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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방송: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무원 주석 김일성 동지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49.3월 김일성의 세번째 모스크바 방문이 이루어졌다. 방문의 공식적인 목적은 소련과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는 것 (1949.3.17), 이 협정으로 김일성은 소련에게서 4천만 달러 규모의 경제원조를 얻는다.
김일성 도착성명: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 대표단은 우리에게 뜨거운 환영과 만족한 교섭결과에 대하여 소련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조선인민의 친근한 벗인 스탈린 대원수 만세!
그러나 김일성이 모스크바로 향한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 한국전쟁의 서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오늘 그 첫번째 시간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올해 (2020년)가 70년이 되는 해인데요. 무엇보다 슬픈건 전쟁이 끊난게 아니라 정전중이란 거 아니겠습니까.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맞습니다. 저도 지금 온지 한 11년 정도 됐잖아요. 아직도 독일 친구들이 한국은 전쟁 중인데 괜찮냐구 많이들 물어봐요, 엄마도 처음 왔을 때 꼭 전쟁기념관 가고 싶다고 얘기해서 삼각지에 있는 전쟁기념관엘 같이 방문했는데~
최원정: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진짜 외국인들이 오면 전쟁기념관엘 제일 먼저 찾는데요. 여긴 아직 전쟁중인 나라, 전쟁에 대해서 알고 싶은게 많은 거죠.
이시원/배우: 한반도에 가장 큰 비극이 외국인들이 한국전쟁을 통해서 한국을 알게 된 이유라는게 진짜 씁슬해요. 여행나가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농담처럼 south냐 north냐 물어보잖아요. 그게 너무 가슴 아파요.
최원정: 그리고 또 우리 세대 때는 교수님, 박사님은 6.25 노래 아시죠?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박상영: 처음 들어요.
이시원: 저도 처음 들어요.
최원정: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이시원: 이걸 어떻게 아세요?
최원정: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아~ 이걸 모르는구나?
이시원: 가사를 다 외우셨나요?
최원정: 그거는 제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예요. 굉장히 비장 하잖아요.
김지윤/정치학박사: 그런 말 있잖아요. 고무줄 하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그런 노래도 있고,
다니엘: 세대 차이 확실히 있네요.
최원정: 진짜 모르시는구나. 전쟁이 누군가에게는 잊혀진 옛날의 역사처럼 기억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데, 오늘부터 한국전쟁 특집을 여러분과 함께 할텐데 이시간을 통해서 한국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시원: 오늘이 5월 5일 어린이날 이잖아요?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고아들만 3년 동안 10만명이 발생했다고 해요. 그리고 민간인 사상자만 279만명 그리고 군인 중에서는 123만명 거의 한반도 인구의 10% 가량이 죽거나 다친 피해를 입었거든요.
김지윤: 외국에서 온 군인들도 많이 죽었죠. 남한측에 총21개국이 참전을 했고 그중에 16개국이 파병을 했고 5개국이 의료지원이나 비전투원을 보냈는데 북한측엔 중공군이 있었구요. 한국측만 하더라도 유엔군이 3만7천명 이상이 사망을 했고 중공군은 진짜 많이 희생 당했어요. 14만명 이상, 이게 규모면으로 봐서 어마어마했고 진짜 많이 그런 얘기가 있었죠. 냉전이 막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은 제3차 세계대전의 전편이다 이런 얘기까지 있었어요.
다니엘: 소련도 혹시 희생자가 있었나요?
김지윤: 소련이 참전을 했는데 참전하지 않은 구조인게 공식적으로 참전을 했다고는 안해요. 자기네들은 중공군에 편입이 돼서 지휘를 받으면서 전투에 조종사들만 있었다. 한 300명 정도가 죽었다 라고 알려져 있는데 소련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했다고 얘기를 안해요.
이시원: 흔히 알고 있는게 한국전쟁은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서 벌인 전쟁이라고 알 고 있거든요.
박상영: 아까 영상에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만세까지 외쳤을 정도로 대단한 혜택을 받은 것으로 느꼈는데~
최원정: 김일성이 모스크바 찾아가서 환영 보셨잖아요 가서 뭐 한거예요? 어떤 일이 있었어요?
정병준/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사람 모형을 들고) 이게 스탈린, 김일성, 해방 직후의 모습인 것 같애요. 4년 동안에 풍채가 많이 좋아졌어요. 김일성이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에 스탈린을 만나러 간게 1949년이었습니다. 그 해에 김일성 신년사(1949년)에 뭐라고 얘기 하냐면, 올해는 국토완정(完整)의 해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완정이라고 하는 것은 무력으로든 어떤 방법으로든 남한을 통일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시스템을 한반도에 수립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언을 한 거죠. 사실은 스탈린을 만나서 체결한 것은 문화협정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지만 (1949.3.17), 표면적으로는 군사협정이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쟁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온갖 군사장비의 쇼핑리스트를 가져가서 자금지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다니엘: 그러면 스탈린이 그 얘기를 듣고 김일성에게 도와 주겠다고 선언을 한 건가요?
정병준: 도와 주겠다고 얘기는 했지만 선제공격은 안된다 그러니까 먼저 남한을 공격하는 전쟁은 허락할 수 없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이시원: 그러면 필연적으로 No 라는 건데 스탈린은 제가 알기로는 여러나라를 공산화 시킬 야욕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쉽게 Yes 하지않고 No 했다는 건 분명 어떤 이유가 있었겠죠?
정병준: 스탈린은 전쟁 자체를 반대한 건 아니고요. 전쟁을 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복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을 선제공격하는 것은 안된다 왜? 북한이 남한보다 병력이나 화력이 우월하지 않다. 그러니까 안된다 사실은 이 대목에서 스탈린의 생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변수였습니다.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38선에 관한 미소협정이 있다. 또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까 안된다 대신 기다리고 있으면 남한이 선제공격할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기회를 틈타서 반격 반공격을 해야 된다. 그러니까 선빵은 안되지만 기다리다가 역공하는 정의의 반공격작전을 해야된다 라고 49.3월에 결정했습니다.
박상영: 전쟁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이시원: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정의의 전쟁이라는 게, 니가 나 먼저 건드렸다 도발했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전쟁하겠다 이런 식의~
---------세일러문 세대의 전쟁 시나리오 해석법,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박상영: 그런 거잖아요. 남한에서 선빵 때리기 기다렸다가 명분이 생기면 그때에서야 전쟁을 하면 미국이 끼어들지 않을 꺼야 이렇게 판을 짜 준거네요.
다니엘: 그리고 사실 선빵도 이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유가 있어야 그걸 날릴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어쨌거나 양국에서 자기정부를 세우느라 바빠서 사실 시비가 붙을 틈이 있었나요? 아무 이유없이 싸울 수는 없잖아요?
정병준: 당시에 사실은 45년에 그어졌던 38선이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는데요. 38선상에서 일종의 분쟁, 충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누가 전쟁을 먼저 일으켰느냐 누가 먼저 교전을 했느냐 이런 걸 사실 알기 어려웠습니다.
최원정: 아주 큰 한반도 모형이 김지윤 박사님 앞에 있는데~
다니엘: 보니까 너무 완벽하게 보시잖아요 38선도 없고 어떤 경계도 없으니까~
이시원: 이렇게 시원한데~ 원래 하나인데~
김지윤: 45년 7월 포츠담 회담이 있었는데 미국측이 한반도에 일본군들이 있으니까 무장해제시키고 그 다음에 여길 어떻게 하든 소련과 분할을 해야겠는데 어떤 분계선을 만들자 어디가 좋을까 38선 정도가 괜찮지 않을까 라고 제안을 하고 주도적으로 그걸 이끈 사람이 존 에드윈 헐 (John Edwin Hull) 이라는 인물이었다고 하죠. (존 에드윈 헐-당시 미육군 작전국장, 미소군사분계선을 38선으로 제안).
박상영: 그러면 38선을 정리하자면 헐 (Hull)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최원정: 이렇게 미소간에 편의상 경계선을 나눈 거예요.
다니엘: 사실 한국 입장에서 서운한 것은 여기 보면 서해에는 Yellow Sea 로 표시되어 있고 동해에는 Sea of Japan이라고~
최원정: 우리 입장에서 풀어야지요. 유독 큰 글자로 동해를 Sea of Japan 일본해 라고~
김지윤: 38선을 그러면 왜 저걸로 그었냐? 왜 38선이냐 라고 나오는게~ 사실은 서울은 가져가겠다 서울이 이쯤 있잖아요. 그리고 한반도에 보니까 중요한 항구가 세개가 있어요. 북한쪽에 원산이 있고 인천이 있고 부산이 있고 이 두 항구를 우리가 가져가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 전략적인 요충지가 있으니까 그래서 이 남한을 미군이 지키고 있으면 일본을 사수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는 전략적인 판단이 있었던 거죠. 안타까운 건 사실 그거예요. 한국은 개입할 겨를이 없이 그냥 두 강대국에 의해서 분할이 된 거잖아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38선으로 나라가 두 동강이 나면서 우리가 이유도 없이 알지도 못하면서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한 거예요. 왜 분할이 됐는지도 모르고 그 깊은 국제지정학적인 얘기도 모른채 갑자기 북한은 나쁘고 남한도 나쁘고 이런 식으로 서로의 증오만 키워나갔다.
박상영: 그냥 편의에 의해서 슥 그어진 거라서~
이시원: 이렇게 아름다운 한반도가 강대국의 패권 다툼에 의해서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 두 동강이 나버린 거잖아요.
김지윤: (한반도 지도를) 제가 한번 짤라 볼게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최원정: 뭘 자르신다구요?
김지윤: (한반도 지도 앞에서) 쌍칼~
이시원: 피로연에서 케익 자르는 것도 아니고~
일동: 안돼! 내 몸이 두 동강이 나는 것 같애~ (칼로 한반도 38선을 기준으로 두 동강이 나게 자른다).
김지윤: 다 잘랐어요.
이시원: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놔서 그렇지 사실은 38선 주변에 산도 있고 강도 있는데~ 마구잡이로 잘라서 돼요? 케익 자를 때도 이렇게는 안잘라요.
김지윤: 원래 경계선이 만들어지면 지형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산맥이라든지 강이라든지 고지라든지 이런 걸 따라서 가게되어 있는데 이건 그런 것 없이 딱 잘른 거잖아요. 얼마나 작위적으로 인위적으로 그랬는가를 볼 수가 있는 거죠.
이시원: 노래가 떠 올라요. 남인수 선생님의 가거라 삼팔선~
일동: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이시원: 이 상황에서 오늘의 노래 주제가 어떻게 보면은~
최원정: 불러 보셔야죠~ 제목만 던져 놓고 가면 어떻게 해요.
이시원: 삼팔선~ 가거라 삼팔선 노래가 너무 애닲으거든요. 아~ 산이 막혀 못오시나요~ 이렇게 시작을 하는데~ 아 물이 막혀 못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련만
정병준: 여기 그런 지도가 있습니다. 38선이란건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은 거잖아요. 인간의 이성과 상상이 만들어낸 선인데~ 그게 사실은 현실에 적용되고 강제 되었을 때 많은 물리적인 비극들이 발생하게 되는 거죠. 강대국들이 5천년의 역사가 있고 3천만이 살고 있다는 이 땅의 문명에 대해서 아무런 배려를 하지 않고 그었고 그 다음에 물리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 거죠. 여기 보면은 이게 38선이예요. 38선인데 여기 마을이 보이죠. 마을이 경기도 연백군 화성면 화장리 (現황해남도 배천군 화산리) 라고 하는 132가구가 사는 마을이었어요. 여기 화장리 라고 쓰여있죠. 이분들이 당시에 처음에는 북한 땅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지도를 보니까 자기네가 38 이남인 거예요. 그래서 주민투표를 했어요. 우리가 어디에 속해 볼까 주민투표를 했더니 표가 갈렸어요. 92가구는 남한에 속하기로 했고, 40가구는 북한에 속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일년 뒤 이번엔 소련군이 나타나서 여기 있던 38선 표시를 2킬로미터 옮겼어요. 그리고는 너희는 모두다가 38 이북이야 그래서 이번엔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리치 미군정 장관한테 이남 소속으로 해달라고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비극적인 불행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시원: 사는 곳은 똑 같은데 38선 이남이 됐다 이북이 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죠?
김지윤: 사실은 이게 어디가 38선 인지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말뚝이 박혀져 있어도 몇 킬로씩 떨어져 박혀져 있고 지금은 GPS가 있으니까 대충 알 수 있지만 내가 서 있는 여기가 위도 몇도고 경도 몇도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넘어가는 일들이 흔해지는데 이게 군사적으로 넘어가는 일들이 흔해지게 되면 그게 도발이 되는 거지요.
다니엘: 선이 애매하니까 그 전부터 계속 충돌이 있었군요.
김지윤: (다니엘에게) 지금 본인이 있는 데가 몇도인지 알아요?
최원정: 우리 GPS로 알 수는 있는데~
김지윤: 지금은 알 수 있는 일이죠. 그래서 굉장히 많은 38선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박금수박사 등장) 안녕하세요? 여러분에게 군사전략전술에 대해서 이야기 해드리는박금수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1년전 바로 오늘 지금 이 시간 38선에서는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949년 5월 4일부터 나흘간 송악산 292고지에서 한국군과 북한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요. 이는 38선에서 여러 대대가 충돌한 남북한 간의 최초의 연대급 전투였습니다. 송악산 292고지가 보이시나요? 개성의 북쪽에 산악지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고지가 되겠습니다. 지금 이 지역은 북한에 속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 38선이 바로 292 정상 부근을 관통하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가 북한 땅인지 남한 땅인지 애매한 경계지역 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38선을 그은 미군 조차도 이게 남한 땅인지 북한 땅인지 굉장히 헷갈렸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이곳은 군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요충지였던 것입니다. 이곳은 바로 감제고지였던 것입니다. 감제고지, 여러분, 감제고지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모르겠죠? 감자는 굽어볼 瞰자에요. 제자는 제어할 制자, 높은 데 올라가서 여러 지역을 볼 수 있는 지역이 바로 감제고지였던 곳이죠. (단상에 올라가서) 여기 지금 다 보입니다. 여러분들, 최원정 아나운서, 대본에 낙서하지 마시고요~ 모든 스튜디오 상황이 다 보이고 있는데요~ 특히 당시에는 이남지역에 있었던 개성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송악산 292고지였기 때문에 이곳은 남한 한국군과 북한군이 경계를 소홀하지 않는 아주 민감한 지역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5월 3일, 북한군이 먼저 292고지에 참호와 포사격을 할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합니다. 이에 대응해서 남한군도 가만 있을 수 없겠죠. 그래서 50여명이 이 참호를 무너뜨릴려고 공격을 실시합니다. 그런데 불과 몇시간도 지나지 않아 북한군의 200여명 정도의 병력이 투입되면서 충돌이 커져갔습니다. 이렇게 남한군과 북한군이 병력을 계속 투입을 하면서 이 전투는 연대급 전투가 되었던 것이죠. 결국에 우리 군은 292고지에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북한군은 내친김에 UN고지 그리고 155고지, 비들기 고지까지 남한지역의 주요 고지들을 모두 점령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은 개성시내가 굉장히 위험해 지게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한국군도 절대로 지켜볼 수 만은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병력을 더 투입해서 이 탈환작전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높은 고지에 만들어진 진지에서 기관총을 쏴대는 북한군을 공격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은 것이었죠. 그런데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박찬근 하사를 비롯한 부대원 10명이 포탄을 직접 들고 이 참호로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7명이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이렇게 치열한 전투를 통해서 우리는 이 고지들을 다시 탈환할 수 있었던 것이죠. 당시 우리측의 증언에 따르면 이 나흘간 치러진 전투에서 북한군이 막 쏘아댄 포탄만 1500여발이었다고 하구요. 우리측의 사상자는 3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송악산 292고지 전투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돌아오겠습니다. I’ll be back-----------------
이시원: 정말 38선에서 전투가 치열했네요~
최원정: 포탄을 들고 적진 참호에 뛰어들었다는 얘기가 너무 충격적이에요. 전쟁은 진행이 되고 있었어요. 와~
박상영: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정병준: 제가 판넬을 준비했습니다. 이게 1949년 1월부터 10월까지 38선상에서 일어났던 충돌을 정리한 주한미군사 고문단의 자료입니다. 여기 보면 적이 출현한 회수(times of enemy appearance)가 563회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교전에 참가한 적의 병력수 (enemy total no. of engaged) 70,625명, 그리고 아군 (friendly strength mobilized) 46,073명 입니다. 여기 보면 38선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서 38선 중요 충돌지역은 옹진지구, 그 다음에 청단, 연안-백천, 그 다음에 개성, 고랑포, 포천, 동두천, 춘천, 원대리, 주문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시원: 여기 보니까 양측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정리를 한 것 같애요.
정병준: 1949년 1월~10월 38선 충돌인명피해
북한군-4,214명 사망
한국군-320명 사망
남측민간인-190명 사상
그러니까 1949년 한 해 내내 38선 상에서 전투와 전쟁이 끊기지 않았습니다. 통계를 보면 매일 1.5건의 충돌에 3.7명이 죽는 상황이었습니다. 38선상에서 험악한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시원: 근데 도표를 보면 적대국 쪽은 4214명, 그리고 아군쪽은 320명 이렇게 차이가 있는데 그 당시에 서로 우세하고 안우세한 차이가 있었나요?
정병준: 적이 얼마 정도 죽었는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군사적으로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원정: 이게 미군 자료죠?
정병준: 한편으로 이 충돌이 벌어진 49년 5월 상황에서
한국군 육군 71,000명(출처: 국방부)
북한 육군 46,000명 (출처: 美외교문서)
그러니까 병력면에서도 한국군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지윤: 49년 후반기부터 김일성이 다시 한번 스탈린 한테 한국에서 전쟁을 하겠다(1949.8) 허락을 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때는 좀더 구체적인 전쟁 시나리오 까지 들고가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우리가 승리하겠다 라고 이야기를 하죠.
---------------------이광용: 한국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김일성의 시나리오는 바로 이것입니다. 1949.9.3. 김일성은 자신의 비서를 통해 소련측에 이 시나리오를 전달합니다. 어디서 전쟁을 시작할 것인가도 이 안에 정확하게 나와 있는데요. 바로 옹진반도에서 남한을 점령하는 전쟁을 시작한다는 겁니다. ~~오잉! 돌아온 박금수 박사님!----------------------------
박금수: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습니다.
이광용: 옹진반도는 대체 어디인가요?
박금수: 옹진반도는 한반도의 서부 중에서도 딱 중간에 있습니다. 옹진반도는 3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옹진반도 라고 부르죠. 현재로서는 북한 땅에 속해 있지만 당시로서는 한반도 중앙 38선을 관통했죠. 그래서 남과 북이 각각 관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광용: 지금 지형적으로 봤을 때도 위쪽으로는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고 아래로는 바다로 연결되어 있고 한반도와 거의 유사한 지형이군요.
박금수: 반도니까요.
이광용: 그러게요.
박금수: 옹진반도의 남한구역은 육지와 차단되어 있어요. 38선에 의해서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나더라도 병력지원을 받기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죠. 김일성이 이걸 노렸던 것이죠. 그래서 옹진반도를 점령한 뒤에 동쪽으로 진군해서 개성 그리고 계속 진군해서 서울까지 차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광용: 옹진반도가 지리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서에 보면 충격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보이시죠? 러시아어 모르세요? 교양인들의 필수언어 러시아어~ 김일성은 이 옹진반도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2주안에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 조금 지체되더라도 두달이면 싹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박금수: 아니 대한민국 국군을 물로 본 거 아닙니까?
이광용: 이게 무슨 자신감이란 말입니까?
최원정: 이광용 아나운서, 스탈린이 분명히 남한이 먼저 공격해야 전쟁을 허락해 준다고 했잖아요?
이광용: 저분이 저 자리에 그냥 앉아 있는게 아니에요. 아주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그런데 1949년 9월 15일 주북한 소련대사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김일성의 전쟁계획을 보고하며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인 즉슨,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읽어보세요~ 넘어가겠습니다. 남한측이 38선 주변을 침범하면 이것은 남한이 북한을 침략한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는 남한을 공격하면 된다. 박사님! 이걸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박금수: 슈티코프---슈티코프---- 이 양반(?)~
이광용: 친한 분이에요?
박금수: 친하지는 않는데~ 하~하~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질이 안좋아요 (테렌티 슈티코프(1907~1964)-1949년 당시 북한주재 소련대사, 군출신 외교관). 이 사람이 저런 수법을 다른 데서도 써먹었거든요. 사실은 이 사람이 군출신 외교관입니다. 이 사람이 1939년에 소련과 핀란드가 치렀던 전쟁에서 지휘를 한 경험이 있는데요. 그때에도 핀란드가 마치 먼저 공격한 것처럼 조작을 해가지고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 당시에도 마치 그때처럼 남한이 먼저 공격을 한 것처럼 명분을 조작하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라고 생각한 거죠.
이광용: 그러니까 북한이 전쟁의 시나리오를 만들자 소련의 주북한 대사인 슈티코프는 명분을 조작하는~ 아~ 아~ 이게 뭔가 착착 들어맞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얘긴데요~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은 과연 이 전쟁을 허락하게 될까요. 한반도에 전운이 임박산 가운데 지금까지 저는 아나운서 이광용입니다. 박금수였습니다.
최원정: 슈티코프의 계략이다, 그럴까요?
이시원: 핀란드와 싸웠던 그 전법을 가지고 한국에서 그대로 써먹었다는 거잖아요.
박상영: 소위 사기치는 노하우를 그대로 들고 온 거네요.
최원정: 김일성이 전쟁계획을 아주 구체적으로 세웠어요. 전쟁에 대한 의지가 대단했다고 봐야될 것 같애요.
정병준: 사실은 49년 3월에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선제공격은 안되지만 반공격하는 전쟁은 된다 그리고 49년 9월에 김일성이 옹진반도를 부분 점령하겠다 그러면 국경선을 단축할 수 있고 나아가서 한국군의 대응을 보고서는 더 밀고 내려갈 수도 있겠다 국지전을 전면전으로 하겠다. 그런 제안을 했구요. 금방 얘기한 슈티코프란 사람은 핀란드 전쟁에서 사용했던 그런 공격을 안하면 공격했다고 위장하면 되지 라고 하는 계책을 덧부쳐서 결국은 한국전쟁의 기본적인 전쟁의 기획이 사실 완성이 됩니다. 그리고 1949년 9월 이래 전쟁이 벌어진 1950년 6월까지 사실은 남한에 대한 총공격계획, 소위 남침계획이라고 불리는 것이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는 그런 과정이 전개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시원: 이 시나리오가 70년전의 시나리오잖아요. 들어보면 진짜 가능할 것 같고 전쟁이 곧 닥칠 것만 같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김일성의 열정과 슈티코프의 작전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데 이렇게 계속 접촉 했을 것 아녜요? 그런데 남한과 미국은 몰랐을까요?
정병준: 당시 미군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소련의 괴뢰다. 남한은 미국이 보증하고 있고 미국의 외교사절이나 군사사절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고 하는 것은 바꿔 얘기하면 소련이 미국을 공격한다 라는 얘기와 똑같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발생할 가능성은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지윤: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미국 생각에는 그래도 우리가 미국인데 그리고 물론 49년 8월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 전까지는 최고의 군사력과 함께 핵기술을 가지고 있던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예요. 그런 면에서 악간은 자신만만 했었다.
정병준: 사실 역설적인 면모가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도 북한에 대해서 우리가 선제공격을 하겠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잖아요.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 북진 통일하겠다 라는 그 계획을 장관과 대통령이 얘기했습니다. 북진통일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요. 그 일을 위해서 미군에게 20만명을 무장할 수 있는 무기를 달라 또 한국군에게 비행기, 전투기와 탱크를 달라, 중포를 달라는 이런 요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해 달라고 요구를 했지만 미국은 49년 6월에 철군하고, 한반도 남한 땅에는 500명의 주한미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철군했습니다.
다니엘: 그래도 미군들이 총, 탱크, 전투기 이런 것들을 주고 갔었나요?
이시원: 군사는 뺏으니까 무기라도 주고 가야죠.
정병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한국군이 당시에는 거의 10만명에 가까웠는데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한국군에게는 6만 5천명이 무장할 수 있는 경무기만을 제공한다. 왜? 외부의 침략이 없으니까~ 한국군의 목적은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는 방위군이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탱크나 중무기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답변은 뭐 였느냐 한반도가 한 마디로 산악지대이고 장마철에 습지로 변하기 때문에 탱크기동에는 적합한 지형이 아니다,
박상영: 아까 경무기가 6만개 정도 지급이 된다고 했는데 3만명은 아예 아무 무기조차 없는 상황이었고 일제가 버리고 간 그런 무기까지 수리해서 쓸 정도였다구 하고 3만명이 말이 좋아 3만명이지 진짜 군의 3분의 2정도가 말 그대로 아무런 무기없이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총알받이로 죽어라 이런거나 다름없는 거잖아요.
이시원: 북한에서 공격해 오면 무기도 없으면 어떻게 방어를 하겠어요?
김지윤: 미국 입장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너무 공세적이니까 북한을 치고 올라가면 어떻게 하나그런 생각을 했었던 거죠. 무기까지 손에 쥐어주면 이건 안되겠다 라는 생각도 했었고 철저하게 제한을 했죠. 군사수를 10만명이하로 해라. 그리고 공군창설을 반대하고 그런 식으로 굉장히 못믿었던 같애요. 그리고 소련도 마찬가지지만 미국도 전쟁이 확장되는 걸 정말 싫었거든요. 여기서 발발이 돼서 확전이 되서 소련과 미국이 뛰어들어서 3차 대전이 되면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이 되게 많았어요.
박상영: 지금 저는 이해가 안되고 화가 나는 게 어차피 미국에서 이념 갈등이 증폭돼서 38선을 반으로 갈라버리고 이래서 미국의 책임이 사실은 분단의 책임이 큰 거잖아요. 발을 빼버리고 이런 것에 대해서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드는 데요.
이시원: 그래도 군사는 철수는 했어요. 군사고문단 500명은 남겨두었잖아요. 이 말은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이 참전하는 가능성이 있다 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는데~
최원정: 겨우 500명인데~
정병준: 군사고문단 규모로는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였어요. 그리스(428명)와 한국에는 군사고문단이 많은 숫자였어요.
이시원: 그렇다면 스탈린도 이렇게 미국의 참전 가능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오케이는 못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행동을 했나요?
최원정: 스탈린의 마음을 뒤흔든 아주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1949년 한반도 38선에서 남북이 치열한 대립을 벌이는 동안 궁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 간에 내전이 3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49년 4월 24일 공산당이 국민당 정권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했다. 같은해 8월 5일 국민당을 지원하던 미국마저 중국개입을 포기하며 승리는 공산당에게로 기운다. 한반도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최원정: 우리가 이제 38선을 두고 긴장이 있는 사이에 중국은 내전으로 아주 치열했어요. 교수님, 한국전을 해야되겠다 라고 결심하는데 중국 내전이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정병준: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는 미군이 양성한 것입니다. 육군참모총장이 미군이었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국공내전에서 중공군이 양쯔강을 건너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하는 관측이 많았습니다. 49년 4월이었는데 미국이 개입을 안했죠. 미국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장개석 정부는 부패했고 장성들도 마찬가지였고, 병사들은 충성심이 없었습니다. 다 중공군에게 부대단위로 투항을 했고요. 국민들에게 별로 신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미국이 여기에 개입하기 위한 적절한 명분이나 자본이 없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스탈린은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처럼 중요한 전략적인 이일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면 한국과 같은 이런 조그마한 지형(이익)에 개입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또 개입하더라도 군사적으로 빨리 끝낼 수 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김지윤: 여기서 그 말 많고 탈 많은 애치슨 라인이 등장해요. 알류산 열도-일본 본토-오키나와-필리핀 까지를 포함해서 당시 국무장관인 애치슨이 1950년 1월 12일 프레스 클럽에서 저걸 얘기해요 (애치슨 라인-1950년 1월 12일 당시 美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극동방위선), 연설을 하면서 여기가 극동 방위선이다. 동북아시아에 있는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저길 지킬 것이다 라고 했는데, 딱 보면 빠진 데가 있잖아요. 한반도~대만도 빠졌고~ 저걸 보니까 한반도와 대만은 미국이 신경 쓰지 않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이시원: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참 중요한데 왜 한반도가 빠졌을까요?
김지윤: 저기에 사실 제1방어선으로 보면 돼요. 저기서 빠진다고 해서 미국이 개입안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제1방어선은 무조건적으로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고 한반도와 대만 같은 경우는 사실 미국이 혼자서 개입을 한다기 보다 유엔군과 함께 유엔 산하에서 전 세계와 함께 동참을 해서 지켜줄 수 있다는 얘기를 그 다음에 애치슨이 해요. 한반도와 대만을 버릴 생각은 없었고 유엔도 있고 무엇보다 주일 미군이 있지 않느냐.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의 공군력이 급상승을 하게 됩니다. 공군이 가서 먼저 때려 버리면 그걸로 먼저 우리가 제압을 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미국이 한 거죠.
이시원: 미국이 공군력이 커지면서 굉장히 자신감이 생겨서 어떻게 보면 한반도를 대만보다 우선 우선순위에서 낮게 둔 그런 타이밍이었네요.
김지윤: 어떻게 보면 아쉽기는해요. 꼭 저렇게 까지 해야 했을까 약간 모자라지 않았나 생각해요.
다니엘: 선언만 안했으면 어쩌면 스탈린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최원정: 저 선을 조금만 위로 올려서 한반도와 대만을 포함해 그렸으면~
김지윤: 그것 때문에 스탈린이 남한을 침공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하는 건 너무 과장되지 않았나 이미 김일성은 그전부터 전쟁을 하겠다고 계속 졸랐고~
이시원: 여러가지가 중첩이 되었던 것 같애요. 김일성 같은 경우는 전쟁을 하고 싶다고 계속 강한 의지를 표명했고 게다가 중국이 어쩌다보니 공산화됐고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됐고 이런 모든 정황을 봤을 때에 스탈린으로서는 이제는 전쟁해도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거든요.
정병준: 스탈린이 사실 이 시기에 운이 좋았습니다. 50년에 70회 생일이었는데 마오쩌둥(毛澤東)이 생일축하 사절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몇 개월 동안 지냈습니다 (1949년 12월~1950년 2월), 아마 중국 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었을 거라고봐요.
박상영: 몇 개월씩이나 체류했던 거예요?
이시원: 기분이 너무 좋으셨구나.
정병준: 목적은 뭐였느냐면 세계공산주의 운동의 총수령 스탈린 형님, 제가 아시아의 거의 대부분을 공산화시켰어요. 사실은 스탈린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 별로 생각이 없었다 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을 스탈린이 마가린 공산당이라고 불렀습니다. Magarine communist 라고~
최원정: 버터 같은 거~?
정병준: 마가린은 버터 대용품이지요. 그러니까 진짜가 아니라 짝퉁~
이시원: 아~ 가짜 짝퉁이라는 뜻인가요?
정병준: 사실은 그렇게 중국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시아에도 공산주의가 퍼지네, 그러면 마가린 공산주의자를 위해 마오쩌둥, 니가 아시아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를 해야되겠지~ 그리고 김일성에게 올라와~ 그러면 전쟁을 허가하겠어 하는 시퀀스가 맞아 떨어진 거죠.
이시원: 우리나라의 역사는 비참하게 흘러가버렸네요.
정병준: 이때쯤 스탈린과 김일성이 다시 등장합니다. 마오쩌둥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애치슨 선언이 발표되고 한 달도 채 안되어서 김일성이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스탈린의 초청편지가 도착합니다. 초청편지에는 내가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1950.1.30). 뭐, 다 아시는 것처럼 김일성의 소원은 전쟁이죠. 개전을 허락하겠다.
박상영: 그것에 들떠 가지고 간 거잖아요?
다니엘: 스탈린은 동생한테 내가 너한테 한번 업무를 맡겨 볼 테니까 한번 잘해봐 이런 식의 느낌이네요.
정병준: 50년 3월 30일에 김일성과 스탈린이 만나서 비밀리에 회담을 했습니다. 스탈린이 전쟁을 허락합니다. 전쟁을 주도한 것은 김일성이었지만 전쟁 결정자는 공산세계의 수령인 스탈린이었습니다. 스탈린이 북한전쟁 오케이 좋아해 대신 조건이 있어, 군사적으로 만약에 미국이 개입하거나 군사적으로 어려워지게 되면 나는 너를 못도와줘. 그러면 어떻게 해요? 너는 마오쩌둥 한테 가서 군사적인 지원을 얻어야 된다 그러니까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부대조건은 뭐냐 마오쩌둥 한테 가서 어려울 때 도와주겠다 라고 하는 확약을 받아와! 그래야지 전쟁을 시작할 수 있어! 라고 하는게 스탈린의 교시였습니다.
이시원: 진짜 약삭 빠르네요. 자기 책임지기 싫어서 싹 숨고 남한테 떠넘기는 거잖아요.
정병준: 결국은 공산세계의 수령이라고 하는 스탈린의 권위와 결정권이라고 하는 게 어느 정도였느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상영: 절대군주라고 볼 수 있겠네요.
다니엘: 결국 소련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지는 않지만 뒤에서 계속 조종하고 있었던 것 같애요.
김지윤: 중국은 미국이 개입을 하게되면 자기네들도 군사를 보내서 개입을 하겠다 하고 또 김일성이 가면서 오가면서 얘기를 전한 거예요. 중국개입한대요. 소련이 동의했어요. 뭐 이런 식으로 그래서 다 동의를 받고 중국이 군대를 보내주기로 하죠. 1949년 7월 정예병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용군 2만명 정도를 보내주고, 1950년 1월에 1만 6천명을 보내준다. 소련은 무기를 보내줘요 (1억 3천만 루블 규모의 무기지원). 자기들 손에 피를 묻히기 싫으니까 무기를 지원해 주는 거죠. 상당히 많은 무기를 줘서 1950년 6월에 보면 장갑차 같은 경우는 한국군이 갖고 있던 것의 두배 정도 가지게 되고, 그래서 군사 숫자도 북한은 20만이 넘게 돼요. 당시에는 한국이 10만 4천명 정도 되었는데 두배가 된 거죠. 전력으로 봤을 때 완벽하게 우위를 차지하게되는 상황이 됐죠.
이시원: 처음에 38선 나눌 때만 하더라도 남한이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는데 이렇게 소련의 지원을 통해서 갑자기 북한군의 세력이 엄청 세어져버렸네요.
정병준: 이 전쟁이라고 하는게 표면적으로는 남북한의 전쟁 혹은 북한의 공격에 의한 전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스탈린의 개전허가, 스탈린이 제공한 군사적인 무기, 또 중국인민해방군 출신의 병력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전쟁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최원정: 진짜 중요한 것은 이 사람(김일성)이 제안을 안했다면 전쟁은 발발되지 않았을 것 아네요. 근데 전쟁 제안을 했고, 이 분이 허락을 해주었고 (스탈린), 이분이 지원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마오쩌둥),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일동: 다 책임이 있어요.
최원정: 김일성이 노력을 많이 했네요. 여기 가서(스탈린) 부탁하고, 저기 가서 (마오쩌둥) 부탁하고~
박상영: 촉새처럼 달려가서 된답니다~ 된답니다~했으니까
이시원: 한 마디로 김일성 이라는 정말 싸우고 싶어하는 투견이 있는데 그걸 스탈린이 풀어놓고 먹이를 주고 훈련을 시킨 거예요 그리고 마오쩌둥이란 보험까지 들어놓고요.
정병준: 네, (이시원의 당돌한 해석에 당황한 역사학자), 저는 수업시간에 다르게 설명하는데요. 사실은 유치원생들의 싸움 같은 것이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박상영: 유치원생들의 싸움?
정병준: 네, 네, 북한의 군사적인 준비나 태세는 유치원생들이 놀이터에서 싸움박질하면서 너 가만두지 않을꺼야. 죽여버리겠어 뭐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애들끼리 싸워봤자 기껏해 봐야 할키거나 꼬집고 코피 정도 나면 끝나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그런 애들 싸움에 실제로 방아쇠 총을 쥐어줘서 쏘게하는 거죠.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이 벌어진 거죠.
최원정: 그러네요. 38선에서 어린애들이 땅 따먹기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어른들이 개입을 한 거네요.
다니엘: 끔찍하다.
정병준: 스탈린이 전쟁을 허락하게 되자 이제 필요한 것은 북한의 소련군사고문단을 교체하는 것이었습니다 (1950년 5월 20명 교체), 2차 대전에서 단련된 대령급 군사고문단 20명 정도 대거 파견됐습니다. 왜 파견됐느냐 이 사람들을 통해서 북한의 강력한 남침계획, 전쟁작전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날이 알고 싶다. 이광용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70년전인 1950년 5월초 전쟁이 임박한 가운데 소련과 북한군은 치밀하게 이 전쟁에 대한 계획을 세워나갑니다. 그리고 50년 6월 16일 보다 구체적인 세부계획이 완성되고 공격개시 날짜까지 정해집니다. 바로 6월 25일, 작전은 3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격의 1단계-옹진에서 국지전처럼 개시한 다음,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한다는 거였죠.
2단계는 수도 서울을 반드시 장악한다는 거였습니다. 소련과 북한군은 이 전쟁의 성패가 서울과수원 구간에서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선 서울을 3방면으로 공격해 한국군의 힘을 분산시키기로 합니다. 그리고 동부전선에서는 모터 사이클 연대가 수원까지 진격해서 협공을 하며 한국군의 90%는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지막 3단계에서 나머지 병력들을 모두 해치우고 주요 항구와 중심지를 점령해서 한반도의 전역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소련과 북한군이 전쟁 초기에 하루에 무려 15~20 킬로미터를 진격해서 단 한달만에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쟁 발발 나흘전인 1950년 6월 21일 남한이 북한의 전쟁계획을 눈치채고 38선 인근과 옹진부근에 병력을 추가했다는 첩보를 접합니다. 이에 북한은 옹진에서 개시하려던 공격을 38선 전역에서 동시에 밀고 내려 가는 것으로 바꿉니다. 6월 21일 전면전으로 긴급수정된 전쟁 시나리오, 한반도 전쟁까지는 이제 단 나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최원정: 나흘밖에 안남았다니까~
이시원: 전쟁 전문가가 투입되고나서 전쟁 직전까지도 계속 시나리오가 치밀해지고 구체적으로 되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아까 남쪽에서 첩보를 통해서 전쟁 발발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어느 정도 남한에서도 대비를 하고 막을 수도 있었던 건 아닌가요?
정병준: 지금 보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에 10만명 이상이 초기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의 남침배치가 있었고요. 또 소련으로부터 탱크나 자주포 무기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다 철도나 항구를 통해서 들어오게 되니까 게다가 북한군이 탱크나 중무기를 이동해야 되기 때문에 도로나 교량을 보수하게 됩니다. 특별하게 5월, 6월에 그런 일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또 전투를 해야되니까 38선 인근에 있는 주민들을 소개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알리는 징후는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군이나 주한미군사 고문단이나 미군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49년에 그 빈번했던 38선 충돌이 다시 재현되는 것일 뿐이다. 북한군의 남침배치나 기동은 여름, 하계군사훈련일 거이다 라고만 생각을 했습니다.
이시원: 너무 안일했다~
김지윤: 그런 식으로 배치가 되니까 전부 긴장상태잖아요. 군인들도 긴장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치는 거예요. 그리고 말씀처럼 하셨던 것처럼 항상 그런 일이 있어왔으니까 북한이 도발을 해왔으니까 라면서 사실은 6월 24일 00시 6월 23일 2400시가 되겠죠. 이때에 비상경계령을 해제해요. 심지어 25일 새벽 들어올 때쯤에는 육군클럽에서 장교들 댄스파티도 하고 해이하게 풀어져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비상경계령을 계속 지키고 있고 우리가 근무를 하고 있으면 뭐가 달라졌겠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없지만 그랬더라도 갑자기 저렇게 기습해서 내려오는데 막기는 역부족 아니었겠느냐 라는 얘기들을 하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됐다. 1129일간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전쟁, 공격개시 암호명은 폭풍(暴風)이었다.--------------
최원정: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시작됩니다. 김일성이 너무 전쟁을 쉽게 생각한 게 아닌가요? 한 달이면 끝낸다더니 사실 3년이나 갔고~
정병준: 김일성이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을 했구요. 예를 들어서 빨치산을 했다고 하지만 그거는 비정규적 소규모 부대였고, 이거는 수십만명이 동원되는 정규전입니다. 일종의 오케스트라와 같다고 얘기를 합니다. 이런건 그냥 빨치산 활동했다고 알 수 있는게 아닙니다. 장군은 전쟁에서 단련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북한에는 그런 장군도 없고 그런 능력도 없습니다. 소련이라는 강대국을 등에 업고 전쟁을 했기 때문에 많은 희생이 나고 피가 낭자하게 되고 그렇게 되는 거죠. 소련, 중국도 사실은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미군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즉각적으로 공군과 해군을 파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김일성, 마오쩌둥, 스탈린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충격이었고요. 사실은 그것이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까지 후퇴하고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너무 쉽게 전쟁을 생각했다고 판단합니다.
최원정: 오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국제정세와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많은 상황들을 살펴 보았는데~
다니엘: 오늘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황을 쭉 살펴보면 약간 악의 퍼즐인거 같애요. 전에 김일성이 처음으로 전쟁을 하겠다고 했을 때 스탈린은 거부했지만 결국에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맞아 떨어져서 거기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진짜 악마의 퍼즐이 된 것 같애요.
이시원: 퍼즐이 딱~딱~딱~ 맞아진 거 같애요.
정병준: 제가 전쟁 연구하면서 깜짝 놀란게 무엇이냐 하면 문화인 108인 선언이란게 있습니다. (문화인 108인 선언(1948.4.14)-남한을 대표하는 문화인 108인이 단독정부 수립반대,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선언문 발표), 이분들이 48년에 뭐라고 얘기하냐하면 앞으로 분단정부가 수립되면 전쟁이 반드시 일어난다. 그런데 이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內戰같은 外戰이고, 내전쪽으로 보이더라도 國際戰이고, 국제전이지만 그것이 내전적 요소를 갖는다 라고 이미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6월 25일에 불현듯 갑자기 일어났다기 보다는 사실은 미소가 만들어 놓은 38선이라고 하는 분단의 궤도를 타고 차근 차근 만들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한국인들에게 남북통일의 기회가 얼마나 있었느냐 이건 우리가 역사를 보고 다시 되짚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김지윤: 38선이 그어지는 과정부터 시작을 해서 가장 안타까운 거는 이 땅의 주인인 우리 국민들이 뭘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어느날 갑자기 38선이 그어지고 어느날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고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게 굉장히 가슴 아픈 일이죠.
최원정: 앞으로 한국전쟁은 어떻게 진행이 될지 역사저널 한국전쟁특집 다음 시간에 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제263회 “6.25, 한국전쟁 개전 시나리오 김일성, 스탈린을 만나다”에서 정리).
①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측이 한반도에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여길 소련과 분할 해야겠는데 어떤 분계선을 만들자 38선 정도가 괜찮지 않을까 라고 제안을 하고 주도적으로 그걸 이끈 사람이 당시 미육군 작전국장 존 에드윈 헐 (John Edwin Hull)이었다. 당시 45년에 그어졌던 38선이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38선상에서 분쟁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는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지역이었다. 누가 전쟁을 먼저 일으켰느냐 누가 먼저 교전을 했느냐 이런 걸 사실 알기 어려웠다.
② 왜 38선을 그었냐. 서울은 가져가겠다 한반도에 보니까 중요한 항구가 세개가 있다. 북한에 원산이 있고 남한에 인천과 부산이 있고 이 두 항구를 우리가 가져가야겠다. 남한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미군이 남한을 지키고 있으면 일본을 사수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하는 전략적인 판단이 있었다. 안타까운 건 한국이 개입할 겨를이 없이 그냥 두 강대국에 의해서 분할이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38선으로 나라가 두 동강이 나면서 우리는 이유도 알지도 못하면서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한 다. 그 깊은 국제지정학적인 얘기도 모른 채 갑자기 서로의 증오만 키워나갔다.
③ 강대국들이 5천년의 역사가 있고 3천만이 살고 있다는 이 땅의 문명에 대해서 아무런 배려를 하지 않고 38선을 그었고 그 다음에 물리적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38선예 경기도 연백군 화성면 화장리 (現황해남도 배천군 화산리) 라는 마을에 132가구가 살고 있다. 화장리가 처음에는 북한 땅인 줄 알았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까 자기네가 38 이남인 거야. 주민투표를 했다. 92가구는 남한에 속하기로 했고, 40가구는 북한에 속하기로 했다. 일년 뒤 소련군이 나타나서 38선 표시를 2킬로미터 옮겼다. 너희는 모두 38 이북이다.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미군정 리치 장관한테 이남 소속으로 해달라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런 현실에서 비극적인 불행이 많이 일어났다고. 지금은 GPS가 있으니까 대충 알 수 있지만 당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까 38선을 군사적으로 넘어가는 일들이 흔해지는데 이게 도발이 되는 거다.
④ 지금으로부터 71년전 38선에서는 전투가 벌어졌다. 1949년 5월 4일부터 나흘간 송악산 292고지에서 한국군과 북한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는 38선에서 여러 대대가 충돌한 남북한 간의 최초의 연대급 전투였다. 송악산 292고지는 개성 북쪽 산악지대에 그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고지다. 지금 이 지역은 북한에 속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38선 바로 292 정상 부근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가 북한 땅인지 남한 땅인지 애매한 경계지역 이었다. 심지어는 38선을 그은 미군 조차도 이게 남한 땅인지 북한 땅인지 굉장히 헷갈렸다. 그런데 이곳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바로 감제고지였다. 높은 데 올라가서 여러 지역을 볼 수 있는 지역이 바로 감제고지였다. 특히 당시에는 이남지역에 개성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송악산 292고지였다. 이곳은 한국군과 북한군이 경계를 소홀하지 않는 민감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5월 3일, 북한군이 먼저 292고지에 참호와 포사격을 할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한다. 이에 대응해서 남한군도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50여명이 이 참호를 무너뜨릴려고 공격을 실시했다. 그런데 불과 몇시간도 지나지 않아 북한군이 2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하면서 충돌이 커졌다. 이렇게 남한군과 북한군이 병력을 계속 투입을 하면서 이 전투는 연대급 전투가 되었다. 결국 우리 군은 292고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북한군은 내친김에 UN고지 그리고 155고지, 비들기 고지까지 남한지역의 주요 고지들을 모두 점령한다. 이러면 개성시내가 굉장히 위험해 진다. 한국군도 절대로 지켜볼 수 만은 없는 상황,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병력을 더 투입해서 탈환작전을 실시한다. 그런데 이 높은 고지에 만들어진 진지에서 북한군의 기관총을 공격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박찬근 하사외 부대원 10명이 포탄을 직접 들고 이 참호로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7명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렇게 치열한 전투를 통해서 우리는 이 고지들을 다시 탈환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측의 증언에 따르면 이 나흘간 치러진 전투에서 북한군이 막 쏘아댄 포탄만 1500여발이었다고, 우리측의 사상자는 30명이 넘었다고, 송악산 292고지 전투는 정말 38선에서 치열한 전투였다,
⑤ 38선에서 전투가 치열했다. 포탄을 들고 적진 참호에 뛰어들었다. 전쟁은 아주 격렬하게 진행이 되었다. 1949년 1월부터 10월까지 38선상에서 일어났던 충돌을 정리한 주한미군사 고문단의 자료, 적이 출현한 회수(times of enemy appearance)가 563회, 교전에 참가한 적의 병력수 (enemy total no. of engaged)가 70,625명, 그리고 아군 (friendly strength mobilized)은 46,073명이다. 38선 중요 충돌지역은 서에서 동으로 옹진지구, 청단, 연안-백천, 개성, 고랑포, 포천, 동두천, 춘천, 원대리, 주문진이다. 1949년 1월~10월 38선 충돌인명피해, 북한군-4,214명 사망, 한국군-320명 사망, 남측민간인-190명 사상, 1949년 한 해 내내 38선 상에서 전투와 전쟁이 끊기지 않았다. 통계를 내보면 매일 1.5건의 충돌이 있었고, 매일 3.7명이 죽었다. 38선상에서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⑥ 1949년 김일성은 신년사에서 올해는 국토완정(完整)의 해다라고 정했다. 완정이란 무력으로든 어떤 방법으로든 한반도를 통일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시스템을 수립하겠다 라는 의지였다. 1949.3.17. 김일성이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을 만나서 문화협정을 체결했지만, 그건 실질적으로 전쟁에 필요한 온갖 군사장비와 자금지원(4천만 달러)을 요청한 것이다. 49년 3월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선제공격은 안되지만 반공격하는 전쟁은 된다. 49년 9월에 김일성이 옹진반도를 부분 점령하겠다 그러면 국경선을 단축할 수 있고 나아가서 한국군의 대응을 보고서는 더 밀고 내려갈 수도 있겠다 국지전을 전면전으로 하겠다. 슈티코프는 핀란드 전쟁에서 사용했던 그런 공격으로 위장하면 된다 라는 계책을 덧부쳐서 한국전쟁의 기본적인 기획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1949년 9월 이래 전쟁이 벌어진 1950년 6월까지 사실은 남한에 대한 총공격계획, 소위 남침계획이라고 불리는 것이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당시 미군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은 소련의 괴뢰다. 남한은 미국이 보증하고 있고 미국의 외교사절이나 군사사절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고 하는 것은 소련이 미국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발생할 가능성은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다.
⑦ 옹진반도는 한반도의 서부 중에서도 딱 중간에 있다. 현재는 북한 땅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한반도 중앙 38선을 관통했다. 그래서 남과 북이 각각 관할하고 있었다. 지형적으로 봤을 때도 위쪽으로는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고 아래로는 바다로 연결되어 있어 한반도와 거의 유사한 지형이다. 옹진반도의 남한구역은 육지와 차단되어 있다. 38선에 의해서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나더라도 병력지원을 받기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일성은 이걸 노렸다. 그래서 옹진반도를 점령한 뒤에 동쪽으로 진군해서 개성 그리고 계속 진군해서 서울까지 차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김일성은 이 옹진반도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2주안에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 조금 지체되더라도 두달이면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런데 1949년 9월 15일 주북한 소련대사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김일성의 전쟁계획을 보고하였다. 남한이 38선 주변을 침범하면 북한을 침략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⑧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은 49년 8월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지만 그렇지만 미국은 그 전까지는 세계 최고의 군사력과 함께 핵기술을 가지고 있던 세계 유일의 국가다. 같은 시기에 이승만 도 북한에 대해서 우리가 선제공격을 하겠다는 얘기를 해요.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북진통일 하겠다. 그 일을 위해서 미군에게 20만명을 무장할 수 있는 무기를 달라 또 한국군에게 비행기, 전투기와 탱크, 중포를 요구했다. 또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해 달라고 요구를 했지만 미국은 49년 6월에 철군하고, 한반도 남한 땅에는 500명의 주한미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철군했다. 한국군이 당시에는 10만명이었는데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한국군에게는 6만 5천명이 무장할 수 있는 경무기만을 제공한다. 한국군의 목적은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는 방위군이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했다. 이승만이 탱크나 중무기를 요청했습니다만 한반도는 산악지대이고 장마철에 습지로 변하기 때문에 탱크기동에는 적합한 지형이 아니다라고,
⑨ 미국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너무 공세적이니까 북진을 하면 어떻게 하나. 무기까지 주면 안되겠다. 철저하게 제한을 했다. 군사수도 10만명이하로 해라. 공군창설을 반대하고 그런 식으로 굉장히 못믿었다. 소련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확장되는 걸 정말 싫어했다. 여기서 전쟁발발이 되서 확전이 되어 소련과 미국이 뛰어들어서 3차 대전이 되면 하는 걱정이 되게 많았다. 미군은 철수했어도 군사고문단 500명은 남겨두었다. 이는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이 참전하는 가능성이 있다. 군사고문단 500명은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였다. 그런데 스탈린의 마음을 뒤흔든 아주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1949년 한반도 38선에서 남북이 치열한 대립을 벌이는 동안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 간에 내전이 3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49년 4월 24일 공산당이 국민당 정권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했다. 같은해 8월 5일 국민당을 지원하던 미국마저 중국개입을 포기하자 승리는 공산당에게로 기울었다. 한반도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⑩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는 미군이 양성한 것이고, 육군참모총장이 미군이었다. 국공내전에서 중공군이 양쯔강을 건너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하는 관측이 많았다. 49년 4월이었는데 미국이 개입을 안했다. 미국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어렵지 않다. 장개석 정부는 부패했고 장성들도 마찬가지였고, 병사들은 충성심이 없었다. 다 중공군에게 부대단위로 투항을 했다. 국민들에게 별로 신망이 없었다. 그러니 미국이 여기에 개입하기 위한 적절한 명분이나 자본이 없었다고, 그러면 한국과 같은 이런 조그마한 지형(이익)에 미국이 개입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개입하더라도 군사적으로 빨리 끝낼 수 이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되었다.
⑪ 1950.1.12. 美국무장관 애치슨이 프레스 클럽에서 애치슨 라인 발표한다. 극동 방위선이다. 동북아시아에 있는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저길 지킬 것이다. 한반도와 대만이 빠졌다. 미국이 한반도와 대만은 신경 쓰지 않는 것인가. 저게 제1방어선이고 제1방어선은 무조건적으로 지킨다. 한반도와 대만은 미국 혼자서 보다 유엔군과 함께 전 세계와 함께 지켜줄 수 있다는 얘기를 애치슨이 그 다음에 했다. 주일미군이 있고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의 공군력이 급상승하였다. 공군이 가서 먼저 때리면 그걸로 먼저 우리가 제압을 할 수 있다라고 미국은 생각을 했다.
⑫ 병력면에서도 한국군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49년 후반기부터 김일성이 다시 한번 스탈린 한테 한국에서 전쟁을 하겠다(1949.8) 허락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때는 좀더 구체적인 전쟁 시나리오를 우리가 이렇게 승리하겠다. 1949.9.3. 김일성은 자신의 비서를 통해 소련측에 이 시나리오를 전달한다. 옹진반도에서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계속 강한 의지를 표명했고, 중국이 공산화됐고,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됐고 이런 모든 정황은 스탈린으로서 이제는 전쟁해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이 시기에 운이 좋았다. 50년에 70회 생일이었는데 마오쩌둥(毛澤東)이 생일축하 사절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몇 개월 동안 체류한다 (1949년 12월~1950년 2월), 체류목적은 제가 아시아의 거의 대부분을 공산화시켰어요. 아시아에서도 공산주의가 퍼지네, 마오쩌둥, 당신이 아시아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를 해봐, 그리고 김일성에게 올라와, 그러면 전쟁을 허가하겠어. 스탈린은 김일성을 초청한다. 내가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1950.1.30). 김일성의 소원은 전쟁이다. 개전을 허락하겠다. 스탈린이 북한전쟁을 오케이 하는 조건이 있다, 만약에 미국이 개입하거나 군사적으로 어려워지게 되면 너는 마오쩌둥 한테 군사지원을 얻어야 된다. 마오쩌둥의 확약을 받아와! 이게 스탈린의 교시였다.
⑬ 중국은 1949년 7월 조선의용군 2만명과, 1950년 1월에 1만 6천명을 보내준다. 소련은 1억 3천만 루블 규모의 무기지원. 상당히 많은 무기를 줘서 1950년 6월에 보면 장갑차는 한국군의 두배 정도 가지게 되고, 군사수도 당시에는 한국이 10만 4천명 정도인데 북한은 20만이 넘어 두배가 된다. 전력으로 봤을 때 완벽하게 우위를 차지하게되는 상황, 결국 6.25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제안을 했고 소련과 중국을 찾아다녔고, 그걸 소련이 허락을 했고, 중국이 지원을 해서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스탈린이 전쟁을 허락하자 소련은 2차 대전에서 단련된 대령급 군사고문단 20명 정도를 대거 파견했다. 그들로 북한의 강력한 남침계획, 전쟁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50년 6월 16일 구체적인 세부계획이 완성되고 공격개시 날짜까지 정해졌다. 바로 6월 25일, 작전은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공격의 1단계-옹진에서 국지전처럼 개시한 다음,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한다. 2단계는 수도 서울을 반드시 장악한다. 소련과 북한군은 이 전쟁의 성패가 서울과수원 구간에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우선 서울을 3방면으로 공격해 한국군의 힘을 분산시킨다. 그리고 동부전선에서는 모터 사이클 연대가 수원까지 진격해서 협공을 하며 한국군의 90%는 무너뜨린다. 마지막 3단계에서 나머지 병력들을 모두 해치우고 주요 항구와 중심지를 점령해서 한반도의 전역을 손아귀에 넣는다. 전쟁초기에 소련과 북한군이 하루에 무려 15~20 킬로미터를 진격해서 단 한 달만에 한반도 전역을 점령한다. 그런데, 전쟁 발발 나흘전인 1950년 6월 21일 남한이 북한의 전쟁계획을 눈치채고 38선 인근과 옹진부근에 병력을 추가 배치했다는 첩보에 북한은 옹진에서 개시하려던 공격을 38선 전역에서 동시에 밀고 내려 가는 것으로 바꾼다. 6월 21일 전면전으로 긴급수정된 전쟁 시나리오, 한반도 전쟁까지는 이제 단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⑭ 남한측에 총21개국이 참전을 했고 그중에 16개국이 파병을 했고 5개국이 의료지원이나 비전투원을 보냈는데 북한측엔 중공군이 있었다. 한국만 하더라도 유엔군이 3만7천명 이상이 사망을 했고 중공군은 진짜 많이 희생 당했다, 14만명 이상, 이게 규모면으로 봐서 어마어마했고, 냉전이 막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은 제3차 세계대전의 전편이다 라는 얘기까지 있었다. 소련이 참전을 했는데 참전하지 않은 구조인 게 공식적으로 참전을 했다고는 한다. 자기네들은 중공군에 편입이 돼서 거기서 조종사들만 한 300명 정도가 죽었다 라고 한다. 흔히 한국전쟁은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서 벌인 전쟁이라고 알고 있다.
⑮ 지금 보면 6.25 한국전쟁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 왜냐하면 전쟁초기에 10만명 이상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의 남침배치가 있었고, 소련으로부터 탱크나 자주포 무기들이 들어오게 되면, 철도나 항구를 통해서 이동해야 되기 때문에 도로나 교량을 보수하게 된다. 특별하게 5월~6월에 그런 일이 많이 벌어졌다. 또 전투를 해야되니까 38선 인근에 있는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전쟁을 알리는 징후는 많이 있었는데도, 한국군이나 주한미군사 고문단이나 미군은 49년에 빈번했던 38선 충돌로 추정했다. 북한군의 남침배치나 기동은 하계군사훈련일 것으로만 판단했다.
⑮-1 남한군은 옹진반도에서 장기간 비상대기 긴장상황에 있으니까 시간이 갈수록 지쳐갔다. 그리고 항상 북한이 도발을 해왔으니까 라면서 사실은 6월 24일 00시, 6월 23일 2400시에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심지어 25일 새벽 때쯤에는 장교들이 육군클럽에서 댄스파티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무차별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개시 암호명은 폭풍(暴風),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김일성이 한 달이면 끝낸다더니 3년이나 갔다. 김일성이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 했다. 김일성이 빨치산을 했다고 하지만 그거는 비정규적 소규모 부대였고, 이거는 수십만명이 동원되는 정규전이다. 장군은 전쟁에서 단련된다는데 북한에는 그런 장군도 없었고 그런 능력도 없었다. 소련이라는 강대국을 등에 업고 전쟁을 했기 때문에 많은 희생이 났고 피가 낭자하게 되었다. 소련, 중국도 미군은 참전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마자 즉각적으로 공군과 해군을 파견하였다. 이것은 김일성, 마오쩌둥, 스탈린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大충격이었다. 그것이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고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⑮-2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황을 살펴보면 악의 퍼즐이 있었다. 김일성이 처음 전쟁을 하겠다고 했을 때 스탈린은 거부했지만 결국 여러가지 요소들이 맞아 떨어져서 거기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악마의 퍼즐이 딱딱 맞아진 거였다. 1948.4.14 남한을 대표하는 문화인 108인이 단독정부수립반대,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선언을 했다. 이분들은 앞으로 분단정부가 수립되면 전쟁이 반드시 일어난다. 그런데 이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內戰같은 外戰이고, 내전쪽으로 보이더라도 國際戰이고, 국제전이지만 그것이 내전적 요소를 갖는다 라고 예견하였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6월 25일에 갑자기 불현듯 일어났다기 보다는 미소가 만들어 놓은 38선이라고 하는 분단의 궤도를 타고 전운이 접근해 가고 있었다.
⑮-3 올해 2020년 6.25 한국전쟁 종전이 된지 6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남한은 몇 번의 정권교체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눈부신 국가경제발전을 거듭하였고 북한은 67년간 김일성 가족 3대 세습통치로 사회주의 봉건주의 체제로 여전히 민중들은 춥고 배고프고 가난하다. 미국의 핵무기는 남한이 원하면 북한박멸에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 김정은이 핵전쟁 도발을 감행시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북한 핵시설과 평양은 초토화될 것이다. 남한정부와 미국은 한미군사동맹으로 북한의 핵무기가 남북협상에 방해물이 되고 무용지물이 되는 전략전술을 수립해 놓고 있다. 현재 남한의 국력(경제력)은 북한보다 30배로 절대 우위에 있고 남한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