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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동학,증산 스크랩 해월 광화문 앞 신원운동 -삼암 표영삼
멩이 추천 0 조회 26 08.01.23 23: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화문 앞 교조신원

표영삼__ 서울교구·선도사

머리말


   1892년 12월에 동학 탄압을 풀어달라고 정부에 소원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도 달지 않은 채 반려(返戾)되었다. 동학지도부는 서울에 올라가 직접 소원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포덕 34년(1893) 정월에 신사 … 봉소도소(奉疏都所)를 청원군 송산리(南一面 新松里) 손천민의 집에 설하였다.”(『청암 권병덕의 일생』) “손천민은 1월에 제소문안을 서둘러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20일경에는 해월신사의 이름으로 전국 접주들에게 경통(敬通)을 보냈다. “각 포 접주들은 도인들을 동원하여 정부를 상대로 한 대선생신원을 부르짖기 위한 운동에 참여하도록 2월 10일까지 서울에 모이라.”고 하였다. 2월 8일(양 3.29)은 왕세자가 탄신한 날이다. 정부는 경축 별시(別試)를 치르기로 하였다. 과시(科試)를 보려는 선비들은 속속 상경하였다. 동학도들도 과거보러 가는 유생 차림으로 줄지어 상경하였다. 2월 1일부터 남서(南暑) 남소동(南小洞) 도소(崔昌漢의 집)에는 선발대가 올라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차주 강시원(姜時元)과 손병희, 김연국, 박인호, 박광호, 서병학 등 지도급 인사들은 신원운동의 효과적 방법을 모색하였다. 많은 도인들을 동원하지 않기로 하였다. 대표자 9인을 선출하여 광화문 앞에 나가 소원하게 하였다. 다만 비답이 내릴 때까지 계속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박광호 소수로 선정


   서울로 올라온 도인수는 수천에 이르렀다. 1898년 7월에 해월신사를 재판한 판결문에는 “계사(1893년)에 기 도제(徒弟) 수천 인을 진궐진소(進闕陳疏)라” 하였다. 『일본(日本)』(1893년 4월 18일)이란 신문에서도 “올라온 동학당은 4천명이었다.”고 하였다. 적게 잡아 3천명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 거리는 과거보러온 유생들과 그 종자(從者), 그리고 세자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올라온 각 고을의 관원들로 붐볐다. 관원들과 시민들의 눈에는 모두가 동학도로 보였다. 보고하기를 동학도들 수천 명이 올라왔다고 하였다. 당시 동학도인들은 세 곳에 분산해 있었다. 일반 도인들은 동대문 밖 낙타산 부근과 남문 밖 이문동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일본신문들은 “낙타산에 3백명, 이문동(남문밖)에 수백 명이 모였다.”고 했다. 그리고 남소동 도소에는 동학지도자들이 모여 있었다. 2월 10일에는 광화문 앞뜰에 나가 복소(伏疏)할 아홉명의 대표가 선정되었다. “소두(疏頭) 박광호(朴光浩), 제소(製疏) 손천민(孫天民), 서소(書疏) 남홍원(南弘源), 봉소(奉疏) 박석규(朴錫奎), 임규호(任竅鎬), 손병희(孫秉熙), 김낙봉(金洛鳳), 권병덕(權秉悳), 박원칠(朴元七), 김석도(金錫道) 등이 뽑혔다.”(권병덕 『이건전란사(李朝戰亂史)』)    이들은 10일 저녁에 봉고식(奉告式)을 올렸다. 목숨을 걸고 호소하는 일이라 모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11일 아침 일찍 주의(周衣)로 차려입은 봉소대표 아홉명은 광화문으로 향했다. 문 앞 길가에 자리를 깔고 늘어앉았다. 붉은 보자기에 싼 상소문은 소반에 단정히 놓여 있었다. 권병덕의 『나의 일생』에는 “9인이 각기 수주(手珠)를 집하고 주문을 송하니 관람 제인(諸人)이 운집 사위(四圍)하는지라, 수문군(守門軍)이 잡인을 금하고 진력 보호하며 궐내에 입시하는 대관이 조복을 착하고 내문하며 외국인도 내문하더라.”고 기록하였다.

교조신원을 호소


격식을 갖추고 조용히 앉아 진소(陳疏)하는 모습을 본 관원들은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봄철 먼지바람을 맞으며 온 종일 요지부동 앉아 있었다. 12일에도 반복하였다. 정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셋째날인 13일 오후에야 사알(司謁)이 나타났다. “집으로 돌아가면 소원을 베풀어주리라.”는 한마디만 던지고 사라졌다. 『동경조일신문』에는 “천여 명의 총대(總代)인 30여 명이 3월 30일(음 2월 12일)에 상소문을 받들고 왕궁 문전에 꿇어앉은 채 마치 죽으려는 듯이 머리를 땅에 늘어뜨리고 배례하고 있었다. … 동학의 결사대는 천여 명이라 하며 … 상소에는 외국 종교인과 상인들을 추방하여 생민을 안정시키라는 조항도 들어 있다.”고 했다. 정부에는 정치적 안목을 가진 이가 없었다. 동학금단령을 핑계삼아 탐관오리들이 도인과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약탈하는 것을 다반사로 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법행위를 하는 작폐는 시정해 주어야 한다. 이런 내부적 모순을 다소나마 해결해주었다면 이후의 동학운동은 달라졌을 것이다. 척왜양창의운동이나 동학혁명운동도 그 양상은 달랐을 것이다. 상소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근자에 진짜 선비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겉치레만 숭상하고 이름이나 얻으려는 선비가 십에 팔 구입니다. 다행히 무왕불복의 이치로 경신년에 경상도 경주 최(제우)께서 천명으로 도를 받아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불과 3년만에 사학(邪學)으로 몰려 3월에 영남 감영에서 정형을 받았습니다. 터무니없는 모략으로 백옥처럼 티 없는 대도가 횡액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최(제우)는 공부자의 도를 깨닫고 보니 한 이치로 정해졌으며, 나의 도와 비해 보면 크게는 같고 조금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섬김에 한울님 섬기듯이 하라 하였습니다. 어찌 도리에 어긋나겠습니까. 우리 도는 동쪽에서 받아 동쪽에서 폈기 때문에 동학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서학으로 지목함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감영과 고을에서는 우리들을 형벌하고 귀양보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도는 마음의 화평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마음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고 형체가 화하면 바르게 되고 사람의 근본 도리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최(제우)께서는 선성(先聖)들이 밝히지 못한 가르침을 창시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로 하여금 천리의 근본을 다하게 하려하였습니다. 행도(行道)에 보람이 없었다면 감히 임금을 속인 것이 되므로 어찌 죄를 면할 것입니까. 소원하건대 천지부모의 은덕으로 신들의 스승님이 억울하고 원통한 죄목을 신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영이나 고을에서 벌을 받고 귀양간 생령(生靈)들을 살려주십시오.(『東學書』)
   광화문전 교조신원운동은 3일만인 13일에 막을 내려야 했다.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하였다. 급히 물러서야 할 이유가 있었다. 동학당 선동에 과거보러 온 유생들이 휘말려 난동을 부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관원들은 서둘러 동학도의 체포령을 내렸다.

반외세운동 병행


   『주한일본공사관통상보고』에는 “상경한 유생들이 과규(科規)에 부정행위가 있었다며 … 간신들의 적폐를 쓸어버려야 한다는 건백서(訴狀)을 올렸다고 한다. 일설에는 동학당이 돈을 주어 암암리에 그들을 성원했다고 하나 진의(眞疑)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서병학이 의(意)를 변하여 대병(隊兵)과 협동하여 정부를 오타(鼇打, 무찔러)코저 하거늘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등이 뇌거(牢拒, 굳이 거절함)하되 불청(不聽)하더라.”고 하였다. 서병학이 정부를 뒤엎자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교중에서 전해지기를 수상한 기미를 사전에 탐지한 지도부는 모든 도인들은 14일에 한강을 건너 서울을 빠져나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한다. 정부는 유생의 압력을 받고 국왕은 2월 28일에 소두 박승호(朴升浩, 朴光浩)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법사(法司)와 각 지방관에 하달하였다. 이번 교조신원운동에서는 반외세운동도 병행하였다. 1892년에 공주와 삼례에서 벌인 교조신원운동 때에도 반외세운동은 병행되었다. 그리고 두 달 후인 1893년 1월에도 전봉준 접주와 여러 접주들이 전라도 여러 군·현 아문에 척양척왜의 내용을 담은 방을 붙이는 운동이 이어져 왔다.
   『남원군종리원사』에도 “계사 정월 10일에 전봉준이 지은 게문(揭文)을 각 고을 아문에 붙였다.”고 하였다. 또한 『영상일기』에는 “2월 10일, 동학은 창의를 칭하며 전라도 제읍 아문에 몰래 방서(榜書)를 붙였다.” “척왜양이란 그 말은 가상하나 행하는 것은 난계(亂階)이다.”고 하였다. 서울에 올라오자 2월 7일에는 서학 교두를 물러가라고 하는 방을 내붙였다. 그 후 2월 13일(양 3월 31일)에는 서울 외국인 거리에, 2월 18일(양 4월 4일)에는 서양공관에, 2월 24일(양 4월 10일)에는 일본인에게 경고하는 글을 내걸었다. 20여 일 후인 3월 2일(양 4월 17일)에는 “일본국 상려관(商旅館)”에 방을 내 걸렸다. 방(서학교두에 보낸 글)의 요지를 보면 “너희들은 들어라. 수호조약에는 상관(商關) 설치와 전교는 허용치 않았다. 말로는 효경(孝敬)한다 하나 공양하고 순종하는 도가 없으며 돌아가면 곡하며 장례를 치르는데 절의가 없다. 어찌 사람의 떳떳한 도리라 하겠는가. 너희들은 영어를 배워주고 한문을 가르쳐 준다 하며 양가집 자녀들을 끌어들여 끝내는 교중에 들게 하였다. 너희들은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가라.” 당시 선교사들은 이 방문은 동학도의 짓이 아니라고 보았다. 학교에서 쫓겨난 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영어를 배워주고 한문을 가르쳐 준다 하며 양가집 자녀들을 끌어들이더니 끝내는 너희들의 교중에 서둘러 들게 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내부사정을 아는 이의 글이라는 것이다. 서울 외국인 거리에 붙인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아, 슬프도다. 그들은 경천한다 하지만 패천하고 있으며 사람을 경애한다 하나 사람을 그르치게 하다. 천당이니 지옥이니 이 무슨 말인가. 어리석은 부맹(夫氓)들은 그 황탄(慌誕)을 믿고 조상의 제사를 버리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이 된다. 우리 도는 하늘의 뜻을 천하에 밝게 비치는 것이니 감히 함부로 능멸할 수 있으랴. 슬프다. 대도를 함께 하여 성경책을 불태우면 혹시 살 길이 있을지 모르리라.”
   일본 상려관에 보낸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도리를 존중하면 사람이라 일컫고 몰지각한 자를 오랑캐라 일컫는다. 아직도 다른 나라에 들어앉아 공격을 으뜸으로 삼고 살육을 근본으로 삼으니 진실로 어찌 하자는 것인가. 지난날 임진년에 너희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과를 저질렀다. 우리는 너희들을 잊을 수 없다. 우리 스승님의 덕은 넓고 가이 없다. 너희들에게도 구제의 길을 베풀 수 있다. 우리는 다시 말하지 않으리니 서둘러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외국인들은 자위력을 마련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우리 정부에 보호책을 촉구하는 한편 군함까지 동원하였다. 3월 8일에 중국은 내원(來遠)과 정원(靖遠) 두 군함을 인천에 불러들였다. 일본도 인천과 한강을 왕래하는 선박까지 준비시켰다. 기독교를 배척하는 방이 나붙자 영국과 미국도 서둘렀다. 영국은 순양함 세븐호를 인천에 기항시켰으며 미국은 군함 베도레루호를 출동시켰다. 일본 또한 3월 1일(양 4월 16일)에 군함 팔중사(八重山)를 인천항으로 불러들였다. 동시에 거류민행동지침까지 내려보냈다. 아홉명의 대표가 광화문 앞에 나아가 교조의 신원을 호소한 것과 몇 장의 방을 붙이자 부산을 떨기 시작하였다. 외국인들은 우리 정부를 믿을 수 없어 군함까지 동원했었다. 동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교조신원운동에서도 교조신원은 이루어내지 못했다.

결론


   무지몽매한 잡배들로 취급당했던 동학도들은 교조신원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잘 조직된 집단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으며, 나라를 위한 집단으로 인식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반외세를 선도하는 집단으로 인식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갑진 경험은 동학운동을 새로운 차원에서 모색해야 한다는 자각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동학도들은 도처에서 조선왕조의 해체현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강대국들의 입김에 우리의 주권은 점점 유명무실해져 간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보국안민의 계책은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라는 대신사의 절실한 고민을 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동학운동은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게 되었다. 광화문 앞 교조신원운동을 계기로 이념을 사회화시키는 쪽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후 동학운동은 내적인 화평을 추구하는 수행과 겸하여 보국안민 즉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아 민인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운동을 겸하게 되었다. 척왜양창의운동이나 동학혁명운동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신인간 146.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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