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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69. [역경의 열매] 최복이 (1-14) 1997년 새벽, 나를 깨운 개척교회 십자가
2010년 9월 29일. 나는 남편 김철호 본죽 대표와 중국 베이징에 간다. 중국 2호 직영점 개소식도 있고 한식 세계화를 위해 해외팀과 연구소팀이 함께 현지에서 회의를 하기 때문이다.
8년 전 본죽 1호점을 서울 대학로에 열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현재 1200개의 본죽 가맹점과 다른 브랜드(본 비빔밥, 본 국수, 본 도시락) 가맹점 100개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에도 오픈하면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 가는 중이다.
우리 부부는 일을 나눠 한다. 나는 연구소를 맡아 브랜드 제작과 교육을 맡고, 남편은 전체적인 기업운영을 맡는다. 내가 구슬을 만들고 남편은 그걸 꿰는 것이다.
짧은 시간 회사가 급성장하다 보니 일에 치여 삶의 여유를 못 찾는 게 늘 아쉽다. 그럴 때면 가끔 1997년 겨울 정신병원에서 보낸 그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대학병원 신경정신과 병동 4층. 잠 잘 시간이라고 간호사가 불을 끄고 나갔다.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멀리 개척교회 십자가가 보였다. 낮엔 보이지 않던 십자가가 밤이 깊으니 거기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텐데 왜 이제야 십자가를 볼 수 있었을까?’
밤이면 창밖 십자가를 보며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빨리 나가서 아버지 집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오게 해 달라고.
책이나 성경책을 달라 해도 안 된단다. 볼펜과 노트를 달라 해도 안 된단다. 몸에 걸친 옷이 전부였다. 심한 우울증에 신경쇠약, 환청, 불면증, 자살충동 등등. 뭐든 위험하니 주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모두에게 섭섭했다. 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와 있어야 하는지 오래도록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이 안 오면 약을 먹고 긴 잠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밥 먹고 무료하면 목욕을 하거나 간단한 운동을 했다. 인간으로서 가장 단순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남편은 저녁 늦게 호떡 몇 개를 싸 들고 병원을 찾아오곤 했다. 그런 남편에게 응석을 부리기도 하고 아이들이 보고 싶다며 울기도 했다.
3년간 운영했던 화장품 수입유통회사가 IMF 구제금융 때 부도가 나고 여러 협력사까지 함께 도산하면서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까지 못 살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에 많이 괴로웠고 빚쟁이나 피해자들의 아우성에 아침이면 눈을 뜨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거기다 엉망인 세 아이와 절망하는 남편을 보는 게 너무 괴로웠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빚을 갚기 위해 시골집을 팔고 짐을 싸서 올라와야 하는 상황까지 갔다. 정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결국 견디다 못해 정신을 놓고 쓰러졌다.
98년 1월, 퇴원하고 나서야 남편이 서울 숙명여대 입구에서 호떡 장사를 하다가 남은 호떡을 싸 들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계를 잇기 위해 호떡 장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결단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을까.’ 가슴이 먹먹했지만 한동안 호떡 장사를 하는 남편을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명색이 사장이었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던 사람이 호떡 장사라니!’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았다.
숙대 입구를 몇 번이나 가서 먼발치서 남편을 보다가 눈물이 나 그냥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마음이 답답해 교회에서 기도하는데 너무 부끄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잘 나갈 때는 남편이라고 따라다니고 호떡 장사하는 남편은 못 견뎌 하는 내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나는 그날로 호떡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내 안의 교만과 헛된 자존심은 그날로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았다. 그때는 잘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고난은 하나님의 변장된 축복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 [역경의 열매] 최복이 (1) 1997년 새벽, 나를 깨운 개척교회 십자가
* [역경의 열매] 최복이 (2) 궁핍한 시절을 이끈 어머니의 고봉밥
* [역경의 열매] 최복이 (3) 학과 선배인 남편, 지리산서 내 인생의 짐을…
* [역경의 열매] 최복이 (4) 스물셋의 결혼… 고난으로 축복하신 주님
* [역경의 열매] 최복이 (5) 축복이 영원하리라 믿었던 사업이…
* [역경의 열매] 최복이 (6) IMF때 부도 맞고 ‘그릇된 물질관’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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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최복이 (2) 궁핍한 시절을 이끈 어머니의 고봉밥
나는 1965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최씨 집성촌의 종갓집으로 지주 집안이었다. 그런 종갓집 맏며느리였던 어머니는 동네에서 이름난 ‘왕손’이셨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게 있다. 고봉밥이다. 사람들은 우리 집에 와서 농사일을 하고 밥도 먹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산봉우리처럼 밥을 푸셨다. 그것도 모자라 주걱에 물을 발라 두드리며 밥을 꾹꾹 눌러 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어머니가 무식하게 밥 푸는 모습을 탓한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가 정색하며 하신 말씀은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니가 호강에 초쳐서 남의 집 밥을 안 얻어 먹어봐서 그런 소리 하는 겨. 이 긴긴 해에 얻어먹는 밥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거여. 남의 집에서 밥 먹다 모자라도 더 달라고 못하는 것이고….”
우리는 13남매였다. 어머니가 7남매를 낳고 작은 어머니가 6남매를 낳았다. 아버지가 종갓집 귀한 외아들이다 보니 작은 부인을 하나 더 들여 자손을 많이 보려 한 것이다. 작은 어머니는 어머니보다 어린 나이에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정치나 사업으로 객지로 다닐 때면 늘 작은 어머니를 데리고 다니셨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었다. 많을 때는 예닐곱의 아이들이 동시에 학교에 갈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엄한 시아버지 모시랴, 많은 자식들 키우랴, 그 큰 종가 살림하랴 쉴 날이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보다 두 살 많은 어머니는 평생 피해의식과 화병을 지니고 사셨다.
그런 어머니였지만 객지 나간 오빠들에게는 늘 미안해 하셨다. 지주 집안이라 해도 시골이기에 현금이 없고 자녀들이 많다 보니 돌아갈 혜택이 적었다. 개학이 되면 오빠들은 등록금과 쌀 두세 말을 등에 지고 타지로 떠났다. 청년이 쌀 몇 말로 6개월을 어찌 버틸까 하며 늘 마음 아파하셨던 어머니는 끼니 때마다 부뚜막에 고봉밥을 아들 몫으로 얹어놓고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곤 하셨다. 그렇게 하면 객지 나간 사람이 배를 안 곯는다는 할머니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고봉밥과 종갓집 종손 며느리 인심은 본죽을 움직이는 정신적 힘이 되었다. 사실 본죽 1호점을 대학로에 열었을 때 흔들렸던 게 있다. 열 명이면 아홉 명이 죽의 양이 너무 많으니 양을 줄이고 값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장사가 잘된다면 누가 뭐래도 처음 그대로 밀고 나가겠지만 장사도 안 되는 마당에 그런 지적을 받으니 정말 그렇게 해 볼까 하는 충동이 있었다. 그때 내 맘을 다잡아 준 것은 어머니의 고봉밥 정신, 종갓집 인심이었다. 본죽의 양이 다소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으면 싸주면 되지만 먹다가 모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니 차라리 많은 편이 나았다. 더욱이 본죽은 주문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을 쒀 내는 맞춤 죽이다 보니 더 달라고 해도 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청년이 먹어도 충분한 한 끼 식사에 초점을 맞췄고 먹다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양을 정했다.
만약 그때 양을 줄이고 가격까지 낮추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찔하기만 하다. 아마 지금처럼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죽의 개념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죽이란 건 원래 못 사는 사람이 먹는 것, 환자가 먹는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절대 깨지 못했을 것이다.
아 참, 올해 86세이신 어머니는 지금 청양 오빠 집에 계신데 딸의 기도에 예수님도 영접하시고 화병도 주님이 치료해 주셔서 잘 지내신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3) 학과 선배인 남편, 지리산서 내 인생의 짐을…
남편인 김철호 본죽 대표와 나는 충남대학교 국문학과 커플이다. 1983년 6월 경북 문경에서 있었던 과 전체 학술답사에서 남편을 처음 봤다. 나는 83학번, 남편은 82학번이었다. 남편은 학술답사 조 편성 시간에 조교 선생님께 너무나 태연하게 나와 같은 조로 짜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얼마 안 돼서 지리산 등반을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다른 선배와 이야기를 하며 힘겹게 노고단을 오르고 있을 때 김 선배는 아무 말 없이 내 배낭을 자기 앞쪽에 메고 앞서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선배 배낭에서 버너용 기름이 흘러 등과 허리가 젖어 들었다. 자기 배낭만도 엄청 무거웠을 텐데 내 것까지 메고 묵묵히 올라가는 모습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남편은 나이보다 어른스럽고 철든 고학생 같았다. 다른 학생과 달리 삶을 깊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국문과지만 철학과에서도 수강했다. 나는 그 모습이 좋았다. 사실 나도 대학교에서 많이 방황했었다. 비슷한 고민을 해서 그런지 우리는 마음이 잘 통하고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하나님을 처음 만난 건 순전히 시어머니 때문이다. 친정집은 보수적이면서도 유난스런 불교 집안이었다. 종갓집으로 유교적인 분위기가 강한 데다 선산에 절이 있고 고모 중 한 분이 승려일 정도였다. 그렇다고 불교 신자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런 분위기 탓에 교회 근처에 가 본 적 없이 자랐다.
1985년, 3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충남 서천에 계신 김 선배의 어머니께서 초대해 주셔서 놀러 갈 기회가 있었다. 하루 저녁을 자야 할 상황이라 어머니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녘에 손길이 닿는 느낌이 들어 살며시 눈을 떴다. 어머니가 내 머리부터 손과 발, 심지어는 배까지 쓰다듬으며 기도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내 이름과 당신의 5남매 자녀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가며 간절한 기도드리고 있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어려운 일 당할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그렇게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과 같은 어머니의 찬송이 나지막하게 이어졌다. 태어나서 그렇게 감동적인 노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날 새벽 그 기도와 찬송은 내 영혼을 울렸다. 눈을 감고 기도와 찬송을 들으며 나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 같다. ‘서른 중반에 혼자 되셔서 행상을 하며 5남매를 흠 없이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저 기도의 힘이구나! 얼마나 고단하고 힘드셨을까?’ 스러지게 부르는 찬송은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김 선배의 어머니처럼 나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길로 올라와 스스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실컷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2002년 서울 대학로에 본죽을 열고 1년에 200개 정도의 가맹점을 열며 잘 나가다가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다.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니 모든 관리가 어려워지고 그에 따른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했다. 그때 대학로 본점 4층을 사무실 겸 기도실로 사용하며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를 했다. 하루에 1∼2시간씩 정해 놓고 날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마땅히 나아갈 길을 알려 달라고. 나는 지금도 어렵거나 문제가 있을 때면 한없이 찬송을 부르는 습관이 있다. 아마도 시어머니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시어머니는 지금도 새벽기도를 나가시고 찬송을 부르기를 좋아하신다. 그날 시어머니의 기도와 찬송은 분명 내 영혼에 떨어진 하나님의 씨앗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4) 스물셋의 결혼… 고난으로 축복하신 주님
남편인 김철호 본죽 대표와 나는 돈 주고도 못 산다는 초년 고생을 호되게 했다.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청양 집에 내려가 있을 때의 일이다. 눈이 많이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불던 날, 지금은 남편이 된 김 선배가 부모님을 찾아뵙겠다며 집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호랑이같이 엄한 아버지가 받으셨다.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공부하라고 학교에 보내놨더니 연애질이나 하고 남자놈을 벌써 집에 끌어들인다고 화가 있는 대로 나셨다. 선배와 연락할 방법도 없고 갑갑했다.
어머니는 집 밖에서 선배가 오면 돌려보내겠다며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셨다. 정말 바바리를 입고 선배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복이가 졸업도 못하면 되겠느냐’며 선배를 달랬다. 선배는 나도 아버지도 만나지 못하고 눈보라 속으로 돌아갔다.
선배는 읍내 여인숙에서 밤새 10장이나 되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부치고 돌아갔다. 며칠 후 도착한 편지를 읽고 나는 펑펑 울며 아버지께 김 선배와 결혼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결국 나는 4학년 말이던 1986년 10월 김 선배와 결혼했다. 스물셋 나이에 말이다. 함이 들어오던 날 아버지는 나를 부여안고 엉엉 우셨다. 아까워서 못 보내시겠다고. 그때 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1987년 우리 부부는 대전에서 조그마한 출판사와 학습지 회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경험이 없다 보니 금세 망하고 말았다. 88년 달랑 100만원을 들고 아이 하나 업고 서울로 올라갔다. 우리 부부에게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다 돈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물론 경제적 문제였다. 처음엔 쌈짓돈 몇 푼 꺼내 쓰다가 금세 바닥이 났다. 결국 아이를 업고 대전에 있는 친척집에 돈을 빌리러 내려갔다. 아직 돈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벌써 눈치를 챘는지 주방에서 속삭이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절대 돈 꿔주지 말라고. 차비도 주지 말고 쫓아 보내.”
자존심 강한 나는 죽을 것 같았다. 그 길로 인사도 안 하고 아이를 업고 뛰쳐나왔다. 친척이 달려 나오며 몇 만원을 손에 쥐어 주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나는 그걸 뿌리치지 못했다. 올라올 차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 하나님이 주신 선한 열망이 있다. ‘꼭 성공해서 나는 평생 나누어주고 꿔주고 베푸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다.’
남편은 모 일간지 광고사원으로 들어갔는데 수입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이의 백일반지와 돌반지, 결혼 예물을 차례로 팔아 아침에 몇 천원씩 남편에게 줬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남편이 밤늦게 퇴근해 들어오면 자기는 지방판이라며, 지방 출신임을 서러워하며 고개 숙이던 모습을.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짠하다. 남편은 서울 지리를 익히려고 서울 시내를 전부 걸어서 다니며 극복했다.
남편이 열심히 서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동안 나는 신앙인이 되어 갔다. 90년 경기도 부천 삼부제일교회에 출석했는데 구역장이던 김모 집사님이 신앙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분과 함께 주일과 수요일, 금요철야 예배를 드리고 한 달에 한 번 기도원에도 따라갔다. 주일학교 봉사를 하다가 드디어는 20대 후반 나이에 구역장까지 맡았다. 성경 공부를 잘 해보고 싶어서 통신신학 공부도 했다.
한번은 방언의 은사를 사모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 마음의 묵상까지도 아신다는 것을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집에서 혼자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엎드렸는데 방언기도가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5) 축복이 영원하리라 믿었던 사업이…
1992년 가을, 남편이 갑자기 잘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고 싶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일간신문 광고국에 잘 적응해 능력도 인정받고 제법 자리를 잡아가던 즈음이다. 둘째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을 때인데 부천에 작은 연립주택을 마련하고 큰 걱정 없이 소시민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대책도 없이 그만둔다니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연애 시절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생각났다. ‘구멍가게로 시작해도 좋으니 우리 힘으로 사업을 일으켜 보자.’ 대학 졸업 후 출판사와 학습지 사업에서 쓴맛을 봤지만 미련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날로 남편에게 그리 하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학원 시간강사와 과외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학원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 동안 세 살, 다섯 살짜리 두 딸은 엄마가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원 앞 놀이터에서 기다렸다. 돌아오는 길에 김밥 몇 줄에 만두 한 접시가 늦은 저녁이 되기도 했다.
남편은 지인들과 함께 인삼 유통업, 통신판매업 등 몇 가지 사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도 남편은 늘 오뚝이 같았다. 아이디어도 많았다. 그러나 차마 생활비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그렇게 가족 모두 지쳐가고 있을 때다. 늦게 귀가한 남편이 나를 잡고 눈물을 흘렸다. 너무 힘들다고, 죽고 싶다고. 그리고 너무 해보고 싶은 사업이 하나 있는데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돈을 빌릴 자신이 없었다. 답답했다.
한 숨도 못 자고 새벽기도를 마친 뒤 남편을 깨웠다. 그리고 몇 천만원 되는 집을 팔아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했다. 남편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날로 집을 내놓았다.
94년 서울 방배동 삼호상가를 얻어 남편이 하고 싶다는 순식물성 바디숍을 열기로 했다. 집은 근처 지하 월세방을 얻었다. 미안해하는 남편에게 ‘이참에 아이들이 강남에 와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점도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돈이 부족해 공사를 하다 여러 번 중단하고 일하는 사람이 철수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가게 앞 육교에 올라가서 가게를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했다.
몇 달을 걸려 예쁘고 아담한 가게를 열었다. 부천 삼부제일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바쁘더라도 주일성수와 성경읽기, 기도생활은 꼭 하라며 믿음이 떨어질까봐 염려를 해 주셨다. 가게가 예쁘니까 지나가던 방송 PD가 우리 바디숍을 유망업종이라고 아침 인기 프로에 소개했다. 그것은 행운의 도화선이었다. 전국 주요 도시에 우리 바디숍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매장이 1년에 100개로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젠 고생이 끝난 것만 같았다. 밤이면 바퀴벌레가 돌아다니던 집에서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통장도 여러 개로 나눠 관리했다. 남편은 카폰이 달린 고급 승용차를 샀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생각에 이젠 누리며 살고 싶었다. 모두 우리가 이룬 것이라 착각했다. 최소한의 감사와 적당한 기준의 십일조, 그리고 형식적인 예배 참여.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목사님의 염려대로 열심을 내던 신앙생활은 점차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매장 수가 200개, 300개를 넘으며 회사가 급성장해 가고 있었다. 축복이 영원하리라 믿었다. 아이 업고 돈 빌리러 다니던 시절 성공하면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고 열망하던 것은 기억조차 못했다. 그러나 마음껏 써보지도 못한 모든 것은 97년 예고 없이 들이닥친 IMF 구제금융 사태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갔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6) IMF때 부도 맞고 ‘그릇된 물질관’ 회개
남편인 김철호 본죽 대표가 1994년 시작한 바디숍은 3년 만에 400개까지 늘었다. 하지만 IMF 구제금융 사태 때 부도가 나면서 모든 게 풍비박산 났다.
1998년 서울 숙명여대 입구에서 호떡장사를 할 때다. 사는 게 곤고하고 힘드니까 서울에 올라왔을 때 신앙의 본을 보여주셨던 김모 집사님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분에게 기도 부탁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니 위로라도 받고 싶었다.
이사를 하면서 연락이 끊겨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어렵게 집사님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안타깝게도 집사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남편이 하던 사업이 어려워지고 집사님은 위암 말기여서 3∼4개월 시한부 인생으로 병원에 누워 계셨다. 가슴이 미어졌다. ‘그렇게 쌓아둔 돈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진작 잘살 때 찾아뵐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남편에게 100만원을 만들어서 집사님께 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 코가 석자이긴 했지만 시한부라는 절박함에 호떡 판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루에 7만∼9만원 정도 팔아 일곱 식구 생계를 잇던 때라 100만원은 결코 쉽지 않은 거금이었다. 기름 묻은 돈 100만원을 모아들고 청량리에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복수가 차 부푼 배를 부여잡고 가쁘게 숨을 내쉬는 집사님 모습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예전에 넉넉하고 푸근하던 집사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며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회개를 했는지 모른다. ‘아이 업고 돈 빌리기 위해 다니며 하나님께 소원했던 나눠주고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선한 열망은 어디로 갔는가. 형통할 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전처럼 어려움을 당하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어떻게든 쌓아두고 모아두려 고민했던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우리 부부는 호떡을 판 돈에서 정확히 십일조를 떼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철저히 회개했다. 우리는 그저 청지기일 뿐 세상에 우리 것이라고 우길 것이 없다는 물질관을 다시 세우는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그때 우리 부부는 오직 하늘에 쌓는 것이 참된 살길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형통할 때는 기뻐하고 곤고할 때는 생각하라”(전 7:14) 고난 중에 주신 하나님 말씀이다. 안종대 삼호침례교회 목사님의 설교집 ‘나의 나 된 것은’을 읽으며 인생의 고난의 의미와 진주가 만들어지는 고통의 과정을 묵상했다. 지금도 나는 이 말씀을 자주 묵상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형통과 곤고함을 병행해 주신다는 의미도 이해하게 되었다.
곤고할 때 생각하라는 말씀은 자신을 돌아보고 인생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고민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본죽이 성공해 가면서 늘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물질을 아름답게 쓸까 고민했다.
이런 배경에서 본죽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노숙인 식사봉사를 지원한다. 또 천안역과 부평역에서 노숙인 식사 봉사를 위한 조리 장소와 재료 등 모든 것을 지원했다. 신학생 장학금 지원과 선교사 후원 등은 회사가 성장하는 것과 발맞춰 조금씩 늘려갔다.
서울 계동 본죽 직영점 하나는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여러 직영점 모두 매출의 일부를 떼서 헌금하도록 했다. 회사가 점차 성장함에 따라 교회를 짓거나 인도차이나 지역에 신학교를 설립하고 선교센터를 건립하는 일에도 동참했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7) 요리사 보조로 일하며 요리의 원리 깨달아
지난 3월 강의를 들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간단한 자기소개 자리가 있어서 본사랑재단 이사장 겸 본죽 연구소장이고 창업자라고 소개하자 모두 놀라는 분위기였다. 의외라는 반응이 역력했다. 어떤 분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줄 알았다며 쉬는 시간에 재확인하는 분도 있었다.
생각보다 어리고 요리하는 사람 같은 느낌이 안 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지긋한 50·60대 장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40대 중반밖에 안됐으니 말이다. 본죽을 창업할 때는 30대 후반이었으니 당황해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사실 나는 요리사는 아니다. 시인이다. 시집도 5집, 시선집도 올해 한 권 냈다. 그 일이 내 달란트라 생각했고 글 쓰며 살 것이라 스스로도 생각했다. 그런 내가 2002년 본죽을 만들었으니 기적은 기적이다.
본죽을 만들 당시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었다. 순식물성 바디숍 사업 부도에 따른 충격 때문에 신경과 약을 복용하고 있었고 삶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남편은 호떡 장사를 하다가 1999년 친구의 도움으로 외식창업 컨설팅 회사를 열게 됐다. 그때 컨설팅 회사에 딸린 조그마한 외식창업요리학원을 맡을 기회가 주어졌다. 말이 좋아 요리학원이지 사실 요리사 보조에 상담, 청소까지 하는 중노동이었다. 그때 나는 최 대리로 통했다.
하는 일은 단순했다. 다리가 퉁퉁 붓도록 서서 요리사를 돕는 일이었다. 나머지 재료 정리나 설거지까지 하고 나면 밤늦게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가는 일이 허다했다. 당연히 차도 없어서 전철과 마을버스를 갈아타며 출퇴근했다.
회의감이 들자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올랐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고 잘하는 일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 힘들었다.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도 답답했다.
그때 나를 지탱해 준 힘은 우연히 듣게 된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의 3분 전화설교였다. 출근하면 꼭 3분 설교를 메모하며 듣고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신기하게도 그날 설교 내용이 현실과 맞아 떨어지고 삶에 힘이 될 때가 많았다. 긴 터널에서 하나님이 주신 큰 위안이었다.
그러다 다행히 흥미 있는 일을 찾았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훌륭한 요리사인데 정확한 자기 레시피를 갖지 않고 있거나 주먹구구로 자기 요리는 손맛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요리사들이 있었다. 그분들에게 자기 레시피를 정확히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계량스푼과 계량컵 그리고 저울을 통해 요리의 계량화, 표준화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이 나름 재미 있고 보람도 있었다.
그렇게 2∼3년 하다 보니 나름 요리의 원리를 알게 되었고 철학도 생겼다. 요리는 물론 손맛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정확한 재료의 조화에서 맛이 나고 정확한 레시피를 가지면 요리사가 아니라도 누구나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음식은 좋은 재료가 좋은 맛을 낸다는 것, 어떤 음식을 만들든 가족에게 먹일 수 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게 프랜차이즈의 핵심 원리가 된다는 것을 안 것은 본죽이 어느 정도 성공하고 난 뒤였다. 항상 중요한 것은 뒤늦게 깨닫는다.
식당을 하나 하고 싶다고 말하자 남편은 죽집을 권했다. 내가 탐탁지 않게 여기자 남편은 오래되고 유명한 죽집 두세 곳을 보여줬다. 거기서 신사들이 죽을 먹는 모습을 봤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8) 메뉴 개발-본죽 개점 모든 게 기도의 힘
남편이 추천했던 유명한 죽집을 둘러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못사는 사람이 먹는 게 죽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임금님이 먹는 게 죽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잘하면 고급 메뉴가 될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래서 죽집을 하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나더러 노하우를 만들라 했다.
요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던 나는 2001년 죽 전문점을 차리기 위해 메뉴 개발에 주력했다. 하나님께 간절히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말이다.
7∼8개월 만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로 영양죽 7개와 전통죽 5개, 그리고 전통차까지 준비했다. 기존의 방식인 죽을 대량으로 쒀서 퍼 주는 식이 아니라 한 그릇씩 주문을 받아 그때그때 쑤는 형태로 완전 새로운 시도의 조리 노하우를 만들어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노하우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그리고 요리학원에서 왜 그런 일을 겪어내게 하셨는지 그때서야 철저하게 준비시키시는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었다. 새벽기도 중 ‘본죽’이라는 이름도 주셨다.
사실 요리사도 아니고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내가 본죽을 만들어낸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본죽을 만들 당시 나는 건강이 다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잘하는 것으로 무엇인가를 했으면 아마도 내가 다 했다고 할 것이지만 본죽은 정말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본죽은 정말이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일방적인 축복이다.
본죽을 창업하던 2002년 봄, 내 손에 쥔 돈은 2800만원이었다. 호떡 장사를 할 때부터 조금씩 몇 년을 모아 마련한 돈이다. 나는 66㎡(20평) 이상 번듯한 카페형 죽집을 열고 싶었다. 노하우도 다 만들어 놓았고 이젠 가게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꿈에 젖어 있던 나는 그 돈으론 어림도 없다는 현실에 부닥쳤다. 공인중개사들은 한결같이 그 돈으론 자투리 3∼4평을 얻기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더 이상 돈을 빌릴 데도 없었고 답답했다. 기댈 언덕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학로에 가게 하나가 있다니 가보라는 것이었다. 2층이긴 하지만 오래 비어 있으니 가격을 절충할 수 있을 거라 했다. 반신반의 대학로 그 가게에 가 보았다.
말이 대학로지 혜화역 주변 핵심 도로에서 한참 벗어난 이화사거리 쪽이었다. 그것도 도로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2층 가게였다. 그나마 넓이는 내가 꿈꾸던 것보다 훨씬 큰 125㎡(38평)였다. 돈은 턱도 없이 모자랐다.
우리 사정을 알고 주인 권사님께서 모자라는 돈을 월세로 계산해 내고 가게를 해 보겠냐 했다. 월세 부담이 엄청나게 컸지만 가게를 얻을 수 있게 됐다는 기쁨에 앞뒤 안 따지고 계약했다.
그 뒤부터 오픈할 때까지 주변 모든 사람들은 외진 2층에 뜬금없는 죽집을 연다는 것에 우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동네 어른은 오랜 경험과 안목에서 진지하게 ‘차라리 치킨·호프집을 하라’고 조언도 해 주셨다.
점심시간 잠깐 골목 몇 집 있는 식당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있을 뿐 그 시간이 지나면 개미새끼 한 마리 골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앞이 깜깜했다. 월세 부담도 많은 데다 인테리어 간판까지도 지인들에게 외상으로 하는 것이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9) 죽 한그릇 팔 때마다 수많은 시행착오
2002년 본죽 서울 대학로점을 개점했다. 내 꿈은 100그릇의 죽을 파는 것이었다. 오픈 첫날 가족과 친지들이 다녀가고 난 뒤부터 우리 죽집은 썰렁했다. 하루에 일곱 그릇, 열두 그릇…. 많은 날 스무 그릇 정도 팔았다. 죽을 것만 같았다. 가겟세를 낼 수 없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시지 않으면 식구 모두가 굶어 죽는다고 매달렸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갈급한 심정으로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선 놀라운 위안과 희망을 주셨다. 서울대병원 모 교수님을 통해서 말이다. “어떻게 여기에 죽집을 열 생각을 했습니까. 본죽 자리가 서울대병원 후문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좋습니다. 대학로에 수백 개 식당이 있지만 죽집은 한 곳도 없어요. 꼭 필요한 가게가 병원 주변에 들어와 참 잘됐습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 말을 듣고 우리의 생각보다 더 넘치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다. 오래도록 가슴이 먹먹했다. 감사했다. 그 외진 2층 죽집이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예비한 자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여러 가지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의 간을 보았는데 갑자기 아무 맛도 안 나는 것이었다. 뜨거운 음식을 식히지 않고 급히 맛을 보다 보니 혀의 감각을 잃은 것이었다. 정확한 레시피를 내기 위해 수없이 수정 보완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음식사업으로 성공하겠다는 사람이 몇 달도 안 돼 혀 감각을 잃었으니 절망스러웠다.
더 큰 문제는 손님이 몰려와 각기 다른 죽을 주문하면 주방이 혼잡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주방 싱크대 뒤에 앉아 울기도 여러 번 했다. 손님이 많이 와주기를 그리 기도하며 전단을 돌리고 간절히 원했는데, 막상 손님이 오면 겁부터 나고 어찌할 줄을 몰라 우왕좌왕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이 30분이 지나도록 죽이 나오지 않자 화를 내고 그냥 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회사원들이 정해진 점심시간에 식사를 못한 채 떠난 빈 홀을 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주방 일이나 구조에 문외한인 내가 오직 1인분의 맛에만 초점을 맞춰 시스템을 만들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시행착오였다.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 매장에 맞게 수정했다. 그것은 죽을 처음 만들 때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과정이었다. 개점하고도 2∼3개월 직접 주방에서 죽을 쑤면서 모든 과정을 수정·보완해 나갔다. 죽 종류별로 달리 뽑았던 육수를 한 가지로 통일시키고, 모든 재료는 1인분씩 소분해 놓고, 반찬도 죽과 가장 어울리는 질이 높은 두 가지로 줄였다. 조리와 주문 과정도 단순화시켰다.
죽이 튀어서 손등이 성한데 없이 다 데고 오래 서서 일하다보니 다리에 쥐가 났다. 팔이 아파 잘 들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자 안쓰러워하던 남편이 죽 젓는 기계를 만들어 주겠다고 알아봤다. 그러나 죽은 깊이 젓는 데서 맛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만두라 했다. 남편은 설거지며 장조림 찢는 일이며 팔을 걷어붙이고 거들었다. 그리고 죽에 맞는 포장 용기나 쇼핑백, 포장기기를 사러 중부시장을 뒤지며 외부 일을 맡아서 뛰었다. 그렇게 가게는 조금씩 모양새를 갖춰 나갔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10) 5개월 만에 하루 100그릇 판매 꿈 이뤄
우리 부부는 아침 6시면 서울 대학로로 출근했다. 그리고 한 명이라도 손님이 들어올까 문을 못 닫고 밤 12까지 기다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래도 주일 만큼은 가게문을 닫고 예배를 드렸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재료를 준비했다. 그리고 정장을 갖춰 입고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3번 출구로 나갔다. 정장차림의 부부가 90도 인사를 하며 전단을 돌리니까 출근하던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힐끔힐끔 돌아봤다.
처음엔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다가 사정이 절박해지자 나중엔 가게 앞 거리에 나가서 혼자 전단을 돌리기도 했다.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오전 서울 경동시장을 다녀와서 점심 장사가 끝나면 틈틈이 서울대병원 병실에 전단을 들고 올라갔다.
그러자 차츰 병원 손님과 여성 위주로 몇 명씩 점심 때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 우리 가게에 온 사람 중에는 비싸다며 돌아가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그래도 들어왔으니 차마 못 나가고 식사를 하고 간 사람은 거의 단골이 됐다. 손님들은 대부분 가게 인테리어와 죽의 양, 맛에 감동하는 표정이었다.
한 그릇씩 한 그릇씩 호박죽부터 팥죽까지 주문과 함께 끓여내는 것은 정말 새로운 조리법이었다. 모든 재료를 완벽하게 준비해 뒀다가 주문을 받으면 정확히 계량해 놓은 재료를 넣어 즉석에서 죽을 끓여냈다. 음식은 금방 한 것이 가장 맛있다는 기본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
그렇게 여성 위주의 단골손님이 늘어가다가 남성 손님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5개월 만에 100그릇 판매의 꿈을 이루던 날! 점심시간 손님들이 계단에서 줄을 서는 광경을 보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꿈을 상향조정했다. 200그릇! 그 꿈도 몇 달 만에 거뜬히 이뤘다. 그리고 한국에 죽 시장이라는 새로운 블루오션을 열었다. 못사는 사람이 먹는 게 죽이라는 개념을 웰빙 식사의 메뉴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메뉴판과 간판에 영어와 일어를 넣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외진 2층에 죽집 하나 내면서 무슨 영문·일문 메뉴판이냐는 것이다. 메뉴판 제작자는 우리 죽 이름을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 모른다며 그냥 한글로만 하면 안 되냐고 했다. 우리는 그걸 끝까지 고집했다. 당시 세계 여러 나라에 죽집을 낼 것이라는 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외국 사람이 우리 죽집에 꼭 올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을 보고 계셨다. 본죽은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중 하나가 됐다. 건강식으로 우수한 우리 음식을 세계화하고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꿈이다.
대학로 시절 메뉴판에서 시작된 꿈은 이제 뉴욕, LA, 도쿄, 베이징 등 세계를 품는 꿈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식 세계화의 선두주자로서의 사명감으로 그 일을 전략적으로 이뤄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본죽의 노하우나 조리 프로세스는 전적으로 새벽기도와 고난의 때마다 가게에서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선물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 믿음과 꿈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기쁘신 뜻을 이루기에 합당한 대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 우리에게 생기는 꿈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벅찬지 모른다. 더욱이 말씀 안에는 분명 그 꿈을 이루시고 영광 받으시겠다는 약속이 내포된 것 같아 든든하기까지 하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11) ‘급할수록 돌아가라’ 깨침에 수십억 수업료
그렇다고 우리가 늘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다. 상처도 많이 받고 잃은 것도 적잖았다. 수십억원의 ‘수업료’도 냈다. 우리가 뼈저리게 배운 것은 급히 한다고 해서 빨리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정말 진리였다.
2006년 LA지점을 시작으로 우리는 외국에 직영점이나 가맹점 형태로 매장을 하나둘씩 열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몰라서 용감했던 것 같다. LA지점을 준비할 때 시누이 부부가 찾아왔다. 시누이는 남편이 대기업을 그만뒀다면서 미국 현지 운영자로 자기 가족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배운 사람들이고 많이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라 믿었고 두 아이들에게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개점하고 그런대로 잘 해나가고 있었다. 시어머니까지 가셔서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나름대로 잘 적응해 간다고 믿었다. 한 번은 가게에 문제가 있다 해서 우리 부부가 함께 건너갔다. 시누이 남편이 약간 우울증 증세를 갖고 언어소통이나 법적 절차 등 적응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부부가 자주 싸우기도 하고 서로 힘들어했다. 낯선 타지에서 함께 힘을 모아도 어려울 판인데, 힘들면 그냥 돌아오라 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이 사고로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갑자기 고아가 된 아이들의 눈물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절규, 깊은 자책감. 우리 모두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절망했다. 그리고 미국 진출은 그만두리라 마음먹었다.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두 아이들은 우리가 맡아 키우면 된다지만 아까운 두 사람의 인생은 어쩌란 말인가. 생각할수록 절망스러웠다.
2009년엔 3년간 공을 들인 도쿄 아카사카 점이 문을 닫는 일이 발생했다. 고급 상권에 많은 돈을 들여 투자했고 손님이 길까지 줄을 서기도 하고 신문 방송에도 여러 번 나오면서 유명한 집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계약기간 만료라며 주인이 건물을 비우라고 통보해 온 것이다. 서류 작성 오류에서 비롯된 합법적인 일이었다.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파 며칠을 뜬눈으로 보냈다. 항의 한마디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철수해야 했다.
우리가 지쳐갈 무렵 2009년 현 정부가 한식 세계화를 선언했다. 국가 성장동력의 하나로 음식사업을 꼽은 것이다. 한 신문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우리가 한식 브랜드를 갖고 외국에 나가 수없는 시행착오와 수업료를 내면서 사업을 추진하는 이유를 물었다. 남편은 담담히 말했다. “가맹점 사장님과 직원들에게 세계적인 브랜드의 자부심을 안겨주고 싶었고 우리 음식의 우수함을 가지고 맥도날드나 스타벅스 커피처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시누이 아이들은 어머니와 우리가 잘 키우고 있다. 그 두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동안 쌓은 경험은 결코 헛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을 전략국가로 선택했다. 이제 더욱 철저하고 치밀하게 준비하고 다지며 세계화를 반드시 이룰 것이다.
2007년 일본 도쿄타워에 올라가서 시내를 바라보며 ‘성공하면 일본에 교회를 짓고 복음전파에 앞장서겠다’며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하나님이 주신 고통과 역경에는 반드시 뜻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현재 일본 신주쿠와 LA지점은 잘 운영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12) 가맹점 400개… 개점 때마다 ‘初心의 기도’
지난 10월 14일은 정말 감격적인 날이었다. 한국에서 처음 생긴 프랜차이즈 대통령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아직 많이 부족한 우리에게 이런 큰 상을 주시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봤다. 지속경영 대상과 중소기업청장상에 이어 올해만 세 번째다. 그동안 정말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오던 시간들이 스쳐가며 가슴이 먹먹했다. 우리는 이 상을 ‘우리의 기대보다 더 넘치도록 행하시는 하나님이 주신 상’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 출근 준비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남편이 “어!” 하더니 입에서 어금니를 하나 식탁에 내려놓았다. 가족 모두가 놀랐다. 잇몸 치료를 해야 한다면서 차일피일 미뤄오던 터라 빠진 이를 들고 남편 친구가 있는 연대 치과 병원을 찾았다. 친구 교수님은 “그리 열심히 살더니 이가 이렇게 다 망가졌다”며 안타까워했다. 결국 어금니 8개를 모두 빼고 다시 해 넣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와 과로가 가장 큰 원인이라 했다. 옆에 서 있던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일하지만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가맹점이 400개가 될 때까지 남편과 나는 전국을 돌며 직접 개점을 지도했다. 오전에는 본사에서 교육을 하고 오후에는 현장에 나가는 식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녹초가 돼 집에 돌아왔다. 남편은 가맹점주와 직원들의 정신교육을 하고 나는 맛과 서비스 교육을 했다.
우리가 현장 방문을 중시한 것은 짧은 본사 교육 시간에 부족했던 점을 보완해 주기 위해서였다. 격려 차원도 있었다. 얼마나 깐깐하게 점검을 했던지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잘못된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지적한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다. 현장을 돌며 수없이 강조한 말이 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원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한번은 전주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가맹점 점주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손님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기겁을 했다. 즉시 손님을 정중히 보내고 처음부터 점검을 다시 했다. 잘못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다시 철저히 준비하십시오. 다음날 다시 오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그냥 올라와 버렸다. 다음 날 일정이 빡빡했지만 대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일정을 조정하고 다음 날 다시 전주에 내려갔다. 밤새 전 직원이 개점 준비를 철저히 해 놓았다. 그제야 나는 ‘오케이’를 했다.
현장에서 점검을 마치면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간절히 기도를 한다. 오래도록 해온 중요한 기도 제목 중 하나가 가맹점들이 장사를 잘하는 것이다. 우리 회사와 인연을 맺은 많은 점주들은 생계형으로 가게를 꾸리고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걸고 하는 분들이 많다. 가게가 안 되면 집안이 어떻게 어려워지는지 잘 알기에 철저히 준비하게 해서 꼭 성공을 시켜주고 싶었다.
남편은 “기업인이 비록 깐깐하다는 욕을 먹더라도 회사 운영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 했다. 그래서 늘 “기업가의 가장 큰 죄는 회사를 잘 이끌지 못해 망하게 한 뒤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것”이라 말하곤 한다. 과거의 처절한 아픈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어떤 경우에도 한눈을 팔지 않을 것이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브랜드를 만들고 관리하고 교육하는 일을 통해 많은 점주들이 가업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도록 돕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소비자의 건강한 식문화를 선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라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13) “창출된 수익은 어려운 이웃에게” 재단 설립
수년 전 빌 게이츠의 부인 멜린다 게이츠가 혁신적인 자선으로 나눔의 역사를 바꿨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자극을 받게 됐다. 그래서 방에 멜린다의 사진과 게이츠재단의 기사를 붙여놓고 기도를 시작했다.
한동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미자립교회 지원, 선교사 지원, 해외 신학교 건립 등에 힘써왔는데 어느 시점에 이르니 너무 소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몰래 돕거나 회사 차원에서 도우면 100∼200명은 도울 수 있겠지만 선한 뜻을 가진 분들과 힘을 모으면 수만명, 그 이상 전 세계적으로 섬길 수 있겠다는 비전을 갖게 됐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있고 또 많은 사람과 합력해 선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대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배경에서 지난해 6월 창립총회를 열고 본사랑재단을 시작하게 됐다. 보건복지부에 신청서를 낸 지 3년 만인 2009년 3월 복지법인 허가가 났다. 기다림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스스로 내 안에 정말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예수의 마음이 있는지, 거품이나 허영으로 하려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단 허가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섬김의 직분을 허락하신 것이라 믿는다.
본사랑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한번은 아이를 업고 친척집에 돈을 꾸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기차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날로 다시는 돈을 꾸며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평생 나눠주고 베푸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때부터 이 기도는 제 삶의 중요한 기도제목이 됐습니다.”
본사랑재단은 섬김과 나눔, 배움이라는 가치 아래 취약계층 돕기에 주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은 ‘사랑 한 그릇’으로 저소득층 아동과 청소년, 노인에게 매주 150그릇의 죽을 지원하고 있다. 또 결식아동 급식비 지원사업도 펼치는데 2009년엔 100명의 결식아동에게 매월 5만원씩 총 2000만원을 지원했다. 올해도 결식아동 100명을 선정해 지난 4월부터 급식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내년 2월까지 매월 5만원씩 지원하게 된다.
장학사업도 펼치고 있다. 취약계층과 장애청소년 52명에게 5470여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했으며, 다문화가정 자녀 87명에게 각각 50만∼100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지난 2월엔 고등학생 20명을 대상으로 청소년 봉사 리더십 캠프를 주최했다. 재능나눔학교를 통해 50여명의 청소년에게 성악과 마임, 수화, 댄스, 독서지도 등을 하고 있다. 이밖에 본사랑미술관을 통해 무명의 미술작가에게 전시공간을 제공하고 있으며, 취약계층 결혼 예정 부부의 결혼식부터 신혼여행까지 책임지는 ‘결혼해요! 우리’ 사업을 펼치고 있다. 기아 난민 지원사업과 다문화가정 식재료 지원사업도 구상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는 말씀이다. 우리의 최고 목표는 기업을 잘 운영해서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특히 좋은 음식으로 많은 소비자를 섬기고 싶다. 오늘도 창출된 수익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는 건강한 기업, 본사랑재단이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 다짐해 본다.
***[역경의 열매] 최복이 (14·끝) 기도가 모여 이룬 성공… 모든 영광 주님께!
프랜차이즈 기업에서 폐업률 한 자릿수라는 통계는 우리의 자부심이고 하나님의 기적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는 말씀대로 내가 가진 소원이 곧 하나님이 주신 소원이라는 믿음으로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어려울 때마다 입에 달고 다닌 말씀이 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힘들 때 수없이 되뇌다보면 신기하게도 힘이 나고 능력도 생기는 체험을 했다. 역시 말씀에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한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은 반드시 기록해 두고 외운다. 살다가 문제가 생길 때면 그 말씀이 답이 되고 힘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내 삶에 큰 영향을 주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발견토록 해준 책이 있다. 조용기 목사님의 ‘4차원의 영적 세계’(서울말씀사)라는 책인데 정말 충격이었다. 수없이 반복해 읽고 남편에게도 권해서 함께 읽고 삶에 적용했다. 심지어 신입사원 교육 때도 활용했다. 이 책에서 꿈이나 생각, 말이나 믿음을 통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본죽이 성장하기까지 많은 분의 기도와 도움이 있었다. 남편인 김철호 본죽 대표이사는 내가 절망하고 낙심해 있을 때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당신은 잘할 수 있어. 당신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야”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남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항상 기회를 주고 믿어주고 세워줬다. 항상 긍정적이고 감사해야 한다는 삶의 철학으로 본을 보여주었다. 그러곤 모든 것을 나의 공으로 돌리며 겸손해했다. 또 시어머니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 늘 새벽기도로 힘을 주시고 우리보고 ‘열 사람의 몫을 할 사람들’이라며 믿어주셨다. 시어머니가 집안살림과 아이들을 맡아 주셨기에 밖에서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당신이 본죽 성공의 일등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은혜를 입은 분은 서울 대학로점 박기순 주방실장님이다. 대학로에 1호점을 냈을 때 7년간 계시면서 많은 가맹점 사장님들을 교육해주시고 밥 챙겨 먹이시며 용기를 주셨던 어머니 같은 분이다. 저녁에 녹초가 되어 앉아 있으면 본인도 어려우시면서 손잡고 기도해 주시고 옷에 붙은 밥풀을 떼어 주시며 덕담을 해주셨다.
대학로 노숙인 봉사를 하시던 윤영일 목사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몸소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시고 늘 기도해 주셨다. 그래서 천안역이나 부평역 노숙인 식사 봉사를 함께할 수 있었다.
우리가 노숙인 후원을 하고 있을 때 김치를 대주시던 분이 고지산 장로님이다. 우리는 서로의 봉사에 감격했고 결국 그 김치회사와 협력해 일을 했다. 지금은 계열사가 되어 한 식구로 일하고 있다. 그 밖에도 100여개 협력사 가족 덕에 굽이굽이 어려움이 있어도 잘 극복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큰 기업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여러 본부장들과 젊고 패기 넘치는 직원들이 협력해 기업을 이뤄가고 있다. 가맹점 사장님들 역시 어렵고 힘든 교육과정이나 개점 과정을 잘 이겨내고 함께 성장을 이룬 분들이다.
마지막으로 본죽을 사랑해 주신 소비자들께 감사하다. ‘죽’이라고 하지만 가격도 비싸고 배달도 하지 않는 데다 시간도 많이 걸리는데 말이다. 모든 게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