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잡아 먹는 걸세
우리 모두는 서로를 잡아먹고 있는 거지.
이따금씩 번쩍이는 선의의 불꽃, 이걸 내다 버려선 안 돼.
삶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게 우리에게 힘을 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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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니는 도덕 교과서 같은 년 하고 라비크는 생각했다.
구역질 나는 열녀 타령
모자 가게에서 일하는 이 어린애의 외로운 마음을 너 같은 게 알 리가 있나
친구를 망쳐 버린 그 산파한테로, 친구를 죽게 한 그 병원으로 용감무쌍하게 다시 찾아왔단
말이다.
그런데도 전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어떻게 돈을 내면 좋아요? 할 뿐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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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후부터 사정은 나아졌다.
그와 함께 나가서 최초의 교훈을 배웠다.
가능할 때는 도와주어라
그럴 땐 무엇이든 해라
하지만 더 이상 도리가 없게 되면, 잊어버려라
그리고 돌아서라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동정이란 평온한 시대에만 필요한 것이다.
목숨이 위태로울 땐 할 짓이 아니다.
죽은 자는 묻어 주고, 삶은 실컷 즐겨라
너의 삶은 아직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
슬퍼하는 것과 눈앞 현실은 별개다.
현실을 보고 인정했다고 해서 덜 슬퍼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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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몰라. 그저 입으로만 그러는 거지.
사람들은 무언가를 절대로 알 수 없어.
모든 것은 언제나 달라지기 마련이야
지금도 그래
두 번째 밤이란 없어.
언제나 첫날밤이지
두 번째 밤이란 마지막 밤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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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묻지 마.
저기 가로등 불빛하고, 요란한 네온사인들 보이지?
우리는 죽어 가는 시대를 살고 있어.
이 도시는 생활 때문에 벌벌 떨고 있어.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절연당했고, 가진 거라고는 우리 마음 뿐이야.
난 다른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어.
그런데 당신은 그대로 있어.
당신은 생명이야
아무것도 묻지 마
천 가지 질문보다도 당신 머리카락 속에 더 많은 비밀이 들어 있어.
여기, 우리 앞에 밤이 있어
아침이 창문을 쿵쿵 두드릴 때까지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것이 영원이야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게 전부야.
기적이면서 또한 이 세상에 있는 가장 자명한 것이지.
그 사실을 나는 꽃피는 덤불 속에서 밤이 녹아들고,
바람이 딸기 냄새를 풍기는 오늘 느꼈어.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휴가 중에 죽은 사람에 불과하고,
몇가지 약속 날짜와 우연한 이름일 뿐이야
그럴 바엔 차라리 죽은 편이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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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리석은 소리지.
하지만 우린 그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는 거야.
사실이라는 메마른 빵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거든.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란 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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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절개를 계속했다.
날카로운 메스의 정확성, 예리한 절개가 주는 느낌, 복강, 구불구불 허옇게 도사린 창자
배를 열고 여기 이렇게 누워 있는 이 사내에게도 도덕적인 원칙이 있었을 것이고
마이어에 대해서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애국적인 의무라고 부르는 그 어떤 것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장막은 있는 법이다.
상급자에겐 또 다른 상급자가 있다.
명령, 훈령, 의무, 지령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리가 여러개 달린 괴물인 도덕이 도사리고
있다.
필연성, 가혹한 현실, 책임과 그 밖에 이런 저런 이름으로 불리는 장막이 언제나 있고,
그 뒤에 숨어 사람들은 단순한 인간성의 법칙을 애둘러 피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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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창 너무 히끄무레한 하늘을 내다 보았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중에 배관공이 조용해졌을 때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잘 살았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던 거야.
없어지면 괴롭기만 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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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가야겠네. 문화의 중심지 몽마르트에서 문을 열어야지.
도대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 걸까?"
"그걸 생각하기 위해서겠지. 다른 질문은 없나?"
"있어. 인간이 그런 걸 생각해서 좀 철이 들자마자, 곧 죽어 버리는 건 또 무슨 일인가?"
"철들어 보지도 못하고 죽어 버리는 인간이 수두룩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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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그레한 뺨에다 얼굴은 어린애 같은 간호사는 솔직하고 또랑또랑했다.
간호사는 자기의 작은 세계와 관련되지 않는다면,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아무 관심이
없었다.
간호사에게 죽어 가는 사람이란 버릇없는 애거나, 아니면 어찌할 줄 모르는 애와 같았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그저 시중만 들면 되고, 죽고 나면 또 새 사람이 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건강해져서 고마움을 표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죽어 버린다.
언제나 그런 식이다.
불안해질 이유는 조금도 없다.
봉마르슈 백화점 바겐세일 기간에 가격이 25퍼센트 인하될 것인지
또는 사촌형제인 장이 재봉 직공인 안과 결혼할지 안 할지가 훨씬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사실 그게 더 중요하지 하고 라비크는 생각했다.
혼돈 앞에서 우리를 막아 주는 자그만한 원
그게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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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눈물은 말라 있었다.
여자는 잔을 죽 들이켜고는 일어섰다.
피곤해 보였다.
"인간이 도대체 왜 이런 거죠, 라비크?
왜 이럴까요? 무슨 이유든 있을 거에요. 그렇지 않다면 질문 조차 없을 테니 까요."
그는 침울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문이야, 조앙. 왜 그럴까?
이 질문 앞에선 지금까지 모든 논리, 모든 철학, 모든 과학이 무력하게 부서지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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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무게도 없이 둥실 떠다녔다.
미래와 과거가 서로 만났으며, 그 둘은 소망도 고통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다른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하지도 더 강력하지도 않았다.
지평선들은 균형을 이루고 있었고, 특별한 순간에도 존재의 저울은 균형을 유지했다.
운명이라는 것도 그것에 맞서는 태연자약한 용기보다 결코 더 강력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면 인간은 자살할 수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 있는 한 결코 잃을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또한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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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앙."하고 라비크가 말했다.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충분치 않아.
강물 속 아주 작은 부분, 물 한 방울, 나뭇잎 하나밖에 되지 않아.
사랑은 훨씬 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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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하시오." 하고 사내는 기분이 상해 말했다.
"안 그래도 당신은 여기 이 사람들을 신고하지 않은 죄로 처벌받을 거란 말이오."
"나는 그게 자랑스러워요. 인도주의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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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이 흔들거렸다.
모두들 꼭 붙은 채로 서 있었다.
거의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트럭이 길모퉁이를 돌았다.
라비크는 운명론자인 자이덴바움을 보았다.
그는 한쪽 구석에 밀린 채로 서 있었다.
"다시 한 번 부닥치게 됬군요." 하고 그가 말했다.
라비크는 담배를 뒤졌다.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트렁크 속에 충분히 넣어 놓았던 게 생각이 났다.
"그렇군요." 하고 그가 말했다.
"인간은 많은 것을 견딜 수 있나 봅니다."
트럭은 와그람 거리를 달려가다 에투알 광장으로 꺾어 들었다.
사방에 불빛이라곤 없었다.
광장엔 어둠만 짙게 깔려 있었다.
너무 어두워,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