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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광해군 14)에 세워진 권벌(權橃)의 신도비명이다. 찬자는 조선 중기
의 문신·학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이며, 서자는 당시 성
균관 유생이었던 김취영(金就英, 1647~?)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시와
글씨에 뛰어났던 선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전액(篆額)을 썼
다. 이 비는 정면, 측면 각 1칸의 팔작지붕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권벌(1478~1548)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자는 자앙(子仰), 호는 충재
(冲齋)이다. 1507년(중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고, 을사사화 때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유
배되었다가 이듬해 유배지인 삭주(朔州)에서 사망하였다. 시호는 충정(忠定)
이며, 저서로 『충재선생문집(冲齋先生文集)』 9권이 있다.
비문의 초반부에서는 권벌의 증손인 상현(峠賢)이 정경세에게 신도비명을 부
탁하게 된 경위가 서술되었다. 중반부에서는 그의 관력(官歷)을 중심으로 하
여 생애를 정리하였다. 생전에 여러 사건에 관계되었던 만큼 이와 관련된 일
화가 많다. 후반부에서는 자녀관계가 정리되었고 명문(銘文)이 이어진다.
충정공(忠定公) 충재(冲齋)선생 신도비명
유명 조선국 증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지경연판의금부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
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충정공(忠定公) 충재(冲齋) 권선생(權先生) 신도비명 : 서문을 아울러 쓰다.
가의대부 행 홍문관부제학 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정경세(鄭經世)가 짓다.
숭정대부 전 행 지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를 쓰다.
영가(永嘉) 권생(權生) 상현(峠賢)이 수백리 길을 와서 경세에게 종유(從遊)하기를 몹시 부지런
히 하였는데 하루는 용모를 가다듬고 나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저의 증조인 충정공께서 나라
를 위하여 큰 어려움을 겪다가 궁벽한 유배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20년이 지난 뒤 선왕(先王)
의 총애를 입어 숭종(崇終)의 전례가 이미 갖추어져서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또 법식에 의
거해서 세우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에 저의 할아버지 형제분들이 일찍이 금석(金石)을 마
련해서 당시에 입언(立言)하는 군자에게 명(銘)을 지어 달라고 청했는데 불행히 뜻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제 아버지께서는 항상 가슴 아파하며 비통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저 상현 등
은 걱정하며 그 뜻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두 번 절하며 명을 지어 주
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충정공은 큰일을 한 분이라 비록 말학인 나도 일찍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렇지만 평소의 언행에 대해서는 말학인 나는 자세히 들은 적이 없다. 또
덕을 찬양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적임자가 아닌 사람에게 부탁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상
현이 일어나 말하기를,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지금 이미 70여 년이 되어 그분의 평소
언행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아득해져 가려는 것은 참으로 대인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다행히 퇴계(退溪) 이선생(李先生)께서 지은 행장이 있어 상고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불초가
못나서 당대의 이름난 제공(諸公)과 큰 선비의 문하에는 본디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대
인께서 지어주지 않으면 끝내는 지을 가망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의 얼굴을 보니 눈
물을 흘릴 듯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선생이 지은 행장은 문집에 실려 있어 백대를 지나도 전해질 것이므로 충정
공의 자손은 그 선조의 덕이 후대에 믿음을 받지 못할 것을 염려할 것이 없다. 다만 묘도(墓
道)에 비석을 세워 아름다운 법식에 맞추려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즉 굳이 사양해서는 안될
듯하여 마침내 나의 어리석음과 견문이 짧은 점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이선생의 행장을 참고
하여 다음과 같이 쓴다. 공의 이름은 벌(橃)이고 자는 중허(仲虛)이다.
고려 시중(侍中)을 지낸 행(幸)의 후손으로 대대
로 안동(安東)에 살았다. 증조의 이름은 계경(啓經)인데 횡성현감(橫城縣監)을 지냈고 병조참판
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이름은 곤(琨)인데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으로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부친의 이름은 사빈(士彬)인데 성균관생원으로 여러 차례 추증되어 의정부영의정에 이
르렀다. 모친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주부(主簿)인 윤당(潤塘)의 따님이며 정경부인에 추증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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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으니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 인해 추증된 것이다.
공은 아주 어릴 적부터 훤칠하고 우뚝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다. 글 뜻을 일찍 통달하여 말을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약관이 되기 전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연산조(燕山朝)에 대
책에서 급제하게 되었으나 시권(詩卷) 중에 ‘처(處)’ 자가 있어 곧 삭제당했다. 이는 대개 연산
군이 일찍이 중관(中官) 김처선(金處善)이 직간(直諫)한 것에 노여워하여 그를 죽이고 중외의
문자에 ‘처(處)’ 자와 ‘선(善)’ 자를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정덕(正德) 정묘년(1507, 중종 2)에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갔다
가 주서(注書)를 거쳐 부수찬으로 승진하였으며 정언(正言)과 예조좌랑, 부교리, 병조정랑을 역
임하였다. 계유년(1513, 중종 8)에 지평(持平)으로 있다가 근친(覲親)하려고 고향으로 내려가
려 할 때 의정부의 종 정막개(鄭莫介)가 신윤무(辛允武), 박영문(朴永文)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고변(告變)하여 당상관의 품계에 오른 일이 있었다. 길을 떠나면서 동료에게 말하기를 “이 종
의 자급(資級)에 대해서는 논의하여 삭탈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떠난 뒤에는 그 의
론이 묻혀 버리고 말았다. 조정으로 돌아온 뒤 대궐에 나아가 여러 동료들을 논박하고 이어 아
뢰기를, “정막개가 이미 박영문 등이 역모한 것을 알았다면 곧장 위에다 아뢰었어야 하는데 여
러 날이 지난 뒤에야 고했으니 죄를 받지 않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바라건대 그의 관직을 삭탈
하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갑술년(1514, 중종 9)에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다가 일로 인해 체차되었다. 얼마 뒤에 호조정랑
에 제수되었는데 어버이가 연로하여 봉양을 편하게 하기 위해 영천군수(永川郡守)가 되었다.
정축년(1517, 중종 12)에 장령으로 소환되었으며 사인(舍人)으로 옮겨졌다. 무인년(1518, 중종
13)에 사성(司成)으로서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는데, 상이 직접 한 정사(政事)에서 그렇게 되었
다. 그 뒤 여러 차례 옮겨져서 좌승지에 이르렀다. 가을에 상이 유생을 불러 친강(親講)하였는
데 강을 마치고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 전강(殿講)에서 인(仁)에 대해 논하였는데 인으로
는 끊어진 세계(世系)를 이어 주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노산(魯山)은 조종의 의친(懿
親)이고 연산(燕山)은 전하의 동기입니다. 그들이 비록 조정에 죄를 짓기는 하였지만 또한 한
시대의 임금이었습니다. 영원히 후사를 끊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다면 어찌 전하의 인(仁)
에 손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장헌대왕(莊憲大王)이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에게 명하여 공순
공(恭順公) 이방번(李芳蕃)의 후사가 되게 하였고,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에게 명하여 소도
공(昭悼公) 이방석(李芳碩)의 후사가 되게 하였으므로, 친족을 두터이 사랑한 것에 대해 지금까
지도 칭송하는 말이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후대의 임금이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
였다. 우승지 김정국(金正國)과 함께 같은 말로 극론하였으니, 일이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시론
(時論)이 장하게 여겼다. 도승지로 옮겨졌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 예조참판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정암(靜庵) 조선생[趙先生 : 조광조
(趙光祖) 선생이 이 세상에 드문 지우(知遇)를 받아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교화를 일으
키는 것으로 작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풍채를 우러러보았다. ~5자 마멸~ 혹 나이가 젊
어 기운이 예리한 사람이 많아서 대정(大貞)의 경계[주역(周易) 둔괘(屯卦)에 ‘은택을 베풀기가
어려우니 조금씩 바로잡으면 길하고 크게 바로잡으면 흉하다.’ 한 데서 온 말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에 있어 급진적으로 개혁하면 실패한다는 경계이다]를 생각하지 않고 급히 경장(更張)
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원망을 샀다. 공은 이를 심히 우려하여 제공들을 위해 힘껏 말하며 조정
하여 화합하는 계책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제공들이 공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 공은 드디어 서
추(西樞 : 중추부)의 직에 있다가 외직을 구해 6월에 삼척부사(三陟府使)가 되어 나았다.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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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북문(北門)의 화(기묘사화를 말함)가 일어나 선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공도 역시 연
좌되어 파직되었다. 물러나 시골에서 산 것이 15년이었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 28)에 다시 서용하라는 명을 받아 밀양부사(密陽府使)에 제수되
었다. 을미년(1535, 중종 30)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다음 좌윤에 배수되었다.
무술년(1538, 중종 33)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는데 대궐에 나아가 사은숙배할 때 상이 말하기
를, “영남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많이 떠돌고 있으니 경은 마음을 다해 안집(安集)시키라.”
하니 대답하기를. “사방의 근본은 조정에 있고 조정의 근본은 임금의 한 마음에 있습니다. 근
래 사치가 풍습이 되어 재용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검소한 덕으로써 솔선하신다면
외방은 저절로 교화되어 흉년도 백성들에게 해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기해년(1539, 중종 34)에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병조참판으로 옮겨졌으며 다시 판윤으로
승진했다가 얼마 뒤에 지중추부사로 고쳐 제수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천조(天朝)에 사신으로 갔다. 이듬해 2월에 칙서를 받들고 돌아왔는데 황제가 은혜로운
전지(傳旨)를 내렸으므로 상이 가상하게 여겼다.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되고 땅과 밭과 장
획(臧獲)을 하사받았다. 여름에 지춘추관사 겸 세자우빈객이 되었다. 신축년(1541, 중종 36)에
좌참찬과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임인년(1542, 중종 37)에 명나라 세종황제(世
宗皇帝)에게 궁비(宮婢)의 변(變)이 있어 바야흐로 사신을 보내어 진위(陳慰)하는 일에 대해 의
논하였는데, 공이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천자는 만승(萬乘)의 존귀한 신분으로 구중궁궐
속에 깊숙이 계시는데, 불측한 모의가 허물없이 지내는 측근에게서 나왔습니다. 조금이라도 소
홀히 하여 경계하지 않으면 위태로운 화란이 뒤따라서 생겨나는 법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거울
로 삼아 항상 반성하고 돌아보는 생각을 가지신다면 아주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말이 임금의
위엄을 크게 범하였으므로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목을 움츠렸다.
갑진년(1544, 중종 39)에 지경연사를 겸임하였다.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 이해 겨울에 중묘(中
廟)가 승하하였다. 공은 빈전도감(殯殿都監)이 되어 능히 정성과 믿음을 다하였다. 을사년
(1545, 인종 1)에 우찬성으로 승진되었는데 판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7월에 인묘(仁廟)가 잇
달아 승하하였다. 명묘(明廟)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아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하
였는데, 삼공(三公) 및 공을 원상(院相)으로 삼아 번갈아 승정원에 직숙하면서 기부를 처리하게
하였다. 당초에 윤원형(尹元衡)이 윤임(尹任)과 틈이 벌어졌는데, 이기(李芑)와 정순붕(鄭順朋), 임백령
(林百齡) 등이 윤원형의 심복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윤원형이 문정대비의 밀지(密旨)에 의탁
하여 대간(臺諫)들을 위협해서 윤임을 탄핵하여 제거시키게 하였는데, 대간들이 따르지 않았
다. 이기 등이 허자(許滋)와 함께 승정원으로 나아가 계사(啓辭)를 올려 윤임의 죄를 다스리려
하였는데, 유관(流灌)과 유인숙(柳仁淑)까지 아울러 처치하려고 하자 공은 불가하다고 주장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얼마 뒤에 문정대비가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 여러 재신(宰臣)들을 불러
들여 의논하게 하였는데, 공이 앞으로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난번에 양도왕(襄悼王)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셨으니 순서상 월산대군(月山大君)이 마땅히
즉위해야 합니다만, 정희대비(貞熹大妃)가 그를 놓아두고 성묘(成廟)를 세웠는데 성묘의 나이가
겨우 열세 살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종시토록 편안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주상께서는
대행왕(大行王)의 적제(嫡弟)로서 이미 임금 자리에 바르게 임하여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다른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왕자군(王子君)들은 외부인들과 교제하는 자가 없으며 대신들
은 정사를 마음대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누가 감히 사특한 계책을 내겠습니다. 바야흐로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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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를 하는 때는 인심을 얻기를 힘쓰고 모든 일을 대공지정(大公至正)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중묘께서 즉위하신 초년에 대신이 잘 보도(輔導)하지 못하여 노영손(盧永孫)이 이과(李顆)를 역
모했다고 무고하여 작상(爵賞)을 취한 뒤부터 상변(上變)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중묘께서 나중
에 그 까닭을 알고 연좌된 사람을 모두 풀어 준 후에야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여 인심
이 안정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마땅히 경계로 삼아야 할 바입니다.”
그날 윤임은 찬축(竄逐)되어 쫓겨나고 유인숙은 파직되었다. 이튿날 공을 전보시켜 병조판서로
삼았다. 그러자 헌납(獻納) 백인걸(白仁傑)이 밀지에 대해 제대로 논집하지 못하였다는 내용으
로 대간들을 탄핵하자 문정대비가 발 뒤에서 크게 노해 백인걸을 국옥(鞫獄)에 내려 치죄하게
하였으며, 세 사람의 죄를 더 가중시켜 윤임은 절도(絶島)로 유배 보내고 유관과 유인숙은 부
처(付處)시켰다. 이에 공은 다시 대궐에 나아가 홀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선조(先朝) 말기에 재이(災異)가 여러 차례 내렸는데 근래에는 또 대풍이 불고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바, 삼가 하늘의 뜻이 혹 감응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는 듯하여 몹시 두렵습니다. 나이
어린 임금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신을 내쫓자 사람들이 모두 그 단서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또 간관(諫官)마저 가두었으니 누가 감히 자신의 속마음을 다 진
달하겠습니까? 윤임이 만약 사특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참으로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
다만 왕대비께서는 후사를 이은 왕에 대해서 어머니로서의 도가 있습니다. 만일 상께서 걱정하
고 상심하여 편치 않게 된다면, 어찌 성덕(聖德)에 있어서 크게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유언비
어는 예로부터 있었으나 밝은 임금은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죄주지 않았습니다. 유관은 평소
에 속병을 앓고 있어서 매번 조당(朝堂)에서 벽에 기대 앉아 있었으며 유인숙은 상기증(上氣
症)을 앓은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늙고 병든 유생들이 지위가 이미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겠습니까. 이제 만약 이들
이 길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이 모두들 ‘나라에서 죽였다.’라고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상께서는 평상심으로 살펴보소서.
그때 마침 임백령과 허자가 윤임의 죄목 가운데서 ‘종사(宗社)’ 두 글자를 삭제하기를 청하자,
정순붕이 크게 노하여 상소를 올려 세 사람의 죄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다. 이에 다시 충순당에
서 인대(引對)할 적에 공은 그 자리에서 사죄하고는 지레 물러나왔는데, 세 사람에 대해 모두
역모를 하였다는 죄목으로 논해 사형으로 처결하였다. 그 뒤 논공(論功)을 하고 책운(策勳)을
하는데 공 역시 위사공신(衛社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얼마 뒤에 정순붕 등이 공에 대해 논
의가 같지 않았다고 하면서 훈적(勳籍)에서 삭제하기를 청하였으며, 양사(兩司)에서는 또 파직
시키기를 청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였다. 당시에 도하(都下)의 인심이 흉흉하여 공의 사위인 홍
인수(洪仁壽)가 급히 달려가 공을 찾아뵈니, 공은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말투와 안
색이 평소와 똑같다. 조금 뒤에 어떤 사람이 큰소리로 떠들어 대는 말을 들은 연후에야 비로소
공이 이미 파직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정미년(1547, 명종 2) 가을에 어떤 무뢰한 자가 문정대비를 비방하고 헐뜯는 말을 양재역(良
才驛)의 벽에다 써 붙였다. 이를 상변하자 을사인(乙巳人)들에게 크게 죄를 가하였는데, 공은
구례현(求禮縣)에 부처(付處)되었다가 얼마 뒤에 태천(泰川)으로 옮겨졌다. 압송하기 위한 관원
이 집에 도착하자 공은 태연한 기색으로 길에 오르며 이별하러 온 향당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의 은혜이다.” 하였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이 공의 손을 잡고 목놓아 통곡하자,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자네를 대장부로 보았는데, 도리어 이와 같은 사람밖에
안 되는가?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은 모두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다.”하였으며,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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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 주면서 아들 동보(東輔)에게 이르기를, “범충선(范忠宣)은 나이 70에도 만리나 되는 먼
길을 갔으니, 너의 아비가 받은 죄는 거기에 비하면 아주 관대한 은전이다. 그리고 나는 선왕
의 은혜를 저버림이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박장(薄葬)을 하라.” 하였다.
길을 가다가 용안역(用安驛)에 이르렀을 때 금부랑(禁府郞)이 성화같이 급히 달려왔으므로 일
행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통곡하자, 공이 정색을 하고 꾸짖었는데, 금부랑이 이르러 와서
보니 또다시 삭주(朔州)로 이배(移配)하는 것이었다.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렀을 때 회재(晦齋)
이선생(李先生)이 강계(江界)로 유배를 가다가 역시 그곳에 도착하였는데, 공이 장난삼아 말하
기를, “두 이상(貳相)이 한 길을 가니 어찌 그리 혁혁한가?.”하였으며 지척의 거리에 있으면서
도 서로 만나 보지 않은 채 길을 떠났다.
유배지에 도착한 다음 해인 무신년(1548, 명종 3)에 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 지냈는데도 오히
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어린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 것을 일상적인 일과처럼 하
였다. 그러다가 3월 26일에 졸하니, 향년이 71세였다. 그해 겨울에 봉화현(奉化縣)의 유곡산
((酉谷山)으로 상구(喪具)를 싣고 와서 장사를 지냈다.
명묘 말년에 간사한 자들이 모두 제거되고 국시가 조금 변하였다. 선대왕이신 선조(宣祖)가 즉
위하여서는 능히 선대의 뜻을 생각해 을사년 이후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들을 깨끗하게 모두
신원시켜 주었으며, 대신의 말을 따라 공의 관작(官爵)과 직질(㮨秩)을 처음과 같이 회복시키도
록 명하였다. 얼마 뒤에는 공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감춘추관사를 추증
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에 태상시(太常寺)의 의논에 따라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
으며, 뒤에 다시 광국공신의 공훈으로 인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공은 풍신이 빼어나고 맑았으며 기국이 크고도 반듯하였다. 검소한 성품을 지녀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지위가 높고 현달한 데에 이르렀으나 자신의 몸을 봉양하는 것은 마치 가
난한 선비와 같았다. 평소에 글 읽기를 좋아하여 성현의 말 가운데 긴요한 곳을 만나면 반드시
자질(子姪)들을 불러 보여 주었으며, 반복해서 가르쳐 주었다. 항상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모
름지기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여야 한다.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단지 말단의 일일 뿐이
다.” 하였다.
말년에 들어서는 특히 자경편(自警編)과 근사록(近思錄)을 좋아하여 비록 숙직을 하거나 공무
를 보는 중에도 반드시 소매 속에 넣고 다녔다. 중묘(中廟)가 일찍이 재산과 집정들을 불러 후
원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꽃을 감상할 적에 각자 마음껏 술을 마시면서 즐기게 하자, 술에 취해
부축을 받아 대궐 밖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궁궐 안에 있던 어린 환관이 작은 책자로 된
근사록 한 권을 주웠는데, 상이 “권벌이 떨어뜨린 것이다.” 하고는 그에게 돌려주라고 명하였
다. 공의 외가가 정현왕비(貞顯王妃)의 가까운 친족이어서 임금으로부터의 총애가 아주 특별하였는
데, 공은 더욱더 스스로 삼가고 피하였다. 재신(宰臣)으로서 내속(內屬)과 연관된 자들은 경사
(京師)에 조회하러 갔다가 돌아오면 반드시 사사로이 물품을 바치는 규례가 있었는데, 공만은
홀로 말하기를, “감히 할 바가 아니다.” 하면서 바치지 않았다.
공은 평소에 거처함에 온화한 기운이 가득 찼으며 일반 사람이나 천한 종들이라 해도 모두 은
혜와 후덕함으로 대하였다. 어떤 여종이 일찍이 소반을 들고 가다가 넘어져 국 국물이 공의 옷
에 튀었는데도 화내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고향 사람으로서 본부(本府)의 교관으로 있
는 어떤 사람이 공을 배알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길에서 어떤 아전을 때렸다. 부사가 그 말을
듣고는 면전에서 따지자 때린 사람이 황급하여 거짓말로 답하기를, “제하 한 것이 아니라 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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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權令公)이 시킨 것입니다.” 하니 부사가 말하기를, “권상(權相)도 사사로운 분노로 인해 공
리(公吏)를 매질한단 말인가?”하면서 욕하는 말을 그치치 않았다. 그런데도 공은 끝내 그에 대
해서 따지지 않았다. 그 도량의 크고 넓기가 이와 같았다.
그러나 대사에 임하고 대변(大變)에 처해서는 얼굴에 의로운 기색을 드러내고는 곧장 나아가
직접 담당하여 처리해 제아무리 용맹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능히 빼앗을 수 없는 점이 있었
다. 두 차례 일에 대해 아뢸 적에는 밤을 새워 글을 기초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조정에 나아
가자 집안사람들과 아들, 사위 등이 옷소매를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리는데도 문득 떨쳐버리
고 대궐로 나아갔다. 도중에 신광한(申光漢)을 만나 함께 가게 되었는데, 신광한이 공의 뜻을
알고는 경악하면서 말렸으나, 공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원상(院相) 이언적(李彦迪)이 있는
자리에 나아가 주서를 불러 그로 하여금 베껴 쓰게 하였는데, 이언적이 그 글을 보고는 놀라면
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을 하더라도 한갓 불측한 화만 야기할 뿐 무
슨 보탬이 있겠는가?” 하고는 위태로운 말을 한 부분을 모두 지웠다. 그러자 공은 자리에서 물
러나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렇게까지 많이 지워 버렸으니 올리지 않느니만 못하다.” 하였
다. 당시에 윤원형이 병을 핑계 대고는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있었는데, 공은 편지를 보내어 꾸짖기
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서쪽으로 가지 않으면 큰 화(禍)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였
다. 지금이 어찌 공이 집에 누워 있을 때인가.” 하였다.
처음에 정순붕이 병이 심하게 들어 몇 달 동안 정고(呈告)하고 있었는데, 윤임에 대해 아뢰는
날에는 곧장 나왔다.
공은 평소에 정순붕과 더불어 두터운 친분이 있었으므로
그를 맞이하면서 “공께서는 어찌하여 나왔는가?” 하니 정순붕이 얼굴빛이 참담해졌다. 그 뒤에 정순붕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윤임의 무리들을 그날 당장 처치할 수가 있었는데, 내가 권벌의 말을 듣
고는 나도 모르게 등골에 땀이 흘러 감히 다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엉성한 이문중[李文仲 :
이기(李芑)]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매섭지 못해서 여러 날을 두고 소란스러웠다.” 하였다. 공
의 강건하고 정직한 기운이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기는 해도 다른 사람에게 굴복되지는 않음이
또 이와 같았다. 무릇 윤원형이 외척의 자리에 있으면서 위태로운 시기를 틈타 여러 간인(奸人)들을 뒤에서 조
종하고 있었으니, 묵은 유감을 푸는 것은 참으로 이미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더 쉬웠다.
그리고 용렬하고 꽉 막힌 윤임은 또 뭇사람들의 의심을 불러오고 참소하는 말을 믿게 할 만한
점이 있었다. 그러니 화의 기미가 발동하는 것은 마치 큰 강물이 육지를 내달리고 맹렬한 불길
이 들판을 태우는 것과 같아, 한때의 선류(善類)들이 모두 화를 당할 것이 뻔하였다. 공과 같
이 밝은 분이 어찌 끝내 구원할 길이 없다는 걸 몰랐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 불에 타고 물에
빠짐을 취하여 분연히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 한창 일어나는 악당의 세력에 맞섰
다. 그러면서 종사(宗社)의 안위(安危)만을 알았을 뿐, 그 자신이 살고 죽는 것은 몰랐으며 충
성스럽고 어진 사람이 무함을 받는 것이 통분하다는 것만 알았을 뿐 말을 하면 곧바로 화가
응해 오는 것이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아, 장렬하기도 하다. 순수한 충성
심과 크나큰 용기가 아니면 어찌 능히 그럴 수 있었겠는가?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일찍이 공에 대해서 죽음으로라도 빼앗기 어려운 절조로써 기대하였는데, 참으로 사람을 제대
로 본 말이라고 하겠다.
처음에 공이 이미 유배된 뒤에도 이기 등의 노여움이 오히려 그치지 않아 반드시 사형에 처하
려고 온 힘을 다해 계청하였으나, 문정대비(文定大妃)가 따라주지 않았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백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공의(公議)가 곧바로
안정되어 포증(襃贈)하는 은혜가 아래로 황천에까지 미치고 흉악한 심보로 화를 일으키는 것을
즐기던 무리들은 모두 주륙되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시원해지게 되었다. 이에 이른 뒤에야
착한 사람들이 비로소 권장되었으며 후대의 어진 사람을 해치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 역시
조금은 경계시킬 수가 있게 되었다.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공의 호는 충재(冲齋)이고 늙어서의 호는 송정(松亭)이다. 향리 사람들이 공이 살던 곳에다가
서원을 짓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지내고 있다. 공의 부인인 화순최씨(和順崔氏)는 직장(直長) 최
세연(崔世演)의 따님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공은 아들 둘을 두었
다. 장남은 바로 동보(東輔)로 군수이고, 차남은 동미(東美)로 현감이다. 또 측실에게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동신(東愼)과 동진(東進)이고, 딸이 하나인데 좌랑 홍인수(洪仁壽)에게 시집갔
다. 군수 동보는 아들이 없다. 현감 동미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채(采)이고 차남은 래
(來)로 군수의 후사가 되었으며 삼남은 집(集)이고, 막내는 비(棐)이다. 딸은 부사 이영도(李詠
道)에게 시집갔다. 좌랑 홍인수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홍사제(洪思濟)는 승문원 정자이고
차남 홍사려(洪思礪)는 진사이다. 증손자는 여섯인데, 상현(尙賢), 상충(尙忠), 세충(世忠), 상신
(尙信), 상절(尙節), 석충(碩忠)이고, 증손녀는 열둘인데, 유진(柳袗), 이장무(李長茂), 이영기(李
榮基), 김영조(金榮祖), 권별(權鱉), 김필(金珌), 김휘(金輝), 이숭언(李崇彦), 김시권(金是權), 김
효민(金孝敏)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지난 옛날 임금 돌아가시던 날
하늘에서 나라 운명 축원해 주었네
거듭해서 큰 상 당하게 하여
올빼미와 같이 못된 심보 부렸네
울연하게 피어났던 저 착한 이들
모두 나라 흥성케 할 인재였었네
어지러이 참소하는 말이 일어나
서로 해치고 혹은 죽기도 했네
공께서는 배고파도 밥 아니 먹고
밤새우며 아침 오길 기다렸다네
홀로 대궐 문 앞에서 우뚝 서서는
손수 지은 글로 위에 아뢰었다네
뜰 가득한 신하 모두 떨었건마는
공께서는 이에 마음 차분하였네
목숨 바쳐 임금 잘못 바로잡는 게
그게 바로 충성 다한 거라 여겼네
오직 충성 오직 곧음 그거였나니
하늘에서 공께 준 덕 두터웠다네
황량한 땅 유배지서 운명했나니
어찌하여 공이 받은 복이 적었나
하늘 어찌 공께 끝내 재앙을 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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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수가 많으면 이기는 거네
공의 몸은 비록 액운 당하였지만
공의 이름 갈수록 더 영원하리라
어느 누가 공의 자취 정리하여서
후인에게 분명하게 알려 주었나
선각자인 우리 도옹 계시었나니
백대토록 영원히 말 드리우셨네
공이 행한 시종 행적 더듬어 보니
부끄러운 말이 있지 아니하구나
높은 산에 큰 길 같은 덕행이나니
그 모두가 후학들의 의귀할 바네
내가 이에 드러내는 시를 지어서
빗돌에다 새겨서 길이 전하네
내가 공께 아첨하는 글이 아니라
도옹(陶翁)께서 전에 이미 서술하셨네
천계(天啓) 2년(1622, 광해군 14)
성균관생원 김취영(金就英)이 삼가 글씨를 쓰다
忠定公沖齋權先生神道碑銘
有明朝鮮國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知 經筵判義禁府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忠定公沖齋權先生神道碑銘幷序
嘉義大夫行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鄭經世撰
崇政大夫前行知中樞府事金尙容篆
永嘉權生尙賢跋涉數百里從經世
遊甚勤一日斂容而告余曰尙賢曾
王父忠完公爲國家犯大難謫死窮
荒後一十年蒙 先王寵奬崇終
之典盖已無所不備而螭首龜趺又
令式之所許吾王父兄弟嘗冶金
伐石請銘于一時立言之君子而不
幸未及就此吾先人之所常茹痛者
尙賢等恤恤焉惟不得成其志是懼
敢再拜以請余曰忠定公有大焉者
雖末學亦嘗與聞於輿誦而知之矣
至其平生言行之詳則末學有不可
得而聞焉且譔德大事也不可以託
諸非人起而言曰曾王父之歿距今
七十有餘載影響將昧昧焉誠如大
人之云所幸者有退溪李先生行狀
在焉可攷而徵不肖無狀於當世名
公碩士之門素不得階主焉若不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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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於大人則終亦無所望幸焉耳矣
視其面若將泫然者余惟李先生之
狀載在文集傳之百世而不刊忠定
之子孫不忠其先德之無以見信於
後特欲立石墓道以應令式而已則
爲若無可以固辭者遂不揆愚陋謹
攷李先生之狀而敍之曰公諱橃字
仲虞高麗侍中幸之後世爲安東人
曾祖諱啓經橫城縣監贈兵曹參
判祖諱琨龍驤衛副護軍 贈吏曹
判書考諱士彬成均生員累 贈至
議政府領義政妣坡平尹氏主簿塘
之女 贈貞敬夫人皆以公貴也公
自髫齔時岐嶷異常文義夙達出語
輙驚人未弱冠中進士燕山朝對策
當第以卷中有處字族削之盖燕山
嘗怒中官金處善直諫而殺之命中
外文字毋得用處善字故也正德丁
卯釋褐由承文院入藝文館遷注書
陞副修撰歷正言禮曹佐郞副校理
兵曹正郞癸酉以持平呈覲將下鄕
有政府奴鄭莫介告辛允武朴永文
謀逆得堂上階臨行語同僚曰此奴
資不可不論奪及去而議遂寢旣還
則詣 闕駁諸僚仍 啓曰鄭莫介
旣知永文等之謀當卽上變而淹日
乃發不伏辠幸矣請奪其職 上
從之甲戌拜吏曹正郞以事遞尋
爲戶曹以親老求便養爲永川郡守
丁丑以掌令 召還轉舍人戊寅以
司成陞拜右副承旨 親政也累轉
至左承旨秋 上召儒生 親講
畢公進曰今日 殿講論仁仁莫大
於繼絶世魯山 祖崇懿親燕山
殿下同氣雖獲戾于 宗廟亦嘗君
臨一時矣永絶不祀豈不有損於
殿下之仁乎 莊憲大王命廣平
大君璵爲恭順公芳蕃後錦城大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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瑜爲雨昭悼公芳碩後其仁親之厚至
今頌之不衰此後 聖之則也與右
承旨金正國同辭極論事雖未行時
論韙之轉都承旨己卯陞禮曹參判
時靜庵趙先生蒙被 不世之遇以
致君興化爲心人皆想望風采而一
時彙征之人或多年少氣銳不思大
貞之戒更張無漸被人噤齘公深以
爲憂爲諸公力言之欲爲調劑之計
而諸公不能從公遂自西樞求外六
月出爲三陟府使十二月北門之禍
作善類殲焉公亦坐罷退處田里者
十有五年嘉靖癸巳 命收敍除密
陽府使乙未丁外憂服闋拜左尹戊
戌觀察慶尙道陛辭 上曰嶺南
近因年荒民多流散卿其盡心安集
對曰四方之本在朝廷朝廷之本在
人主一心近來奢侈成習以糜財用
今若以儉德先之外方自然承化凶
年不能爲害矣己亥拜刑曹參判
轉兵曹陞判尹尋改知樞以 宗系
辨誣事奉使天朝明年二月奉
勑還有 恩旨上嘉之進階
正憲賜土田臧獲夏知春秋館事
兼世子右賓客辛丑歷左參贊禮
曹判書兼知義禁府事壬寅 世
宗皇帝有宮婢之變方議遣使陳慰
公於 經席啓曰 天子以萬乘
之尊深拱九重而不測之謀出於贄
御秒忽之不戒危禍之所隨願以是
爲鑑而恒加省念則善矣辭甚觸犯
同列皆縮頸甲辰兼知 經筵事還
左參贊是冬 中廟上昇公爲
殯殿都監克盡誠信乙巳陞右贊成
兼知義禁府事七月 仁廟繼陟
明廟幼沖嗣位 文定大妃垂
簾同聽政以三公及公爲院相令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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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政院參斷機務初尹元衡與尹任
有隙而李芑鄭順明林百齡等爲
其服心至是元衡託密 旨誘脅臺
諫使劾去任臺諫不從芑等乃與許
磁詣政院將 啓治任罪竝及柳灌
柳仁淑公持不可俄而文定御忠
順堂召諸宰入議公進曰往者
襄悼王薨無嗣月山次當立貞熹
大妃舍之而立 成廟年甫十三
矣然猶終始帖然況今 主上以
大行嫡第旣已正位豈有他虞且今
王子君無外父大臣無專擅孰敢有
陰邪之計方此初政務得人心每事
當以大公至正行之 中廟初年
大臣不能善導誣李顆以反盧永孫
取爵賞自是上變相繼 中廟後
知其故盡釋連坐人然後一國咸服
而人心定此今日之所當戒也是日
任竄灌遞仁淑罷翌日轉公爲兵曹
判書獻納白仁傑劾臺諫不能論執
密 旨簾中盛怒下仁傑鞫治加三
人罪任竄絶島二柳付處公復詣
闕獨 啓曰自 先廟末災異累
降近又大風連雨蒙昧竊恐天意或
有所感甚可畏也 幼主卽位未
幾貶竄大臣人皆莫測其端又囚諫
官誰敢有盡言者尹任若有邪心死
且無惜 王大妃於 嗣王有
母之道萬一憂像不豫豈不爲大累
乎飛言自古有之明主不以此罪人
柳灌素有腹病每於 朝堂倚屛壁
以坐柳仁淑得上氣證有年此等老
病儒生位極人臣豈有他心今若死
於道路人皆曰國殺之也願 上
平心察之會百齡磁請於尹任罪目
中去 宗社二字順朋大怒上疎極
言三人罪復於忠順堂引對公卽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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罪俓退於是三人皆以逆論死論功
策勳公亦 賜衛社號已而順明等
以公論議不同請削勳兩司又請罷
職皆 允時都下恟懼女壻洪仁壽
急馳來謁則公方坐對書言色如平
日少頃人有來唁者然後始知公之
已罷也丁未秋有無賴子題謗訕語
良才驛壁變上乃大加罪乙巳人付
處公求禮縣俄移泰川押官至公怡
然就道語鄕黨來訣者此 天恩
也進士琴元貞執公手失聲哭公笑
曰始以子爲夫也顧乃爾耶死生禍
福無非天也作書寄子東輔曰范忠
宣年七有萬里之行汝父所蒙甚
寬典也且吾負 恩至此死卽薄葬
可也行至用安驛有禁府郞星馳而
來一行皆驚惶號哭公正色叱之至
則又移朔州矣至碧蹄驛晦齋李
先生配江界亦到公戱曰雨貳相一
路行何赫赫也咫尺不相見而行至
謫之明年戊申感疾在枕褥猶不去
書授小兒千字文如常課以三月二
十六日卒享年七十一以其冬歸葬
于奉化縣之酉谷山 明廟末剪
去奸穢國是稍變 先大王卽位
克追先志凡乙巳以後庶寃群枉皆
以次昭雪用大臣言 命復公爵秩
如初尋 贈公大匡輔國崇祿大夫
義政府左議政兼領 經筵監春秋
館事越三年用太常議 賜諡忠定
後以光國勳加 贈領議政公風神
秀朗器局峻整性儉素不喜華靡位
至通顯而自奉如寒士雅好讀書遇
聖賢言語切要處必招子姪開示反
復敎告常曰爲學須爲己科第特末
事耳晩節尤好自警編近思錄雖直
省在公不離懷袖間 中廟嘗召
宰執宴後苑賞花 命各盡歡醉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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攜以出有內小宦拾得近思小冊
上曰落自權橃矣 命還之公外氏
於 貞顯王妃爲近親宸眷異常
而公益自謹避凡宰臣聯內屬者朝
京回必有私獻公獨曰非所敢也平
居和氣薰然雖庸人賤隸皆待以恩
厚婢嘗奉盤而跌羹汙公衣亦不形
嗔恚鄕人有爲本府敎官者來謁公
道撾吏人府使聞而面數之惶遽紿
應曰非我也權令公也府使曰權相
亦以私忿捶公吏耶恚言不置公終
不辨其弘量如此及 至臨大事處大
變則義形于色直前擔當有雖賁育
莫能奪者當其再啓事也通夜構
草待明趨朝家人子壻更扳挽泣諫
輙麾之至闕申公光漢相遇並行
問知公意愕然止之公不聽就院相
李公彦迪坐招注書使寫李公見之
驚曰事已至此言之徒惹起不測耳
奚益盡抹其危言處公却坐嘆曰刪
沒至此不如不爲之爲愈也時元衡
引疾不出公移書責之曰古人云吾
不西行大禍不止此豈公高臥時也
初順朋病甚在告數月告任日輒出
公雅與分厚迎謂曰公何乃亦來耶
順朋色沮後語人曰任輩卽日當了
吾聞權某之言不覺汗背更不敢發
口歇後李文仲處事不猛以致累日
紛擾其剛毅正直之氣屈人而不屈
於人又如此夫以元衡處肘腋之地
乘危疑之會眴唆群奸以逞宿憾固
已易於反手而任之庸繆又有以來
衆疑而信讒口者其禍機之發如洪
河走陸烈火燎原一時善類擧將逮
及以公之明豈不知其終不可救自
取焦溺而奮然不顧起當其方至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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勢知宗社之有安危而不知其身
之有生死知忠賢受誣之爲可痛而
不知言發禍應之爲可畏嗚呼烈矣
非純忠大勇而能之乎鄭文翼公光
弼嘗期公以死難不可奪之節眞知
言矣始公旣謫芑等怒猶未已必欲
置之重典 啓請甚力而 文定
不從此豈人力所與而未及百年公
議旋定 褒贈之 恩下逮泉壤而
窮凶樂禍之徒悉就誅殛爲世所快
至此然後爲善者始勸而後之戕
賢椓邦者亦可以少戒矣庸非天意
而誰耶公號沖齋晩號松亭鄕人就
公所居建書院立廟以祀之公配和
順崔氏直長世演之女先公歿贈
貞敬夫人男二長卽東輔郡守次東
美縣監側室男二東愼東進女一適
佐郞洪仁壽郡守無子縣監有四男
一女伯采仲來爲郡守後叔集季棐
女適府使李詠道佐郞有二子思濟
承文正字思礪進士曾孫男六人尙
賢尙忠世忠尙信尙節碩忠女十二
人柳袗李長茂李榮基金榮祖權
鼈金珌金煇李崇彦金是權金孝閔
其壻也餘幼銘曰
昔歲龍蛇天祝邦命荐以大喪逞以
梟獍蔚彼善人爲紀于國讒言胥亂
或刀或肉公飢不餐不寐待明獨立
天閽手掣奔霆盈庭掉慄公乃從容
以死匡君是爲盡忠維忠維直天厚
公德飱之荒狼曷嗇公祿豈天阨公
人衆而勝公身雖阨公名愈永孰最
公迹以詔來裔有覽陶翁言垂百世
循公始終罔有愧辭高山景行後學
攸依我用顯詩託之剞劂匪我諛公
陶翁是述
天啓二年▨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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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金就英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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