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보좌파가 되는 것은 보수우파가 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일까?
● 진보 좌파가 된다는 것과 한국사회의 진보좌파의 문제점과 과제
●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는 수학에서 짝수와 홀수와 같이 필연적인 것이다.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대립은 정치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남과 여, 음과 양, 홀수와 짝수 등이 세계를 이루는 필수적인 요소인 것과 같다. 정치에 있어서 조화 비례 균형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건강의 ‘정상 상태’와 같은 것이다. 이 균형화 조화가 깨어지면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는 것이다. 편식을 하면 육체적 탈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좌와 우, 보수와 진보의 균형이 심각하게 깨어지면 정치적 혼란이 질병처럼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가 서로 균형을 일루고 서로 화합하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서로 인정하고 서로 양보한다는 것은 정치가 건강하게 발전하는 필요조건이다. 그래서 진보좌파와 보수우파는 서로 무찔러야 할 적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한 국가의 건강한 정치적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파트너’라고 생각해야 한다.
● 좌파와 우파는 범주(진영)의 문제이고 진보와 보수는 성격(기질) 상의 문제이다.
좌파와 우파가 순수하게 정치적인 용어라고 한다면, 보수와 진보는 다분히 철학적인 성격을 말해주는 용어이다. 좌파와 우파의 어원적 기원은 프랑스 혁명 이후 ‘왕정 복구’를 추구하는 세력과 새로운 ‘공화국 건설’을 추구하는 세력이 대립하면서 하나의 의사당에서 ‘좌와 우’로 나눠져서 대립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는 조선 시대의 ‘노론과 소론’이 서로 좌와 우로 나누어져서 대립한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전통적인 가치나 질서, 기득권을 가진 계층의 관점을 지지하는 것이 우파이고, 미래의 새로운 가치나 변화, 기득권에서 배제된 약자의 계층을 지지하는 것이 ‘좌파’이다.
반면 보수와 진보는 보다 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용어이다. 보수는 말 그대로 과거의 것을 유지하고 질서를 존중하며, 점진적인 변화를 지향하고 있다면, 진보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미래의 것을 추구하고, 질서 보다는 개혁이나 변화를 추구하고, 점진적인 변화 보다는 근본적인 변화 즉 혁명적인 것을 추구한다. 따라서 좌와 우는 카테고리(진영 혹은 범주)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한다면, 진보와 보수는 기질 혹은 성격의 특성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 진보 좌파가 된다는 것은 보수 우파가 되는 것 보다 더 어렵다.
보통 사람들은 “보수 우파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진보 좌파는 엄청나게 공부를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곤 한다. 사실 이 말은 정확히 옳은 표현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보수 우파는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가치들을 수호하고 보존하면 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공부하거나 미래의 비전을 위해 골몰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따로 더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무조건 기존의 것을 고수하는 것이 보수가 아니다. 진정한 보수는 무엇이 우리사회가 가졌던 진정 가치 있는 것이며, 어떤 부분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계속 지켜나가야 하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 주어져 있는 것들을 지켜낸다는 차원에서 더 많은 새로운 공부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진보 좌파가 되기보다는 보수 우파가 보다 쉬운 것이다.
반면 진보 좌파는 기존의 주어져 있는 가치나 질서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산출해야 한다. 말 그대로 사회가 계속 진보하기를 바라는 것이 진보이다. 그래서 진보세력은 항상 바뀌어야 할 것, 변화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하고, 그 사회의 미래를 그려보아야 하는 것이다. 아직 주어져 있지 않는 새로운 것을 창출한다는 것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보전하거나 수호하는 것 보다 훨씬 어려운 일임은 당연한 것이다.
● 보수는 ‘자유’를 진보는 ‘평등’을 지향하는 것은 정치에서 ABC와 같은 것이다.
각자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하여 부나 권력이나 명예를 추구하고 공정하게 자연의 법칙과 시장의 원리에 의거하여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자유롭게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은 ‘보수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첫 번째 가치는 개인의 ‘자유’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유우파’라는 말은 자연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의 ‘자유’ 혹은 개인의 ‘자유’에 너무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 ‘빈익빈 부익부’ ‘약육강식’ 심지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부정적인 상황이 쉽게 발생하게 된다. 즉 자유주의가 성숙한 윤리도덕의 발전을 전제하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불공정한 사회’ ‘비-정의로운 사회’가 도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을 ‘사회’보다 먼저 고려할 때 발생하는 사회악의 문제이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보수 우파’의 가치가 유발하게 될 ‘사회악’을 최대한 없앨 수 있는 가치를 앞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평등’의 가치이고 ‘분배의 정의’이다. 어떤 의미에서 부수 우파가 자연적인 인간의 본성이나 행위 원리에 입각하여 삶을 고려한다면, 진보 좌파는 이러한 자연적인 경향성을 넘어서거나 초월하는 것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능력과 힘이 있다고 무제약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경계하고, 가진 자와 빈자가 서로 적절하게 나누어 가지고, 가급적 시민들이나 국민들이 서로 유사한 경제적 문화적 가치들을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좌파들의 정신의 기저에는 ‘만인이 평등하다’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고귀한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기독교적 정신’에 기초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진보좌파들은 기존의 사회구조가 야기하는 다양한 부정적인 요소들을 해소할 수 있는 미래시회의 구조를 생각하여야 하기에 끊임없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서구 유럽들이 ‘유럽식 사회주의’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진보사관’에 기초해 있다. 가급적 모든 인간이 골고루 부를 가지고, 모든 인간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끊임없이 ‘평등의 가치’ ‘분배의 정의’를 생각하였고, 그로 인해 현재의 ‘복지국가’라는 사회적 구조를 마련한 것이다. 여기서 옆길로 미끌어진 것이 '마르크스-엥겔스' 사상에 기초한 '공산주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가 아니다. 항상 더 나은 미래사회의 모습을 고민하는 것이 ‘진보세력의 지향점’이기에 진보가 된다는 것은 부지런하게 공부하고자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래서 보수우파가 되는 것보다 진보좌파가 된다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인 것이다.
● 진보좌파는 그 본질에 의해서 ‘도덕적 모범주의’를 지향하기에 어려운 것이다.
유럽에서 ‘진보좌파’가 존중받는 이유는 그들이 ‘공정함’ ‘청렴함’ ‘똘레랑스’ ‘배려’ ‘관대함’ ‘약자에 대한 배려’ 등 도덕적으로 성숙한 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기득권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 이러한 도덕적 가치들을 지켜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기에, 우선적으로 자신들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진보 좌파’가 가장 두려워하는 해야 할 일은 도덕적으로 해이해져서 ‘자기모순’에 빠지는 일이다. 스승이 ‘바담풍’을 되뇌면서 학생들에게는 ‘바람풍’을 발설하기를 바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보좌파가 자신들이 가진 그 정신을 현실의 삶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순간 시민들은 곧 자신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며, 등을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좌파가 된다는 것의 어려움은 ‘열심히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그 도덕적 가치들을 자신들 스스로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즉 ‘도덕적 모범주의’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에 있고, 이는 전자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반면 한 사상가나 정치가가 진정한 '진보 좌파'의 모습을 보여줄 때 누구나 존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한국의 진보좌파는 스스로 변혁을 시도하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진보좌파’의 모습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아마도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이며, 심하게 말하면 진보좌파가 거의 ‘유사-진보좌파’처럼 추락 혹은 타락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보를 자처하면서 보수주의자 이상의 보수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고, 미래보다는 항상 과거에 사로잡혀 있고, 평등과 화합보다는 항상 독점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고, 공정함과 청렴함 보다는 궤변과 교설에 집착하고, 모두가 함께하는 공동체주의 보다는 ‘집단적 이익’에 집착하고 있다. 지도자와 국민이 서로 평등하게 격이 없기 보다는 마치 조선시대처럼 권위의식과 위계질서에 집착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아마도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의 진보좌파는 시작부터 ‘사이비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의 사회주의 사상’과 연류 되었거나 최소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술분야 종교분야 교육분야 등 모든 분야에서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겠지만, 어떤 분야에서건 건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첫 단추’가 매우 중요하고 그 다음이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일 진데, 한국의 진보세력들은 너무나 자주 북한의 사이비 진보세력들과 연류 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첫 단추도 잘못되었기 때문에 고수할 초심이라는 것도 거의 없어서 오늘날의 이상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한국사회의 건전한 정치문화를 되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미래 한국의 이상적인 정치적 환경을 창조하기 위해서, 이제 한국의 진보좌파들은 뼈를 깎는 자기쇄신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보나 좌파는 그 자체 아주 소중한 가치이고 숭고한 인류의 노력의 결과이다. 이를 추하고 괴상하고 타락한 모습의 정치현상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한국사회의 정체성이 ‘자유 시장경제’에 입각한 ‘자유의 나라’인 만큼 더욱 더 ‘건강한 좌파’가 담보되어야 ‘행복한 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우파 사람들도 ‘건강한 좌파가 없이는 건강한 우파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여야 한다. 요컨대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는 서로 싸워야 할 적이 아니라,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인정해 주고 협력하고 힘을 합쳐야 할 정치적 ‘라이벌’이자 ‘파트너’라는 생각을 잊지 말하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