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정선 이야기10
짝집 정선, 삼베길쌈에 담긴 정선사람들의 훈훈한 향기
삼베는 우리나라 옷감의 바탕
“베전(廛)을 살펴보니 각색 마포(麻布) 들어찼다. 농포(農布), 세포(細布), 중산(中山)치며, … 가는 베는 바리 안에 드는 베로다.”
이 구절은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은 『한양가(漢陽歌)』(1840)에서 삼베상점의 모습을 나열한 내용입니다. 몇 지역의 삼베 특징을 들어 열거하였지요. 물론 정선포(旌善布)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지도서』(1780)에 의하면 고려 시대 사람 안축(安軸, 1287~1348)이 정선 객사 북쪽에 있는 봉서루(鳳棲樓)를 보고 지은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峻坂縈廻叱馭行 가파른 언덕을 빙빙 돌아 말을 급히 몰아가니/ 桑麻十里是荒城 뽕나무와 삼[麻]이 십 리를 이은 황폐한 옛 성터”
정선읍내에 뽕나무와 대마(大麻)가 십 리를 이었다고 했으니, 그 당시 얼마나 많은 명주와 삼베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명주와 삼베에 관한 기록은 정선군수를 했던 오횡묵의 『정선총쇄록』(1897)에도 나온다. 정선 곳곳에 뽕나무와 삼이 가득하고 잘 자란다는 내용이다.
명주와 삼베에 관한 기록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의식주 중 옷에 관한 일이니 당연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 과정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삼베의 경우는 일 년 365일 동안 매달려 일해야 하는 힘든 과정이 있어야, 삼베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우리 정선에서는 여태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실이 맺혀 2023년에는 정선군 남면의 유평삼베민속이 강원도 무형문화재가 되었지요. 이는 정선유평삼베민속보존회 회원들이 노력한 덕분입니다. 우리의 전통을 잇는 일은 참 훌륭한 일입니다. 가장 정선다운 일이 가장 세계적인 일이 되니까요.
삼 광주리에 담긴 여성들의 애환
“정선 읍내야 물레방아는 사시사철 도는데, 우리 집의 저 낭군은 날 안고 돌 줄 몰라~”
이 정선아라리는 삼 삼는 여인들이 부르는 소리입니다. 한겨울이 되면 정선의 여인들은 삼 광주리(체)에 삼을 들고 마실을 다닙니다. 오늘은 임계댁, 내일은 여랑댁, 다음날은 영월댁처럼 삼 삼는 일을 하면서 밤마실을 가지요. 삼을 삼는 일은 정말 고됩니다. 엄청난 참을성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겨우내 삼아야 물레를 돌리고 돌기를 돌려 봄 되면 잿물에 삶아 색을 뺄 수 있지요. 삼 삼는 여인들의 입술은 언제나 부르터 있으며, 오른쪽 넓적다리와 무릎은 삼물에 젖어 추위를 감내해야 합니다. 삼실을 입에 물고 두 가닥을 내어야 하고, 갈라진 가닥을 맞대어 다리에 대고 돌려 이어줘야 합니다.
그렇게 밤이 이슥하도록 여인들은 삼을 삼지요. 여럿이 하기에 덜 힘들 수 있습니다. 삼을 삼으면서 틈틈이 옛이야기도 하고, 정선아라리도 합니다. 물론 유행가도 어떻게 돌고 돌았는지 멋지게 부르지요.
밤이 깊으면 밤참을 먹습니다. 밤참은 필수 코스입니다. 국수를 준비했다가 삶아 먹기도 하고, 동치미를 꺼내 비빔밥과 함께 먹기도 하고, 감자를 찌거나 감자 부치기도 합니다. 부엌살림을 맡은 여인들이라 금방 먹거리를 만듭니다.
밤참을 먹으면 또 삼 삼기가 이어집니다. 어느덧 농촌의 겨울밤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되면 삼은 삼이 광주리 위를 수북이 쌓여 갑니다. 하루의 일이 끝나는 시점입니다. 이제 잠도 오고 몸도 피곤한 터라 그날의 삼 삼기는 끝납니다. 그러면 각자 보자기에 삼광주리를 싸 들고 하얗게 내린 눈밭 위를 걸어 집으로 가지요. 물론 내일 밤은 어느 댁 집에서 모이자고 언약한 터입니다. 그렇게 겨우내 삼은 삼이 모여서 몇 필의 베가 만들어집니다. 삼 삼는 동안에 가늘기를 나타내는 몇 세(細)의 베가 결정됩니다. 가늘기는 삼 삼는 여인들만이 가진 재능이지요.
삼굿이 열리던 추억의 계곡
“짐물이요~. 짐물이요~.”
하얀 김이 하늘을 향해 올라갑니다. 장정들은 한 이틀 불을 때서 발갛게 단 돌에다가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서 들어붓습니다. 삼굿이 계곡 옆에 만들어지는 이유이지요. 하얀 김이 솟구칠 때는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장정들의 빠른 몸놀림이 몇 번에 걸쳐 이어집니다. 그리고 재빨리 물구멍에 흙을 덮어 막습니다. 그렇게 한 이틀 놔두면 삼대가 익어 녹색이 황색으로 변하지요.
삼굿은 몇 가구가 함께 합니다. 집집마다 삼을 많이 하는 터라 그 양이 엄청납니다. 지게로 져온 삼단이 수십 지게씩 들어가니까요. 이때 보통 짝집 단위로 하는데요. 짝집은 소[牛] 짝으로 이뤄진 농사 두레를 뜻합니다. 일소가 있어야 농사를 짓던 시절 이야기지요. 그래서 두세 집이 한 단위가 됩니다. 한 식구가 보통 10명이 넘던 시절이라, 일할 때마다 아이들까지 30여 명 이상이 움직입니다.
보통 8월 15일 경이면 삼굿을 했습니다. 삼굿할 때 별미는 가마에 넣어 익힌 옥수수와 감자입니다. 왜 그리 맛있던지요.
삼굿으로 쪄진 삼은 흐르는 물에 담가 껍질을 벗기고, 말렸다가 겨울에 삼고, 봄이면 물레를 돌려 꼬고, 돌기를 돌려 삼실을 만들고, 양잿물에 삶아 색을 내고, 다시 돌기에 돌려 실을 내리고, 풀을 먹여 메어 실을 고르면서 뱁댕이를 끼워가며 도투마리를 만듭니다. 도투마리를 베틀에 올려 북과 바디를 놀려 베를 짜지요.
베를 짜던 어머니의 모습은 신기(神技)에 가까웠습니다. 어쩌면 한 번도 북을 떨어트리지 않고 오른손 왼손으로 바꿔가면서 끌신을 당겼다 놓았다 하면서 바디질을 하던지, 옆에서 지켜보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신의 기술이었습니다.
자식들 학비 대고, 저승 여행에서 입는 최고의 옷 만들고
삼베를 얻기 위해서 정선사람들은 일 년 내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삼베를 생산하는 일은 정말 힘든 작업이었지요. 삼베는 옷을 해 입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농촌에서 가장 큰 목돈을 만지게 해주던 일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자식들 공부시키고, 어른들 환갑잔치도 성대하게 치러드렸습니다. 평상시에는 생활 옷을 만들고, 두루마기 같은 예복도 지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삼베는 정말 중요한 일에 쓰였습니다. 윤달이 들면 집마다 곱게 간직한 베를 꺼내 할아버지 할머니 저승 갈 때 입을 옷을 지었습니다. 가장 고운 베를 썼지요. 수의(壽衣, 襚衣)입니다. 이승 떠날 때 곱게 입혀 저승 여행을 보내는 옷입니다. 자식들이 정성으로 지은 수의라, 아마도 망자는 두 팔 흔들며 남들에게 자랑하며 저승 여행을 할 겁니다.
이처럼 정선사람들에게 삼베는 사시사철 일상으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과정에는 정선사람들의 아픈 상처로 흐르는 눈물도 기쁨이 넘치는 행복도 함께 했지요. 이런 삼베가 정선의 무형문화유산으로 자리하고, 매년 행사를 엽니다. 모든 정선사람은 그 현장에서 멀리 몸은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마음은 가 있지요. 삼베의 힘든 일을 짝집 두레로 이어간 정선사람들의 슬기가 넘쳐나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