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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84회. '고려말 비상계엄. 왜구를 격파하라' (2000.09.02.)
84회 : 고려말 비상계엄. 왜구를 격파하라
고려말 비상계엄. 왜구를 격파하라
방송일: 20000902 조회수 : 3129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 스페셜 제 83회
고려말 왜구는 정예부대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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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말달리면 1352년 공민왕 원년 3월,
계엄글씨 발생하면 고려의 수도 개경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팬... 횃불과 군사들 백성들의 통행이 통제되었고 궁궐을 지키는 병사들에게는 급박한 경계령이 내려졌다.
대문앞 지키고 내란도아니고 전쟁도 없었던 평화시. 고려의수도 개경에 내려진 계엄령.
계엄령이 발령되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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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고려말 왜구는 정예부대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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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1( 오프닝)
훈도시 왜구
뒤에 숨어있던 엠씨가 걸어나오지
여러분은 왜구...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해안가에 나타나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고... 온갖 노략질을 해대던 해적집단...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뒤를 가리키며 머리를 틀어올리고 아랫도리는 벌거벗은 야만인.... .
바로 이것이 우리 머릿속에 있는 왜구의 모습일것입니다.
그런데 바닷가의 해적이 수도 개경에는 왜 나타났으며, 해적이 나타났다고해서 개경 장안에 계엄령이 내려
진건 또 무슨 까닭일까요?
1
침구지도 엠씨옆에 발생 이 지도는 당시상황을 표시한 것입니다.
붉은 점.... 내륙으로번지기 보이는 것처럼 왜구는 전라도 경상도 해안 뿐 아니라 충청도 강원도 내륙 깊숙히
까지 들어와 온 강토를 유린했습니다. 백성들은 숱한 피해를 입었고 급기야는 수도 개경에 계엄령이 발령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훈도시 왜구 점점 어두워지며
검은 그림자로 변한다 고려전역을 어지럽히고 평화롭던 개성에 계엄령이 발령되도록 만들었던
의문의 집단 왜구. 왜구는 과연 우리의 생각처럼 단순한 해적집단이었을까요.
오늘 역사스페셜에선 고려말 왜구의 실체를 밝혀보겠습니다.
VCR1
도쿄시내 트래킹7
나무팬.. 건물외경7 왜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우리가 처음 찾은 곳은 도쿄.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 사료편찬소 현판 왜구와 관련된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문열고 들어가는 5
철제문을 열고 수장고로 들어가니 뒷모습들5 안쪽에 삼나무로 만든 상자형태의 방이 나왔다.
나무에서 꺼내고 천 벗기고11 몇 개의 나무상자를 열고 몇 겹의 천을 펼친 후에야,
우리는 그 자료를 볼 수 있었다.
두루말이 펼치고8 왜구도권.
16세기 명나라 해안에 나타나 노략질하던 왜구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풀샷 팬9 (3초 후)
가로 5.2미터, 세로 32센티미터의 이 그림에
타이트, 왜구모습들9
왜구들의 얼굴과 복장, 그리고 활동모습이 자세히 담겨있다.
대머리 현장인터뷰12 이 그림은 왜구의 활동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유례가 없는 귀중한 자료다
팬... 창 든 왜구15 (팬하다가 두 번째 배 보이면)
그림 속의 왜구는 아랫도리를 벗은 채 칼이나 창을 들고 있다.
창들고 칼들고...6
팬 시작..... 방화 11 왜구들은 가는 곳마다 방화와 약탈을 일삼으며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보따리 메고 나오는....14 16세기 명나라 해안에 나타났던 왜구.
그렇다면 고려에 침입했던 왜구도 이와같은 모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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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표지10 고려사에는 왜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대목이 있다.
1380년에 벌어진 황산대첩의 한 장면이다.
고려사 아기발도15 아기발도라는 장수는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얼굴에는 동으로 만든 보호대를 하고 있다 .
고려사 하까다 만호15 또 다른 장수는 큰 쇠투구를 쓰고 손과 발 까지 모두덮는 갑옷을 입었다고 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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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5 고려사에 나타난 왜구의 모습을 알아볼 방법은 없을까? (취재진은 도쿄에 있는 한 박물관을
찾았다. )
전시실로 인3
팬5(갑옷입은 왜구모습)
이곳에는 각 시대별로 일본무사들의 복장이 전시 되어있다.
투구, 동면구...동면구로 줌인13 고려말에 해당되는 14세기 무사들의 복장에서 고려사에 언급된 장수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슴2
손3
풀샷2
박물관 관계자인터뷰41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투구가 있다거나 얼굴을 감싸주는 마스크가 있고 목주변을
고정시키는 것은 물론 팔다리까지 몸의 각 부분을 보호해주는 장비로 구성되어있다.
또 끈으로 각부분을 연결시켰는데 색깔이 화려해 몸을 보호함과 동시에 위엄있게 보일 수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왜구옷 전면샷6 고려사의 기록과 비교해보자 !
투구7 커다란 쇠투구라는 기록은 바로 이런 투구를 가리키는 것이다.
동면구7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화살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는 얼굴보호대다.
갑주7 온몸을 뒤덮었다는 크고 견고한 갑옷.
손발보호대6 팔다리 뿐 아니라 손발을 모두 감쌌다는 보호대다.
전면 6 이런 복장을 한 왜구장수는 말을 타고 병졸의 호위를 받았다고 했다.
아키오 인터뷰 45 말을 탄 사람은 총사령관이라 불리는 지휘관으로서 지상으로 내려와서 싸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무장방법이 남다르다. 갑옷도 대갑옷이라 해서 크고 화려한 것을 입으며 투구를 쓰고 말에 올라 타
긴칼을 차고 또 긴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었다.
노을 ...아기발도13 (5초 뒤)
이것이 바로 고려말 이땅에 쳐들어왔던 왜구장수를 복원한 모습이다.
줌인...얼굴로10 아기발도는 커다란 투구와 얼굴보호대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다.
틸다운... 팔보호대14 크고 견고한 갑옷과 팔다리 보호대로, 화살하나 들어갈 틈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틸다운 다리 보호대15 말을 타고 호위병을 거느린 완전무장의 왜구. 그것은 분명 단순한 해적의 모습은
아니다.
스튜디오2
*아기발도 복장 씨지
소품- 활과 화살, 고려사 책
고려사 펼쳐 들고 잠시 보다가
앞에서 보았던 고려사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 한 대목이 나옵니다.
갑옷 씨지 위로 화살 날아와... 황산싸움에서 아기발도의 활약으로 고려군이 주춤하고 있다 튕겨나가는구나
을 때였죠. 고려병사들이 아무리 화살을 쏘아도 아기발도는 끄덕 없었습니다.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얼굴에 철가면까지 썼으니 쉽게 죽을 리가 없었습니다.
엠씨, 화살 들어 한번 쏘아본다...
빗나가거나... 튕겨나가는 살.
겸연쩍은...... 표정 제가 한번 해볼까요?
역시, 어림도 없군요.
이 아기발도를 죽이는 과정에서 이성계는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보여줍니다.
달리는 말에서 그의 투구끈을 맞추어 투구가 벗겨지게 만든 것입니다.
그 틈에 부하가 아기발도의 얼굴에 화살을 명중시켰고, 결국 고려군은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대단하죠?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성계의 활솜씨보다도 아기발도가 무장한 수준입니다.
확실히 해적이나 도적떼 우두머리의 복장과 무기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습니다.
아기발도 앞에서 물론 이건 지휘관인 일부 장수들의 차림새이긴 하지만....
분명한건 일부 장수들이 이처럼 완벽한 모습으로 무장을 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본토의 정예부대와 거의 일치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왜구는 당시 일본의 정예부대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VCR2
금강하구를 달리다10 전라북도 군산과 충청남도 장항을 잇는 금강하구언.
취재진은 이곳에서부터, 고려말 왜구의 실체를 추적해보기로 했다.
바다위에 고려사 수파10 고려사에 최대침입지로 기록된 진포는 어디쯤일까.
왜선 5백척이 진포어구에 침입하다
두사람 위치설명 현장음10 금강하구 바로 여기에 진포가 있었습니다... 제가 볼때는....여기가 장항입니다.
지도 7 지형이 많이 변했지만 군산과 장항 사이 일대가 옛 진포자리인 것 만은 확실했다.
이영교수 현장 인터뷰24 저기 대선단 5백척이라고 하는 대선단이 이 근방에 정박. 큰 동아줄로 묶여져 있었다.
주력부대는 이미 금강을 거슬러 옥천에 가있었다. 여기에는 약탈하고 납치해온 사람과 쌀, 재화들이 배에 실려
있었다. 그리고 수비병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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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전경3
배...팬 배박물관 외경13 5백척 선단이라면 어느정도의 규모였을까.
5백척의 규모를 가늠해보기 위해 우리는 도쿄에 있는 배박물관을 찾았다. .
트래킹 전시된 배들14 일본의 항해술과 선박기술은 8세기 이후부터 크게 발전한다.
이 박물관에는 시대별로 많은 배가 전시되어 있다.
이야기하는 두사람4 당시, 왜구들은 무역이나 약탈을 위해
설명하는 해군4 고려 뿐 아니라 멀리 명나라 까지 나가곤 했다.
견명선 타이트16 고려에 출몰
하던 왜구의 배는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같은 시대의 이 배들을 통해,
그 크기나 기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인터뷰 이정도면 실제 크기는 얼마나 되나
크기는 미터로 하면 15미터에서 20미터 쯤 된다
몇 명 정도 탈 수 있나
사람은 십여명 탄다. 13-14명 정도.
계산수파...5000.... 9 적게 잡아 한 배에 열 명이 탔다고 가정했을 때,
5백척 배에 올라탄 왜구의 수는 5천이 된다.
두 배12 배 중에는 백여명이 탈 수 있는 큰배도 있다.
오천이란 숫자는 말과 무기 그리고 보급물자, 또 약탈한 물건을 싣고올 공간을 남겨 계산한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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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기록22
포획한 말이 1600필이다
왜적의 기병 700, 진주에 침입 배의 숫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말에 관한 대목이다.
이성계의 황산대첩에서는 적의말을 천육백필이나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있고 이보다 앞서 진주침입시에는
말을 탄 기병이 7백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영 인터뷰 38 보병 2천 기병 7백이란 기사가 있습니다. 보병 기병의 비율을 3대 일로 봤을 때 기병이 1600
이라면 보병은 5천, 다 합치면 6,7천 되죠. 거기다 진포 입구에서 죽은 왜병을 포함하면 거의 만명에 가까운
병력이 되죠.
이 만명이라는 왜구는 5백척이라는 대선단에 어울리는 병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적떼로 보기에는 힘들다.
무사 전투도...말로 퀵 줌19 당시의 전투에서 말이란 존재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왜구들은 뛰어난 기동력으로 불시에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고려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이재범 인터뷰26 보병과 기병의 합동전술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의 협동체제가 원만히 이뤄지지 않고서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산악이 많은 곳에서 보병과 기병이 보기합동전을 펼쳤다는 것은
이들의 평소훈련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된다.
물살5
바다를 가네12 5백척 대선단, 그리고 전문적인 기병부대의 존재. 고려말 왜구는 고도의 훈련을 받은 본토의
정예부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스튜디오3
대규모 전투그림 진포에 몰려왔던 왜구의 수가 최소한 3천에서 5천명이란 계산을 해봤는데요....
이건 최소로 잡은 거고,.. 학자들에 따라선 만명이상으로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적게 잡아도 연대 이상,
넉넉하게 잡으면 일개 사단수준의 병력이 진포로 몰려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게다가 그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앞서 보셨습니다
만 기병이란 존재였습니다.
,그림의 각부분 돌출, 이 기병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습니다.
기병 나와서 일렬로 서고
뒤에 보병 줄로 서고
이런 모습 씨지로.... 뒤의 그림은 당시 일본 무사들의 전투장면을 그린것인데요,
말을 탄 기병이 활을 쏘며 적의 대열을 흐트러놓으면, 이어서 보병이 달려들어 육탄전을 벌이는 형태입니다.
왜구들은 고려땅에서 이와 같은 보병기병 합동작전을 펼쳤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적 전투집단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완전한 무장에 엄청난 규모를 갖고있었던 의문의 집단 왜구.
이 왜구들은 고려땅에 들어와 어떻게 싸움을 벌였을까요?
VCR3
길 트래킹4
상주시 표시김천시 표시5 김천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3번 국도.
트럭 보이면 7 지금은 그나마 완만해졌지만, 고려때 이 길은 경사가 무척 심한 고갯길이었다.
할아버지랑 대화6 고개의 옛이름은 왜유령. 혹은 왜넘이재로 불린다.
할배 인터뷰11 왜넘이재라 합니다. 확실히 내력은 몰라도 왜놈이 넘어가서 이름이 난 모양이라요....
하늘, 틸다운 저기 오는 차9 왜넘이재의 사연은, 6백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고려말 왜구에서 비롯된다.
(이어서 계속)
지도수파10 1380년 진포에서 패배한 왜구들은 옥천 영동 김천을 지나 상주로 흘러든다. 그리고 운봉에서
패배한 후 마지막으로 남은 70여명이
줌인 무등산5 바로 이곳 무등산에 숨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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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오르는 교수님과 피디8
오르는 시선5 진포에 침입했던 왜구들의 최후 은거지! 무등산의 규봉암은 험한 산이었다.
정상서 산아래 보며5
팬... 절뒤의 바위들10 왜구가 은신했던 규봉사. 이 절은 신라시대에 지어진 고찰이다.
규봉사 정면5 이곳은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틸업 뒤의 바위7 이곳에서 왜구는 추격하는 고려군을 맞아 최후까지 저항한다.
이영교수 인터뷰 그 단순히 산으로들어간 것이 아니라 산에 들어가서 이런 방어하기 좋고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서 공격하기 좋은 바위라든지 3면이 절벽이고 접근길은 한방향 뿐이죠. 이런곳을 선택한거죠.
산속에서도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한 곳에 은거한 것이죠.
잡지표지4
농선전그림14 그런데 규봉암에서 왜구가 보여준 전술은 놀랍게도 일본무사들의 전법과 일치한다.
당시 무사들의 전술이 나타난 기록들을 보면 규봉암과 너무도 흡사한 지형들이 나온다.
농성전씨지...돌던기19 자연지형을 방패삼아 산 위에 성을 구축하고 돌이나 나뭇가지등을 던지면서 저항하던
전술. 이것을 농성전술이라 부른다. 이것은 당시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전술이었다.
아키오 인터뷰34 3면이 산으로둘러싸인 곳에서 방어를 하는 전쟁 방법은 14세기 일본 남북조시대 무사들의
일반적인 전쟁모습이다. 특히 이시대는 무사들이 서로간에 격렬히 싸웠던 시대였기 때문에 산에 성을 쌓고
공격을 하거나 공격을 당하는 상황이 반복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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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트래킹... 홍산면4 충남 부여군 홍산면.
이영교수 김피디 길 가리키며...책으로15 이곳은 최영장군의 유명한 홍산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여기서 왜구의 또 다른 전술을 살펴볼 수 있다.
산길 오르는 차 시선17(최영이야기) 1376년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왜구부대와, 토벌대 최영의 부대가 홍산에서
맞붙게 된다.
이때 환갑을 넘긴 최영장군은 화살을 맞고도 앞장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올라가는 두사람5 정상에 오르면
지도 가리키며 7 당시일본 무사들이 이용했던 지형과 똑같은 모습이 드러난다.
이영교수 현장인터뷰13 자기나라가 아니고 외국인 고려에 와서이런 지형을 발견하고 여기를 자기들의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하는 눈을 가진 전문적이고 숙련된 전투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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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하니 동진교가 보이네13 동진강 하류에는 동진교라는 다리가 있다.
6백년전 고려시대에도 이 자리에 다리가 있었다.
고려사 기록 12 당시 왜구는 곰소에서 적현을 넘어 부안으로 들어온 후 고려토벌대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왜선 5백척이 동진교 파괴.... 그러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동진교를 끊고 도주를 한다. .
씨지...가면서 다리파괴17 원래 일본에선 강을 이용한 방어전술이 발달해 있었다. 다리를 끊고 도망치는 것은
추격하는 군사를 따돌리는데 있어 가장 효율적인 전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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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교동도 해협6 수도 개경을 코앞에 두고있는 강화도.
바다에 고려사 수파20
최영유인작전 고려사에는 이 지역을 무대로 왜구가 벌였던 치밀한 전략이 기록되어 있다.
수도인 개경에는 수도방위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최영장군의 정예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377년, 왜구는 개경 주변의 양광도 지역을 집중공격한다.
씨지 왜구의 계획18 그 뒤에는 최영의 부대를 유인해서 개경의 주력부대를 외각으로 빼내겠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개경에서 최영의 부대가 빠지면 그 공백을 이용해 개경을 친다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었다.
이영 인터뷰48 왜구는 고려의 정규군을 격파하다. 그것은 각 부문별 작전, 자연지형 활용, 다리 끊기, 등
개별전술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고려정규군을 유인해서 심장부인 수도개성을 공격하겠다 전략 세울 정도로
정예부대인 전투집단인걸 알 수 있다.
강화도 바다...성...11 왜구가 고려땅에 와서 사용한 전술을 보면, 본토의 정예부대와 거의 같은 것들임을 알 수
있다.
다리밑을 흐르는 물, 갈매기24 남의 땅에 들어와 이런 전략과 전술을 구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왜구가 뛰어난 정예부대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스튜디오4
농성전그림
3애1도그림 (산에서의 농성전, 간첩을 이용한 첩보전, 험한 지형을 이 다리전술 그림 용한 게릴라전.....)
왜구들은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면서 고려땅을 유린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거의 무방비상태나 다름없는 해안가를 누비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막는자가 없으니 여기가 바로 낙토로구나....."
고려사 들고 왜구의 낙토가 된 고려땅에는 수많은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잠시 숨을 돌리고, 고려사의 한 대목을 볼까요?
어떤 군수가 처음 부임하여 동네를 도는데....
여인의 슬피우는 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아 물어보았더니 새신랑이 왜구에게 잡혀가 돌아오지 않았다더랍니다.
이런 가슴아픈 사연은 전국에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새신랑이 잡혀가 돌아오지 않았다.....
죽거나 다친게 아니고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구는 왜 고려의 젊은이들을 잡아갔던 것일까요? 그들은 무엇을 얻으러 바다건너 고려땅에 들어와 만행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왜구의 목적을 파악하면 그 실체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
VCR4
물살.. 왜구지침시차 글씨15 1350년 충정왕 2년 2월. 왜구가 남해안 일대에 대규모로 침입했다.
고려사는 이때를 왜구침입의 시작으로 기록하고 있다.
산 올라가는 일행4
가리키는 아저씨팬... 산아래 마을12 (지금은 이렇게 들이지만은... 까지 듣고)
침입지 중 하나인 전남 순천시 해룡면을 찾아갔다.
간척지... 안쪽 홍두마을9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됐지만, 고려말 당시 산 아랫마을은 바다였다.
간척지 안쪽에 들어 앉은 홍두마을은 왜구들이 자주 침입하던 곳이다.
집으로 인5
할아버지 인터뷰 11 말터 그 자리가 창고자리지 않느냐. 그 배난 자리서 싣고 나가고 배가 들어오고....
마을.. (조창설명)24 여기에서 13대를 살아온 토박이 할아버지가 기억하듯 이곳은 국가에 세금으로 낼 곡식과
재물을 모아두던 창고 , 즉 조창이 있던 자리였다.
이곳 해룡창은 고려시대 해안가에 있던 열세개 조창중의 하나였다.
이영교수 인터뷰22 조운선이 모이는 곳이 조창이다. 딴 곳에 가는 거 보다 곡식이나 경제적 가치있는 것이
모이는 창고를 급습한다면 그야말로 손쉽게 양곡을 한꺼번에 가져갈 수 있는 거죠.
전국조창 수파13 왜구의 침입은 조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왜구의 가장 큰 목표는 조창에 모여있던 쌀과 재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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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린는 차...줌인 창안8 왜구가 쌀과 재물을 얻기위해 조창을 집중공격하자,
고려는 조창을 내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팬 걸어오고9 산아래 깊숙히 지어진 진성창은 창고를 보호하기 위해 입구부터 성을 쌓았다.
진성창 터 팻말...터10 이곳은 주변의 만경강과 금강 유역에서 나는 쌀을 모으던 조창으로 왜구의 침입을 피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농기계창고5
나종우 인터뷰27 공민왕 7년 1358년에 전라도 진변사 고영현이란 사람이 연해에 있는 조창을 외지로 옮기자
건의를 하고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이곳에 있던 진성창도 내지로 옮겨지고 1376년까지는 연해의 모든
조창들이 내지로 옮겨지게 된다.
왜구침입상황도12 조창이 내륙으로 옮겨지자 왜구들의 침입도 조창을 따라 내륙 깊숙히 까지 들어오게 된다.
달리는 섬진강 하구13 광양만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하류.
왜구들은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하동 산청 화개를 지나 내륙으로 들어오게 된다.
줌인 뭍의 집들8 내륙으로 들어온 왜구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지방관청을 습격하기 까지 했다.
이영인터뷰22 바다에서 죽 올라가 가지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약탈하고 또 강가에 없으면 말을 타고 이동하면
서 큰 고을에 들어가 약탈하고 배에 싣고 도망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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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강화바다15 왜구의 침입은 더욱 기승을 부려 1377년에는 강화부를 함락시킨다. .
강화도는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이재범선생과 김피디3
지도3
수파..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 10 전국의 조운선들은 이곳 해로를 따라 개경으로 들어갔다. .
한마디로 이곳은 고려의 세금이 모이는 요충지였다.
이재범 인터뷰44 고려에 조세를 거두는 조운선이 이곳 바다와 강을 이용해 개경으로 들어왔는데 교동도는
개겨에서 가까운 코앞에 있는 섬으로서 이곳이 장악당하게 되면 남해안과 서해안에서 오는 조운선이 출입이
금지됩니다. 따라서 왜구들은 침구목적이었던 조운선을 쉽게 이곳에서 탈취... 교동도를 침구 거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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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표지10 왜구가 노린 것은 쌀과 재물만이 아니었다.
줌인 내용 완산부 임씨10 완산부의 최씨부인은 겁탈하려던 왜구에게 저항하다 팔다리가 잘리고 살해되었다.
영암 최씨14 영암의 최씨부인은 왜구들이 쫓아오자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피했으나, 결국 잡혀서 죽임을
당했는데, 갓난 아이가 죽은 어미젖을 빨다가 따라 죽게 되었다.
손홍렬 교수 인텀뷰48 일본이 계속 내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사람의 가치관을 전도시켜서 사람을
잔인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려사에 예를 보면 서너살 먹은 여자애를 잡아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쌀을 넣고
고사를 지낸 뒤 그 쌀로 밥을 해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 정도로 잔인했으니 여자를 겁탈하거나 쌀 뺏고 집 불지르고 한 정도는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았다 생각할
정도로 심한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고려사 강화부사 포로10 그러나 왜구가 주로 노린 것은 부녀자보다는 젊고 힘센 장정들이었다.
정몽주 포로10 고려사에는 왜구에게 잡혀서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려사에 나온 사례를 다 모으면 잡혀간 사람의 수가 삼만여 명에 이른다.
훔쳐가는 왜구그림21 잡혀간 장정들은 대부분 노예로 팔리거나 왜구의 배를 젓는데 이용됐다.
또 고려군과의 전투에 동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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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전경8 왜구들이 노린 또하나의 목표는 고려의 값진 문화재였다. 왜구의 근거지로 지목돼온 대마도.
관음사 외경3
불상보는 일행4 대마도 관음사에는 고려의 음보살좌상9 불상이 모셔져있다.
배2 1970년대 전반, 이 불상안에서
복장기꺼내기14 제작연대와 제작경위등이 기록된 문서가 발견되었다.
고려국 서주 부석사9 (5초 후) 원래 불상이 있었던 곳은 고려의 부석사였다.
풀샷3
천력 3년.... 시주자 명단18 제작한 연대는 1330년, 서른 두명이 시주를 해 제작됐다.
제작연대는 물론 시주자 명단까지 밝혀진 고려불상이 대마도에 와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마쓰 향토사학자 인터뷰30 어떻게 이 절에 오게 되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우리도 그게 궁금하다. 이 기록에는 불상을 만들 당시의 과정이 적혀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언제 건너왔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이 절에 보관되게 됐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대흥사 외경8 대마도 곳곳에는, 이런 고려의 문화재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탄생불5
약사여래좌상4 공식적으로 확인된 불상만 130여점..
동조여래입상18 개인들이 소장한 것까지 합치면 훨씬 많은 우리의 불교문화재가 이곳으로 넘어왔을 것이다.
고려청자7 전문가들은 이것들이 대부분 왜구들이 가져온 것으로 보고 있다.
깨진 청자 원샷12 깨지고 손상된 이 청자의 조각들이, 정상적인 경로 외의 방법으로 들어온 온 여정을 반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영호 교수 인터뷰1'05"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해변에 왔겠죠.
그러나 와서 봤을 때 그네들이 불교 불상 이런 실물을 대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 신비스런 많은 문화재를
보고...탐이 났다.
그래서 이런 탐나는 것을 가져가 일본육지본토에서 토호들이 귀중한 유물을 가져왔다 해서 돈을 주고 사들였
겠죠. 이것이 재물이 되고 돈이 되는 것을 알고 점점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갔죠.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양유관음상18 고려시대는 불교문화가 융성한 시기였다.
일본은 물론 중국에서조차 흉내낼 수 없었던 고려만의 자랑 불화. 이 고려불화는 지금, 전세계에 100 여 점이
남아있는데, 미륵하생경 변상도5 그중에 90 여 점이 일본에 있다.
관경변상도12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은 열 점이 채 안된다.
스튜디오5
훔쳐간 문화재 전시회
불경, 불상, 탱화 액자에 걸려
뒤에 발생. 왜구들이 노렸던 것은 결국 경제적 가치가 있는 쌀과 사람 ,그리고 재화들이었습니다.
왜구의 침입이 심했던 40여년간, 고려가 입은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저 불경과 불상 그리고 탱화들은, 이제는 돈을 주고도 못살 세계적인 보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의 자랑스런 유산들을 맘대로 볼 수 조차 없습니다.
왜구로 인한 피해가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안타까운 손실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왜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여러측면에서 접근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첫째, 왜구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왔던 해적집단을 뛰어넘어 체계적인 조직을 갖춘 대규모집단
이다.
둘째, 그 전술로 봐서 본토의 정규군과 거의 같은 전투력을 가진 집단이다.
셋째, 어떤 계기로 해서 돈이 될 만한 걸 찾아서 고려에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과연 그 어떤 계기란 무엇일까요. 이제 이 사실들을 바탕으로 진짜 왜구의 실체를 확인해볼 차례입니다.
과연 왜구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VCR5
후꾸오카 바다4
대재부 비석...팬 터6 14세기 큐슈지방의 중심지였던 후쿠오카 다자이 후 터..
바닥을 훑어요...10 다자이후는 그 지방을 통치하던 관청이 있던 곳이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영주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비석3
무라이 인터뷰45 가마쿠라 시대 후반기에 천황가가 두갈래로 분열되는 일이 생겨서 결국 2개의 왕조로
나뉘게 된다. 당시의 무사들도 두 왕조를 따라 분열이 되는데 하나의 집안 내에서도 두 계파로 나뉘어
싸우는 일이 광범위하게 이뤄지던 시대였다.
일본내란지도7 일본 역사상 최대의 혼란기. 역사가들은 이때를 남북조 쟁란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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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오고리시 이정표6
놀이터...팬... 전적지 비석11 지금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이 장소는 남북조시대 최대의 격전지였다.
비석글씨 보는 피디7씨11 1359년. 당시 후쿠오카의 통치자였던 쇼니는 경쟁자 기쿠치의 군대를 맞아 이곳에서
대 혈전을 벌이게 된다.
지도 보며 설명하는 아자씨 쇼니군이 7만명, 기쿠치군은 3만명. 10만 대군이 사활을 걸고 16시간동안 혈투를
벌였다.
(기냥 이어서)
지도 타이트10 쇼니군은 기쿠치군의 야간기습을 받아 패배를 하게 된다.
설명 아자씨16 이곳에서 승리한 기쿠치 세력이 쇼니군을 물리치고 규슈의 다자이후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후
십수년간 큐슈의 실권을 잡게 된다.
지쿠코강 풀샷17 오오하라 전투의 패배는 처절한 것이었다. 이 패 배로 인해 쇼니는 이만 여명의 사상자를
낸다. 그리고 큐슈에서 세력을 잃게 된다.
강물 6 쇼니군이 흘린 피가 몇날 며칠이고 지쿠코강을 피로 물들였다고 한다.
아키오 인터뷰1'07" 지방사회에서 싸움을 하면 무사들은 계속해서 병사와 군량미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일본열도는 그렇게 땅이 크지가 않다. 그리고 산이 많은 곳이라 논이나 밭을 만들어 식량을 확보하는
일에 한계가 있다. 남북조 내란이 어느한도를 넘어서서 일본 열도내의 식량만으로 감당 할 수 없게 되면
무사들은 밖으로 나가 약탈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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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아소만 전경15 (5초 뒤) 큐슈에서 세력을 잃은 쇼니가 재기할 꿈을 다진 곳은 바로 대마도,
그리고 바다건너 고려였다.
산간도로7
코마쓰 향토사학자 인터뷰25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농경지가 적어 옛날부터 식량이 많이 부족했다.
대마도 안에서 조달할 수 있는 쌀이나 곡물이 적으니까 자연히 한반도나 중국 또는 큐슈와의 무역에 많이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역이 주된 산업이었다.
코후나코시와 해파리8 대마도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고려였다.
좁은 해로를 간다11 대마도인들은 고려에서 대대로 물자를 구해왔고 그 때문에 고려의 수로와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소우씨 성터10 더욱이 대마도의 통치자였던 소우씨는 쇼니씨의 직속부하였고,
쇼니가 요청한 고려침입은 대마도의 이해와도 부합되는 일이었다.
소우영정7 이로써, 본토의 정예부대였던 쇼니세력과 휘하의 대마도 세력이 고려로 몰려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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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현 박물관 외경8 취재팀은 취제 도중 , 쇼니와 왜구와의 관계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법화경 꺼내는 여자... 묘법연화경8
펼치고...줌인...변상도7 금을 녹여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금자사경.
변상도 타이트7 이 경전은 찬란한 금빛으로 고려불교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 팬...뒤에 글씨17 금자사경은 전세계를 통털어 열 점이 안되는 진귀한 문화재다.
게다가 뒷부분에는 불경의 제작 경위와 연대, 시주자의 이름이 일일이 적혀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다.
제작후기3
지원6년 7 이 불경의 제작연대는 지원6년. 왜구의 침입이 시작되기 10년전인 1340년이었다.
여자 현장인터뷰 21 고려불경을 일본으로 가져와서 그것을 당시 큐슈 통치자였던 쇼니씨가 천만궁이란 절에
기증을 했다는 식으로 기록이 돼있다. 어떤 경로로 입수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원제작자 글씨/ 일본측 글씨9 기증자가 큐슈영주 쇼니라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이 불경의 입수경로를 추정할
수 있었다.
쇼니 이름3
씨지글씨... 봉기진..... 14 .
결국 고려에서 제작된 이 불경은, 고려땅에 들어왔던 왜구의 의해 그들의 영주 쇼니의 수중에 들어갔고,
다시 쇼니를 통해 천만궁에 바쳐지게 된 것이다.
전영호 교수 인터뷰37 이 금자사경이 그 연대를 보니까 천력이라고 하는 이건 1357년에 해당.
1340년에 만들어져서 1350년 이후 한참 왜구가 유행했을 때 이것이 일본으로 약탈당했죠.
이것이 자기 주인에게 받쳐져 그 주인은 또 아주 위의 사람에게 바쳐져 절에 모시게 된거다.
이렇게 해서 순서를 밟아 절에 바쳐졌다.
잡지...남북조 전란7 그러나 이런 왜구와 영주들의 관계는 큐슈영주 쇼니에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싸우는 그림14 남북조 쟁란기 동안 영주들은 혼전을 거듭했다.
거듭되는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주들은 필요한 물자들을 고려에서 얻으려 했던 것이다. .
무라이 인터뷰30 남북조 쟁란이 특히 큐슈지역에서 격렬하게 벌여졌고 장기화 됐다. 14세기 후반까지
전란이 계속되는 것이 큐슈지역의 상황이었다.
이것과 왜구의 활동이 활발해진 것과는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다.
배위에서 본 바다20 모든 세력이 무장을 했던 일본에 비해, 당시 고려의 지방방비는 상대적으로 허술했다.
일본의 영주들에게 고려는, 배만 타면 건너와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는, 낙토와도 같은 곳이었다.
스튜디오6
훈도시 왜구...디졸브
말탄 아기발도로 변한다.
그뒤에 일본내란 지도 배경이 고려말 왜구는 단순한 해적집단이 아니라 ,남북조 내서서히 생겨나 진해지고
란이라는 일본의 혼란스런 상황에서, 군수물자확보라는 특수한 목적을 갖고 고려에 쳐들어온 정예부대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밝혀낸 왜구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왜구는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여기를 보십시오.
거국원정 왜승기허 거국원정 왜승기허.
<<요동을 치기위해 군사를 일으키면 그 틈을 타서 왜구가 기승을 부릴 것이다..>>.
1388년 고려의 마지막 왕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에게 요동을 정벌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군사를 이끌고 위화도 까지 갔던 이성계는 이와같은 명분을 들어 군사를 돌립니다.
우리역사에서 새 왕조가 탄생하는 급박한 순간에, 왜구의 존재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려말 왜구는 우리 역사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일까요?
VCR6
강화도 가는길8 (5초 뒤)
80년에 걸친 몽고의 지배와 계속된 외침으로
돌담길 따라서~~~5 고려의 국력은 쇠퇴할 대로 쇠퇴해져있었다.
몽고 홍건 왜 침구지도16 몽고가 물러가자마자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고 왕궁을
불태운다. 한편 남쪽에서는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민심이 피폐해지는 등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었다.
손승철 교수 인터뷰37 고려는 원나라가 1270년부터 1351년까지 80여년간 지배를 했다.
원나라가 지배를 하면서 고려의 저항을 우려해가지고 지방군체제를 완전히 와해시켰다.
그리고 수도 개성을 지키는 치안 수준의 경군만을 유지했다. 그러니까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나타난
왜구에 대해 고려가 무방비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정몽주 영정6 왜구의 침입을 맞아 고려가 먼저 힘을 쏟은건 외교적 노력이었다.
고려사 정몽주 외교사절19 고려는 정몽주 등을 외교사절로 큐슈에 보내 왜구를 근절시키라고 엄중히 요구했다.
적지 않은 성과를 보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 없었다.
바다 수파.... 적이 와도 바라만보니...
배를 모르는 연해민...20 해안은 연일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스러웠다.
고려는 수군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관리들의 상소가 이어졌고 결국 공민왕 3년, 고려는 수군제도를 마련하고 지방군을 정비하게 된다.
장암수 해변팬15 해변주민 세명을 한호로 정하고 수군 한명씩을 내게했다.
또 지방군으로 진술군을 편성했다.
장암진성 흔적18 (3초 후) 왜구의 침입이 잦은 해안가에는 성을 쌓고 경비를 강화했다.
장암진성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금강하구에 지어진 성이다.
손승철 인터뷰29 와해됐던 지방군을 재정비해서 진수군을 편성하고 바다해군을 선기군을 양성하다.
동시에 전쟁에 필요한 화약이라든지 병기를 개발하면서 대략 1370년대 후반기가 되면 왜구와 전면전을
벌여 승리할 만큼 군사체제가 재정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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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영정9 무엇보다 획기적인 일은 화포의 개발이었다.
글씨 씨지 화통도감11 1377년 우왕 3년 10월.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이 설치된다.
화포발사16 화약과 함께 대장군 이장군 석포 신포 등 각종 화기가 잇따라 개발되었다.
화약무기의 개발 이후 고려의 전투력은 눈부시게 발전한다.
진포전경....줌인...하니 배 보이네16 1380년 8월.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의 수군은 백척의 적은 선단으로 5백척
왜구의 대선단을 격파한다. 대왜구전의 양상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고려사 5백척 수파)
이영교수 인터뷰32 가장 효율적인 왜구격퇴의 해답을 찾은 것이 최무선의 진포대첩이다.
그것은 화포라는 최신식 무기를 개발 처음으로 사용한 곳이이곳이다. 그래서 화포전법으로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또 승리를 거뒀다. 진포대첩은 왜구승리의 해답을 찾은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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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가는 찻길5
향토사학자와... 길에서10 진포대첩이 바다의 주도권을 잡은 첫 승리이었다면,
운봉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은 왜구토벌사에 한 획을 긋는 전투였다.
팬.... 전투터 오버랩 전투씬30 1380년 9월. 진포에서 배를 모두 잃은 왜구의 대부대는,
인월면쪽에서 몰려와 진을 치고 있었다.
이성계는 적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움을 지휘해,
왜구 대부분을 사상시키고 말 천육백필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남일 향토사학자25 이성계 장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많은 군사를 독려해서 여기서 힘든 싸움을 하게
되는데 말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가면서 싸움을 해서 전쟁을 결국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황산대첩과 피바위...15 (3초 후) 이때 흘린 왜구의 피가 강을 물들여 일주일동안이나 그 물을 마시지 못했고
여기서 승리한 이성계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손홍열 교수 인터뷰56 왜구출몰 로 인한 피해... 이것은 이성계와 같은 신흥무장을 성장시켰고 사대부들이
그로 인해 조정에 재정적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서 사전혁파를 주장하게 되고 구세력을 물리치고 새왕조를
개창하는데 성공했다.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것은 왜구와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불 수 있다.
황산... 어디냐....10
대첩비각 현판8
대첩비8
경복궁 근정전8
고려말 왜구와의 싸움을 통해 얻어진 경험들은 이후 조선의 대왜구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된다.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무력으로 응징하면서, 조선은 초기 100년 이상 주도적으로 왜구와의 관계를 이끌어
간다. 자신감 있는 조선의 왜구정책은 고려말 40년의 시련속에서 얻어낸 열매였던 것이다.
스튜디오7(클로징)
기본세트
고려왕조는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화포가 개발되었고 지방군 체제도 정비됐습니다.
왜구의 침입이, 역설적으로 고려의 국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
하지만..... 그 구체적인 성과는 고려가 아니라 다음왕조인 조선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조선의 건국주체였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이 왜구토벌 과정을 통해 민심과 권력을 동시에 거머쥐게
됩니다. 그리고 그힘을 바탕으로, 새왕조인 조선을 건국하게 됩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역사의 변동기, 왜구는 그 흐름을 가속화시킨 촉매같은 존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