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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승희야
▲ 벨베데레의 ‘아폴론’. 기원전 330년경 레오카레스가 만든 청동조각을 로마시대에 카피했다. |
미켈란젤로의 초상, 1535년경 |
신화와 마찬가지로 미술에서도 그리스와 로마를 항상 묶어서 다루는 이유가 있다. 그리스는 멸망한 이후 로마 치하에 있게 됐다. 그때 그리스에 와서 조각을 본 로마 사람들이 그리스풍에 반해서 그야말로 델로스섬 등 조각 공방의 일꾼들을 싹쓸이 해서 로마로 데려갔다. 그리곤 그 그리스풍과 똑같이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풍의 작품이 무더기로 만들어졌다. 어떤 경우는 카피본이 200점을 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런데 카피와 레플리카는 차이가 있다. 카피는 그리스 시대의 조각을 로마시대에 다른 사람이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다. 반면 레플리카는 어떤 공방의 조각가가 A란 조각을 만들었을 경우, 그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같은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는 경우에 그 작가 혹은 같은 공방의 사람이 같은 작품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거의 완벽한 복제가 가능한 조각이니까 가능한 얘기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는 위작의 명수였다. 1496년 21세의 미켈란젤로는 누군가의 제안과 자신의 허영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조각품 ‘잠자는 큐피드’를 유적에서 발굴한 것처럼 꾸미기로 마음먹었다. 하얀 대리석의 윤기를 퇴색시키기 위해 밭에 묻어두는 술수도 썼다. 미켈란젤로는 그 조각을 로마의 골동품상인 발다사레 디 밀라네세에게 보냈다. 발다사레는 이것을 포도밭에서 발굴된 고대조각이라면서 로마의 고위 성직자 리아리오 디 산 조르조 추기경에게 200투카토에 팔아넘겼다. 예술을 사랑하고 학식을 갖춘 추기경이 위조품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그런데 추기경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고대 작품의 보존 상태가 너무 완벽했고 부오나로티 가문 출신의 한 젊은이가 로마인들과 똑같은 조각상을 제작한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추기경은 위조품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대리인을 보내 그 젊은이에 대해 알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매료된 대리인은 피렌체에 온 목적을 솔직히 털어놓고 로마에 와서 마음껏 재능을 펼쳐볼 것을 권유한다. 이게 미켈란젤로의 로마 입성 계기다. 모작으로 천재적 가능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