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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여 인간 _우리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저자: 손창섭(孫昌涉). 평남 평양에서 태어나 1935년 만주로 건너갔다. 1936년에는 일본으로 가 고학생으로 교토와 도쿄에서 여러 중학을 다니다가 니혼 대학에 적을 두기도 했다. 1949년 《연합신문》에 「얄궂은 비」를 발표하고, 1952년 「공휴일」, 1953년 「사연기」를 『문예』지에서 추천받으면서 등단한다. 1972년에 일본인 아내와 도일한 이후의 행적은 노출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전후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소설에는 세계에 대한 절망을 지닌 인물들에 대한 반어적 태도가 잘 드러난다. 주요 작품으로는 「비 오는 날」, 「미해결의 장 : 군소리의 의미」, 「인간동물원초」, 「잉여 인간」 등의 단편소설과 『유맹(流氓)』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해설자: 허윤진(문학평론가).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졸업. 2003년 계간 『문학과사회』 제3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평론 부문)했다. 「나의 분홍 종이 연인들, 언어로 가득 찬 자궁이 있는 남성들」, 「프쉬케로스(Psycheros), 시간의 미로에서 영원히 길을 잃/잊다」, 「인큐베이터의 시대」, 「현미경과 망원경이 있는 글쓰기 실험실 1」 외 다수의 평문을 발표했다.
1. 미시적 전쟁의 시작
현대 한국사에서 한국전쟁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전쟁은 사회가 성립되는 물적인 기반을 파괴하고, 구성원들의 생명을 앗아 가며, 살아남은 구성원들에게 인간성에 대한 뿌리 깊은 회의를 남긴다. 가족처럼 가까운 타인들이 눈앞에서 포탄을 맞고 총알을 맞아서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 과연 인간성이라 불리는 것을 계속해서 신뢰할 수 있겠는가?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보면서 인간이 동물과 차별화되는 이성적 존재라는 생각을 지속하기란 어렵다. 오히려 살기 위해서 정량의 먹잇감만을 포획하는 동물의 세계가 합리적인지도 모른다.
물적 기반과 정신적 기반이 모두 파괴된 상태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새로운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가? 거시적인 차원에서 전쟁은 끝났지만 사실 전쟁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은 낱낱이 폭로된 것이 아닌가? 「잉여 인간」을 비롯한 손창섭의 여러 작품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인 고민을 보여 주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은 척박한 생활 속에서 생존을 향한 고투에 여념이 없다. 거시 전쟁이 끝나고 이제 미시 전쟁이 새롭게 시작되는 자리에서 「잉여 인간」은 출발한다.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 과잉의 상태와 결핍의 상태 사이에서 가치의 교환이 정체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잉여 인간」에서는 자본이라는 물질적 에너지가 산 자들의 생존을 위해서 소통되고 거래되는 것이 아니라, 결핍 상태를 오히려 부추겨 산 자들을 위태로움으로 몰고 가기 위해 상황에 투입된다.
「잉여 인간」에서 자본의 순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본은 단지 경제적 측면에서만 논의되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는 자본이라는 물질적 에너지가 사랑이라는 정신적 에너지와 동전의 앞뒷면처럼 병행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실제 경제 구조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랑의 경제 구조가 지닌 속성을 잘 표현한다. 노동과 자본을 투입하여 최대한 효율적인 생산을 하고, 생산품을 소비자가 구매하도록 '합리적으로' 추동되는 것으로 가정되는 실제 경제와 달리, 사랑의 경제는 무익한 노동과 막대한 정신의 자본을 투입한다 해도 효율적인 순환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잉여 인간」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사랑의 관계들이 그러하다.
격렬한 전쟁의 시기를 보내고 나서 인간들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았는가'? 사회의 가치를 벗어나는 무익한 감정의 덩어리들이 잉여물인가? 아니면, 혹 인간 자체가 쓸모없는 잉여물은 아닌가?
2. 자본의 과잉과 결핍
'잉여 인간'이라는 표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 첨가된 '잉여'라는 표지다. '잉여'는 기대되는 기준치를 초과한 분량을 뜻한다. 기준치를 초과한 상태가 존재한다면, 기준치에 미달되는 상태도 역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 과잉의 상태와 결핍의 상태 사이에서 가치의 교환이 정체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의 문제에서 과잉과 결핍 사이의 긴장 관계가 특히 두드러진다.
작품의 주인공인 만기는 작은 치과의원의 개업의(開業醫)다.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식구들이 많이 있지만 사회의 경제적 상황과 치과의원의 낙후된 시설로 인해 그는 충분한 소득을 올리고 있지 못한 상태다. 누구보다도 그에게는 경제적인 소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지만, 경제적 윤택함은 간절한 그의 욕망만큼 다가와 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돈을 거의 쓰지 않고 늘 자신의 생업에 성실하게 임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근면 성실함은 별다른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만기의 두 친구인 봉우와 익준의 경우에도 경제적인 불균형은 두드러진다. 봉우는 처갓집이 부자인 덕에 별다른 노동을 하지 않고서도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누린다. 반면 익준은 장모와 병든 처, 아이들을 부양해야 하는데도 학력이 중졸인데다가 별다른 기술이 없어서 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힘든 전쟁의 시기를 함께 지내와 현재에 도달한 친구들이지만, 자본의 과잉과 결핍 상태는 개인에 따라서 상이하게 나타난다.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노동을 하거나, 아니면 자본을 투자하거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봉우와 익준은 타인의 일터에 상징적인 '출근'을 하지만 이 일터가 그들의 일터가 아니므로 어떤 경제적 이득도 창출해 낼 수가 없다.
봉우 처가 경제적 원조를 하겠다고 제안할 때마다 만기는 번번이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작품의 말미에서 만기는 결과적으로 봉우 처에게 돈을 빌리게 된다. 익준의 처가 결국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만기가 일시적으로 확보한 자본은 그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그 돈은 익준의 처의 장례 비용으로 사용된다. 죽은 자를 위해서 소비하는 돈은 실질적으로 산 자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장례에 소용된 돈은 비유적으로 말해서 일종의 '죽은 돈', '매장된 돈'이며, 작품 속의 산 자들에게는 갚아야 할 채무로서 남게 된다. 이처럼 「잉여 인간」에서는 자본이라는 물질적 에너지가 산 자들의 생존을 위해서 소통되고 거래되는 것이 아니라, 결핍 상태를 오히려 부추겨 산 자들을 위태로움으로 몰고 가기 위해 상황에 투입된다.
3. 무익한 사랑의 범람
「잉여 인간」에서 자본의 순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본은 단지 경제적 측면에서만 논의되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는 자본이라는 물질적 에너지가 사랑이라는 정신적 에너지와 동전의 앞뒷면처럼 병행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만기는 자본의 결핍 상태에 시달리고 있다. 문제는 가시적인 이로움은 부재하는 상태인데, 비가시적인 이로움인 사랑은 과도하게 넘쳐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가부장적 규범하의 사회에서 사랑의 경제 구조는 크게 두 가지 층위로 나타난다. 하나는 지상 경제인 결혼 제도이며, 다른 하나는 지하 경제인 매매춘이다. 작품 속에서 만기의 상황을 살펴보면, 사랑의 경제라는 측면에서 만기는 사랑의 과잉 공급을 받고 있는 상태다. 우선 그는 현숙한 아내와 결혼을 이미 했다.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는 여인이 한 사람만이라면 사랑의 에너지는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규범적 경제, 즉 결혼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사랑의 관계가 다층적으로 존재한다.
우선 만기는 처제인 은주의 사랑까지도 받고 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방식은 순수한 동경과도 같다. 그녀는 형부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방식으로 그를 사랑한다. 만기의 가정에 은주가 존재한다면, 직장에는 간호사 인숙이 존재한다. 그녀는 만기의 좋은 동료인 동시에, 만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또 다른 여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봉우 처는 농염한 여인의 향기를 풍기면서 만기를 유혹하려 한다. 팜 파탈(femme fatale)적인 이미지에 가까운 그녀는 넘치는 열정으로 인해 만기를 두렵게 할 정도이다. 만기를 중심으로 한 관계망에서 만기는 여러 여성들의 사랑을 과도하게 받음으로써 사랑의 과잉 포화 상태에 놓여 오히려 괴로움을 겪고 있다.
반면 친구 봉우의 경우에는 아내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간호사 인숙을 사랑하는 사랑의 결핍 상태에 놓여 있다. 그의 사랑은 인숙에게 보답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익준은 아내가 죽음으로써 사랑의 경제에서 원심적으로 멀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만기를 중심으로 한 관계를 역으로 뒤집어 보면, 만기를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하는 여성들의 경우에도 사랑에 대한 보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교환의 결핍과 부재 상태에 놓여 있다. 물론 사랑이라는 정신적 자본이 교환되어야만 사랑이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기를 사랑하는 여성들은 사랑의 메시지와 돈의 메시지를 등가적으로 타전(打電)한다. 만기가 월세를 올려 달라는 봉우 처의 협박 아닌 협박으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자 간호사 인숙은 자신이 모아 두었던 월급을 선뜻 내놓기까지 한다.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애정은 자신이 가진 돈을 희생하는 방식으로까지 표현되는 것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돈을 내어 놓는 행위는 일종의 무익한 소비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숙은 자신의 의사를 이런 방식으로라도 표현하려 한다.
사랑과 자본이 구조적으로 등가화되는 양상은 봉우 처에게서 가장 잘 드러난다.
봉우 처는 툭하면 병원을 찾아왔다. 한 달에 한 번씩 셋돈을 받으러 들르는 외에도 치석(齒石)이 끼었느니 입치(入齒)가 어떠니 충치가 생기는 것 같다드니 핑계를 내걸고 걸핏하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봉우 처는 짙은 화장과 화려한 의상으로 풍요한 육체를 장식하고 있었다.
봉우 처는 만기의 사랑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이 가진 자본을 이용한다. 그의 곤란한 생계를 역으로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를 움직이고자 하는 것이다. 만기는 작품 속에서 그녀의 집요한 유혹을 뿌리친다. 그러나 봉우 처에 관한 묘사를 보면, 그녀의 섹슈얼리티가 지닌 풍요로운 매혹은 분명 그를 무의식적으로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여기서 그녀의 육체가 "풍요하다"라는 구절은 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에게 자주 사용되는 수사지만, 봉우 처가 지닌 자본의 풍요로움까지도 환기시킨다.
이처럼 자본, 사랑, 나아가 섹슈얼리티가 경제적인 구조로 나타나는 양상은 만기가 봉우 처에게 익준 처의 장례 비용으로 쓸 돈을 빌리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선생님에게두 저 같은 여자가 소용에 닿을 때가 있군요. 좋아요. 저는 점잖은 선생님의 청을 거절할 용기가 없어요!"
여자는 언어 이상의 의미를 표정으로 나타내고 나서 일어서 저쪽으로 가려다가,
"오만 환 정도라면 당장 되겠어요. 물론 현금이 좋으시겠죠."
대답도 듣지 않고 카운터 뒤로 사라져 버리더니 좀 뒤에 현찰을 신문지에 꾸려 가지고 돌아왔다.
봉우 처는 만기가 자신에게 돈을 빌리는 행위가 자신에 대한 '수요'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본다. 여기에서 만기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거부하던 봉우 처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그녀를 어떤 면에서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봉우 처는 상징적으로나마 자본의 교환 관계가 이루어짐으로써, 모종의 '관계'가 결국은 성취되는 것에 부분적으로나마 안도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만기와 봉우 처의 관계에서 봉우 처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인물일 수 있다. 그러나 인숙을 스토킹하는 수준으로 쫓아다니는 봉우처럼, 그의 아내도 경제적 이익을 떠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전차 정류장 쪽을 향해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인숙의 뒤를 봉우는 부리나케 쫓아가고 있었다. 그 광경이 흡사 엄마를 놓칠세라 질겁해서 발버둥 치며 쫓아가는 어린애 모양과 비슷했다. 그 꼴을 묵묵히 바라보고 서 있던 만기는 저도 모르게 가만한 한숨을 토했다. 계산이 닿지 않는 애정에 저렇게 열중해야 하는 봉우가 - 그리고 저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이 딱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만기 자신을 중심으로 자꾸만 얼크러지는 애정과 애욕의 미묘한 혼란이 숨 가쁜 까닭이기도 했다.
"계산이 닿지 않는 애정"이라는 구절은 결국 실제 경제 구조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랑의 경제 구조가 지닌 속성을 잘 표현한다.
이 작품이 생산되고 발표되던 시기에 사회적으로 시급한 문제는 초토화된 환경 속에서 다시 어떤 방식으로 생존해야 할 것인가, 사회적인 물적 토대를 어떻게 쌓아 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서 개인의 사적인 욕망이 억압될 수 있던 시대에, 손창섭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전쟁과도 같은 욕망의 충돌에 주목하고 있다. 작품에서 실제로 많은 비중이 할애되고 있는 이야기 내용은 인물들의 생존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존과는 무관한, 무익한 감정적인 문제들이다. 기존에 그의 작품들은 전후 사회의 허무주의를 그려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단순하게 요약되기에는 이처럼 복합적인 문제들이 작품 속에서 세밀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 잉여물로서의 인간
제목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 보자. 잉여 인간. 격렬한 전쟁의 시기를 보내고 나서 인간들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았는가'. 사회의 가치를 벗어나는 무익한 감정의 덩어리들이 잉여물인가? 아니면, 혹 인간 자체가 쓸모없는 잉여물은 아닌가? 이런 점에서 일종의 심리적 쌍둥이들처럼 존재했던 만기, 봉우, 익준의 관계가 익준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것으로 작품이 끝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작품 전반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인물로 보이는 만기는 자신이 속한 가족, 사회에서 그다지 무익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사회 속에서 나름의 몫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봉우와 익준은 상대적으로 무능력하며,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서 배제되어도 사회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쓸모없는' 인물들이다. 특히 익준은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지도 못하며, 아내의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하지도 못한다. 엄마의 장지(葬地)에 다녀온 아이들의 철없는 모습에 그저 "장승처럼 선 채 움직일 줄 모르"는 그는 공동체에서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힘없는 인물이다. 사회의 중심점을 비껴나, 사회가 만들어 낸 불필요한 잉여물처럼 보이는 익준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사회에 충실히 복무한 후 기계의 부품처럼 버려지는 우리의 모습은 또 다른 잉여 인간이 아닐까.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동물로서의 욕망은 대개 은폐되어 있다.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의 동물적 본능과 욕망은 생생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타인에게 진정으로 윤리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인가, 혹은 본성을 다양한 기제로써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인가? 어떤 것이 더 '자연'스러운가? 손창섭의 다른 작품 「미해결의 장 : 군소리의 의미」와 「인간동물원초」를 함께 읽어 보자.
2. 6·25전쟁을 비롯한 역사적 사건은 우리에게 기록으로만 남아 있으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직접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편, 영상 매체의 발달로 국경의 경계를 넘어 사건들의 이미지를 접하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 되었다. 우리는 9·11테러 등 현대사의 분기점이 될 만한 사건들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경험한다.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은 오히려 고통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마비시킬 수 있다. 모든 것이 화면의 뒤편으로 소거되고 있는 지금,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는 다른 시대에 씌어진 소설을 읽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는 없을까?
3. 현재 한국 사회는 개인들이 경제적 안정을 얻는 것을 최대의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 체제 속에서 충실히 노동을 하고, 충실히 소비를 하고, 충분한 자본을 다시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은 진실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모두가 경제적인 충족만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이 시대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는 경제적 가치 외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대가 없는 행위, 무익함을 넘어서는 기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까?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잉여 인간, 허윤진/재편집: 오솔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