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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 없는 가수 손인호의
‘해운대 엘레지’
부산 [해운대]에 가면 딸네 집이 있다.
그래서 방문할 때 마다 새벽에는 산책을 위하여 ‘해운대 백사장’을 찾는다.
그날도 백사장을 바라보며 소나무 숲을 걷는데 노래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해운대 엘레지’노래비였다.
백사장을 바라보고 있는 <해운대 엘레지> 노래비 가사 가운데 2절의
‘조각달도 흐르고’는 ‘기울고’가 맞고,
‘잘 있게나’는 ‘잘 있거라’
를 노래비 작업 중에 잘못 새긴 것이라고 손인호선생이 확인해 주었다는 말도 있지만 잘못되었다는 가사가 오히려 더 정감이 간다.
우리 대중가요에는 〈엘레지〉란 단어를 제목으로 활용한 노래가 많다.
‘용두산 엘레지’, ‘해운대 엘레지’, ‘황혼의 엘레지’, ‘남한강 엘레지’, ‘엘레지의 여왕’, ‘종로 엘레지’, ‘여의도 엘레지’, ‘용인 엘레지’, ‘조치원 엘레지’, ‘홍천강 엘레지’, ‘북녘 땅 엘레지’, ‘오봉산 엘레지’, ‘금오산 엘레지’, ‘압구정동 엘레지’, ‘청춘 엘레지’, ‘호숫가 엘레지’, ‘결혼의 엘레지’, ‘현해탄 엘레지’, ‘청량리 엘레지’, ‘부산항 엘레지’, 등등 그 수를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비가(悲歌)의 전형으로 ‘해운대 엘레지’의 배경이 된 해운대!
엘레지(elegy)는 서양에서 문학이나 악곡에서 슬픔을 담은 노래로 비가(悲歌), 또는 애가(哀歌)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 대중가요에는 슬픔을 담은 것이 대다수이니 거의 엘레지의 특성을 지닌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슬픔이란 대개 이별이나 실패, 좌절 따위에서 비롯되는 원초적 감정이니 그것은 깨어진 사랑이나 가족이산, 질병과 죽음 때문에 빚어진 쓰라린 결과물이다.
특히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독재 등으로 모진 고초와 시련을 겪은 우리 현대사에서 슬픔은 하나의 운명처럼 수반되는 필수항목이었다.
눈물과 한숨, 통곡은 한 날 한 시도 마를 날이 없었다.
다소 잔잔해졌는가 하면 또 다른 충격적 슬픔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우리 대중가요의 노랫말과 정서가 그토록 슬픔과 애잔함이 묻어 있는 것은 민족적 삶의 토양이 늘 불행의 그늘 속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가요 속의 슬픔은 인간의 삶을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극적 현실을 딛고 넘어서서 속히 극복하도록 추동하는 힘이 들어있다.
그 원리는 초상집에서 실컷 울고 난 뒤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 즉 여과나 정화의 기능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엘레지 형식의 노래들이 주로 이 슬픔을 조절하거나 걸러내 주는 여과 정화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눈여겨보자!
■해운대를 노래한
부산 대표 ‘엘레지’
부산 테마 노래 중 제목에 엘레지가 들어가는 대표곡은 ‘용두산 엘레지’와 ‘해운대 엘레지’다. 두 작품 모두 사랑의 추억과 이별의 쓰라림을 담아내고 있는데 그 역사적 배경에는 6.25전쟁과 피란살이의 시련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해운대 엘레지’에서는 비가의 전형적 특성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가고 나만혼자 외로이
그때 그시절 그리운 시절 못잊어 내가 운다
♩♪♬ ~ ♩♪♬ ~
울던 물새도 어디로 가고 조각달도 흐르고
바다마저도 잠이 들었나 밤이 깊은 해운대
나는 가련다 떠나가련다 아픈 마음 안고서
정든 백사장 정든 동백섬 안녕히 잘 있게나
♩♪♬ ~ ♩♪♬ ~
청년시절 사랑의 맹세와 다짐은 얼마나 불처럼 뜨겁게 타올랐던 것인가?
그러나 모든 것을 허물고 파묻어버리는 가혹한 세월 속에 그 굳은 맹세는 덧없는 한 모금 담배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느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났거나 아니면 변심과 배반 때문에, 혹은 생활고로 말미암은 불가피한 작별이 두 사람을 아주 남남으로 갈라놓고 말았다.
‘해운대 엘레지’의 가사에는 이러한 사랑의 덧없음과 애타는 미련이 절절히 투영되어 있다.
이 모든 표현이 바로 부산의 명소 해운대를 공간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부산의 작사 · 작곡가가 만든 노래
이 노래의 작사는 함북 청진 출생으로 부산에 거주하던 작사가 한산도가 맡았다.
작곡은 부산 출생의 작곡가 백영호가 담당하였다.
백영호는 당시 부산의 빅토리레코드사를 직접 운영하며 수준 높은 대중가요를 많이 발표하고 있었다.
노래는 평북 창성 출신의 실향민가수 손인호가 취입하였다.
1958년에 발표된 이 곡은 작곡가 백영호가 노래를 부를 가수로 손인호를 미리 정해놓고 그의 음색과 창법에 맞춰서 곡을 썼다.
백영호가 작곡한 150여곡 중에서 유일하게 노래비가 세워진 곡이기 때문에 특별한 노래다.
해운대는 본래부터 한국의 대표적 명승지였지만 이 노래 한 곡으로 전국의 청춘남녀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선망의 장소로 우뚝 자리를 잡았다.
뿐만 아니라 해운대 백사장과 동백섬, 주변의 명소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효과를 자아내었다.
한반도 남쪽 명소의 웬만한 곳은 신라시대 문인이자 학자였던 ‘최치원’의 발자취와 연관이 있다.
‘해운대’란 지명도 최치원이 이곳 경치에 반해서 여러 날 머물던 중 문득 얻은 착상으로 지었다.
이 해운대는 부산의 다른 명소들인 태종대, 몰운대, 신선대, 오륜대, 의상대, 겸효대, 강선대와 더불어 부산을 한층 분위기 있게 꾸며주는 여덟 군데 절경 중 하나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유명한 온천, 해수욕장, 고급 관광호텔들이 즐비하여 전국 최고의 관광지로 굳게 자리를 잡았다.
개발도 눈부시게 이루어져서 2001년에는 벡스코가 준공되었다.
2005년에는 ‘APEC정상회담’이 동백섬에서 개최되면서 국제컨벤션 중심지로도 그 명성을 더하고 있다.
이제 해운대는 신시가지가 조성되어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한층 더하고 있다.
탁 트인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대단위 고층아파트가 조성된 이곳은 해운대 관광특구의 배후 주거지역을 화려하게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해운대의 가장 큰 장점은 일 년 열두 달 언제나 관광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에 열리는 해운대 백사장의 [해맞이 축제], 한겨울 추위에 온몸을 바다로 풍덩 던지는 [북극곰 수영대회], 6월에는 [모래축제], 8월에는 불꽃놀이로 밤을 밝히는 [바다축제], 가을에는 그 명성 높은 [부산국제영화제] 등이 쉼 없이 열려 불야성을 이룬다.
그 때문에 주말과 휴일, 축제가 열리는 계절에는 심각한 교통체증으로 불편을 겪는다.
♣ 얼굴 없는 가수 ‘손인호’는?
그는 1926년에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출생하였다.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유아기를 보내다가 ‘수풍댐’ 건설로 고향이 물에 잠기자 1938년에 만주로 이주하여 살았다.
해방 후 귀국을 한 1946년에 ‘관서콩쿨대회’에서 1등을 하였다.
그 후 심사위원의 권유로 남으로 내려온 후 KPK 악단에서 가수 생활을 했다.
한국 전쟁을 전후해서는 ‘녹음기사’로 전업하였다.
손인호는 노래를 부르면서 공연무대에는 서지 않아서 얼굴 없는 가수라고 하였다.
취입을 해서 발표는 했지만 무대에서 관중들을 직접 마주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공보처 영화녹음기사’라는 공무원 신분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54년에 작곡가 박시춘에게 <나는 울었네>와 <숨쉬는 거리> 두 곡을 받아 취입한 것이 크게 히트하였다.
이후 그는 <오아시스 레코드>에서 <비 내리는 호남선>을 발표하였다.
계속해서 <울어라 키타줄>, <사랑찾아 칠백리>, <하룻밤 풋사랑>, <이별의 성당고개> 등을 히트시켰다.
1957년 말에 <도미도레코드>로 이전하여 <한많은 대동강>, <짝사랑>, <물새야 왜 우느냐>, <이별의 부산항>, <청춘등대>, <향수의 블루스>, <동백 꽃일기>, <남원땅에 잠들었네> 등의 히트곡을 연이어 쏟아내었다.
<빅토리레코드>에서는 <해운대 엘레지>를 발표하여 크게 히트시켰다.
그는 1960년대 중반까지도 <돌아가자 남해 고향>, <한 많은 명사십리> 등을 취입하여 히트시켰다.
1980년대 중반까지 영화녹음 작업을 했으며 2013년까지 계속 가요무대에 출연하다가 2016년에 8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 ‘동백섬’은?
‘해운대 엘레지’ 가사 2절에 나오는 동백섬은 부산기념물 제46호다.
모양이 다리미를 닮았다고 해 ‘다리미 섬’이라고도 한다.
퇴적작용으로 이제는 육지가 된 동백섬이 옛날엔 진짜 섬이었다는 말이 무색하다.
과거엔 동백나무가 많았으나 지금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섬 안엔 동백공원이 있고 공원 안엔 최치원의 동상과 시비가 있으며, 동쪽 바위벽에 ‘해운대(海雲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동백섬이란 이름은 섬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이른 봄에는 떨어진 꽃잎이 땅에 10㎝나 쌓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말발굽에 밟혔다고 한다.
동백섬이란 명칭을 가진 섬은 우리나라에 여럿 있었으나 지금은 해운대 동백섬이 유일하다.
이곳에는 200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개최됐던 ‘누리마루 APEC하우스’가 현대사의 증거물로 소나무 숲속에 오롯이 남아 있다.
♣ ‘해운대’와 관련된 노래는?
해운대와 관련된 노래는 수십 여곡이 된다.
그 첫 번째 노래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선우일선의 목소리에 태워진 ‘조선팔경가’다.
‘해운대 저녁달은 볼수록 유정해라’
라는 가사가 담긴 노래다.
이후 이미자의 <비 내리는 동백섬-1968>을 선두로 부산 토박이 작곡가 김종유의 <해운대 연가-1970>, <해운대야 말해다오-1970> 현 철의 <추억의 해운대-1971> 등 해운대 시리즈가 줄을 잇는다.
이후 1975년 ‘꽃피는 동백섬에’로 이어지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 절정에 오른다.
이후 2003년에는 최백호가 ‘청사포’를 자작곡으로 발표하면서 화룡 점정한다.
‘해운대 엘레지’의 작사가 한산도의 작품이어서 인지 문주란의 <찾아온 해운대>는 옛사랑의 흔적과 미련에 다시 흐느끼며 부르는 <해운대 엘레지>의 속편처럼 들린다.
그대 얼굴을 그대 모습을 눈시울에 그리며
나홀로 왔네 찾아서 왔네 추억맺힌 해운대
물새 소리도 파도 소리도 그 옛날과 같건만
그리운 님은 가고 없더라 찾을 길이 없더라
♩♪♬ ~ ♩♪♬ ~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연 백사장에 남기고
못다한 사랑 저주하면서 헤어지던 그 날 밤
생각을 하면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미련에
저달을 보고 저 별을 보고 밤을새워 울었소
♩♪♬ ~ ♩♪♬ ~
이제 해운대는 부산의 외진 해변이 아니다.
특급열차 통일호를 타고 일생일대의 신혼여행을 오는 관광지도 아니다.
‘신혼여행’
해외여행은 일반화가 되기 전이라 1979년에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해운대로 신혼여행을 간 일이 아득한 추억 저편에 있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올 수 있는 남쪽 해변일 뿐이다.
“부산에 가자”는 말은
“해운대 가자”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K-POP의 위력은 깍두기 머리를 한 중국 사람뿐 아니라 히잡을 쓴 이슬람 여인까지 해운대의 넓은 바다를 찾도록 했다.
해운대는 지금 방풍림처럼 둘러싼 마천루의 경쟁이 한창이다.
‘센텀’이란 이름이 붙으면 아파트는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마린시티’, ‘엘시티’라는 익숙한 이름으로 신흥부촌 해운대가 되었다.
지진과 태풍으로 시달린 바다 건너 일본의 갑부들이나 전염병과 미세먼지의 기습으로 혼비백산한 중국의 호방한 갑부들은 해운대의 로얄층을 찜한다.
내국인도 마찬가지다.
구입한 순간부터 애물단지가 되는 별장 시대가 아니라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최고급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보유세로 때려잡으려는 권력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쉬운 최신식 ‘나만의 성채’다.
38층 풀이나 스파에서 내려다보는 해운대 바다!
해운대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는 발아래 저 수많은 인파를 거느린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상위 1%의 사람들이 외부와의 철저한 차단 속에서 즐기는 ‘그들만의 리그’
‘신귀족’이 된다는 ‘으쓱함’은 높은 분양가가 문제가 아니다.
발아래 세상을 깔고 보는 우월한 ‘하이엔드’ 문화가 어찌 유혹이 되지 않으랴?
해운대 ‘엘시티’에서 동쪽으로 100여 미터를 가면 ‘미포항’이 있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에서 가장 뜨는 해운대와 연결된 ‘미포항’은 작은 항구다.
“무역선 왔다 갔다 부산항구 제2부두…….”
로 이어지는 [아메리칸 마도로스]가 아니더라도 제4부두까지의 부산항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노래가사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부산항은 제1부두에서 제4부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항구도 있다.
이곳 해운대에 가려서 이름조차 미미한 작은 항구 ‘미포항’이 그곳이다.
딸네 집이 인근에 소재한 관계로 나는 방문을 할 때면 ‘미포항’을 가끔씩 찾는다.
이곳에 소형어선들은 해운대 앞바다에서 밤새 잡은 싱싱한 생선들을 새벽이 되면 소매판매를 하기 위하여 항구로 싣고 들어온다.
6~7곳의 소매상들이 밤새 잡은 싱싱한 생선을 판매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어부의 아내가 직접 판매하는 집도 있고 잡은 생선을 넘겨받아서 위탁판매를 하는 곳도 있었다.
아무튼 유명한 ‘자갈치 시장’이 먼 거리에 위치한 관계로 나는 이곳을 가끔씩 애용한다.
싱싱한 것을 직접 구매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미포항’ 뒤쪽은 ‘달맞이 고개’로 연결이 된다.
높은 빌딩은 고개보다 훌쩍 높아서 달맞이고개가 낮아 보인다.
벚꽃 철에 찾아본 이곳은 밤 벚꽃이 장관이었다.
각양각색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아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야경은 한번쯤은 찾을만한 곳이다.
이곳에 에피소드 한 토막이 전해온다.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원래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던 9홀의 골프장이 있었다.
지방시찰을 와서 [해운대 조선비치]에 묵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저 골프장을 없애고 서민 아파트를 지으라!”
고 지시를 해서 15평짜리 AID차관 아파트가 들어섰다.
오늘날 부산칸트리가 된 골프장은 금정산 근처로 옮겨갔다.
해안 방풍림인 ‘해송’이 울창했던 이 고개는 지금은 카페 촌으로 변해 있다.
정상 조금 아래에 춘원 이광수가 쓴 ‘해운대에서’가 새롭다.
누우면 산월이요 앉으면 해월이라
가만히 눈 감으면 흉중에게 명월있다
오륙도 스쳐 가는 배도 명월 싣고
어이 갈거나 어이 갈거나
이 청풍(淸風)이 명월 두고 내 어이 갈거나
잠이야 아무 때나 못 자리 밤새도록
춘원 이광수 같은 명사도 해운대 바다에서 설레어 잠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젊은 청춘들이야 밤을 꼴딱 새워도 모자랄 판이 아니겠는가?
♥ ‘동해남부선’이 어깨동무 하던
바다와 이름도 예쁜 <청사포>
이 길은 부전역을 출발한 동해남부선이 달맞이 고개 아래 벼랑에 붙어 미포 바다를 피하듯 돌아 나오던 길이다.
지금은 관광열차가 무심하게 관광객들을 실어 나른다.
기차가 다니는 길옆에는 산책로가 멋지게 조성되어 있다.
[청사포]에는 카페가 된 옛 건물 옆으로 돌담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해운대를 가려고 해도 동해남부선을 타야 했던 시절에는 청사포는 기차도 그냥 지나치는 그저 그런 어촌이었다.
[청사포]는 해운대의 명성에 가려 최백호의 <청사포>가 아니었더라면 부산이나 양산 사람들이 호젓하게 찾는 조그만 포구였을 터이다.
그런 곳이 관광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17년에 [청사포 스카이워크]가 개통되었다.
2020년에는 [해운대 해변열차와 스카이캡슐]이 개통되었다.
4.8km에 달하는 이 구간은 [스카이캡슐과 해변열차]를 타고 해안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철길 옆으로는 해안 산책로도 함께 마련되어있기 때문에 새벽 산책코스로 안성마춤이다.
특히 이 산책로가 마음에 드는 점은 ‘자전거와 전동킥보드 통행을 전면 금지’하고 있어서 보행자들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다.
포항에도 ‘철길 숲’이 잘 만들어져 있는데 자전거와 전동킥보드도 함께 통행을 시킨다.
좁은 공간에서 다양한 이용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려는 의도인 것 같은데 보행자들은 달리는 자전거와 전동킥보드의 눈치를 봐야하는 불안함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기차를 타고 달리며 예쁜 바다풍경을 바라보거나 여유 있게 걸으며 바다를 즐길 수도 있는 이곳은 한번쯤을 찾을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이러한 매력 때문일까?
코로나 와중에도 이곳은 하루 10만 명이 찾는 유명 관광지로 급부상하며 부산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관광자원이 되었다.
특히 4명 단위로 이용할 수 있어서 거리두기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온 여행객들을 배려한 [스카이 캡슐]이 아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옛 동해남부선 폐선 부지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아주 큰 성공 사례다.
이곳에 관광 열차가 다니면서 달라진 점이 무엇일까?
우선 선로의 구조가 달라졌다.
원래 이곳은 한 가닥의 선로로 열차들이 통행하는 단선 선로였다.
그러나 4.8km 구간에 4대의 열차가 수시로 운행하게 되면서 단선 선로만으로는 원활한 열차 운행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중간 중간에 대피 선로를 만들어 열차가 교행하며 원활히 운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청사포] 마을로의 접근은 해변열차의 개통으로 더 좋아졌다.
따라서 더 많은 관광객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되어 더 많은 관광객들이 고즈넉한 청사포마을의 풍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밤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에 밤바다 야경을 즐기려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청사포’로 가는 길목에서 부르는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과 잘 어울리는 장면이다.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고운 머릿결을 흩날리며 나를 반겼던
그 부산역 앞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어디로 가야 하나
너도 이제는 없는데
무작정 올라가는 달맞이 고개에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이대로 손을 꼭 잡고 그때처럼 걸어보자
아무 생각 없이 찾아간 광안리
그때 그 미소가 그때 그 향기가
빛바랜 바다에 비춰 너와 내가 파도에
부서져 깨진 조각들을 마주 본다
부산에 가면
♥ 가수 ‘최백호’는?
가수 최백호는 1950년에 부산 기장군에서 태어나 예명 같은 본명 ‘백호’라는 이름을 얻었다.
2대 국회의원까지 지낸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다닌 일광국민학교는 그에게 바다가 일찍이 들어와 살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군을 제대하고 음악 살롱을 전전하다 가수 하수영과 맺은 인연으로 1977년에 발표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석 달 만에 6천장이나 팔리며 대학가 청춘들의 우상이 되었다.
1980년에 <영일만 친구>로 TBC 방송가요대상 남자가수상을 수상했다.
이어서 <고독>으로 MBC 10대 가수상과 KBS 가요대상을 수상한 1983년까지가 ‘제1 전성기’였다.
이후 미국 이민을 잠깐 갔다 오며 방황을 하다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96년 위세당당한 대발이 아버지가 주인공인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낭만에 대하여>가 삽입되면서다.
이 곡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아내의 뒷모습이 유리에 반사되는 걸 보고 만들었다는 곡으로 그는 흰머리와 제대로 깎지 않은 수염까지 청재킷에 잘 어울리는 영원한 가객이 된다.
최백호가 부르는 쉰 듯한 목소리는 가슴 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그 무엇을 길어 올린다.
불현듯 잊혀진 여인까지도 불러 낼 듯한 마성의 노래로 청사포의 ‘그날 밤 그 바다’를 추억한다.
해운대 지나서 꽃피는 동백섬
해운대를 지나서
달맞이 고개에서 바다로 무너지는 청사포
언제부터인가 푸른 모래는 없고
발아래 포구에는 파도만 부딪히어
퍼렇게 퍼렇게 멍이 드는데
해운대 지나서 바다와 구름언덕
해운대를 지나서
달맞이 고개에서 청사포를
내려보면 여인아
귓가에 간지럽던 너의 속삭임
아직도 물결 위에 찰랑이는데
찰랑거리는데
순정의 첫 키스 열정의 그날밤
수줍던 너의 모습
이제는 바람에 흔적마저 찾지못한 청사포
사랑한다고 나만 사랑한다고
철없던 그 맹세를
내 진정 믿었던가 목메어 울고 가는
기적소리여
해운대 지나서 꽃피는 동백섬
해운대를 지나서
달맞이 고개에서 청사포를
내려보면 여인아
귓가에 간지럽던 너의 속삭임
아직도 물결 위에 찰랑이는데
찰랑거리는데
<청사포>
최백호 작사, 작곡, 노래, 2003
첫댓글 공부 잘 했습니다.
불가 6년전에 타게한 손인호 가수님을 그냥 예전의 가수로만 어럼프시 기역하고 살았으니~~~
좋은공부 할수 있었음에 고마움 전합니다.
누리님은 항상 모범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