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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크리스마스 / 빌 2:5-11
우리는 새천년 시대의 첫번째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다. 참 행복한 크리스마스이다. 저는 오늘 아침에 송명희 자매의 성탄 축시를 소개해 드리고 싶다. 그는 지체부자유자로 인생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매우 소박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준다.
<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소서>
주님은 하늘에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하늘 위로 올라갑니다.
더많이 가지려는 욕심과 더 우뚝 높아지려는 우월감,
그래서 이 세상은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한 아기의 나심을 볼 때 세상에 믿음 소망 사랑이 충만해 집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세상에 믿음을 주소서.
깊은 절망 속에서 다시 붙잡고 일어나는 소망을 주소서.
자신의 것을 줄 수 있는 영원한 사랑을 주소서.
0.1%의 가능성을 가진 사랍들과 가난한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소서.
임마누엘 한 아기가 오셨으니 마라나타 만왕의 왕 오소서.
우리는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좋겠다. 성탄절은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절기이다. 특히 우리 가슴이 예수님으로 충만하기를 바란다. 크리스마스의 핵심은 예수님이어야 한다. Christmas, 그리스도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보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신앙의 대인이다. 그는 이런 자기 고백적인 간증을 들려준다. 고전 2:16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누가 그분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평생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았기에 오늘 본문 5절에서 이렇세 호소한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1.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마음이다.
죄로 오염된 인간의 마음에는 두가지 대표적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이다(롬 1:28). 자기만을 주장하는 교만한 마음이다(사 14:12-14). 그래서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고상한 마음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신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자기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셨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절하) 여기 ‘취한다’는 헬라어는 ‘강탈한다, 움켜잡는다, 놓치지 않으려고 꽉 붙잡는다’는 뜻이다. 자기 주장을 강하게 고집할 때 쓰는 단어이다. 자기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단어이다. 축구나 운동경기에서 advantage를 얻으면 결코 양보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들이 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고 포기하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은 자기 주장이 너무나 강한 시대이다. 현대인들은 자기 권리를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자기가 너무 강하다. 고집이 너무 세다. 봉사는 열심히 하는데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다. 그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었다. 119층이다. 그런데 더 높은 것은 시카고의 시어즈 타워이고, 그보다 더 높은 것은 동경타워이고, 지금은 토론토의 CN타워가 가장 높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것이 하나 있다. 고집이다. 혹시 나는 고집이 너무 세다고 느껴지지 않나? 자아가 너무 강하지 않나?
예수님은 자존심이 없어서 자기 주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자기 권리를 포기하셨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세로 일하신 적이 없다. 바울 역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 훌륭한 보습을 보여준다. 베드로 사도도 교회에서 일을 맡은 직분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벧전 5:3절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우리 교회 제직은 ‘책임은 있어도 권리는 없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주장하려는 성서 진리가 아무리 옳아도, 결코 내 자아가 주장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순간에라도 자아라는 주인을 권좌에서 단호하게 끌어내리고, 그 권좌에 합당하신 예수님께 그 자리를 내어드려야 한다.
2. 자기를 비우는 마음이다.
사람이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려면 결국 자기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래서 본문 7절은 좀더 근원적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여기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케노운(kenoun)’인데 통을 쏟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 비우는 경우를 말한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빈 마음을 함축하고 있다(고전 15:10).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빈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한다. I'm nothing! 요즘 세상은 자기가 뭐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느날 하늘의 천사가 세 친구를 찾아와 소원을 물었다. 천사가 첫 번째 사람에게 소원을 물었더니 자기는 별처럼 빛나고 싶다고 하여 Star가 되게 해주었다. 두번째 사람은 왕이 되고 싶다고 하여 King이 되게 해주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욕심이 많이 자기는 기왕이면 둘 다 되고 싶다고 하여 스터킹이 되게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다같이 한번 따라서 해보자. ‘나는 아무것도 아녀.’ 하나님은 자기의 마음을 비우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줄 믿는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쏟아주는 빈 마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비워 쏟아주셨다.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땀과 눈물과 피까지도 다 쏟아주셨다. 그렇다. 마음을 비우면 무엇이든 다 줄 수 있다. 빈 마음이 풍부한 마음이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 8:9) 마음을 비울수록 오히려 부유해진다. 마음이 커진다. 비울수록 편해지고 행복해진다.
얼마 전 백인들의 지상낙원이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성 시온교회’라는 흑인들만 모이는 교회에서 특별행사를 가졌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던 것처럼 누구든지 자기가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의 발을 씻어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백인 판사 한분이 이 흑인교회의 예배에 참여했다. 그는사회에서 대단히 존경받는 판사로서 차기 대법원장으로 내정된 올리버라는 분이었다. 그는 시온교회에서 시행하는 세족식 광고를 듣고는, 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으로 자기 집에서 일하는 흑인 여종 마르다 포트윈의 발을 씻어주고자 찾아왔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흑인 여종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발을 씻겨주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다. ‘마르다는 내 집 하녀로서 오랜 세월동안 내 아들딸을 돌보았으며, 그녀가 내 자식들의 발을 씻어주는 모습을 수백번도 더 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가정을 정성껏 돌보아주는 마르다가 너무 고마워서 내 여종의 발을 씻어주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이 일로 그는 사퇴를 당했으나 행복해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2천년 원점의 크리스마스에 나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고급한 은총이 있기를 바란다.
3.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다.
이제 예수님은 자기의 마음을 비우는데서 낮추는데로 더 낮아지셨다. 그래서 7-8절은 이렇게 더 진취적으로 전개된다.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여기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말은 ‘취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신학적으로는 성육신이라고 말한다. 이제 예수님의 겸손은 마음의 낮아지심에서 몸의 낮아지심으로 더욱 적극성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낮아지셨다. 의인이 죄인이 되셨고, 주인이 종이 되셨고, 영광을 버리고 부끄러움을 입으셨고, 왕자가 거지로 변신하셨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셨다. 금세기 최고의 영성 신학자인 필립 얀시 목사는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지셔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있어서 얼마나 겸손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나? 현대사회는 자기 PR시대이기에 자기를 낮추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높이고 있지 않나? 크리스마스는 그동안 우리가 잊어버린 겸손을 되찾게 해주는 은혜를 회복시켜 준다. 영국의 기독교 문학가 C.S. 루이스는 이런 진지한 말을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겸손해지고자 한다면, 내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첫단께는 교만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내가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기만 해도 우선은 덜 교만해질 수 있다. 겸손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혹시 자신의 겸손이 인정받기를 원하시는 분 있나? 그것이 곧 숨은 교만이다. ‘나는 겸손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이것은 더욱 더 무서운 자만이요 오만이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농구 코치로 유명했던 존 우든은 선수들에게 이런 훌륭한 조언을 들려주었다.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겸숀하라. 명성은 인간이 주는 것이니 감사하라. 자만은 자아가 주는 것이니 조심하라.’ 고전 10: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렇다. 크리스마스는 낮아지는 은혜를 받는 축복의 절기이다. 그동안 살아오면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진 마음이 다시 겸비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4. 자기를 희생하는 마음이다.
아마도 사람의 마음 중에 가장 고상한 마음은 희생정신이다. 그러므로 어떤 철인이 말하는대로 인생에게 있어서 ‘얼마나 고난을 감내하느냐 보다는, 얼마나 희생을 치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고난을 감내하신 분이 아니라, 기꺼이 희생을 치르신 분이시다. 본문 8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오셨다. 자신을 희생하러 오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예수 믿고 누리게 된 구원이 우리 편에서는 값없는 선물인 은혜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나무에 매달려 죽게하신 엄청난 희생이 치러졌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의생하셨다. 이처럼 기독교는 희생의 정신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낭만적인 절기가 아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오신 날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가급적 자기를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3D 기피현상이 초래하였다. 요즘 회사나 일터에서 희생전신을 이야기하면 그는 전근대적인 사람으로 따돌림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할 말이 있다.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를 수 없다.’ 미국의 훌륭한 설교자인 W. 위어스비는 희생에 대하여 이렇게 호소한다. ‘어떤 축복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만한 피흘림이 있어야만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를 즐겁게 지셨다. 오늘 우리도 어차피 져야할 십자가가 있다면 기쁘게 지고 갈 수 있기를 바란다. 희생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고, 흐뭇함이 있고, 보람이 있다. 오늘 우리는 새천년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흥청망청 망년회나 즐기는 그런 값싼 크리스마스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복된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크리스마스! 얼마나 고상하고 고급스럽나? 양질의 크리스마스!
옛날 페르시아에 씨루스라는 왕이 어느 날 전쟁을 하면서 자기 적대국가의 왕자와 그 부인과 아이들을 생포해 왔다. 그래서 씨루스는 그들을 죽이기 전에 이렇게 질문했다. ‘만일에 내가 왕자인 당신을 살려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주겠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을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제산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마누라를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씨루스왕은 깜짝 놀라서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감동이 되어 그들을 다 풀어주어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그날 밤 늦게 집에 돌아온 왕자는 살아서 돌아온 것이 너무나 기뻐서 축하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록 씨루스왕이 적국의 왕이지만 참 훌륭한 분이더라. 내가 보니 정말 잘생긴 미남이더군. 의젓하고 늠름하고 장수답고 사나이답더군.’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 아내의 대답이 더욱 감동적이다.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멀 봤어요?’ ‘나를 위해서 대신 죽겠다고 늠름하게 말하는 한 남자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에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하늘나라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신 그 예수님!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비어 종이 되시고, 자기르 낮추어 나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 희생을 치러주신 그 예수님만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만 보이는 크리스마스!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 깊이 품는 복된 크리스마스! ‘여러분은 이런 마음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얼마나 기꺼이 자기주장을 양보하며 철회하는 편인가? 이제는 고집을 꺾을만 하지 않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곧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마음을 비우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주는 빈 마음이다. 그리고 당신은 얼마나 예수님의 겸손함을 몸으로 익혀가고 있나? 혹시 자기 스스로 나는 그래도 겸손한 편이라고 스스로 속고 있지는 않나?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희생하고자 이 땅에 내려오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크리스마스는 이처럼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만을 가슴에 품는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란다. (01 성탄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