생NATURE과의 연결continuity로 내재한 조화주체가 있다면, 문명인으로 살아가면서 문명과 연결connection된 주체가 있다. 사회화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는 이러한 주체를 패러다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후천적으로 형성된 이 주체를 문명주체 혹은 권력주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패러다임을 문명주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선천적 조화주체라도 약화되거나 강화되는 등의 후천적 영향으로 변화한다. 또한 문명주체도 강화되거나 약화되면서 변화한다. 변화하는 주체는 자아의 드러남에서 그 드러남의 방향성이기에, 자아는 어제와 다르고 내일 또 다르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가능성과 확실성의 범주에서 일어난다.
주체를 선천성과 후천성에 따른 구분하는 이유는 단지 태생적 관점을 살피기 위함일 뿐이다. 두 주체의 상이함은 각 주체가 지향하는 바이다. 주체가 형식이라면 그 형식이 유도하는 바가 주체 그 자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화주체는 조화를 지향한다. 문명주체는 권력을 지향한다. 이때 문명주체를 권력주체로 명명해도 무방하다. 또한 문명주체와 대비하기 위해서 조화주체를 비문명주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이미 문명인으로 문명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다. 즉 스스로 비문명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문명의 권력적 속성을 거부하고, 비문명의 조화를 회복할 수가 있다. 이러한 이중행동을 유도하는 측면에서 조화주체를 반문명주체(Anti-civilized Subject)라고 명명할 수 있다.
한편 우리에겐 두 가지 주체가 함께 내재한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은 크게 네 가지- 조화, 비조화(非調和), 파괴, 비파괴(非破壞)-로 드러난다. 행동에 있어서 조화로움은 조화주체를 강화시킨다. ‘조화롭지 않음’은 조화주체를 미미하게 약화시키지만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다만 이를 파괴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파괴적’은 권력주체를 강화시킨다. ‘파괴적이지 않음’은 권력주체에 유효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지만, 조화주체에 대한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한 주체가 강화되면 다른 주체는 약화된다. 행동은 주체의 드러남이면서 동시에 주체를 강화하거나 약화시킨다.
우리는 문명인으로 문명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 특히 도시에 살고 있다면 그 영향은 더욱 커진다. 행동의 원인이 정신, 몸, 환경에 영향으로 복합적인데, 행동의 이유에 해당하는 주체가 권력주체라면, 그 행동의 결과가 문명화된 외부환경에 부합되면서 권력주체는 더욱 강화된다. 권력주체는 행동의 구현과 더불어 결과를 통해서도 강화된다. 반면 조화주체에 따른 행동은 비록 타자에 의해서 환영받을 수도 있지만, 폄하되거나 무시되는 경우도 많다. 대체적으로 문명을 의심하지 않고 문명에서 살아가면서 조화주체가 강화되기란 여간 쉽지 않다. 그래서 문명인은 성인이 되면서 어느덧 권력주체에 압도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약화된 조화주체는 흔적으로만 남을 수도 있다. 조화주체가 더 이상 자아에 유효한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권력주체에 압도된 인간을 우리는 소시오패스라고 지칭할 수가 있다. 소시오패스에겐 어떤 양심을 기대할 수가 없다. 어떤 면에선 그는 논리적이고 지적이다. 또한 권력은 자아 내의 약화되어 있는 주체마저 대상으로 삼고 소유하여, 흔적으로만 남은 조화주체를 스스로 컨트롤하려고도 한다. 그래서 그는 가식적이지만 친절한 교양인으로 보일 수도 있다.
‘생’은 외재하지만 그 연속성으로 연결된 조화주체는 자아에 내재한다.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현상적으로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모를 수 없는 앎’이다. 다소 엉뚱하지만, 그 방증을 기독교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유니콘이라는 상상의 동물을 우리는 없다고 하지만, 그것을 상상할 수 있음은 유니콘이 실재하는 동물들의 조합, 즉 실재에 대한 연장extension이기 때문이다. 연장은 있는 그대로의 모사를 초월하여 모방이 되고, 창조물이 된다. 이때 창조물이 왜곡된다면, 즉 그 연장이 실재와 분리되어 더 이상 실재와 관계가 없어진다면 시뮬라크르가 된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시뮬라크르라고 본다면, 하나님은 ‘생’의 왜곡된 모방이고, 성령은 ‘주체’의 왜곡된 모방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외재하는 하나님과 내재하는 성령, 그리고 삼위일체라는 정말 상상하기 힘든 것들을 큰 반감 없이 믿는다. 이러한 믿음이 가능한 이유는 생과 조화주체,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한 ‘모를 수 없는 앎’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생’은 원리이며, 그 원리의 온전한 구현이 자연이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그 원리를 엿볼 수가 있다. 그 원리는 ‘조화’라는 보편적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직관적 이성에 따르자면, ‘생’은 실체substance이며, ‘대자연’은 양태mode이며, ‘조화’는 속성attribute이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는 연속성continuity에 있으며, 필연적inevitable이다. 즉 대자연이 없어지면 생도 없어지고 조화도 사라진다. 조화가 사라지면 자연은 파괴되고 생은 사라진다. 그래서 생이 곧 대자연이며 조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당연히 자연과학의 법칙은 자연 원리의 한 단면이기에 ‘생’이라는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논리’라는 형식도 ‘생’이라는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편 언급한 바, 자아는 몸과 몸에 깃든 생명의 총체다. 이때 몸은 자연에서 왔으며, 몸에 깃든 생명은 곧 생으로부터 왔다. 곧 자아는 자연의 연장이자 생의 연장이다.
생명은 ‘살아있음’이며 ‘삶’이다. 우리는 생명을 생명이 되도록 하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안다. 이는 기본적인 논리체계에 따라서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렇다고 그 무엇을 신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 ‘신’의 존재를 실증할 수 없고, 그래서 당연하지만 ‘신’과 생명의 관계성조차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신이 있다고 믿고 있다. ‘믿음’은 ‘앎’의 근저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주요한 속성이 ‘기댐’이다. 이러한 속성은 신의 기원을 암시한다. 고대무속과 토템에 등장하는 신과 숭배의 대상이 자연만물이었고, 초기 문명의 여러 신들도 자연을 상징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류가 경외하고 ‘기댐’의 대상으로서 ‘신’은 자연과 분리되지 않았다. 문명은 인간의 몸과 이성을 분리시키듯, 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우열을 가늠하는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이로써 생명을 생명이 되도록 하는 그 무엇을 우리는 권력의 상징인 신이 아닌 ‘대자연’이라고 함이 오히려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