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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교통발달사 6
근대 한국의 교통혁명
- 증기선과 해운업
1. 근대한국의교통혁명 서양 증기선, 조선을 뒤흔들다
이 땅에 서양 증기선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32년 9월(순조 32년)이다. 황해도 몽금포 앞바다에 영국 상선 로드 아마스트 호가 들어와 조정에 통상을 요구하다 돌아갔다. 이 배는 돛과 증기 엔진을 겸용하는 풍범(風帆) 증기선이었다.
우리나라의 개화 바람은 증기선의 등장에서 비롯되었고, 옛 교통을 개혁한 선봉도 증기선이었다. 증기선이 나타나면서 서양의 과학상품과 대포, 석유 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조선을 유럽에 알린 네덜란드 하멜과 스페르웨르 호
때는 조선조 제17대 왕인 효종 5년(1653년 8월), 제주도에 대형 서양 범선이 나타나 나라 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의 상선이 태풍에 못 이겨 표류하다가 제주도 남쪽 차귀진(遮歸鎭) 근방 대야수(大也水)로 밀려와 좌초한 것이다. 30문의 대포와 5개의 돛이 설치된, 길이 91m의 거대한 범선이었다.
조정에서는 인조 6년 조선에 표착하여 귀화한 네덜란드인 박 연(朴 淵)을 보내 조사를 시켰다. 박 연의 본명은 장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로 네덜란드 상선의 선원으로 중국에 왔다가 군함 위베르케르크(Ouwerkerck) 호로 바꾸어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 군함은 침몰하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제주도에 표착하여 관헌에게 붙잡혔다.
후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박 연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귀화하고 조선 여자와 결혼도 했다. 그는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서양전술을 가르치는 한편 서양 대포 등 병기도 개발했다.
헨드릭 하멜(Hendrick Hammel)은 18세 때 국제무역상사인 연합동인도회사에 서기로 취직해 1648년 4월 스페르웨르 호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8개월 후 자카르타에 도착해 이곳을 중심으로 4년간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무역을 했다. 1653년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가까스로 배와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하멜과 일행 35명은 조선 조정에 억류되어 있다가 유배생활 13년만인 1666년 9월 조선을 탈출, 동인도회사의 지사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 자유의 몸이 됐다. 하멜은 일본에서 1년간 체류하면서 13년 동안의 조선생활을 소상히 기록한 <하멜의 항해일지>를 만들어 네덜란드의 본사에 바쳤다.
하멜의 항해일지는 즉시 책으로 출간되어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 책을 통해 조선이 유럽 여러 나라에 상세히 알려지게 됐다. 350년이 지난 현재 하멜을 기념하기 위해 제주도 용머리 해안에 ‘하멜 상선 전시관’을 세우고 복원한 스페르웨르 호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 땅에 나타난 최초의 서양 증기선
1765년 영국인 제임스 와트가 증기엔진의 실용화에 성공하여 동력혁명을 일으켰다. 이 동력혁명은 생산공장의 수동식 동력을 자동식으로 혁신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증기선, 기차를 만드는 등 교통혁명도 뒤따랐다.
1783년 프랑스인 제프로와 다반이 세계 최초로 증기선을 만들어 실험에 성공한 데 이어 1807년 미국인 풀턴이 영업용 증기선 클레이몬트 호를 건조하여 증기선 시대를 열었다. 이것은 풍범선을 동력선으로 바꾼 선박의 혁명이었다. 이와 함께 과거의 목조선이 철갑선으로 바뀌고, 선원도 대폭 줄어들었다.
이 땅에 처음 서양 증기선이 나타난 것은 1832년 9월(순조 32년)이다. 황해도 몽금포 앞바다에 나타난 영국 상선 로드 아마스트 호가 조정에 통상을 요구하다가 돌아갔다. 이 배는 돛과 증기 엔진을 겸용하는 풍범(風帆) 증기선이었다.
이어 현종 11년인 1845년 여름 영국의 군함 샤마랭 호가 제주도 북쪽 해안에 들어와 지형을 살피다가 곧바로 전라도 서해로 건너와 대포를 펑펑 쏘아 주민들을 위협하면서 해안을 정탐했다. 기겁을 한 근방 수령이 ‘높은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공중으로 뿜어내며 양 옆구리에 붙은 큰 물자세를 돌려 쏜살같이 달리는 산채보다 큰 무쇠덩이 이양선(異樣船)이 화포를 쏘며 쳐들어온다’는 화급한 장계를 한성 궁궐로 올렸다.
쇄국주의 정치와 서양 배척사상에 철저했던 흥선대원군이지만 이 장계에는 얼굴빛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전라수군장에 명령하여 천자포와 화승총을 쏘게 했다. 증기선은 별일 없이 물러갔지만 이를 시발점으로 계속 서양 군함이 우리나라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3년 후인 1848년에는 프랑스 군함 한 척이 충남 외연도 앞바다에 들어와 조정에 교역을 청했다. 나폴레옹 3세 휘하 해군 소속이었던 이 군함은 동남아 지역을 항해하면서 무력으로 위협해 무역을 개척한 상선이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의 친서가 조정에 전달됐지만 불어를 몰라 해석할 수 없는 데다 대원군의 철저한 반(反) 양이사상 때문에 이 배는 노기등등한 거절을 당하고 돌아갔다.
1861년(철종 12년)에는 러시아 함대가 원산 앞바다에 나타나 역시 화기로 위협하며 통상을 요구했다. 이렇게 나타나는 이양선마다 대포와 서양총으로 무장한 군함이어서 대원군의 쇄국 고집만으로는 물리칠 수 없었다.
동양과의 교역을 개척하던 초기의 서양 상선들은 대부분 무장한 군함이었다. 서양인들은 교역 요청을 순순히 받아주지 않으면 성능이 우수한 무기로 위협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조정에서는 무례한 이양선의 침범을 수수방관할 수 없어 이를 막을 수 있는 군함을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대원군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학우선(鶴羽船)이라는 군함이다. 재래식 목조 군선에 학의 깃털을 붙이고 천자포를 설치한 우리식 군함은 적이 쏘는 화력에 속수무책, 실패작으로 끝났다.
화륜선과 함께 소개된 서양 과학문명
우리나라의 개화바람은 증기선의 등장으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게다가 옛 교통을 개혁시킨 선봉이 증기선이었다. 증기선이 나타나면서 서양의 과학상품과 대포, 석유 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증기 엔진의 화륜선이 나타나기 전에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모두 바람의 힘으로 가는 풍범선(風帆船)을 썼다.
그래서 아라비아, 동남아, 일본 등에서 우리나라로 상선이 들어올 때는 반드시 계절풍을 이용했고, 왜구가 대마도를 거쳐 부산을 침략할 때도 계절풍에 맞춰 풍범선이 떠나는 시기와 장소를 선택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바람을 이용하는 돛 대신 증기 엔진이 등장하면서 언제든지 대양을 누비게 되었다. 따라서 배를 만드는 소재도 바뀌었다. 옛날 풍범선의 선체는 나무에서 쇠로 바뀌었고, 바람 대신 석탄으로 증기 엔진을 가동했으며 돛 대신 높은 굴뚝을 세워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또 하나 바뀐 것은 노가 없어진 대신 양쪽 뱃전에 달린 수레바퀴가 물자세질을 하여 큰 선체를 전진시킨 점이다. 당시 사람들은 괴상한 모양을 한 증기선을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다.
1876년 개항 전의 대원군 시절부터 증기선이 부산 앞바다와 서해에 종종 나타나 백성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괴상한 이양선을 본 고을 수령들이 조정에 보고를 올리면 노기등등하고 뱃심 좋던 대원군도 얼굴빛이 변했다.
나무가 아닌 무쇠덩이로 만든 배에 연기를 뿜는 굴뚝까지 달렸고, 노나 삿대 대신 물레모양의 물자세가 파도를 가르는 것이 쏜살같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 배가 서양 대포까지 달고 와서 펑펑 쏘아댄다는 얘기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시로 앞바다에 나타나 위협하는 서양 화륜선 때문에 서양과의 교섭을 철저히 반대하는 반양이(反洋夷) 사상의 화신인 대원군도 심기가 편치 못했다. 증기선을 만들 수 없으니 서양근대과학의 집성체인 화륜선의 위력에 움츠러들었다.
대원군은 더 이상 쇄국주의를 고집할 수 없게 되자 1876년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하면서 정식으로 서양 증기선의 출입을 허락했다. 이를 계기로 서양문물과 서양인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양 군함과 싸운 신미양요·병인양요
1866년 7월, 미국 증기 상선인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가 서해로 들어와서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 어귀에서 대포를 쏘아 위협한 후 통상을 요구했다. 이 상선은 당시 중국 천진을 무대로 동남아 일대에서 무역을 하던 미국인 소유로, 영국 메도스상사의 망원경, 자명종 등을 팔고 있었다.
셔먼 호가 대동강으로 진입할 즈음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사건에 대해 프랑스 군함이 보복을 위해 조선을 침범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평양 백성들은 이 배가 프랑스 군함인 것으로 오인하고 공포에 떨었다.
평안도 관찰사인 박규수는 대원군의 명을 받고 군관을 셔먼 호에 보내어 철수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셔먼 호에 승선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 토마스가 유창한 한국어로 무역을 하고 싶다며 천리경, 유리그릇, 자명종 등의 서양물건과 조선의 호피, 인삼, 사금을 바꾸자고 했다.
거절을 당한 셔먼 호 선장은 총으로 위협하며 박규수를 배에서 쫓아내 버렸다. 이튿날 배는 평양 중심부인 만경대 아래까지 밀고 들어왔다. 겁이 난 박규수는 이현익 장군을 보내 철수할 것을 호령했으나 오히려 그를 배로 끌고 가 감금해 버렸다.
이에 격분한 평양 백성들이 갈대를 만재한 배 수십 척으로 대동강 어귀를 막고 셔먼 호가 나가지 못하도록 불을 질러 버렸다. 이에 놀란 셔먼호는 대포, 총을 쏘며 황급히 대동강을 빠져나갔다. 마침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물이 줄면서 셔먼 호는 양각도 앞 모래 바닥에 박혀 요지부동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평양의 군병과 주민이 합세하여 셔먼 호를 공격, 일대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평양 백성 75명이 사망하자 박규수는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여 셔먼호를 점령하고 선원을 몰살한 후 배를 불태워 버렸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로 우리가 승전 노획한 최초의 서양 증기선이다.
셔먼호 사건이 벌어졌던 같은 해 9월,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프랑스 신부 9명과 많은 천주교 신도가 학살당한 것을 항의하기 위해 프랑스 군함 5척이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인 로즈 제독은 강화도를 점령한 후 많은 보물과 서적을 강탈해 갔다.
이양선 등장 이래 최대 규모의 침입이었다. 프랑스 해군과 우리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는 한 달 넘게 계속되었다. 결국 40일 만에 한성근과 양헌수가 이끄는 특공대가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충돌이 ‘병인양요’다. 병인양요는 여기서 자신을 얻은 대원군에게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양선의 침입은 계속되었다. 병인양요로부터 5년 후인 1871년 조정에서 우려했던 대로 셔먼 호 사건에 대한 미국의 보복이 펼쳐졌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인 로저스 제독이 5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쳐들어왔다.
이즈음 대원군은 병인양요 이후 철저한 군사훈련과 성곽 수리, 포대 쌓기, 신식 대포 제작 등으로 이양선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결국 이재연이 이끄는 조선 수비대의 강한 저항을 당해내지 못하고 미국 함대는 철수하고 말았다. 이것이 신미양요(辛未洋擾) 사건이다. 서양 함대와의 전투에서 연속으로 승전한 대원군의 기세는 하늘로 치솟았다.
김기수의 첫 화륜선 견문기
해양교통에 혁명을 일으켰던 화륜선을 처음 타 보고 견문기를 쓴 사람은 김기수(金綺秀)다. 김기수는 병자년(1876) 조일수호조약이 맺어지기 전인 1875년 (고종12년)에 별시문과에 합격한 명필이었다.
김기수는 다음해 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예조참의가 되어 수신사로 임명받아 인천에서 일본 화륜선을 타고 건너가 기차도 처음 타보고 근대 과학문물을 두루 살핀 후 돌아왔다. 말하자면 김기수를 따라간 수신 사절단이 증기선과 기차를 타본 최초의 조선인들이다.
김기수는 귀국 후 일본에서 본 근대문명의 이기에 대한 견문기인 <일동기유>(日東紀遊)에서 화륜선에 대한 얘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화륜선의 모양은 양쪽 뱃머리가 좁고 낮으면서 길며 어떤 것은 길이가 100여 척이고 높이가 20여 척이나 되나니 뱃전만 하여도 사람의 키 세 배 이상이나 되더라. 화륜선은 뱃전을 바닷물 속으로 10여 척이나 가라앉혀야 비로소 기울고 넘어질 염려가 없더라. 화륜선은 마치 칼이 물건을 자르듯이 바다 위에 오뚝이 서 있더라. 화륜선이 가는 이치는 반드시 바퀴를 돌리는 힘은 석탄을 태워 얻게 되므로 석탄을 많이 싣고 다니더라. 화륜선은 석탄을 때느라 높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고, 옆에 달린 바람 주머니가 휘파람을 내어 기적을 울리면 귀신이 호곡하는 듯하더라.”
첫 국산 증기선의 실패
대동강에 나타나 병인양요를 일으켰던 미국의 셔먼 호를 격퇴하고 배를 손에 넣은 홍선 대원군은 셔먼 호와 배에 실려 있는 근대적인 화기의 위력 앞에서 조국의 미개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역사적으로 대원군은 흔히 쇄국주의자요 개항정책을 철저히 반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쇄국정책에 천주교 탄압으로 인한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불러왔지만 그의 내적 안목은 결코 폐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근대적 화륜선과 무기를 만나 직접 싸워 본 대원군으로서는 나라를 외세에 빼앗기지 않으려 쇄국정책을 썼지만 내면으로는 개화의 절박성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은 재래식 무기인 창과 칼 또는 조선의 최신식 무기인 천자포(千字砲)나 화승총으로는 서양의 과학무기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을 닫고 병기 개혁의 의지를 굳혔다.
이를 위해 전국에 ‘반상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로 나라에 이익을 될 수 있는 인물이면 벼슬을 주어 긴히 쓰리라’라는 내용의 방을 내걸었다.
전국에서 귀재를 불러들여 신병기 제조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묘한 기계를 잘 만진다는 김기두(金箕斗)와 강 윤(姜 潤)을 발탁하여 특급기능사로 중용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1897년 양수기를 개발한 강 윤과 김기두는 대원군의 특명을 받아 대동강에서 빼앗은 셔먼 호를 가져다가 증기선 제작에 들어갔다.
서양의 화륜선을 처음 본 김기두는 운전법을 알 턱이 없었지만 한국판 셔먼 호를 만들어 석탄이 아닌 숯을 때어 시운전을 했으나 배가 무거운데다 힘이 약해 여남은 발짝 전진하다가 가라앉고 말았다.
이 최초의 국산 화륜선을 제작하느라 전국에서 수십만 량의 쇠와 구리를 모아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이 배를 다시 부수어 걷어낸 철과 동으로 나중에 대포를 만들었다고 한다.
2. 근대한국의 교통혁명Ⅱ 해운교통의 개혁과 개화
임오군란 직후 우리 조정은 청나라 이홍장에게 해상관련 업무를 처리할 능력있고 서양 사정에 밝은 인물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온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중국에서 출세한 전형적인 친청파였다.
그는 조선정부의 외국인 고문으로 일하면서 많은 개화작업을 이끌었지만 청나라의 앞잡이 노릇이 지나쳐 개혁을 파행으로 몰아가다 부임 4년만에 파직되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증기선 시대의 개막
증기선의 필요성이 대두되다
조선은 건국부터 일본에 강점 당할 때까지인 500여 년간 외국 세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나라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던 쇄국정치 때문에 백성들의 해양진출이 완전히 봉쇄 당해 국제간 해상교통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기웃대던 열강들의 힘에 밀려 1876년 일본의 강압 아래 한일간 병자수호조약을 맺으며 문호를 개방했다.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묄렌도르프, 언더우드, 알렌 등 서양의 지성인들은 한결같이 조선이 부강하려면 해양으로 활발하게 진출해야 하는데 원시적인 조선의 구식 배로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선박의 근대화, 즉 증기선으로의 교체를 충고했다.
이뿐만 아니라 조일 수호조약 채결 다음 해인 1877년에 초대 일본공사로 서울에 들어왔던 화방의질(花房義質)은 조선의 조속한 개화를 위해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기선이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고종은 증기선 도입, 국제적 해상교역과 해상교통에 관한 업무, 병기제작 등의 자문을 얻기 위해 1879년 당시 통역관 겸 정치가였던 이용숙(李容肅)을 청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던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파견했다.
청나라에 간 이용숙은 증기선을 타보고 돌아와서 역시 개화에는 기선이 절대 필요함을 주장하고 조속히 도입할 것을 고종에게 권유했다.
이용숙은 조선 말기에 통역관으로 활약하던 정치가로서 중국어와 일어를 잘해 1866년 대동강으로 들어와 평양을 침범했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사건 때 통역관으로 셔먼호 퇴치에 공을 세웠고, 한일 수호조약 직후 초대 수신사였던 김기수를 수행하여 일본을 다녀왔다.
또 청나라로 건너가 민비의 세력에 말려 청나라에 납치됐던 흥선대원군을 귀국시키는데도 일조를 했던 외교관이다.
이렇게 국내외로부터 기선 도입 권유를 받은 고종과 조정은 나라의 개화는 물론 세곡의 신속한 운송을 위해서라도 증기선이 필요함을 절감했고, 1882년(고종 18년) 고종은 선박업무를 담당하던 주교사(舟橋司)에게 지시하여 증기선과 대형 풍범선을 도입하도록 했다. 동시에 민간인들도 민간자본으로 증기선을 도입할 수 있도록 허락해 해운교통의 개혁이 시작됐다.
일본 증기선이 활개친 초기의 연안항로
1876년 조일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산이 처음으로 개항하자 일본 미쓰비시사는 재빨리 나가사키∼부산간 항로를 개설하고 증기선을 취항시켰다. 미쓰비시에 이어 1880년에는 일본 스미모도사가 오사카∼부산항로를, 뒤이어 일본우선회사가 고베∼부산∼인천∼청진 항로를 개설하고 증기선을 띄웠다. 때를 같이하여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도 1882년부터 상해∼인천 사이에 기선을 취항시켰다.
같은 해 6월에 구 조선군인들이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양성과 군제개혁, 봉급 체불 등에 불만을 품고 일으켰던 임오군란을 평정한다는 이유로, 청국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기 위해 필요한 군인과 군수품, 물자를 수송하는데 처음으로 청국 선박을 취항시킨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나라 연안항로에는 개항 초기부터 일본과 중국 기선들이 마음대로 밀고 들어와 기선해운업을 독점했다.
개화파의 거두였던 윤치호(尹致昊, 1864∼1946) 선생의 <윤치호일기>(1884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개화당 정객의 한사람이었던 고우(古愚) 김옥균(金玉均)의 집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기선편을 알기 위해 일본 미쓰비시회사 사원을 만나 원산과 인천에 기선이 들어오는 시기를 물었다.
그러자 미쓰비시 사원이 “지금 원산과 부산 사이, 그리고 부산과 인천 사이에 각각 1척씩의 기선이 왕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기선의 출입항 일자는 일정치 않다. 지금은 많은 병정들이 그 기선에 타고 항상 대기 중이므로 기선의 출항과 입항시간은 불규칙하다”고 말했다.’ 이 대목을 보면 이미 일본 증기선들이 우리나라에 드나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4년 9월 당시까지 우리나라 연해에는 정기선이 운항되지 않았다. 다만 초기에는 부정기적으로 원산, 부산, 인천을 드나드는 일본이나 청국 기선들이 병사와 군수품을 실어 나르면서 일반 여객과 화물 운송영업도 겸하여 시작했던 것이다.
윤치호가 미쓰비시 사원과 만나던 때는 윤치호,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당이 사대당을 물리치고 혁신개화정부를 세우기 위해 일으켰던 갑신정변 2개월 전이었다. 윤치호는 만약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증기선을 타고 해외로 망명하기 위해 미쓰비시 사원과 만나 기선의 출입시간을 물었던 것 같다.
윤치호는 이보다 2개월 앞서 1884년 7월에 우리나라 최초로 한미합작 기선회사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윤치호는 명문가 출신으로 17세 때인 1881년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도미하여 미국에서 신문학을 배워 일찍부터 개화에 눈을 뜬 뒤 개화당 정객의 일원이 되어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이승만, 이상재 등과 같이 활약했다.
윤치호는 일찍부터 교통의 개혁에도 관심이 깊어 신식 탈것인 인력거, 자전거, 서양 객마차, 자동차 등을 제일 먼저 탔던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해운의 근대화 기틀을 마련한 묄렌도르프
고종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갔던 이용숙이 청나라 이홍장으로부터 조선의 정치와 제도의 개혁, 국제적 해상업무, 증기선의 도입 등 서양문물과 제도를 적극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는 권고를 받고 돌아오자 조선 조정은 개혁작업을 시작했다.
초기의 개혁작업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군대의 개혁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에 대해서는 의외로 반발이 심해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은 구식군대가 일으킨 변란으로 신식군대 양성 과정과 13개월치나 밀린 급료에 대한 불만 때문에 터진 것이었다.
이후 계속 몰려오는 열강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군대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각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외국 선박의 통관과 출입국 업무처리가 시급했으나 이를 해낼 인물이 없었다.
이에 따라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 조정에서는 청나라 이홍장에게 다시 사절단을 파견하여 해상관련 업무를 처리할 능력과 서양 사정에 밝은 인물의 추천을 요청했다.
이홍장은 마침 청나라 천진에 와서 세관업무에 종사하면서 능력과 재능을 인정받아 천진 주재 독일영사로 출세하고 정책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조선정부 고문으로 추천했다.
묄렌도르프는 독일서 법학과 동양학을 전공한 후 1870년대 말 청국으로 들어가 천진 주재 독일영사관에서 일하다가 해박한 서양식 세관업무의 능력을 인정받아 곧 천진세관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이홍장과 친분을 맺었다.
묄렌도르프는 그의 실력과 청국의 세력을 등에 업고 1880년대 초에 천진 주재 독일영사로 출세, 정치가로 변신하면서 이홍장의 외교적 앞잡이 노릇을 했다.
1882년 묄렌도르프는 이홍장의 추천에 따라 조선정부의 정치. 제도, 경제, 군사개혁을 위한 고문으로 서울에 들어와 교역업무의 최고책임자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시작하여 외교와 통상을 관장하는 협판교섭통상사무아문, 조폐공사인 전환국 총판, 공업정책 부서의 공조참판, 군사 총괄의 병조참판, 관세청 책임자인 해관총세무사로 개화기 우리 조정에서 최고의 벼슬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조선정부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외국인 고문으로 일하면서 많은 개화작업을 했다. 특히 구시대의 경제제도를 개화시키는 일에 치중하면서 증기선 도입부터 추진했다.
이어 국영해운업 경영법, 세관업무제도, 광산개발, 잠사업 장려, 전신가설, 화폐제조, 서양열강과의 수교조약 체결, 외국차관 도입, 내정개혁 등을 주도하다가 부임 4년만인 1885년 파직되었지만, 그로 인해 1894년 공포된, 구식제도를 신식으로 개혁하는 갑오경장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앞잡이였던 묄렌도르프의 단명
묄렌도르프는 조선에 들어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벼슬을 받으면서 목인덕(穆麟德)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다녀 은근히 조선과의 친근감을 과시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조선정부의 최고 실권을 갖고 행세하는 동안 열강들은 조선의 이권을 따기 위해 그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조선 주재 외교관들이나 외국 사업가들은 묄렌도르프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그 앞에서 설설 기었다고 한다.
묄렌도르프는 짧은 기간 동안 조선정부의 개화사업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뒤로는 이홍장과 결탁하여 조선의 이권으로 청나라를 돕던 스파이였다.
1884년 친일파인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당이 친청파인 사대당의 민씨 일파를 물리치고 혁신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이틀 후 사대당과 청나라 군대의 반격으로 실패하자 조선정부와 일본, 청나라 관계가 험악해졌다.
정권을 잡고 있던 민씨 일파는 국제정세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돌파구로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들여 보호받으려 했다. 이때 묄렌도르프를 사이에 넣어 서울에 와있던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비밀교섭을 시켜 유사시에는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해 주도록 요청했다.
이때 민씨 세력의 핵심인 민비는 총리격인 총리내무부사 심순택을 시켜 국새를 찍은 비밀 협약문서를 러시아에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러시아 끌어들이기에 적극 반대했던 친청파인 병조판서 민영익이 1882년부터 서울에 주둔하면서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던 청나라 장군인 원세개(袁世凱)에게 이 사실을 밀고했다.
이 때문에 한·러 수호조약을 주선했던 묄렌도르프는 청나라를 배반했다는 원세개의 분노를 사서 조선 근무 4년만인 1885년 조선정부로부터 파직을 당했다.
해상교통의 개화
최초로 고용한 외국 증기선
미국 증기선 셔먼호 사건 이후 외국 증기선들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개항 직후부터 일본 증기선들이 우리나라 해안에서 활개를 쳤다. 이를 보며 우리 조정도 근대화된 해양교통수단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지만 증기선제조기술이 없어 결국 외국에서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조정의 개혁고문으로 부임하면서 조선정부가 원하는 증기선 도입을 뒤로 마루고 외국 증기선을 고용하여 세곡 운반과 수출입물자 수송을 추진했다. 우선 이렇게 하는 것이 청나라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그의 사욕 때문이었다.
묄렌도르프를 통해 우리 조정이 최초로 고용계약을 맺고 끌어들인 외국 선박은 영국계 무역상인 이화양행의 남승호였다. 1883년 11월부터 1년간 계약을 맺고 상해∼인천∼부산∼일본 항구를 운항하며 조선의 세곡 운반과 수출입품을 수송했던 남승호는 621톤급 쌍륜 증기선이었으나 화물의 수송량이 많지 않아 손해를 보았다는 이유로 1년만에 철수하고 말았다.
이화양행은 1860년경 중국에 진출한 영국 무역상사인데, 중국의 차와 견직물의 수출로 돈을 벌어 1881년까지 3개의 기선회사를 가지고 양자강과 중국해 연안의 해운업을 장악했다.
두 번째로 고용한 증기선은 청나라 해운업무 담당 기관인 초상국(招商局) 소속의 부유호였다. 이 중국 증기선은 묄렌도르프가 이홍장을 돕기 위해 초상국 산하 최대의 기선회사인 상해윤선초상총국 기선회사와 채결한 고용계약에 따라 사용했지만 역시 수송화물 부족으로 생기는 결손과 이를 배상하라는 청국의 트집 때문에 취항 1년만에 돌아가고 말았다.
상해윤선초상총국 기선회사는 이홍장이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만든 반관반민회사였다. 이처럼 초창기 묄렌도르프를 통하여 고용한 외국선박들은 자기네들의 이해타산만 따지고 조선정부가 바라는 해운교통 개화에는 별 도움을 주지 않았다.
불발로 끝난 한미합작 증기선회사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곧 미국으로 건너가 신문학을 배우고 조미수호조약 체결 1년 후인 1883년, 초대 미국공사인 푸트(Harwood L. Foote)의 통역관으로 같이 귀국한 운치호가 묄렌도르프에게 조선에서 기선회사 설립을 원하던 미국인 존 미들톤(John Middleton)과 영국인 헨리 그리블(Henry Gribble)을 소개했다.
이후 묄렌도르프의 허락으로 1884년 7월 조선정부와 기선회사 설립 계약이 이루어져 최초로 외국자본 조선국적의 ‘미들톤 기선회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렇게 쉽게 설립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들톤 기선회사의 사업 목적이 묄렌도르프의 외국고용선 정책을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들톤 기선회사는 이화양행이나 청나라의 초상국 기선처럼 조선의 세곡과 수출입상품을 수송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과 조선 해안의 미개항구(未開港口) 간에 증기선을 투입하여 조선내의 화물과 사람, 우편물을 운송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조정에서 볼 때 미들톤의 사업은 조선의 해운교통을 개화시키는 데 매우 바람직했다.
그러나 미들톤이 조선 연안의 해운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가졌다는 이유를 들어 이화양행, 초상국, 세창양행 등 기존의 외국선박업체들이 방해를 하는 데다 묄렌도르프가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조선정부가 요구한 연간 15%의 이익배당이 불평등하다는 등의 이유로 계약이 취소되어 미들톤 기선회사는 설립되자마자 문을 닫고 말았다.
외국 고용기선의 횡포
1884년 음력 10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젊은 개화당 정치가들이 보수적인 사대당인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개화정부를 세우려다가 사대당이 부른 청나라 구원병의 반격으로 실패한 갑신정변 때문에 일본은 관리 피살과 일본공사관을 파손한 대가로 13만 원의 배상을 강요했고, 우리 조정은 지불할 것을 약속했다.
국고가 빈약한 우리정부는 대일 배상금을 외국 차관으로 갚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묄렌도르프의 중계로 인천에서 개업했던 독일의 무역상인 세창양행(世昌洋行)으로부터 13만 원을 빌리게 됐다. 이런 거금을 장사꾼인 세창양행이 그냥 빌려줄 리 없었다.
세창양행은 차관대가로 연 10%의 고율이자, 연간 3만 석의 세곡을 5년 동안 해마다 5개월간 세창양행의 증기선이 운송할 수 있는 독점권, 우리 정부가 고용하는 다른 선박의 운영권까지 달라고 요구했다. 돈이 급한 우리 조정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수밖에 없었고, 1885년 고용선 계약이 이루어졌다.
세창양행은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가 있는 독일 무역상사로서 1870년대 말 홍콩과 천진으로 진출하여 중국을 상대로 무역업 등을 하던 거대 무역상이다. 이 회사는 1884년에 인천까지 들어와 지점을 세우고 `칼 발터 무역상사`라는 상호로 일을 시작했다가 얼마 후 세창양행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바꾸었다.
한국에서는 무역보다 부동산 투기와 정부를 상대로 높은 이자의 차관 알선, 정부수요 외국물자 납품, 고리대금업 등을 했다.
그러다가 묄렌도르프와 손을 잡으면서 조선정부의 기선 구매와 외국 고용선 알선, 자사가 고용한 선박으로 세곡미 운송 독점, 조선정부 소유 선박의 수탁운영, 광산 개발 등 큼직한 이권사업을 독식했다. 세창양행은 우리 조정과 밀착했던 일종의 어용상사로, 묄렌도르프와 짜고 조선의 피를 빨아먹던 악랄한 외국기업이었다.
13만 원의 차관 대가로 고용선과 국영선 수탁운영 계약을 따낸 세창양행은 1885년 최대 5천 석을 적재할 수 있는 400톤급 증기선인 희화선(希化船)을 상해로부터 들여와 서해연안 해로에 투입하여 세곡을 독점 운송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그동안 세곡미를 운송하던 국내 사유 선박들의 화물을 모두 탈취 운송하는 바람에 반발이 심하게 일어났다. 이뿐만 아니라 적재 능력이 큰 대형 증기선이라 미곡의 선적과 하역 시간이 길어 미곡의 손실이 큰데다가 우리 조정 입장에서는 고액의 용선료를 지불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불리했다.
또 세창양행은 조선정부의 고용선 수탁 운영으로 생기는 이익과 결손액을 조선정부와 균등하게 배분하고 분담한다는 계약조건도 지키지 않았다.
게다가 미곡을 운송하다가 돈이 더 많이 생기는 수출입품 수송이 생기면 바로 희화선을 빼돌리는 바람에 지방에서 세곡이 산더미처럼 쌓여 썩거나 손실되는 일이 생기는 등 정부가 입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담당부서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세곡의 긴급 수송을 위해 일본 기선과 재래선박을 고용하자 세창양행은 계약 위반이라며 손해배상을 강요했고, 조선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다시금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청나라 옹호를 위한 도가 넘치는 부정과 민비의 친러정치 지원 등으로 1885년 파직 당하자 세창양행도 철수하고 말았다.
청국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하여 묄렌도르프를 앞세워 조선의 해운교통 개척 전담기관으로 탄생시킨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세곡 조운을 둘러싼 관리들의 부정부패, 해운제도의 모순, 서양 경제와 서양식 상거래에 미숙한 정부의 서툰 고용선 계약, 외국 상사의 탐욕, 갑신정변을 미끼로 한 일본의 흉계 등에 휘말렸고, 결국 외국 기선 고용시대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3. 일본에 지배당한 초창기 해운업 - 세곡 운반 위해 증기선 도입해
세곡 운반을 위해 증기선을 들여왔다가 조선정부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조선의 해운업자들은 자본과 경험 부족으로 초기부터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1890년을 넘어서자 인천, 군산, 부산, 원산 등 개항지에는 한일 합자 민영 기선회사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객주로 불리던 조선의 대상인 몇 사람은 상품 수송을 위해 일본과 청나라로부터 소형 기선을 빌려 오기도 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세곡 운송을 전담했던 전운국(轉運局)이 1883년 기선 도입을 전담하는 부서로 개편되었지만 묄렌도르프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동안 사용했던 외국 기선의 폐단과 세곡 수송에 끼쳤던 막대한 손실을 보면서 현실에 눈뜬 조선정부는 남의 나라 기선보다는 힘이 들어도 조정에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선이 필요함을 자각하고 묄렌도르프가 물러가자 전운국에 기선 도입을 서둘도록 지시했다.
첫 기선은 일본이 보낸 세자비 책빈 선물
이에 앞서 1882년 초, 후에 순종이 된 고종의 둘째 아들인 척(拓)의 세자 관례식과 세자비 책빈(冊嬪)식을 축하하는 의미로 일본이 소형기선 한 척을 선물로 보내와 국내에 기선이 처음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 기선은 고물이어서 엔진 고장이 잦고 석탄 구입이 어려워 한강 양화진에 방치해 두었다가 폐선이 되고 말았다.
세자 관례식이 있던 해 11월,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부임한 묄렌도르프는 증기선 도입을 위한 본보기로 상해로부터 12마력짜리 소형 증기화물선 한 척을 1888년 봄에 들여와 조정 대신들 앞에서 과시했지만 이 역시 고물선이라 돈만 버리고 말았다.
묄렌도르프의 주장으로 기선을 사들인 조선정부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지만 전국 조창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세곡미의 수송을 위해서는 증기선 도입이 시급했다.
이번에는 정부가 직접 도입키로 하였으나 자금이 부족해 조선에서 장사를 하던 영국과 독일상사를 통해 외국 차관을 들여왔다. 그러나 새 기선을 도입하기에는 금액이 부족해 할 수 없이 전운국을 시켜 중고선 3척을 사오게 했다. 해룡호, 조양호, 광재호 등이 그것이다.
해룡호(海龍號): 일본 제일은행과 미국 무역상인 타운센드(W. Townsend)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일본우선주식회사가 사용하던 성능이 떨어지고 비경제적인 소형 중고선 `‘지마환’(志摩丸)을 1886년 6월에 구입, 해룡호로 이름을 바꾸었다.
236톤급에 돛 두 개와 물 자세 바퀴가 양쪽 뱃전에 한 개씩 달린 2범 쌍륜선 증기선으로, 최대 2천400가마의 곡물을 운반할 수 있다. 인천서 대동강 어귀까지 항해하는데 24시간이나 걸리는 저속선으로, 후에 밀무역을 적발하는 연안 순시선으로 사용되었다.
조양호(朝陽號): 1887년 5월 독일 무역상인 세창양행의 차관으로 독일 함부르크 선적의 중고선 249톤급 도이취란드호를 도입하여 조양호로 이름을 바꾸고 운항했으나 1년간 잔금을 완불하지 못하여 독일기를 달고 다녀야 했다.
이 배 역시 항해 보조용으로 두 개의 돛이 달린 증기선으로 서남해안의 세곡 수송에 투입됐다. 그러나 1년여 만에 항해기술 미숙으로 인천 앞바다에서 좌초하여 대파, 보험사에서 718달러를 받고 공매처분 당했다.
광재호(廣齋號): 세창양행의 차관으로 홍콩에서 운항하던 독일선박 시그날(Signal)호를 1887년에 구입하여 9월 인천항에 도착하자 광재호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888년 다시 창룡호(蒼龍號)로 바꾸었다. 403톤급에 2범 기선으로 1892년까지 잔금을 상환하지 못해 독일기를 달고 운항했다.
초기의 증기선들은 원양항해용 대형선인 경우 증기 엔진의 힘이 약해 바람의 힘을 보조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대형 돛을 2~4개씩 달고 다녔다. 조선정부의 기선 관리부서인 정운국이 이 3척의 국유선을 1892년까지 관리했다. 그후 최초의 국제 해운사인 이운사로 넘겨 1895년까지 위탁 경영을 하다가 일본에 몰수되었다.
정부는 1892년 말 창설한 한·청 합자 해운사인 이운사(移運社)에 국영해운업을 위탁하기 전까지 외국 차관을 이용해 1척을 더 도입했다
현익호(顯益號): 1880년대 말 세곡 운송에 사용하던 노르웨이선 붕기복호를 세창양행의 차관으로 1892년 사서 현익호로 개명해 사용하다가 이운사에 넘겨주었다. 현익호는 700톤 급의 대형선박으로 물 자세 바퀴로 추진하는 기선이 아닌 최초의 스크루(screw) 추진식 선박이었다.
이렇게 외국 돈을 빌려 1890년대 초까지 4척의 증기선을 도입했으나 우리 기술로는 잦은 고장을 고칠 수 없어 일본 오사카나 나가사키 또는 중국 상해로 가서 수리해야 했다.
국유 기선 부족 틈타 일본 고용선 횡포
1880년대 말 우리나라는 최대의 풍년을 맞았다. 따라서 국가에 세금으로 바치는 세곡 운송량이 폭주하자 전운국이 소유한 국유선만으로는 부족하여 외국 기선을 빌렸다. 이때부터 국산 곡물이 일본과 중국에 수출되었고 수입품이 늘어났다.
최초로 도입한 국유 기선이 전부 고물선이어서 세곡 운송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외국 기선을 빌려야 할 형편이었다. 1886년 봄 일본 증기선 `미농환`을 빌려 세곡을 운송하기 시작한 때부터 1892년까지 일본배가 12척으로 가장 많았다.
1888년 440마력의 증기 엔진으로 시속 13km를 내는 독일의 위락사호를 4개월간 용선한 데 이어 1889년 노르웨이 붕기복(Bankchef Henrikssen)호를 1892년까지 빌려 세곡을 운송하다가 마지막 해에 나라 차관으로 이 기선을 구입, 전운국 대행업체인 이운사에 대여했다.
세곡을 빨리 운반하기 위해서 고용한 일본 기선들 때문에 조선정부는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높은 이자를 지불하는 외국 차관으로 빌려 온 외국 기선을 세곡 운송에만 활용하고 세곡이 없는 시기에는 운휴한다는 조건에 따라 1년 중 8개월간 배를 놀려도 용선 비용을 계속 지불했기 때문이다.
수출입 상품이나 일반 토산품 운송에 활용했더라면 적자 누적을 피할 수 있었지만 조선 관리들은 기선운항관리 경험과 기술이 부족했다. 국제 해운관리기술 부족은 결국 해운발달을 방해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정부의 외국 선박고용 바람에 이어 민간업자들 사이에서도 외국선박을 고용하는 붐이 일어나 증기선들은 호황을 맞았다. 상인들은 일본 선박을 많이 고용했는데, 다른 나라보다 고용비용이 쌌기 때문이다.
국내서 장사를 하는 외국 업체들도 앞다퉈 증기선을 도입, 외국으로 나가는 돈이 이만저만 아니어서 정부가 입는 손해는 계속 커져 갔다.
이를 막기 위해 1889년 조정은 일본 제일은행에서 14만 원을 빌려 인천에서 무역업을 하던 미국 타운센드 상회를 통해 세 번째로 기선 3척을 사들였다. 1891년에는 서울에서 무역상과 차관 중개업을 하던 청국인 거상 동순태옥(同順泰屋)으로부터 10만 원을 빌려 중·소형기선을 구입했다. 이때부터 국내 연안 해운에 국제 증기선 경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증기선 해운업이 번창하자 1884년 인천에 상륙하여 장사를 하던 독일 거상 세창양행에서도 증기선 2척을 사 경쟁에 뛰어들었고, 일본 상인들도 합세하여 국제항로뿐만 아니라 내륙의 한강 항로에도 증기선 경쟁시대가 열렸다.
이렇게 해상교통 혁명초기를 서양인과 일본인이 주도하게 되자 내국인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조희연, 박기종, 민영휘, 김익승, 최봉준 등 토착재벌들이 증기선 사업에 뛰어들어 근대 한국해운업을 본격적으로 개막시켰다.
한국 민영해운 효시 대흥상회의 비운
증기선 도입이 강하게 거론되던 시기인 1882년 10월 고종은 나라 힘으로는 여력이 없어 민간인이 증기선을 도입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자본이 빈약한 민간 해운업자들로서는 값비싼 증기선의 도입이 쉽지 않아 정부의 민간 해운정책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다가 1886년 서울의 이병선, 김동헌, 김범식 등 세 명이 합자로 민간 기선회사인 ‘대흥상회’를 설립하고 그해 10월 일본에 거주하던 미국 해운업자인 에드워드 레이크로부터 72톤급 소형기선 1척을 도입했다.
대흥상회는 이 기선을 구입하기 위해 세창양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구입비 1만 달러 중 8천880달러만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는 30일 안에 완불하기로 하고 배를 인도받았다. 배 이름을 대흥호로 붙이고 인천 서울간 한강 운항에 투입했다. 이것이 한강에 출현한 최초의 민영 증기선이었다.
“아니, 저게 무엇인가.”
“검은 것이 쇠배(鐵船) 같네 그려.”
“그런데 배에다 웬 굴뚝을 저리 높이 달고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가, 혹시 불난 배 아녀?”
“불이 난 것이 아니라 저것이 석탄으로 불을 지펴 헤엄치는 화륜선(火輪船)이라는 것이라네.”
“그런가, 저게 바로 증기선이라는 것이구먼. 그런데 어떤 서양 코쟁이가 또 증기선을 몰고 삼개(麻浦) 나루까지 쳐들어오는가?”
“양코쟁이 증기선이 아니라 우리 백성의 대흥상회 증기선이라네. 저것 보게. 뱃머리에 펄럭이는 깃발에 `대흥호`라고 대문짝 같이 써 있지 않은가.”
지금 양화대교가 놓여 있는 쪽 인공폭포 절벽 밑으로 물살을 가르면서 올라오는 증기선을 처음 본 서울 백성들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백성이 처음으로 들여온 대흥상회의 증기선은 고물에 가까워 고장이 잦은데다가 비싸게 부른 운송비 때문에 운송 수주량이 적어 6개월간 영업적자를 보았다. 게다가 선원 임금까지 누적되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더불어 전 선주인 레이크의 잔액 독촉과 돈을 빌린 세창양행의 채무 독촉으로 배를 공매처분하게 됐다.
최초의 민간 해운사인 대흥상회가 단명하게 된 이유는 레이크가 대흥상회 주주들의 기선구매업무 무지를 악용하여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씌운 것이 큰 화근이었다.
레이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흥호의 공매처분에 달려들어 10분의 1이라는 파격적으로 싼 값에 낙찰받아 배를 거의 공짜로 회수해 갔다. 대흥상회는 1년만에 비운의 종말을 맞고 말았다.
이뿐만 아니라 세창양행은 빌려준 돈을 못 받게 되자 조선정부에다 거세게 항의, 대흥상회 대표인 이병선은 체포되고 재산까지 몰수당해 알거지가 되었다.
일본인 기선회사가 해운업 주름 잡아
대흥상회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장한 민영 해운업체는 인천과 서울 사이 한강에 소형 기선을 취항시켰던 삼산사다. 1888년 8월 서울의 한강에 삼산사의 소형 증기선인 삼호호(三湖號)와 용산호(龍山號)가 나타난 것은 구시대적 한강 수운의 잠을 깨우는 신호였다. 용산호는 18톤, 조금 작은 삼호호는 13톤 급이었다.
조선조 말 군부대신을 역임했던 조희연이 설립한 삼산사의 주목적은 나라의 세곡미를 서울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조희연은 무과 출신으로 일찍부터 서양 근대산업을 배우는데 힘쓴 실무파였다. 그는 조정의 기기국 위원으로 출세해 후에는 군부대신까지 역임했다.
조희연은 당시 조정에서 도입한 기선으로는 세곡미 수송에 부족한데다 일본 선박들이 조선 연안 해운을 장악하는 것을 보고 우리의 해운을 일본에 빼앗길 수 없다 하여 민영 기선회사를 설립하기로 하고 고종에게 기선 도입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 결과 조희연은 왕실의 자금을 얻어 삼선사를 설립하고 소형 증기선을 도입, 한강에 취항시켰던 것이다.
삼호호는 한강에 취항한 지 3개월도 못되어 물살이 세고 간만의 차가 심한데다가 지형이 복잡한 강화도 물목에서 운전 미숙으로 난파되고 말았다. 초창기부터 막대한 손실을 입은 조희연은 주저앉을 수 없어 독일의 세창양행에서 차관을 얻어 독일 함부르크에서 건조한 35톤짜리 증기선 제강호 1척을 도입해 다시 투입했다.
그러나 제강호 역시 취항한 지 3개월도 못되어 역시 운전 미숙으로 강화도 영강포에서 바위를 들이받고 크게 부서져 삼선회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이어 부산항에서 부산감리서 직원으로 근무하던 정현철과 민거호 그리고 경찰관 박기종 등 3명이 전찰회사(電察會社)를 부산에 설립하고 다음해인 1888년 일본서 소형 증기선 1척을 도입, 낙동강과 남, 동해 연안 항구를 상대로 상인과 화물수송업을 시작했다.
이후 소형기선 몇 척을 더 도입해 영업을 한 전찰회사는 실은 조선사람을 주주로 위장시킨 일본인 기선회사였다.
이렇게 조선의 민족 해운업자들은 자본과 경험 부족으로 초기부터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으로 해운권을 빼앗겼다. 1890년을 넘어서자 인천, 군산, 부산, 원산 등 개항지에는 한·일 합자 민영 기선회사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선박은 대개 일본에서 빌려 영업을 했다. 객주로 불리던 조선의 대상인 몇 사람이 자신들의 상품 수송을 위해 일본과 청나라로부터 소형 기선을 빌려 사용할 정도였다.
조선의 민영 해운업체들은 대부분 1, 2척의 소형기선을 보유한 영세업체로 한국인 명의를 빌려 등록한 일본업체들이어서 조선인 주주는 실권이 거의 없는 허수아비였다. 게다가 선장, 기관사 등 요직은 일본인이 독점하여 기술이 없는 조선인 선원들은 대우가 비참했다.
조선정부는 해운교통의 발전을 위해 조선인 선원 양성이 시급한데도 교육기관 하나 세울 능력이 없었다.
4. 부관연락선과 연근해 해운업 일본 침략정책에 따라 흥망성쇄
부관연락선은 1905년 9월 일본의 산요철도주식회사가 일본철도와 경부선을 연결할 목적으로 1천680톤급 일기환(이키마루)을 투입해 격일운항을 한 것이 시초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정책에 힘입어 발전했고 일제시대 최대의 기선 13척이 취항했다.
2차대전의 패배로 43년 종말을 맞은 이후 부관페리로 부활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1945년 광복 이전에는 기선이 일본, 남중국 등 국제 여객교통을 담당했다. 우리나라에서 동경이나 상해를 다녀오려면 정기운항 여객선을 탈 수밖에 없었다. 1940년 이전에는 외국도 형편이 같았다.
이처럼 20세기 전반의 국제교통수단은 증기여객선이 주역을 담당했기 때문에 나라마다 정기여객선 교통망이 발달했다. 1940년대 들어 항공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힘입어 국제교통수단의 주역이었던 대형 여객선은 그 임무를 항공기에 넘기고, 화물선이나 유람선 또는 나라 안의 단거리 여객선으로 쓰이게 되었다.
부관 연락선의 시초는 1905년 ‘이키마루’호
1905년 9월 일본의 산요철도주식회사가 일본철도와 경부선을 연결할 목적으로 1천680톤급 일기환(壹岐丸, 이키마루)을 투입, 격일운항을 한 것이 부관연락선의 시초다. 같은 해 11월부터는 자매선인 대마환(對馬丸)을 추가해 매일 취항하다가 1906년 12월 야간운항으로 바꾸고, 주간항해는 격일로 했다. 그러다가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 12월 주간항해로 변경해 매일 주야로 부산과 시모노세키에서 출항했다.
취항 초기에는 하루 평균 승객 150여 명, 화물은 약 70톤이었지만 1922년부터는 승객 1천600명, 화물은 약 600톤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승객과 화물이 크게 증가하자 1931년 3천 톤급의 고려환(高麗丸)와 신라환(新羅丸)을 새로 건조해 취항시켰다. 이용자가 많을 때는 용선을 하기도 했다.
1932년 3천600톤급 덕수환(德壽丸)과 경복환(慶福丸)을, 이듬해에는 창경환(昌慶丸)을 추가했다. 4월 1일 경복환, 창경환, 덕수환을 여객 전용선으로 바꾸면서 부산∼시모노세키의 운항시간이 11시간에서 8시간으로 짧아졌다.
구선인 신라환과 고려환은 여객화물 혼용선으로 바꾸고, 낡은 최초의 관부 연락선인 일기환과 대마환은 부관 항로에서 퇴역시켰다. 1936년말 새로 건조한 7천 톤급 금강환(金剛丸)을, 1937년초에는 7천 톤급 흥안환(興安丸)을 각각 취항시켰다.
이로써 7천 톤급 2척과 3천600톤급 3척 등 5척이 시모노세키와 부산에서 주야 2회씩 출발, 하루 4회 운항했다.
한국과 중국 침략정책에 힘입어 급발전
1936년 일본의 침공으로 일어난 중일전쟁 때문에 관부항로의 수송량이 폭증하여 1942년 7천900톤급의 천산환(天山丸), 1943년 9천700톤급의 곤륜환(崑崙丸)을 새로 만들어 부관항로에 취항시켰다.
부관연락선은 한국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정책에 힘입어 발전했다. 1943년 최대 호황기를 누리다가 일본 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항로도 종말을 맞게 되었다.
부관연락선의 선명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과 중국을 회유하려는 침략적 근성이 배어 있다. 일본이 현해탄에 있는 일기도와 대마도를 부관연락선의 이름으로 정한 것은 대한해협을 건너 한국을 침략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한국에 관련된 이름을 붙였는데, 1911년에 등장한 신라환(新羅丸), 고려환(高麗丸)은 한일병합을 달성했다는 의미로, 1922년의 경복환(慶福丸), 창경환(昌慶丸), 덕수환(德壽丸)은 1919년의 3·1운동 진압으로 한국 식민지화에 자신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 1936년 금강산환(金剛山丸)은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아 대륙침략을 본격화한다는 야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만주에 관련된 이름도 있다. 1937년의 흥안환(興安丸)은 일본이 1931년에 일으킨 만주사변, 1932년에 수립한 만주국, 1937년에 일으킨 지나사변(중일전쟁) 등의 도발로 침략의 첫 단계를 성취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42년의 천산환(天山丸), 곤륜환(崑崙丸)은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여 태평양전쟁에 돌입한다는 호전적 정신을 의미했다.
1905년 개설되어 2차대전의 패배로 1943년 종말을 맞을 때까지 일제시대 최대의 기선(1천680∼7천900톤) 13척이 부관항로에 취항했다. 광복 후 1967년, 동경에서 개최된 한일 경제 각료회의에서 부관연락선을 부활하기로 하고 일본이 자본금 2억1천600만 원을 들여 1969년 8월 30일에 부관페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70년 3월에는 부산과 시모노세키에 터미널을 기공하여 6월 3천870톤급 일본선 ‘페리-관부’호를 취항시켰다. 1974년 문세광의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승용차 탑재가 금지되면서 경영에 타격을 받은 `페리-관부`를 1976년 한국의 (주)동양고속이 매입하여 운항을 계속했다.
귀국선 ‘우키시마’호의 비극
일본 아오모리 현에 있는 시모키타 반도의 오미나토 항에는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이 해방을 맞아 귀국선 ‘우키시마’호를 타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945년 8월 22일 오후 10시쯤 일본 해군 특별군함인 우키시마호가 부산으로 출항했다.
오미나토에 있는 일본해군경비부의 발표에 따르면 그 배에는 한국인 징용 노동자와 가족 3천735명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배는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고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다.
우키시마호는 8월 24일 오후 5시 20분쯤 마이스루 항에 도착하자마자 원인 모를 폭발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일본정부는 미군이 매설한 지뢰에 부딪친 것이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지뢰로 인한 침몰이라면 구멍이 선체의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뚫려야 하지만 9년이 지난 뒤 인양해서 살펴본 결과 바깥 방향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한국인은 7천500명이었고, 어떤 문서에는 1만2천 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800명에서 1천500명으로 집계된다.
우키시마호는 왜 부산으로 가지 않고 회항하다 마이스루 항에 들렀고, 폭발 원인은 무엇이며 일본해군이나 정부는 왜 즉각 구조작업에 나서지 않았는가? 이 사건은 지금껏 의혹에 싸여 있다. 이후 일본군에 의한 계획적이고 잔인한 폭침이라는 증언과 자료가 즐비하게 나왔다.
배의 폭발사고로 숨진 한국인의 유골이 아직도 해저에 있다는 사실이 재일교포에 의해 2002년 2월 밝혀졌다. 배가 쉽게 가라앉도록 선창에 수백 톤의 자갈을 실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1980년대 초 잠수부 가사하라(笠原)는 마이스루만 바다 밑을 조사하던 중 유골 무더기를 발견했다. 또 1945년 우키시마호 인양 때 선체 윗부분은 건져냈으나 아래쪽은 너무 무거워 포기했는데, 바닥에 실린 360톤의 자갈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원을 훨씬 초과한 7천500명을 태운 배에 자갈을 실은 것은 배를 가라앉히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70년대 중반부터 사건의 진상규명에 매달렸던 ‘우키시마호 희생자 진상규명위원회’ 대표 제일교포 리병만 씨가 일본에 건너간 것은 3살 때다. 경남 함안에서 강제로 징용된 부친을 따라 일본으로 간 것이다.
오사카, 고베 등지에서 조총련 직원으로 일한 그는 50년대 초반 우키시마호의 참상을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70년대 중반 은퇴 후 이 사건에 매달렸다. 관련자료를 찾기 위해 마이스루 시 당국과 후생성을 셀 수 없이 드나들었다. 이뿐만 아니라 생존자와 일본인 승무원을 만나기 위해 일본 전역을 돌아다녔다.
일본인들은 “꿈에도 생각하기 싫은 일”이라며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또 생존자들로부터 사고 직후 일본 군인들끼리 “더 많이 죽여야 했는데, 왜 이것밖에 죽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리병만 씨는 “마이스루만(灣)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사고 당시 시신 대부분이 떠내려갔을 텐데 아직도 그렇게 많은 유골이 남아 있다면 희생자가 얼마나 많았겠느냐”면서 치를 떨었다.
2차대전 터지자 해운통제 강화
중국대륙 침략에 이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자 조선총독부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대형선박을 보유하고 있던 조선우선주식회사로 하여금 동남아쪽 항로에 배선하도록 했다.
한반도 중심의 연근해 해운업을 통합해 새 해운회사를 설립, 조선우선이 동남아 방면 항로에 진출하더라도 지장이 없도록 대비했다. 동시에 한반도의 해운을 일본의 전시체제로 편입해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조선총독부는 일본정부가 1936년 5월 공포한 항로통제법에 따라 전시통제를 실시했다. 처음에는 민간업자의 자치통제에서 반관반민 통제로, 그리고 최후에는 국가관리 해운통제로 전환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선박을 대량 징발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군수 물동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운임과 용선료가 폭등했다.
일본 국내에서도 일본우선(日本郵船), 대판상선(大阪商船), 삼정(三井), 산하(山下), 대동(大同), 천기(川岐), 국제(國際) 등의 대형해운회사가 1937년 7월 고베에서 해운자치연맹을 결성한데 이어 1938년 4월에는 일본선주협회와 연합해 일본해운통제위원회를 결성,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조선총독부도 조선 연안의 소형선박업자들이 1938년 8월 소형기선자치통제위원회를 결성하도록 해 운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민간해운을 통제해 중국 침략작전에 끌어들일 발판을 마련했다.
1938년 10월 일제의 만주 침공으로 군수품 물동량이 크게 늘어 선박이 부족해지자 민간의 의 자발적 지원선박으로는 수송이 곤란해졌다. 이에 일본 군부는 ‘해운통제령’을 만들어 1940년 2월 공포, 선박을 강제동원할 수 있게 했다.
2차대전 중반 전세가 일본에 불리해지자 1942년 9월 일본정부는 더욱 강력한 ‘해운통제 국책요강’을 제정해 일본의 해운을 준국가관리체제로 만들었다. 즉 모든 선박의 자유거래를 금지하고 운임과 용선료를 동결시켰다.
1942년 말에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한 ‘전시해운관리령’을 공포하고, 100톤 이상의 선박을 정부가 징발하여 태평양전장에 투입했다.
해운통제 위한 어용단체 조직
2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동남아 지역의 자원 탈취가 시급해졌다. 조선우선은 동남아에 진출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와 함께 어용단체인 서일본기선주식회사(西日本汽船株式會社)를 창립했다. 서일본기선주식회사는 (주)입석(立石)기선, (주)조선기선, (주)황양기선 등 3개의 연안해운업체를 합병하여 1941년 8월 15일 설립했다.
창업 당시의 명령항로는 부산∼울릉도, 목포∼제주도 2개 노선이었다. 이와 함께 부산∼나고야(名古屋)와 부산∼일본 서부의 주요 항구노선을 포함한 5척의 기선 건조와 조선연안 해운업체를 통합하여 어용단체를 만들려던 계획은 전세의 약화로 실행되지 못했다.
한반도 연안의 소화물 총괄운영을 위해 자본금 50만 원으로 설립한 어용회사 조선선박운항통제주식회사는 500톤 이상의 선박 20척을 징발해 일본정부에 바쳤다. 한반도 연안의 유조선 통제·운영을 위해 자본금 400만 원으로 설립한 조선유조선주식회사는 100톤 이상의 유조선 8척을 바쳤다.
가장 악랄한 어용단체는 한반도내 각종 해운관련업자를 감시하고 감독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해운협회(자본금 400만 원)로 한반도 해운통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총독부는 이 협회를 조종하여 한반도의 해운업체들을 전시용으로 동원했다.
선박건조는 물론이고 연료까지 통제
일제는 전쟁에 징발, 사용하기 위해 규격에 맞춰 선박을 건조하는 업자에게 보조금을 주었다. 즉 일반업자의 건조계약에 대해서는 조선식산은행으로 하여금 연리 3분(分) 9리(厘)의 저리로 융자해 주었다.
선박을 전쟁용으로 징발하기 위해 총독부는 1942년부터 계획조선을 실시하여 건조선가와 인도선가와의 차액을 정부가 보조하여 677척의 선박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재 및 노동력의 부족, 자재수송의 어려움으로 495척이 건조되는데 그쳤고,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계획은 중단되었다.
2차대전으로 산유국에서 석유의 수입이 불가능하자 1939년부터 석유연료를 배급제로 하다가 1940년 석유연료를 사용하는 민간선박은 물론이고 자동차의 연료배급도 중단해 버렸다. 이에 따라 자동차는 숯불가스로 움직여야 했다.
특히 선박연료인 중유가 부족해지자 총독부는 석탄액화로 만든 중질유를 사용할 계획을 세우고, 1945년 5월부터 5개월간 조선선박운항통제주식회사의 선박 300척에 중질유 사용장치를 달기로 했다. 하지만 8월 15일까지 작업을 마친 배는 18척에 불과했다.
중질유 사용과 병행하여 석탄가스발생장치를 달아 삼척의 무연탄을 연료로 쓸 계획도 세워 1945년 5월부터 6개월간 조선선박운항통제주식회사의 선박 2천300척에 설치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술이 미흡하고 자재 구입이 어려워 40척만 완성한 채 패전을 맞게 되었다.
2차대전 말기까지 살아남은 해운업체들
중국 침략에서 태평양전쟁 말기까지 살아남은 가장 큰 해운업체는 총독부 어용해운기업으로 2천500톤급 이상의 기선 26척을 보유했던 조선우선주식회사 외에 조선기선주식회사, 입석(立石)기선주식회사, 마루터 해운, 화전상점(和田商店)주식회사, 택산형제상회(澤山兄第商店), 대지회조점(大地回漕店), 부산상선조(釜山商船組), 환신(丸神)기선주식회사, 경인기선주식회사, 흥아해운주식회사, 주식회사 삼국상회(三國商會), 조선협동해운주식회사, 주식회사 조선해양사, 삼신(森信)운수주식회사 등이 있었다.
1941년 조선기선, 입석기선 및 황양(黃陽)기선은 총독부의 연안해운 통제방침에 따라 통합되어 일본기선주식회사로 바뀌었다.
한국인 해운기업은 서양자본이 침투하기 시작한 구한말 관영과 민영 기선업체로 출발했으나 일본의 말살정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근거리 연안항로에서 소형선을 운영하며 명맥을 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창립되어 가장 활발하게 해운활동을 했던 국내 해운회사는 삼신(森信)기선주시회사, 남일(南一)운수주식회사, 경기도 부천군의 면영(面營)통운조합(通運組合) 정도였다.
삼신기선주식회사는 1918년경 23톤의 소형 발동선으로 인천∼강화 노선을 개설해 1924년경 연안선에 진출한 유진식(兪鎭植)이 창업했다. 그는 개인기업을 1927년 자본금 20만 원의 삼신기선주식회사로 키웠다. 처음에는 본사를 강화도에 두었으나 후에 인천 중심의 운항에서 벗어나 부산∼여수간 정기선을 운항했다.
남일운수주식회사는 1924년 2월 목포 연안 다도해에서 549명이 투자한 자본금 15만 원으로 설립해 24톤급 호남환(湖南丸)과 남제일환(南第一丸) 등 2척의 발동선으로 목포∼다도해 간을 매일 운항했다.
기항지는 안창, 기좌, 판금, 암태, 자은, 당두, 비금, 도초 등 다도해 각지였다. 남일운수는 6척의 선박을 소유할 정도로 커졌으나 태평양전쟁을 맞아 연료 고갈과 선박의 노후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광복 이후 자본금을 300만 원으로 증자하고 7척의 선박을 운영하면서 소생했다.
부천군의 면영통운조합은 1934년 6월 경기도 부천군의 대부, 영흥, 덕적, 용유, 북도 등 5개의 섬 주민들이 출자하여 설립했다. 이 조합은 5개 도서와 가까운 인천, 강화, 화성을 오가며 승객과 화물을 수송했다. 광복 이후 면에 기증하여 1947년 6월 부천군 ‘면영통운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