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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8강 4장 21절에서 31절 두 언약
26.05.10(일)
갈라디아서 4장 21절에서 26절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지난주에 이어서 지난주부터 계속 이어져 왔던 주제를 살피려고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건데요.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들어보셨으면 계속 비슷한 얘기가 반복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 바울은 반복된 주제를 계속 심화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를 좀 더 깊은 이해로 초대하거든요. 그래서 오늘 특별히 인제 바울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언약에 관한 건데요.
우리는 이제 두 언약이 있는데 두 언약 가운데 우리는 어떤 언약 아래에 있는가 이 이야기를 이제 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제 이렇게 볼 건데요. 먼저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언약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언약의 의미를 좀 생각을 해 봐야됩니다. 그래서 먼저 언약의 의미를 보고요.
그 다음에 21절부터 27절을 통해서 이 언약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구약성경에 있는 아브라함의 두 아내를 예로 들어서 비유를 합니다.
이 비유의 내용이 좀 고도로 좀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급적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가 인제 은혜 언약 아래 있다라는 이야기를 28절부터 31절까지 보면서 살필 겁니다.
자 먼저 제가 이제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언약의 의미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그러면 언약이라는 게 뭘까요? 언약이라는 것을 이제 우리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면 많은 학자들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이라는 것은 이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만드셨어요.
근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셔서 물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좀 특별한 관계로 두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여기 보면요 제가 행위언약이라는 말을 써놨는데요. 이 행위 언약이라는 것을 맺으십니다.
이거는 성경에서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보면은 다른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마음껏 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이게 언약 조항이에요.
근데 문제는 뭐냐하며는 아담이 속아서 결국은 그 조약을 어기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아담 가운데 행위로 맺었던 언약은 깨져버렸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그 이후에 아담 이후에도 그럼 이제 언약이 깨졌으니까 아담과 아담 이후의 자손은 하나님과 관계가 깨져야 될 거 아니에요.
근데 성경을 좀 계속 유심히 보면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가 계속 유지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이후에 사람들 있죠.
이후에 사람들에게 버리거나 외면하지 않고 계속 아담 이후에 사람들을 찾으시고 또 돌보시고 사랑해 주시기도 하시죠.
그것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을 달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걸 보고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은혜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인간은 어떤 존재다 라는 관계에 대한 정립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행해야 되는지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 같은 것들이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되고 무엇을 행해야 되는 지가 다 정해져 있어요.
그런식으로 치면 행위 영역과 그렇게 다를 건 없어요. 그쵸. 그런데 놀랍게도 행위 언약과는 달리 이 은혜 언약은 이 조항들을 인간측에서 어긴다 하더라도 관계가 파기되지 않습니다. 어기면 안 됩니다. 이 언약 조항들은 다 열심히 지켜야 돼요.
근데 어긴다고 해서 관계가 깨지는 건 아닙니다.
어겨야 하지만 관계가 깨지진 않아요. 이걸 보고 은혜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으로 이 은혜 언약을 말해주는 가장 좋은 이 본문이 이제 아브라함이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 창세기 15장에 있는 장면인데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3년 된 암소와 삼염된 암염소와 3년 된 수량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새끼를 가져올지라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잘 보세요. 중간에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했다 라고 말합니다.
뭘 한 걸까요? 이것은 고대 근동에서 흔히 행해졌던 언약식을 말해줍니다. 고대 근동에서 국가와 국가가 있지 않습니까?
에이 국가와 비 국가가 있으면은 양쪽의 왕이 서로 뭐 예를 들면 평화 조약을 맺는다고 할게요 우리 서로 싸우지 말고 우리끼리는 친하게 지내자 그리고 이제 외국의 적들이 오면 같이 싸워주자 이렇게 평화 조약을 맺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냐하냐하면 이제 조약문을 다 써요 그러고 나서 이제 어떻게 하냐하면 송아지 같은 걸 하나를 잡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좀 잔인하지만 반으로 딱 쪼개놔요 그리고 쪼개놓은 송아지를 양쪽에 놓고 이 언약의 당사자 두 왕이 이 같이 이 가운데를 지나갑니다. 이게 인제 피의 언약식이에요.
고대 근동에서 흔히 행해졌던 일입니다.
너와 내가 이렇게 약속을 했으니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소가 쪼개져 죽는 것처럼 피를 흘려 죽어야 할 것이라는 소위 저주였습니다.
근데 이제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과 더불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믿을 걸 요구하시고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순종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실 거죠.
이렇게 언약을 맺으신 다음에 언약식을 하도록 요구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언약식을 합니다. 언약식 하기 위해서 준비를 다 해요. 그래서 이제 짐승들을 쪼개 놨습니다.
근데 그 다음에 쭉 내려가면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하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 연기 나는 화로가 보입니다. 불이 하나 보여요. 그죠 그리고 타는 횃불이 쪼겐 고기 사이로 지납니다.
이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 사이를 지나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쳐다보고 있고요. 햇불만 지나갑니다.
이건 뭘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인재는 고기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했고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만일 이 약속을 내가 지키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스스로에게 언약을 하세요.
근데 아브라함 안 지나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건 뭘 의미할까요? 아브라함은 이 언약을 깰지라도 하나님께서 언약을 깨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거죠. 이게 은혜 언약을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의 하나입니다.
실제로 그 이후에 이 아브라함의 역사를 보면 그렇게 됐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던 것이 아니었어요.
아브라함이 이제 이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 신뢰한 거죠. 그래서 17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꾸짖으시는 장면이 나와요.
그렇지만 언약을 파기하거나 아브라함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속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이끌어주시고 결국은 이삭이라는 자손을 주시죠.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제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믿음의 승리를 할 수 있도록 계속 이끌어 주십니다. 이게 은혜언약의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됩니다. 그러나 신뢰하지 못한다고 해서 순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언약이 깨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팔을 붙잡고 계시고 놓지 않고 계시고 그분이 언약을 다 지키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죠. 이게 은혜언약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자 이 두 언약을 생각해 보시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21절부터 보면은요 이제 아브라함의 두 아내를 비유로 들면서 이제 언약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약이 어떻게 우리의 자유를 보증하는가를 얘기해주고 싶거든요.
근데 자 21절부터 볼게요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느냐 라고 말합니다.
이건 무슨 말이냐하면 거짓 교사들과 그리고 거짓 교사들에게 속은 갈라디아 교인들한테 잘 생각해 봐라 율법 즉 구약성경에도 보며는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심을 받거나 혹은 행위를 잘함으로써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라고 이야기를 해줍니다.
율법을 듣지 못했느냐 너 율법 구약성경 읽어봤잖아. 구약성경도 너희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말 안 안해 라고 말하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이 비유를 들죠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갈이라는 여종이죠. 그리고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
이 스토리를 잘 아시겠지만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아브라함이 아들이 없으니까 사라가 하갈이라는 여종을 아브라함에게 붙여서 아들을 낳게 합니다. 종의 아들인 거죠. 그게 인제 이스마엘입니다.
근데 그 이스마엘은 결국은 이제 아들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아들은 아니었던 거죠. 근데 여종에게는 하갈에게는 뭐여요? 육체를 따라 낳았고 그리고 자유 있는 여자 사라에게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육체를 따라났다 라는 말은 기적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습니다. 기적적인 요소가 없고 그죠 근데 사라에게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는 그 경수가 끊겼어요.
무슨 말이냐면 이제 더 이상 애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됐다는 거죠. 그럼 이 사라로부터 애를 낳으려면 초자연적인 기적이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고 이미 아브라함한테 약속을 하셨거든요. 그러니까는 한 아들은 육체 다시 말하면 그냥 자연적인 그죠 이 저기 과정을 따라 낳았다라는 것을 통해서 뭐냐하면 그냥 인간의 의지 의지나 인간의 힘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을 뭐라고 해야 될까 비유합니다. 이걸 알레고리라고 하죠. 풍유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라의 아들 사라로부터 이삭이 나온 것은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의 힘이란 의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거듭나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초자연적인 이야기 이제 초자연적인 은혜의 역사를 풍유하는 거죠.
그걸 약속으로 말미암았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자 이것은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죠. 두 언약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행위언약과 은혜 언약을 말합니다.
한쪽은 행위로 인간의 행위로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종의 노사관계인 겁니다. 이 행위에서 인간이 약속을 어기잖아요.
그러면 이제 약속은 파괴되고 인간은 저주 안에 있게 되죠.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모든 내용들 이 행위 언약을 따르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거짓 교사들은 행위언약이라는 말을 뭐 알지도 못하고 뭐 그런 용어를 써 가지고 얘기하진 않겠지만,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였어요.
뭐냐하면 하나님께 우리가 어느 정도 순종하지 않으면 그죠 순종해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된다라는 거죠. 그쵸.
그렇지만은 이제 다른 건 뭐죠 은혜 언약입니다.
은혜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이미 성립돼 있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긴 해야 되지만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버림받는 건 아니라는 거죠.
무엇이 더 죄인된 인간의 현실에 정확히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은혜 언약이겠죠. 그러면서 뭐라고하느냐하면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이 시내산은 뭐냐면은 이제 구약성경의 율법 체계를 지키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을 시내산이라는 단어 안에 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서 문학적으로 일종의 제유법이죠.
이 펜은 칼보다 강하다 그러면은 여기서 말하는 펜은 저기 언론을 제어하는 거잖아요. 그런 것처럼 이제 시내산은 율법과 율법 전체를 지킴으로써 행위 언약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모든 시도를 다 이제 신의 산이라는 표현으로 쓴 겁니다. 그리고 이게 이제 하갈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여기서 이제 하갈 그리고 하갈로부터 낳은 아들 이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심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가르침이나 시도들 전반을 의미하는 거겠죠.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뭘 의미할까요?
아까 시내산하고 대비되는 거겠죠. 아까 시내산이라는 장소가 있었잖아요. 시내산은 율법 전체를 행하거나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외롭게 하심을 받으려는 시도나 가르침이라고 그랬죠 마찬가지로 위에 있는 예로 살려면 뭘 의미하냐면 이제 천국에 지금 성도들이 있잖습니까?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나 다윗 같은 성도들이 있어요.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받았나요? 그렇지 않죠 아까 제가 아브라함 이야기를 했지만 아브라함도 약속을 어겼습니다. 언약을 어겼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고 있어요.
이 누가복음에 보면 이 천국에 있는 그 천국을 가리켜서 뭐라고까지 표현하냐하면 아브라함의 품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브라함은 천국에 있죠. 저 위에 천국에 있는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은 뭐냐하면 마치 노사관계처럼 그리고 하갈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관계처럼 행위로 말미암아서 버림도 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고 자유자 사라처럼 그리고 사라의 아들 이삭처럼 이미 관계가 성립된 부자관계처럼요 성립된 상태에서의 관계 은혜언약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곧 우리 어머니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여기서 이제 잠깐 좀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습니다.
이 4장 26절을 가지고 인제 이 우리나라의 어떤 이단은 이제 이 하나님께서 위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도 있지만 어머니 하나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이 본문의 문맥을 보면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죠. 그쵸. 본문의 문맥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는 오히려 뭐죠 자유케 하는 그 저기 그 집단들 혹은 자유로운 집단들을 가리키는 거죠.
은혜 언약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 개혁가들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 어머니가 신약 교회의 비유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테르톨리아누스나 혹은 장 칼벤 같은 사람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은 어머니로서의 교회 돌봄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늘 표현하곤 했어요. 어쨌든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보면은 뭐예요?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지금 있는 예루살렘 25절과 26절을 비교해 봅니다. 이게 두 개가 비교되겠죠. 그렇죠.
이게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역시 지금 계속 같은 얘기를 여러 가지 단어로 바로 우리 비유해 주고 있는 거예요. 율법과 율법을 지키고 싶은 모든 체계들 아까 시내산이랑 똑같은 거죠. 그렇죠.
그리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또 뭐겠습니까? 행위 언약이 아닌 은혜 언약 아래에서 은혜 언약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실제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는 거죠.
그래서 간단하게 좀 표로 만들어 봤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라와 하갈을 비유하는 거죠. 사라와 하갈이라는 인물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라와 하갈이라는 인물을 사용해서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가 중요한 거죠. 출산 방법은 사라는 약속을 따라 초자연적으로 은혜로 말미암아서 이제 이삭을 출산했고요.
하갈은 육체를 따라 그냥 초자연적인 방식이 아니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그냥 인간의 의지와 힘만으로 된 겁니다.
장소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땅의 예루살렘 신분은 자유자와 종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상징하는 바는 새 언약 다시 말하면 은혜 언약과 옛 언약 그죠 행위언약 이 두 개를 구분해서 상징하는 것이라는 거죠. 이것은 사실 좀 복잡하긴 합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마다 이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법이 굉장히 다릅니다. 그래서 이제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에 대해서 각 단어에 대해서 굉장히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그렇지만 본문의 핵심은 똑같습니다. 한쪽은 둘 다 무엇을 행해야 되는 건 있어요. 그렇죠. 근데 한쪽은 행하지 않으면 저주와 진노를 받는 것이 있고요.
그리고 또 한쪽은 행해야지만 하나님 뜻대로 선행을 해야 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부자 관계로 맺은 성립된 자유를 누리면서 그 기쁨으로 말미암아서 선행을 행해야 되는 언약이 있는 것이죠.
이 두개의 비유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이제 27절은 이사야 45장 1절을 인용하면서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거는 뭐냐 하며는 인제 이러한 그 이 사라가 아이를 낳고 기뻐하는 모습들을 이제 이 이사야 4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인제 선행을 낳지 못하고 하나님의 그 은혜로 말미암아 열매를 낳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기뻐하게 되고 열매를 낳고 은혜를 받고 그리고 무엇보다 구원받을 것에 대한 그 예언이거든요.
이 예언을 이제 사도바울이 인용해 주면서 이 예언이 성취됐다. 우리는 더 이상 행위 언약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은혜어라 은약 안에 있다.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자 그래서 볼게요 이제 28절은 이렇게 단호하게 외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다 라고 단호하게 외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행여언약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은혜언약 안에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
그러나 그때 이삭과 이스마엘 있던 그 시절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 때 그때도 육체를 따라난 자 누구죠 이스마엘입니다. 그쵸. 육체를 따라난 이스마엘이 성령을 따라난 자 누구일까요? 저 이삭이겠죠.
성령을 따라난 자를 박해했습니다. 실제로 보면요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라고 창세기 21장 9절이 인제 말해주는 거죠.
그 이야기를 바울이 인용하면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냐면 이거죠. 바울은 그 창세기 때도 아브라함 때도 이삭이 이스마엘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런 것처럼 지금 거짓 교사들이 바울과 같은 참된 하나님의 사도들 있잖아요. 그쵸. 그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고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 내에서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서 은혜와 언약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이 행위 언약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로부터 막 핍박받고 있거든요.
그러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놀라지 마라
결국 은혜 언약 아래에 있는 너희들이 상속을 받을 것이고. 은혜를 받을 것이고. 행위 언약을 주장하는 저 사람들은 결국은 뭐예요? 내쫓으라 내쫓김을 당할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바울이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맺은 관계가 행위 언약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그분의 사랑 가운데 맺은 언약이다. 라는 걸 이야기해 주고 싶은 거죠.
예 이제 전체적인 정리와 적용을 좀 해보려고 하는데요. 이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은혜 언약 안에 있다라는 거죠.
그래서 바울은 최대한 우리가 은혜 언약 아래 있기 때문에 부자 관계의 자유를 누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죠 어 이제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부자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보죠. 우리는 부모님의 자녀입니다. 근데 이제 좋은 부모님과 좋은 자녀와의 관계는 거기에 지켜야 하는 점이 없는 게 아닙니다. 지켜야 하는 점들이 있죠.
예를 들면 대부분의 좋은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뭐 억압하는 방식은 아니라 하더라도 공부를 잘하기를 원하죠.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잘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 같은 경우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인제 뭐 놀러 다니고 그러면은 이제 놀러 다니는 게 그렇게 막 좋게 놀러 다니기보다 나쁜 짓도 하고 그러면은 이제 아버님한테 회초리를 맞고 그랬습니다.
그러며는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아버님한테 회초리를 맞는다고 해서 저하고 아버지하고의 부자 관계가 끊기는 건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오히려 저를 사랑하기 때문에 회초리를 때린 거죠.
여기에는 우리가 행해야 되는 언약적 관계가 존재하지만 부자관계 가운데서도 사실 지켜야 되는 도리가 있고요. 지켜야 되는 언약이 있습니다. 그죠 그렇지만 그 언약을 어긴다고 해서 버림받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 자유롭지 않고 얽매인 관계 같은 것들을 종종 보게 되거든요.
예를 들면 신앙 생활을 할 때 어떤 무슨 큰 죄를 저지렀습니다 죄를 저지르면 마치 내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용서는 받겠지만 이 땅에서 살아갈 때 내가 뭐 고통을 당할 거라든지 혹은 뭐 내가 무언가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도 그것이 좌절될 수 있다든지 예를 들면 삶을 살다 보면 우리가 우리 삶에서 우리 힘으로만은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 시험을 봅니다. 자녀가 시험을 본다든가 아니면 내가 무슨 시험을 봅니다.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 같은 걸 보면 내가 공부 열심히 하면 잘 본다 라는 게 꼭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날의 컨디션도 있을 수 있고요.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운도 있을 수 있고 여러 가지 것들이 있을 수 있죠.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중요한 시기에는 내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나셔가지고 이 시험을 망하게 해버리면 어떻게 하지 시험 볼 때 예를 들면 갑자기 중간에 배가 아파가지고 막 정신이 흐트러져 가지고 망해버리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자녀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의 생각이 아니죠. 여전히 종과 같이 하나님과 우리를 노사관계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와 하나님이 맺은 언약은 노사관계의 언약이 아닙니다. 사랑의 언약이죠. 그래서 저는 값 없이 베풀어지는 복음의 은혜를 누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건 이제 우리는 다음 강의에 이 복음의 은혜를 누린다라는 것이 더 무슨 뜻인지 분명히 말하겠지마는 먼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계속 지금까지의 강의에서도 그랬듯 복음 말해서 자유를 누리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선하셔서 늘 우리를 선대하십니다.
때로 우리 삶의 고난이 있죠.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건 오히려 행위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행위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행위언약 안에 있어라고 명시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내가 뭘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나한테 진노하시고 그죠 내가 뭘 잘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선이 대해주시고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근데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아 이 고난도 하나님께서 내게 선하게 아버지로서 때로는 회초리를 드시고 때로는 나를 강하게 키우시기 위해서 아버지로서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한 과정이다라고 생각하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요. 그리고 자기가 뭘 잘했다. 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무언가를 소위 자신의 생각에 기여했다고 느낀다 하더라도 자랑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자유하고 모든 것의 기쁨을 누리게 되죠. 이러한 복음의 은혜를 그리고 복음이 주는 이 언약의 사랑을 여러분들이 깊이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어 지금까지 이제 갈라디아에서 4장 전체를 다 살펴봤고요. 다음 주에는 이제 5장 1절부터 15절을 통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심화시켜서 이 결론을 좀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어 다음 주에 이제 5장 1절부터 15절을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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