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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강 춘추의 시작
1. 2개의 전시회
지난 주말에서 서울 시내 두 군데를 들렀다. 한 곳은 덕수궁이다. 지금 거기서 오르세 미술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은 프랑스의 기차역을 수리해서 미술품 박물관으로 만든 곳이다. 1980년대 개조를 해서 훌륭한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그곳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집중적으로 소장되어 있다.
오르세 미술관 : 1900년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세워진 파리의 기차역을 1980년대 미술관으로 개조하여 다기능 문화공간으로 활용. 인상파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장.
서울에서 전시회를 한 지 오래되었는데, 그래서 아실 분들은 아실텐데, 저도 미루다 가보았다.
또 한 군데는 예술의 전당이다. 지금 거기서 한국 서예 2000년전을 하고 있다. 제가 한문을 많이 쓰고, 다들 관심이 많은데, 너무 훌륭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거 같다.
오르세 뮤지엄에서 온 전시품도 물론 귀한 것이다. 하지만 그 나라의 국보급 문화재를 반출할 때, 절대로 A급의 문화재를 무차별하게 반출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와 있는 그림들을 보면, 불란서 작가의 그림 중에서 최고급품들은 안 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기는 사람들이 꽉꽉 차서 도대체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게 몇 십 점이 안 된다. 물론 외국 것이 귀해서 그러기도 하겠지만, 관객이 많았다.
반면에 한국 서예 2000년전은 세계적으로 명품 중에서도 최고 명품들만 수백점을 전시하고 있다. 난 그렇게 집약적으로 우리나라 서예의 명품들을 모아놓은 전시회를 못 보았다. 그렇게 엄청난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데, 텅텅 비어 있었다.
객관적으로 전시의 격으로 볼 때, 덕수궁 전시보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서예 2000년전은 훨씬 더 잘 짜여 있고, 명품이 많은 훌륭한 전시회다. 이건 절대로 내가 우리 것이라고 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박물관의 상식으로 볼 때, 누가 봐도, 비교가 안 되는 대규모의 전시회가 강남에서 열리고 있다.
2. 인상파
이것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해드리려고 한다.
덕수궁에 밀레의 작품도 와 있다. 밀레의 대표작은 만종인데, 이번에는 이삭줍기라는 게 와 있다.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 ~ 1875) : 노르망디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 쿠르베와 더불어 사실주의의 대가로 꼽힘.
인상주의 화가들 앞에 사실주의 작가들이 있다. 사실주의가 무슨 말이냐?
사실주의(realism) : 예술에 있어서의 사실주의란 현재적 삶과 그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묘사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예술운동으로서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와서 누드를 그려도, 과거의 이상화된 형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인간을 그렸다. 자기들이 실제로 자는 창녀를 그대로 그렸다. 실제적인 여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 시작한 게 사실주의다.
사실주의 이전의 누드는, 희랍여신상 조각에서 보여지듯이 이상화된 형상(Ideal Form)의 추구였다. 이러한 형상이론은 플라톤의 기하학주의적 이데아론과 상통한다.
밀레의 만종 같은 것을 보면, 이삭을 줍다가, 저녁에 성당 종이 울리니깐 기도를 하는 농부의 아주 평화스러운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층민의 모습을 살아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최하층의 농부가 저녁 어스름할 때, 아주 종일 힘들게 일을 하다가 지친 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이 소위 사실주의라는 것이다.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사실주의는 남들이 안 보는 비천한 세계를 많이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상파라는 게 나오는데, 이게 대단한 것이다.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당대의 광학이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대상은 빛의 반사에 의해 우리 감관에 주어지는 색깔들의 인상일 뿐이다. 그들은 이 인상을 그리고자 하였다.
근세로 오면 광학이론이 발달한다. 철학적으로 볼 때, 여기 모자, 목도리, 책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사실 여기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단지 빛을 통해서 반사되고 있는 것만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당대의 광학이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대상은 빛의 반사에 의해 우리 감관에 주어지는 색깔들의 인상일 뿐이다. 그들은 이 인상을 그리고자 하였다.
우리가 여기 뭐가 있는지 모른다. 떡인지 모자인지 모른다. 빛에 비치는 반사가 우리 망막에 들어오는 것이다. 빛에 반사되어 온 어떤 색깔만이 1차적으로 우리 망막에 들어오는 것이다. 눈으로 어떤 물체를 파악할 때, 눈에 색깔들만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망막에 나타나는 색깔의 인상만 들어온다.
만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감각은 마찬가지다. 직접적으로 그 자체를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한테는 감각의 소여만 들어온다. Sense data만 들어온다.
근세 인식론에서, 우리는 대상에 대해서 알 수 없고, 결국 대상에 대한 인상만을 알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적에, 우리들은 뭘 보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에서 들어온 인상만을 캐치하는 것이다.
인상이 나한테 들어와서 꽉 눌리는 것이다. 내 의식을 사진기와 같은 감광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감광판에 와서 impress된다.
im(밖에서 안으로) + press(누른다, 찍힌다) = impression(인상)
그런 인상만을 그리는 것이 인상파 화가 운동이다. 대상을 그리는 게 아니다. 그러니깐 어떤 화가들은 점으로만 또는 색깔로만 그림을 그린다. 형체는 그리지 않는다. 옛날에는 형체를 선으로 그렸다. 그런데 형체는 안 그리고, 인상만을 그렸다. 그래서 그 인상이라는 것은 점만으로 그린다.
쇠라(Georges Seurat, 1859 ~ 1891) : 인상파화가로 점묘법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킴. 대표작 『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쇠라’같은 사람은 많은 점으로만 그렸고, 세잔느, 마네, 모네, 이런 사람들은 그냥 색깔만 더덕더덕 칠해 간다. 어떤 색깔에 콘트라스트를 주어서 표현한다.
마네(Edouard Manet, 1832 ~ 1883) : 『불로뉴 항의 달빛』
모네 같은 사람은 수련 같은 그림으로 유명하다. 모네가 일본 것을 좋아해서, 일본식 가든에 다리도 만들어 놓고 살았다. 그 사람이 살던 집이 지금도 있다. 새벽에 본 자기의 인상, 느낌을 그리고 있다.
모네(Claude Monet, 1840 ~ 1926)
모네가 런던 브리지를 갔을 때, 황혼의 국회의사당에서 자기가 느꼈던 어리어리한 인상만을 그렸다.
그런 것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고, 이것이 나중에 상징주의로 넘어간다. 하여튼 인상파 화가의 운동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3. 왕희지
강남의 한국 서화 2000년전을 갔더니, 마침 그날이 마지막 날이었다. 이렇게 위대한 전시회를 몰랐다는 게 아쉬웠다. 그런데 다행히 관장님을 만났더니 연장전시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해드리려고 한다.
내가 칠판에 계속 한문을 쓴다. 이 강의를 듣는 분들은 다 한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다.
난 옛날에 글씨는 중국 사람들이 정말 잘 쓴다고 생각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게임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2000년 전시회를 가보고,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 선조가 그렇게 위대한 민족인줄 몰랐다.
심포니 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베토벤이 탁 나와야 한다. 그럼 서도(書道)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당연히 왕희지다.
왕희지(王羲之, 321 ~ 379) : 동진 시대의 서예가. 회계산음(會稽山陰) 출신. 정치가로서도 훌륭한 실적을 남김. 중국서체를 완성. 당태종이 애호하여 서성(書聖)으로 모시었다.
왕희지라는 인물은 4세기 위진남북조 때 사람인데, 글씨라고 하면 왕희지다. 왕희지 글씨를 보면 참으로 놀랍다.
중국의 서체라고 하면, ‘해서’라는 게 제일 먼저 성립되고, 거기서 예서, 초서가 나온 줄 아는데, 사실 해서가 제일 나중에 성립한 것이다.
해서(楷書) : 일점일획을 정확히 독립시켜 쓰는 서체. 정서(正書)·진서(眞書)라고도 한다. 진·한대의 예서(隸書)로부터 발전. 초당 삼대가, 우세남·구양순·저수량에서 완성.
그런 해서가 왕희지에 와서 완성이 되었다고 본다.
4. 우리의 서예사
우리나라의 서예 역사를 보자.
여러분들이 전시관에 들어서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 : 414년 장수왕이 세움. 1882년 일본인 발굴 보고. 길림성 집안시 사공리(四公里)에 위치. 높이 6.39m. 1,800여 글자.
실제로 대왕비를 가서 보시는 것보다, 글씨를 감상하려면 탁본을 봐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구려 시대 때부터 대단한 글씨를 썼다. 광개토대왕 비문부터 보면, 글씨에서 투박한 고서의 맛이 대단하다.
비문 내용에 얽긴 여러 가지 해석의 문제라든가, 일본사람들이 왜곡을 했다는 이야기는 접어 둔다.
신묘년(辛卯年) 기사 부분을 일본인들이 탁본하면서 "倭(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쳐부셨다"는 식으로 왜곡시켰다. 지금까지도 이것은 학계의 논쟁으로 남아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으로 시작을 해서, 보통 신라 시대 때 유명한 서예가로 김생을 들 수 있다.
김생(金生, 711 ~ ?) : 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 고려시대 문인들이 그를 해동제일의 서예가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오면 탄연이 유명하다.
탄연(坦然, 1070 ~ 1159) : 고려시대의 고숭. 성은 손씨(孫氏). 호는 묵암(默庵). 왕희지 필체를 고려인 고유서법으로 재창조.
우리나라 2000년 역사를 통해서, 내가 보기에 시서화의 최고봉에 달한 사람은 안평대군이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정말 대단하다.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한다.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 ~ 1453) : 세종의 셋째아들. 이름은 이용(李瑢).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다. 황보인·김종서와 함께 수양대군과 대립. 계유정난 이후 사사됨.
김생이나 탄연은 모두 왕희지체를 갖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려말기부터 왕안합체라는 것이 들어온다. 왕희지와 안진경의 서체가 합쳐진 서체이다.
왕안합체(王安合體) : 동진 왕희지와 당나라 안진경의 서체의 느낌을 조화시킨 서체. 고려에서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이런 서체의 흐름이 우리나라에 있었다.
안진경은 당나라 사람으로, 글씨가 똥똥하고 투박하고 소박하다. 아주 독특하다.
안진경(顔眞卿, 709 ~ 785) : 성당(盛唐)의 절개 드높은 정치가며 서예가. 두툼하고 박력있는 서체를 창안. 구양순·우세남·저수량과 함께 당사대가로 꼽힘.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진경체에 왕희지의 어떤 맛을 가미해서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왕안합체다.
고려 말에서 조선조 초에 주자학이 나오면서, 글씨에 대한 생각도 변해간다. 주자의 신유학 사상권에서 나온 사람이 그 유명한 조맹부라는 사람이다.
조맹부(趙孟頫, 1254 ~ 1322) : 원나라 사람. 오흥(吳興)출신. 자는 자앙(子昻). 그 서재를 송설재(松雪齎)라고 불렀다. 화려한 연미(燕尾)의 서체
조맹부라는 사람의 글씨체는 송설체라고 한다. 조맹부의 근본도 역시 왕희지다.
조선조 초기에 오면 조맹부체가 유행한다. 송설체는 글씨가 아주 화려하다. 연미스럽다. 제비 꼬리가 날아가는 듯하다. 아주 장쾌하다. 이게 왕실 황족들의 취미랑 맞아떨어져서, 조맹부체를 좋아하게 된다.
내가 보기엔, 조맹부보다 안평대군의 글씨가 더 좋다. 안평은 세종의 3째 아들이다. 첫째가 문종이고, 둘째는 세조가 되었다. 세조랑 안평대군이 싸움을 해서 결국 세조가 안평대군을 죽인다. 강화로 유배했다가 결국 죽인다. 세조라는 사람이 나쁜 짓을 많이 했다. 안평대군은 정말 탁월하다. 시서화의 3절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퇴계 선생은 안평대군의 글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화려해서 공부할 때 방해가 된다고 한다.
이황(李滉, 1501 ~ 1570) : 호는 퇴계(退溪). 신유학을 조선사회의 맥락에서 재해석하여 집대성. 퇴계의 도학풍 이후에는 서체가 소박·간결한 마음의 표현으로 변모한다.
글씨라는 것은 마음 공부의 표현이면 된다. 알아보면 되었지, 글씨 자체를 그렇게 잘 쓰려고 공력을 들일 필요는 없다. 그렇게 화려하고,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글씨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도학자들은 소박한 마음의 표현이면 족하다고 본다. 이런 것이 퇴계 선생의 글씨관이다.
그 뒤로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로 유명한 양사언과 같은 사람은 도가적 풍이 들어난다. 초서로 유명하다.
양사언(楊士彦, 1517 ~ 1584) : 조선 전기의 서예가. 1546년 문과급제. 8고을 수령을 지냄. 황기로와 함께 초서에 뛰어났다.
황기로 같은 분의 초서도 대단하다.
황기로(黃耆老) : 16세기의 초서 명가. 호는 고산(孤山).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사양했다. 낙동강 서쪽에 매학정(梅鶴亭)을 짓고 신선처럼 살았다. 해동초성(海東草聖)
초서(草書) : 점획을 생략하여 연결된 선으로 빨리 쓰는 서체. 예서에서 탈화되어 한나라 초기부터 이미 발달하였다. 후한 말에 상당히 정비됨.
그렇게 우리나라 글씨는 조선조 중기에 이르러, 도학자의 정신을 받아서 과거의 왕희지체를 다시 복원하되, 화려하지 않게 우리 감각을 가지고 다시 완성한 사람이 한석봉이다.
한호(韓濩, 1543 ~ 1605) : 선조 연간을 대표하는 명서가. 호는 석봉(石峰). 명종 22년에 진사합격. 사자관(寫字官)으로 활약. 조맹부의 송설체를 벗어나 왕희지의 고법을 추구, 자기서체를 이룸
한석봉의 글씨를 보면 대단하다. 중국 사람의 글씨 이상이다. 그 뒤로 여러 사람들이 나온다. 그러다 그 유명한 송시열 선생이 나온다.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 : 호는 우암(尤庵). 본관은 은진. 노론의 영수. 율곡학문의 적통. 송준길(宋浚吉)의 서체와 함께 양송체(兩宋體)로 유명.
그리고 허미수의 아주 독특한 전서가 나온다.
허목(許穆, 1595 ~ 1682) : 호는 미수. 청남(淸南)의 영수. 전서의 동방 제1인자
그 다음에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가 나온다.
윤순(尹淳, 1680 ~ 1741) : 호는 백하(白下). 미불·문징명·동기창의 서법을 구사
이광사(李匡師, 1705 ~ 1777) : 호는 원교(員嶠). 윤순의 문하생. 정제두에게서 양명학을 배움
그런 사람들이 활약하다가, 그러한 모든 서도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모두 요약해서 완성한 사람이 추사 김정희다.
김정희(金正喜, 1786 ~ 1856) :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1819년 문과 급제. 이조참판에 이름. 금석학에 뛰어났다.
이번 전시회에 가서 추사 글씨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보셔야 한다. 추사는 너무 잘 알지만, 추사 근처에 이산만 같은 사람도 있다.
이삼만(李三晩, 1770 ~ 1845 ?) : 호는 창암(蒼巖). 정읍출생으로 전주에 살면서 서예에 몰두. 독특한 자기 필법의 초서를 잘 썼다.
추사를 낳은 그 시대에 강세황이라든가 이인상, 신위 같은 사람도 있다.
강세황(姜世晃, 1712 ~ 1791)
이인상(李麟詳, 1710 ~ 1760)
신위(申緯, 1769 ~ 1845)
그리고 여러분이 북학파로 아는 박제가 선생의 글씨도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추사 글씨가 나온 맥이 보인다.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 : 호는 초정(楚亭). 박지원·이덕무·유득공 등의 북학파와 교류. 글씨는 예서풍을 띠며, 구양순·동기창의 행서를 잘썼고, 추사체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
추사 이후에는 오늘날까지 추사를 뛰어넘는 대가는 없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에서 여러분들이 꼭 보셔야 될 것이 대원군 글씨다.
이하응(李昰應, 1820 ~ 1898) : 호는 석파(石坡).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며 서민의 삶을 체험하고 서화를 익혔다. 그 난초는 천하 제일품이다. 글씨도 추사체에 뒤지지 않는 자기 서풍이 있다.
대원군 글씨가 물론 추사체의 영향을 받았지만, 나는 대원군의 글씨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추사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떨어지지 않는다. 자기체가 있다.
그리고 유명한 김옥균의 글씨도 아주 좋다.
김옥균(金玉均, 1852 ~ 1894) : 호는 고균(古筠). 본관은 안동. 오경석의 제자. 갑신정변 3일천하의 주인공.
최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서예사를 한 눈으로 보면, 우리 민족이 글씨를 통해서 얼마나 자기 표현을 멋있게 해왔는지 알 수 있다. 선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전시회다.
앞으로 계속 열릴 거니깐, 우리 국민들이 우리 것을 보고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이번에 나온 것 중에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라는 게 있는데, 원주에 가면 있는 어마어마한 비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 강원도 원성군 부론면 법천리 소재. 전체 높이 4.55m.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석비(1085년)
탁본이 와 있는데, 가서 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위대한 글씨들이다.
하여튼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전시회는 우리 국민들이 꼭 봐야한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관람을 바란다.
5. 삼환
오늘은 위정편 5번째 장을 공부하기로 하겠다.
爲政 第 5
孟懿子問孝, 子曰 : 無違, 樊遲御,
子告之曰 :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樊遲曰 : 何謂也?
子曰 : 生, 事之以禮; 死, 葬之以禮, 祭之以禮.
이게 오늘 말씀드릴 새로운 장이다.
여기에는 인물들이 아주 복잡하게 등장한다. 세 사람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맹의자라는 사람과 번지라는 사람, 그리고 공자다.
맹의자(孟懿子) : 맹희자(孟僖子)의 아들. 공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삼환 맹손씨 가문의 대부.
번지(樊遲) : 46세 연하의 말년 제자. 약관의 나이에 계씨 밑에서 벼슬함. 공자의 수레몰이 역할을 자주함.
이 세 사람이 만들어낸 하나의 드라마로 구성되어 있다.
맹의자라는 사람은 맹손씨 가문의 수장격인 사람이다. 그 당시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라는 세 대부 가문이 노나라를 실제로 지배하고 있었다.
삼환(三桓) :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세 가문을 지칭. 맹손씨(孟孫氏)·숙손씨(叔孫氏)·계손씨(季孫氏).
이 사람들의 족보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면, 세 가문의 시조는 노나라 환공의 세 아들이다. 그래서 이것을 삼환(三桓)이라고 부른다.
삼환이 어떻게 해서 노나라의 실력자로서 노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공자가 살았던 시대가 어떤 시대고, 어떠한 시대구조 속에서 어떠한 노력을 하려고 했는지, 공자의 정치 상황을 알 수 있다.
6. 춘추와 노주공세가
노나라의 역사를 지금부터 공부해 보기로 한다.
지금 우리가 낯선 사람을 만났을 적에 ‘나이가 몇 살이십니까?’라고 하기 보다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한다. ‘당신은 태어나서 봄, 가을을 몇 번을 거치셨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다.
춘추라는 게 환절기다. 여름이나 겨울보다는 시간의 변화를 가장 강하게 느낄 때이다. 겨울에는 동면하고, 여름에는 더워서 나른하게 지낸다. 옛날 사람들은 봄, 가을이라는 것을 히스토리, 역사라는 말로 썼다. 시간의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있으니깐 그렇게 했다. ‘춘추가 몇이십니까?’ ‘당신은 살아서 몇 번의 봄가을을 거치셨습니까?’ 그게 바로 역사를 묻는 것이다.
노나라에서는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춘추’라고 불렀다. 각 나라마다 자기 나라의 역사서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내 호가 도올(檮杌)이다. 도올은 신화에 나오는 어떤 황제의 아들 이름으로 나온다.
顓頊氏有不才子 ....... 天下之民, 謂之檮杌
황제(皇帝)의 손자인 전욱의 한 아들의 이름이 도올이었다.
<춘추좌씨전> 문공 18년
또한 초나라에는 도올이라는 역사서가 있었다고 한다.
時亡然後, 春秋作. 晉之乘, 楚之檮杌, 魯之春秋, 一也.
[맹자] [이루] 하 21
초지도올(楚之檮杌)이라고 하는데, 도올이라는 것도 역사책의 이름이다. 제가 그런 저런 이유로 제 호를 딴 것이다.
노나라의 역사서를 춘추(春秋)라고 부른다.
춘추라는 책은 은공(隱公)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노나라는 원래 주공이 분봉된 나라라고 했다. 그 주공의 아들인 백금이 실제로 노나라에 와서 제1대 제후가 되었다. 백금으로부터 14대에 이르는 사람이 은공이다. 이 은공으로부터 춘추가 기록되고 있다.
은공(隱公) : 노나라에 봉하여진 주공(周公)의 아들. 백금(伯禽)이 노나라의 제1대 군주다. 세는 방법에 따라 은공은 14대로, 혹은 13대 군주로 기술된다.
그리고 이 춘추를 공자가 편찬했다고 한다.
춘추(春秋)
은공 원년(BC 722)부터 애공 14년(BC 481)까지 12공 242년간의
노나라 역사를 춘하추동으로 기술한 책.
춘추는 애공 14년에 끝나고 있다. 은공 원년이 BC 722년이고, 애공 14년이 BC 481년이다. 그 사이의 역사를 매년 춘하추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춘추는 공자 이전의 역사를 상세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런데 가장 종합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노나라의 역사를 잘 알 수 있는 자료는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이다.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 사마천 『사기』의 제33권. 노나라의 통사에 해당된다. 사건들이 드라마틱하고 포괄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 세가는 노나라의 역사만을 사마천이 모아서 잘 기술을 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제가 지금 춘추와 세가의 자료를 종합해서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해 드리는 것이다.
7. 혜공과 서자 식(息)
은공(隱公)의 아버지가 혜공(惠公)이라는 사람인데, 원래 은공이라는 사람은 서자 출신이다. 은공의 원래 이름은 식(息)이다. 옛날에는 이름들이 하도 많아서 복잡하다.
식(息) : 은공의 이름. 혜공(惠公)의 천첩(賤妾)인 성자(聲子)의 소생
그런데 혜공은 이 서자 식(息)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서자 식(息)이 결혼할 나이가 차서, 색시를 송나라에서 데려왔다. 송나라는 성이 자(子)씨이다. 제나라는 강태공이 봉해졌다. 그래서 제나라는 강(姜)씨다. 송나라는 은나라의 후예라고 했다.
옛날에 시경에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송나라 자씨만을 얻어야 부인이냐? 고기를 먹으면, 황하의 잉어만 먹어야만 고기냐? 아무거나 먹어도 다 고기지. 새악시를 얻는데 꼭 제나라의 강씨녀만 새악시냐?’ 하는 노래가 나온다.
豈其取妻, 必宋之子.
새악시를 얻는데 송나라의 자씨녀만 새악시냐?
豈其食魚 必河之鯉.
먹는 고기라면 어찌 황하의 잉어만 있으리오?
豈其取妻, 必齊之姜.
새악시를 얻는데 꼭 제나라의 강씨녀만 새악시냐?
그러니깐 송나라 자씨녀와 제나라 강씨녀가 이뻤다는 것이다. 그 당시 자씨녀와 강씨녀는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로 유명했다.
아무튼 서자 식(息)이 송나라에서 송녀를 하나 얻어왔는데, 혜공이 보니깐 너무 아름다웠다. 며느리로 데려왔는데 너무 예뻐서 혜공이 가로 챈다.
옛날에는 그런 게 참 많았다. 양귀비의 경우도 당현종이 처음에 며느리로 데려왔었다. 며느리로 데려왔다가 워낙 예쁘니깐 부인으로 삼은 것이다.
백낙천의 장한가를 보면, 양귀비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楊家有女初長成, 養在深閨人未識.
양씨 가문에 갓 장성한 딸이 있었으나, 깊숙한 규방에서 자라니 누구도 알지 못했소.
....
回眸一笑百媚生, 六宮粉黛無顏色。
눈웃음 한 번에 온갖 아름다움이 살아나, 여섯 궁궐 후궁들의 안색을 가렸다오.
양귀비가 눈동자를 한 번 돌려서 생긋 웃으면, 온갖 교태가 생겨나서, 육궁(六宮)에 있는 모든 화장을 한 여인들이 안색을 잃었다고 한다. 그렇게 양귀비의 미모를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당현종이 며느리를 자기 부인으로 가로챈 것이다.
마찬가지로 혜공도 서자 식(息)이 송나라에서 여자를 하나 데려왔는데, 너무 예뻤다. 그래서 자기가 데리고 산다. 서자 식은 중간에서 붕 떴다.
8. 은공의 죽음
그래서 혜공은 송녀하고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이 윤(允)이다.
윤(允) : 훗날의 환공(桓公). 혜공과 송녀 사이에서 난 아들. 윤이 태어나자 송녀는 정부인으로 승격되었다.
그러고 나서 결국 혜공은 돌아가신다. 윤이 어릴 때였다. 신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해서, 아직 윤의 나이가 어리니 임시 섭정으로 식을 모시기로 결정한다. 식은 서자지만 인품이 좋았다. 그래서 식은 은공이 되었다.
혜공은 윤(允)한테 왕위를 주려고 했기 때문에 식은 자기 아버지의 의지에 반해서 왕이 된 것이다. 신하들이 떠받들어서 왕이 된 것이다.
은공은 사람이 착했다. 그래서 자신은 윤을 대신해서 섭정을 한다고만 생각했지, 자기가 왕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상당히 조용하게 살았다.
이런 관계에서는 항상 악인(惡人)이 태어나게 마련이다. 왕실의 공자 중에 휘(揮)라는 놈이 은공한테 가서 속삭였다. ‘당신이 좌우지간 왕이 되었는데, 왜 윤을 살려둡니까? 어린애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면, 당신이 왕이 될 게 아닙니까? 제가 당신을 위해 죽여드릴테니, 대신 재상 자리를 주십시오.’라고 한다.
百姓便君, 君其遂立.
백성들이 당신을 받들었기에, 당신께서는 마침내 자라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吾請爲君殺子允, 君以我爲相.
저는 당신을 위하여 윤을 죽이고자 하니, 당신께서는 저는 재상으로 삼아주십시오.
그런데 은공이라는 사람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되겠냐? 나는 토구라는 곳에 내가 나중에 살 움막까지 지어놓았다. 나는 왕이니 이런 거 싫다. 나는 윤이 조금만 장성해서 왕위를 맡을 만하면, 윤한테 왕위를 주고, 토구라는 시골로 내려가 가서 토막에서 살 생각이다. 그러니깐 아예 그런 말을 하지도 말라.’고 한다.
今允長矣
이제 윤이 성장하였으니
吾方營菟裘之地而老焉
나는 바야흐로 토구(菟裘)의 땅에 집을 짓고 노년을 준비할 것이며
以授子允政
아들 윤(允)에게 정권을 넘겨줄 것이다.
그러니깐 이 휘(揮)라는 놈은 윤(允)을 죽이겠다고 발설을 한 이상, 불안했다. 윤한테 자기가 한 말이 들어가면 앞으로 어떡하겠냐? 앞으로 윤이 왕이 될 건데 너무도 불안했다. 결국 이 휘(揮)라는 놈은 참지를 못하고 그날로 윤(允)한테 간다.
‘태자님, 태자님. 지금 큰일 났습니다. 은공이 이제 섭정을 거두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당신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큰일 났습니다. 저한테 허락만 해주면, 제가 은공을 처치하겠습니다. 대신 재상 자리나 주십시오.’라고 한다.
隱公欲遂立, 去子, 子其圖之
은공이 드디어 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그대를 죽이려고 하니, 그대는 이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請爲子殺隱公
그대를 위하여 은공을 살해하겠습니다.
사실 은공 입장에선 윤(允)과의 관계가 묘하다. 왜냐하면 사실 윤은 이복동생이다. 그리고 자기 부인이 되려고 했던 여자가 낳은 아들이다. 아주 관계가 묘하다.
아무튼 휘의 거짓말에 어린 윤은 무서우니깐, 은공 살해를 허락하고 만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의 형뻘이자 아버지뻘이면서, 자기 생명을 끝까지 보호해주던 은인인 은공을 죽여 버리고 왕위에 오른다.
이 아이가 바로 환공(桓公)이다.
立子允爲君, 是爲桓公.
윤을 자리에 올렸으니, 이가 곧 환공이다.
9. 환공과 문강
여기서부터 환공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서막이다. 그렇게 해서 환공이 등장했다. 혜공, 은공, 환공까지 왔다. 여기서 한참을 가야 한다.
환공은 어려서 등극을 했다. 등극하고 3년 후에 결혼을 한다. 앞에선 송나라 자씨를 데려왔으니깐, 이번에 제나라 강씨를 데려온다.
그 당시 노나라 위에 제나라가 있었다. 제나라는 그 당시 강성한 나라였다. 노나라는 어차피 제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나라였다. 국경이 접해있었다. 그래서 제나라와 화약(和約)도 맺을 겸 해서 제나라의 강씨녀를 데려온다. 그 여자가 유명한 문강(文姜)이라는 여자다.
문강(文姜) : 강국 齊나라의 양공(襄公)의 여동생. 환공 3년에 魯나라 환공에게 시집옴. 유명한 음녀인데, 그녀를 풍자한 노래들이 『시경』에 다수 남아있다.
이 문강이라는 여자는 천하의 요녀다. 문강을 둘러싼 이야기가 너무 많다. 시경에 나오는 제나라의 노래를 제풍이라고 하는데, 나와 제 처는 그런 주석을 배격하지만, 한대 주석가로부터 주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풍을 문강(文姜)에 관한 노래로 해석하고 있다.
魯道有蕩, 齊子由歸.
노나라의 길은 넓기도 해라, 제나라 새악시가 이 길로 시집왔네.
旣曰歸止, 曷又懷止.
이미 시집을 왔는데 왜 또 옛집을 그리워하누.
-제풍 [남산]
시경에 제나라의 문강을 풍자한 노래가 잔뜩 실릴 만큼 문강에 대한 소문은 많다.
아무튼 문강은 제나라 양공의 누이동생이다. 그런데 시집오기 전부터 자기 오빠하고 간통을 한 사이였다. 아주 깊게 사랑을 하는 사이였다. 아주 애절하게 사랑을 해서, 시집을 올적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왔다.
그런 문강은 환공하고 결혼을 해서 3년 후에 아이를 하나 낳는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아버지 환공하고 태어난 생일이 똑같았다. 그래서 이름을 동(同)이라고 지었다.
동(同) : 환공과 문강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훗날의 장공(莊公). 태어난 날이 환공 생일과 같아 이름을 동(同)이라 했다.
환공이 등극한지 3년 후에 결혼을 하고 3년 후에 아이를 낳은 것이다. 그리고서 문강이라는 여자는 노나라에서 계속 산다.
환공 18년에 문강의 부모가 다 돌아가셨는데, 문강이라는 여자가 자기 친정엘 가고 싶어 했다. 자기 오빠인 양공이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고 한다. 그래서 환공이 허락을 한다.
그런데 신수(申繻)라고 하는 노나라의 대부가 노나라 예법에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친정에 가도 되지만, 지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오빠만 있는데, 근친을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반대를 한다.
신수(申繻)
노나라의 대부. 환공이 문강과 함께 제나라로 근친(覲親)가는 것을 만류한 충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공과 문강은 수레를 타고 제나라로 간다. 양공이 둘을 맞이한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제나라 양공은 문강에게 ‘옛날에 살던 궁궐이 보고 싶겠구나. 빨리 가 보자’고 한다. 문강을 데리고서 그날로 별궁으로 가서, 그 동안 못 놀았던 회포를 밤새도록 진탕 푼다.
한편 환공은 뭔가 의심스러워서 염탐을 보냈다. 사정을 알아보니깐, 그날 밤에 제 양공하고 문강이 별궁에서 같이 잤다는 게 들통 난다.
환공은 제나라 임치(臨淄)에서 하룻밤을 멀쑥하게 보내고, 다음날 문강이 돌아오자, ‘너 어젯밤에 어디 있었냐?’ 하고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네 오빠랑 같이 잤지?’ ‘오빠가 어디서 잤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이렇게 싸움을 하면서 자꾸만 추궁을 하니깐, 여자는 울어버리고 만다.
제나라 양공은 불안한 마음에 문강이 돌아갈 적에 염탐을 같이 보낸다. 그래서 환공한테 자신들의 일이 들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거 안 되겠다.’해서, 제나라 양공은 엄청난 잔치를 연다.
夏四月丙子(하사월병자) 齊襄公饗公(제양공향공)
여름 4월 병자일에, 제나라 양공이 환공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리고 환공을 제나라의 금준미주(金樽美酒)로 대접을 해서 술에 만취하게 만든다. 그 다음에 양공은 팽생(彭生)이라고 하는 장사를 불러서 ‘저 놈이 술에 취하거든, 수레에 들어갈 때, 늑골을 으스러뜨려 버려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그날 밤에 술에 만취한 노나라 환공을 막사에 돌아가는 수레에 앉히면서 늑골을 으스러뜨려 버린다. 환공이 피를 토하니깐 수레에 앉히면서 거기서 죽여 버린다.
公醉, 使公子彭生抱魯桓公, 因命彭生摺其脅, 公死于車.
환공이 술에 취하자, 공자 팽생(彭生)을 시켜 환공을 부축하게 한 뒤, 그가 누운 틈을 타서 평생에게 늑골을 꺾으라고 명했다. 팽생이 환공을 수레에서 죽였다.
이게 ‘역사서’라든가 시(詩)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환공은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버렸다.
모처럼 친정에 가서, 자기 남편을 죽여 버린 문강은 노나라로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그러니깐 노나라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항의를 하니깐, 제 양공이라는 놈은 팽생이 나쁜 놈이라고 하면서, 팽생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죽여 버린다.
齊人殺彭生以說魯
제나라 사람들이 팽생을 죽여서 노나라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10. 장공
그렇게 하고, 바로 태자 동(同)이 등극을 하는데, 그게 바로 노나라의 장공(莊公)이다.
立太子同 是爲莊公.
태자인 동(同)이 자리에 오르니, 이가 곧 장공(莊公)이다.
문강은 제나라에 계속 머문다. ‘열국지’와 소설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여튼 문강은 노나라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제나라에 머문다.
이 장공(莊公)이라는 사람은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엄청난 효자였다. 말을 잘 들었다. 장공의 치세 기간 30여 년간 문강은 계속 멀리서 원격으로 노나라를 조정한다. 그래서 30여 년간은 제나라와 노나라는 비교적 별 마찰이 없이 지내는 역사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 장공이라는 인물이 죽을 때가 되어서 생겨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주 복잡한 문제가 일어난다.
문강은 자기 오빠인 제나라 양공의 딸인 애강(哀姜)을 장공(莊公)에게 시집보낸다. 애강이라는 여자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여자이다.
애강(哀姜) : 문강의 오빠이며 정부인 제 양공의 친딸. 문강의 아들인 노나라 장공에게 시집오다
이 장공과 애강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가 복잡하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알아야 삼환의 태동을 알 수 있다.
또한 환공의 아들로 장공 말고도 다시 세 아들이 있다. 그 아들들과 장공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이야기를 해야만 노나라의 역사가 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