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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先生事蹟 / [事蹟]
靑鶴洞碑銘[鄭弘溟]
靑鶴洞碑。鄭弘溟銘曰。若高麗,百濟,新羅。國雖一域。粤有蓬萊,瀛洲,方丈。山則三神。積氣扶桑。篤生奇異。嗚呼。檀木之眞人一去。空餘太白之山。東明之麟馬不返。只有朝天之石。上古之玄風已遠。長生之秘計無傳。而况國徒尙干戈戰爭。論詩作賦之士。寥寥不聞。人不知道德文章。走馬控弦之輩。滔滔皆是。吾其左袵矣。海東無章甫之儒。文不在茲乎。嶺南降瑚璉之器。勵鋩刃於學海。樹旗幟於詞林。公姓崔。諱致遠。號孤雲。生應天命。家有祥瑞。陸出蓮花。質稟海嶽。才超秦漢。學堯典,舜典之文章。禮變齊,梁。振周南,召南之雅頌。光焰萬丈。若列明月之珠。律呂相和。似奏勻天之樂。動蛟龍於紙上。集風雨於毫端。渤海波濤。仍健筆而益壯。扶桑日月。得高名而重光。僻處三韓。每歎山河之隘。仰視八極。欲窮宇宙之寬。豈居陋巷柴門。將展桑弧蓬矢。東浮滄海。卻逐漢使之槎。北學中原。更悅周召之道。始知冀郡有馬。莫謂秦國無人。魯庭經過。慕季札之觀樂。蜀橋來渡。學相如之題名。齒雖弱冠。才雄多士。天門射策。紫極之皇帝知名。幕府飛賦。綠林之盜賊屈膝。聲聞四海。石友贈儒宗之歌。飛上九天。金丞遷翰林之職。顧非王仲宣之土。仍奏楚執圭之吟。缺 國人歎無奇才。女主授以貴職。値國朝之多艱。恨我生之不辰。吾道未展。所蘊難伸。列宿高峯。往來於銀河巫。靑松黃葉。歎息於鵠嶺雞林。閶閤浮雲。空流賈生之涕。風塵世俗。誰知伯牙之音。燈前萬里之心。物外千山之夢。紅塵眯目。挂衣冠而長歸。紫芝療飢。向林泉而高臥。一溪松竹。半掩月影之臺。萬壑烟霞。遙連靑鶴之洞。卻忘物我。正如伏羲之民。不知死生。怳在華胥之野。登高邱而淸嘯。臨碧流而長歌。彼何人斯。吾喪我也。心通 缺。 雲山古迹。不沒上書之庄。樂府遺音。尙傳伽倻之曲。嗚呼。上自公卿宰相。下至士庶兒童。莫不誦先生之姓名。想先生之風彩。若非道德過人者。安能景慕如是乎。惟我國家。接于遼羯。若稽自古。爲文幾人。朴堤上之忠誠。烈士而已。金庾信之英傑。缺 則無。惟先生。通塞遏之詞源。闢荒昧之學海。掛秦鏡於宮殿。五臟皆見。揮禹斧於山川。九州始定。東方之氣習一變。國以扶持。北極之星辰爲宗。人皆瞻仰。是以。配公于聖人廟。諡公以文昌侯。流聲千萬餘年。比肩七十高弟。慕先聖德。至今祀之。使後世知。其誰功也。余。濠梁秋水。憶莊生之胷襟。穎川淸風。夢許由之氣像。讀劉向傳。誦屈原辭。石門嵯峨。撫古今而長歎。雙溪淸淺。訪隱逸之遺蹤。先生之風。山高水長。
고운 선생 사적 / 청학동의 비명〔靑鶴洞碑銘〕[정두경(鄭斗卿)]
고려와 백제와 신라로 말하면, 나라는 비록 한 지역에 속한다고 하겠지만 봉래(蓬萊)와 영주(瀛洲)와 방장(方丈)이 있어서 산으로는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다고 할 것인데, 그 기운이 부상(扶桑)에 한데 모여서 기걸한 인물을 특별히 태어나게 하였도다.
아, 단목(檀木)의 진인(眞人)이 한번 떠나자 태백산(太白山)만 허전하게 남게 되었고,동명(東明)의 인마(麟馬)가 돌아오지 않자 조천석(朝天石)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상고(上古)의 현풍(玄風)은 이미 멀어지게 되었고, 장생(長生)의 비결은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나라에서는 한갓 간과(干戈)와 전쟁만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시(詩)를 논하거나 부(賦)를 짓는 인사는 들을 수 없이 적요하기만 하였고, 사람들은 도덕과 문장을 알지 못한 채 말 달리며 활 당기는 무리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해동(海東)에 장보(章甫 유자(儒者)의 관)를 쓴 선비가 없었다면 우리는 좌임(左袵)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남(嶺南)에서 호련(瑚璉 종묘의 제기)의 그릇이 탄강하였으니, 사문(斯文)이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학해(學海)에서 망인(鋩刃)을 숫돌에 갈게 되었고, 사림(詞林)에 기치를 세우게 된 것이었다.
공의 성은 최(崔)요, 휘(諱)는 치원(致遠)이요, 호는 고운(孤雲)이다. 천명을 받고 태어남에 집안에 상서가 있었고, 육가(陸家)의 연화(蓮花)가 나옴에 사해(四海)와 오악(五嶽)의 자질을 품부받았다.
진(秦)과 한(漢)의 재질을 능가하여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의 문장을 배웠으며, 제(齊)와 양(梁)의 시체(詩體)를 바꾸어서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아송(雅頌)을 진작시켰다.
만장(萬丈)의 광염(光焰)을 토할 때는 마치 명월주(明月珠)를 배열한 것과 같았고, 율려(律呂)가 서로 조화되는 것은 흡사 균천악(鈞天樂)을 연주하는 것과 같았나니, 종이 위에서 교룡(蛟龍)이 움직이는 듯, 붓끝에서 풍우(風雨)가 몰아치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발해(渤海)의 파도가 건필(健筆) 덕분에 더욱 장하게 되었음은 물론이요, 부상(扶桑)의 일월이 고명(高名)의 힘을 얻어 거듭 빛나게 되었다.
구석진 삼한(三韓) 땅에 처하여 산하가 비좁은 것을 매번 탄식하였나니, 무한대한 공간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드넓은 우주를 끝까지 파헤쳐 보고자 하였다. 어찌 누항의 시문(柴門)에 거하면서 상호봉시(桑弧蓬矢)의 뜻을 장차 펼 수가 있겠는가. 창해에 배를 띄우고 문득 한(漢)나라 사신의 뗏목을 좇아, 중국으로 유학하여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도를 다시 즐기게 되었다.
기주(冀州) 고을에 준마(駿馬)가 남아 있음을 처음 알았나니, 진(秦)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면 안 될 것이로다. 노(魯)나라의 뜰을 지날 적에는 계찰(季札)이 음악을 평한 것을 사모하였고, 촉(蜀) 땅의 다리를 건널 적에는 상여(相如)가 다리에 써넣은 것을 본받았다.
연치(年齒)는 비록 약관에 불과했지만, 재질은 다사(多士)의 위에 군림하였다. 그리하여 천문(天門)에서 책문(策文)을 쏘아 맞추자 자극(紫極)의 황제가 공의 이름을 알았고, 막부(幕府)에서 사부(詞賦)를 지어 날리자 녹림(綠林)의 도적이 무릎을 꿇었다.
사해에 명성이 널리 퍼짐에 석우(石友)는 유종(儒宗)의 노래를 지어 증정하였으며, 구천(九天)에 날아오름에 김승(金丞)은 한림(翰林)의 관직으로 승진시켰다.
돌아보면 왕중선(王仲宣)의 땅이 아니라서 초(楚)나라 집규(執圭)의 노랫가락을 읊조렸는데, 신선 같은 풍골(風骨)이 진세(塵世)를 벗어났으매 동방삭(東方朔)의 성정(星精)이 하강하였고, 비단옷을 입고 신라로 돌아오매 노담(老聃)의 자기(紫氣)가 동쪽으로 옮겨왔다. 나라 사람들이 기걸한 인재가 없는 것을 탄식하는 가운데 여주(女主 진성여왕(眞聖女王))가 공에게 귀한 직책을 제수하였다.
국조(國朝)에 어려움이 많은 시대를 당하여, 나의 생이 때에 맞지 않음을 한탄하였나니, 오도(吾道)를 어떻게 펼 수 있었겠으며, 가슴에 온축한 뜻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었겠는가.
무협 고봉(巫峽高峯)의 해에 들어갔다가 은하 열수(銀河列宿)의 해에 돌아와서계림(雞林)에는 누런 잎이 지고 곡령(鵠嶺)에는 소나무가 푸르다고 탄식하였다.
뜬구름 떠 있는 대궐을 바라보며 속절없이 가생(賈生)의 눈물을 흘렸나니,이 풍진세상에서 그 누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었겠는가.
등불 앞에는 만리(萬里)의 마음이요, 세상 밖에는 천산(千山)의 꿈이로다. 홍진이 눈에 들어와 앞을 볼 수 없자 의관을 걸어 놓고 영원히 돌아갔고,자지(紫芝)로 배고픔을 달래며 임천(林泉)을 향해 높이 드러누웠다.
한 시내의 송죽(松竹)에 반쯤 닫힌 월영대(月影臺)요, 1만 골의 연하(煙霞)에 멀리 이어진 청학동(靑鶴洞)이라. 문득 물아(物我)를 잊으니 정녕 복희(伏羲) 시대의 백성이요, 사생(死生)을 아랑곳하지 않으니 화서(華胥)의 들판과 방불하였다.
높은 언덕에 올라 맑게 휘파람 불고, 푸른 강물 굽어보며 길게 노래했나니, 저분이 어떤 분이신가, 내가 나를 잊은 분이로다.현빈(玄牝)에 통하여 중묘(衆妙)의 문을 스스로 얻었고, 약(藥)은 금단(金丹)을 단련하여 참동(參同)의 계(契)를 다시금 이었다. 물외(物外)에서 형신(形身)을 길러 곰처럼 매달리고 새처럼 폈으며, 인간 세상의 구각(軀殼)을 벗어 매미처럼 허물 벗고 용처럼 변하였다. 오곡을 먹지 않으면서 바람과 이슬을 들이켜고 경화(瓊華)를 씹었으며, 팔구(八區)를 떨쳐 버리고서 구름과 기운을 타고 일월(日月)을 잡아탔다. 구령(緱嶺)에서 자진(子晉)에게 읍하였으며,공동(崆峒)에서 광성자(廣成子)를 방문하였다. 지극한 사람이라 이를 수가 없어서 만상(萬象)에 뒤섞여 같은 몸이 되었으며, 신령한 기운이라 변하지 않아 천년이 지나서도 오히려 존재하였다. 들고 남에 있어서는 그 단서를 알 수가 없었으며, 변화함에 있어서는 처음과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운산(雲山)의 옛 자취여, 상서장(上書莊)은 없어지지 않았고, 악부(樂府)의 남은 음악이여, 아직도 〈가야곡(伽倻曲)〉에 전하도다.
아, 위로는 공경(公卿)과 재상(宰相)으로부터, 아래로는 사서(士庶)와 아동(兒童)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성명을 외우지 않은 자가 없고, 선생의 풍채를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다. 남보다 뛰어난 도덕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이 경모를 받을 수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요갈(遼羯)과 국경을 접한 관계로 옛날부터 문학에 뛰어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박제상(朴堤上)이 충성스럽기는 하였지만 열사일 따름이요, 김유신(金庾信)이 영걸스럽기는 하였지만 - 원문 빠짐 - 그런 인물은 있지 않았다.
오직 우리 선생이 옹색한 사원(詞源)을 개통하고, 황량한 학해(學海)를 개척하였나니, 이는 마치 진(秦)나라의 거울을 궁전에 걸자 오장(五臟)이 모두 보이고,신우(神禹)의 도끼를 산천에 휘두르자 구주(九州)가 비로소 안정된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동방의 기습(氣習)이 한꺼번에 변하여 나라가 그 덕분에 부지되었나니, 북극의 성신(星辰)이 중심이 되는 것처럼 사람들 모두가 선생을 우러러보았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사당에 공을 배향하고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공에게 내렸나니, 천년만년토록 명성이 전해지는 가운데 70명의 고제(高弟)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선성(先聖)의 덕을 사모하여 지금도 제사를 올리게 하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알게끔 한 것은 그 누구의 공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추수(秋水)의 호량(濠梁)을 통해 장생(莊生)의 흉금을 떠올리고,영천(穎川)의 청풍(淸風)을 통해 허유(許由)의 기상을 꿈꾼다. 나는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을 읽고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를 외우면서 높고 험한 석문(石門)에서 고금을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하고, 맑고 얕은 쌍계(雙溪)에서 은일(隱逸)의 남은 자취를 찾아본다. 아, 선생의 풍도는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다고 하리로다.
[주-D001] 청학동(靑鶴洞)의 비명(碑銘) : 이 비명의 작자에 대해서 대본에는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편찬자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 비명은 정두경(鄭斗卿)의 문집인 중간본 《동명집(東溟集)》 권10에 〈최학사고운비서(崔學士孤雲碑序)〉라는 제목으로 전재(全載)되어 있는바, 바로 정두경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정두경의 호가 동명(東溟)이므로, 편찬자가 ‘정동명(鄭東溟)’을 ‘정홍명(鄭弘溟)’으로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이다. 《고운집》과 《동명집》에 나오는 글을 서로 비교해 보면 글자의 출입이 아주 많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동명이 뒤에 비석에 글을 새길 적에 글을 수정하거나 글자 수를 증감한 것인 듯하다. 또한 대본에는 중간 중간에 빠진 부분이 있어 ‘缺’로 처리되어 있다. 번역을 하면서 글자의 출입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교감하지 않고, 단지 ‘缺’로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동명집》에 나오는 글에서 보충하여 번역하되, 글자의 색깔을 달리하여 구분해 주었다.[주-D002] 단목(檀木)의 …… 되었고 : 단목은 신단수(神檀樹), 진인(眞人)은 단군(檀君), 태백산(太白山)은 묘향산(妙香山)을 가리킨다.[주-D003] 동명(東明)의 …… 되었다 : 조천석(朝天石)은 평양(平壤)의 부벽루(浮碧樓) 곁에 있던 바위 이름이다. 옛날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 부벽루 아래 기린굴(麒麟窟)에서 기린마(麒麟馬)를 길러 이 말을 타고 기린굴에서 조천석으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주-D004] 좌임(左袵) : 오른쪽 옷섶을 왼쪽 옷섶 위로 여미는 오랑캐의 의복 제도를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孔子)가 관중(管仲)의 공을 찬양하면서 “만약에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머리를 풀고 좌임하는 오랑캐의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주-D005] 사문(斯文)이 …… 않겠는가 : 고운이 유가(儒家)의 도통을 계승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공자가 일찍이 광(匡) 땅에서 횡포를 부렸던 양호(陽虎)로 오인받아 그곳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위태로웠을 때 “문왕이 돌아가신 지금에는 사문이 나에게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늘이 사문을 망칠 작정이라면 나와 같은 자가 사문에 참여하지 못했겠지만, 하늘이 사문을 망치지 않으려 한다면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고 강한 자부심을 표명한 대목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주-D006] 육가(陸家)의 연화(蓮花) : 세상에서 보기 드문 명산(名産)이라는 뜻으로, 특출한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 남조 양(梁) 임방(任昉)의 《술이기(述異記)》 권상에 명산품을 열거하면서, 왕씨(王氏)의 귤원(橘園)과 육가의 백련(白蓮)과 고가(顧家)의 반죽(斑竹)을 거론하였다.[주-D007] 제(齊)와 양(梁)의 시체(詩體) : 남조(南朝)의 제와 양의 시대에는 시를 지을 때에 대부분 음률(音律)과 대우(對偶)를 중시하여 사조(詞藻)가 화려한 대신 내용은 결여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를 문학사상 제량체(齊梁體)라고 부른다.[주-D008] 균천악(鈞天樂) : 균천광악(鈞天廣樂)의 준말로, 중국의 궁중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균천은 천제(天帝)의 거소인데, 춘추 시대에 조간자(趙簡子)가 5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균천에 올라가서 광악을 듣고 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43 趙世家》[주-D009] 상호봉시(桑弧蓬矢)의 뜻 : 천지 사방을 경륜할 큰 뜻을 말한다. 옛날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상목(桑木)으로 활을 만들어 문 왼쪽에 걸고 봉초(蓬草)로 화살을 만들어 사방에 쏘는 시늉을 하며 장차 이처럼 웅비할 것을 기대했던 풍습이 있었다. 《禮記 內則》[주-D010] 창해에 …… 좇아 : 고운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 당나라에 들어간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 사신은 장건(張騫)을 가리킨다. 그가 한 무제(漢武帝)의 명을 받고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나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았는데, 이때 뗏목을 타고 은하수로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나고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天中記 卷2》 중국이 천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뗏목을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주-D011] 기주(冀州) …… 것이로다 : 천리마처럼 뛰어난 인재가 아직도 조정에 선발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중국 사람들이 고운을 보고서 비로소 알았다는 말이다. 한유(韓愈)의 〈송온처사부하양군서(送溫處士赴河陽軍序)〉에 “백락이 기주 북쪽의 들판을 한 번 지나가자 말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伯樂一過冀北之野 而馬群遂空〕”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백락은 천리마를 잘 알아보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또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 사회(士會)가 진(秦)나라에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할 적에, 진(秦)나라 요조(繞朝)가 채찍을 증정하면서 사회의 진짜 의도를 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그대는 진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지 말라. 나의 계책이 마침 채용되지 않았을 뿐이다.〔子無謂秦無人 吾謀適不用也〕”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文公13年》 여기에서 진나라는 변방의 신라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주-D012] 계찰(季札)이 …… 것 : 춘추 시대 오(吳)나라 공자 계찰이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周)나라의 음악을 듣고 열국(列國)의 치란과 흥망을 아는 등 정확하게 비평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주-D013] 상여(相如)가 …… 것 : 촉군(蜀郡) 성도(成都)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촉군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에 성도의 성(城) 북쪽에 있는 승선교(昇仙橋)에 이르러 그 다리 기둥에 “고거사마를 타지 않고서는 다시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不乘駟馬高車 不復過此橋〕”라고 써서 기필코 공명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는데, 뒤에 그의 뛰어난 문장 실력을 한 무제(漢武帝)에게 인정받고 출세한 고사가 진(晉)나라 상거(常璩)의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전한다.[주-D014] 석우(石友)는 …… 증정하였으며 : 고운과 동년(同年)인 중국인 고운(顧雲)이 고운이 귀국할 때 송별시를 지어 준 것을 말하는데, 《고운집》 〈고운 선생 사적(孤雲先生事蹟)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그 시가 소개되어 나온다. 석우는 금석(金石)처럼 정의(情誼)가 굳건한 벗이라는 뜻이다.[주-D015] 김승(金丞)은 …… 승진시켰다 : 신라 헌강왕(憲康王)이 고운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한 것을 가리킨다. 김승은 김씨(金氏)인 승(丞)이라는 뜻이다. 승은 관직 이름으로, 고대에 천자를 보필하는 4인 중의 하나였다.[주-D016] 돌아보면 …… 읊조렸는데 : 선진 문명의 중국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고국이 너무도 그리워서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가 중선(仲宣)인 위(魏)나라 왕찬(王粲)이 후한(後漢) 말 동란 때에 형주(荊州)의 누대에 올라 고향 생각을 하며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는데, 그중에 “아름답긴 하다마는 우리의 땅이 아님이여, 어찌 잠깐이라도 머무를 수 있으리오.〔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라고 탄식한 구절이 나온다. 《文選 卷11》 또 전국 시대 월(越)나라 사람 장석(莊舃)이 초(楚)나라에 와서 벼슬하며 집규(執圭)라는 직책의 고관이 되었다가 병에 걸렸는데, 초왕(楚王)이 “누구를 막론하고 병이 들었을 때에는 고향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한번 시험해 보라.”라는 혹자의 말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장석이 무의식적으로 월나라 노랫가락을 읊조리고 있더라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70 張儀列傳》[주-D017] 동방삭(東方朔)의 성정(星精) : 동방삭은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만청(曼淸)이다. 해학과 직언을 잘하였고 선술(仙術)을 좋아하였는데, 하늘나라의 반도(蟠桃) 3개를 훔쳐 먹어 3천 년을 살았다고 한다. 성정은 별의 영기(靈氣)를 말한다.[주-D018] 노담(老聃)의 자기(紫氣) : 노담은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노자가 일찍이 주(周)나라에서 사관(史官)으로 있다가 주나라가 쇠해진 것을 보고는 주나라를 떠나갔는데, 노자가 서쪽으로 가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관의 영(令)으로 있던 윤희(尹喜)가 이에 앞서 함곡관 위에 자색 기운이 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얼마 뒤에 노자가 동쪽에서 푸른 소를 타고 왔다고 한다. 《列仙傳》[주-D019] 신선 …… 옮겨왔다 : 대본에는 ‘缺’로 되어 있는데, 정두경의 《동명집》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이 부분의 원문은 ‘仙骨出塵 方朔之星精下降 錦衣還國 老聃之紫氣東來’이다.[주-D020] 무협 고봉(巫峽高峯)의 …… 돌아와서 : 고운이 12세에 중국에 들어가서 28세에 금의환향했다는 말이다. 무협에 12봉이 있고 하늘에 28수가 있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주-D021] 계림(雞林)에는 …… 탄식하였다 : 신라는 쇠망하고 고려는 흥성한다고 고운이 비유했다는 것이다. 곡령은 개경(開京)의 송악(松嶽)을 가리킨다.[주-D022] 뜬구름 …… 흘렸나니 : 고운이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온 시무(時務) 10여 책을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올렸으나 허사로 돌아간 것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비통한 심정으로 문제(文帝)에게 치안책(治安策)을 올리면서 “삼가 일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두 가지요, 장탄식할 만한 것이 여섯 가지이다.〔竊惟事勢 可爲痛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고 전제한 뒤에 하나하나 설명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48 賈誼傳》[주-D023] 이 …… 알아주었겠는가 : 당시 세상에 지기(知己)가 없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친구인 종자기(鍾子期)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다.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였는데, 종자기가 죽고 나서는 백아가 더 이상 세상에 지음(知音)이 없다고 탄식하며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린 고사가 전한다. 《列子 湯問》 《呂氏春秋 本味》[주-D024] 홍진이 …… 돌아갔고 : 혼란한 세상에서 벼슬하는 일을 그만두고 산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서 유유자적했다는 말이다. 매복(梅福)이 일찍이 남창 현령(南昌縣令)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는 성의 동문(東門)에 관을 걸어 두고 떠난 뒤에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漢書 卷67 梅福傳》[주-D025] 자지(紫芝) : 자줏빛의 영지(靈芝)를 가리킨다. 진(秦)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상산(商山)에 은거한 네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등 사호(四皓)가 자지를 캐 먹고 배고픔을 달래면서 〈자지가(紫芝歌)〉를 지어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주-D026] 화서(華胥) : 황제(黃帝)가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이상 국가의 이름이다. 황제가 이 나라를 여행하면서 무위자연의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는 꿈을 꾸고는, 여기에서 계발되어 천하에 크게 덕화를 펼쳤다는 전설이 전한다. 《列子 黃帝》[주-D027] 내가 …… 분이로다 : 대본은 ‘吾喪我’이다. 《장자》 〈제물론〉 첫머리에 나오는 말인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고 일체 물아(物我)의 경계를 떠난 자유로운 경지를 뜻하는 표현이다.[주-D028] 현빈(玄牝) : 만물을 생성하고 기르는 본원(本源)을 뜻하는 말로, 《노자(老子)》 제6장에 이르기를, “곡신은 죽지 않는데, 이것을 일러 현빈이라고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 하였다.[주-D029] 참동(參同)의 계(契) : 한나라 때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책인 《참동계》로, 《주역》의 효상(爻象)을 빌려 금(金)을 단련하는 법을 논하였다.[주-D030] 곰처럼 …… 폈으며 : 옛날에 행하던 일종의 양생법(養生法)으로, 곰과 같이 나뭇가지를 기어오르고 새처럼 다리를 쭉 뻗는 것을 말한다. 《장자》 〈각의(刻意)〉에 이르기를,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여 심호흡을 하며,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듯 새가 다리를 쭉 뻗듯 체조를 하는 것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주-D031] 경화(瓊華) : 전설 속에 나오는 경수(瓊樹)의 꽃으로, 옥가루와 비슷하다고 한다.[주-D032] 팔구(八區) : 팔방(八方)과 같은 말로, 천하를 가리킨다.[주-D033] 구령(緱嶺)에서 자진(子晉)에게 읍하였으며 :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는 뜻이다. 자진은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이다. 도가(道家)의 고사에 “주나라 영왕의 태자 진이 칠월 칠석날에 흰 학을 타고 피리를 불며 구산(緱山)의 마루에 머물러 있다가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하였다. 《後漢書 卷82 方術列傳上 王喬》[주-D034] 공동(崆峒)에서 광성자(廣成子)를 방문하였다 : 공동산(崆峒山)은 계주(薊州)에 있는 산이고, 광성자는 중국 상고 시대의 선인(仙人)이다. 광성자가 공동산의 석실(石室)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황제 헌원씨(皇帝軒轅氏)가 그를 찾아가 함께 노닐면서 수신법(修身法)을 물었다고 한다.[주-D035] 현빈(玄牝)에 …… 없었다 : 대본에는 ‘缺’로 되어 있는데, 정두경의 《동명집》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이 부분의 원문은 ‘玄牝 自得衆妙之門 藥鍊金丹 更續參同之契 養形神於物外 熊經鳥伸 脫軀殼於人間 蟬蛻龍變 不食五穀 吸風露而嘰瓊華 揮斥八區 乘雲氣而騎日月 揖子晉於緱嶺 訪廣成於崆峒 至人無名 混萬象而同體 神氣不變 曠千載而猶存 出入不知端倪 變化難窮終始’이다.[주-D036] 진(秦)나라의 …… 보이고 : 진 시황(秦始皇)이 네모진 거울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거울에 비춰 보면 몸속의 오장이 다 보임은 물론이요, 마음속의 선악까지도 모두 밖으로 드러났다는 전설이 진(晉)나라 갈홍(葛洪)의 《서경잡기(西京雜記)》 권3에 나온다.[주-D037] 신우(神禹)의 …… 것 : 하우(夏禹)가 치산치수를 하며 범람하는 홍수를 막으려고 8년 동안 분주히 돌아다닌 끝에 중국을 구주(九州)로 나누고 안정시킨 고사를 말한다.[주-D038] 70명의 고제(高弟) : 공자(孔子)의 뛰어난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시서예악을 교재로 가르쳤는데, 제자가 대개 3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서 육예를 몸으로 통달한 사람은 72인이었다.〔孔子以詩書禮樂敎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라는 말이 나온다.[주-D039] 나는 …… 떠올리고 : 장자(莊子) 자신이 물고기가 아닌데도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던 것처럼, 정두경 역시 고운은 아니지만 고운의 심회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이다. 장자가 친구인 혜시(惠施)와 함께 호량(濠梁)을 거닐다가 피라미가 한가롭게 노니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다.〔是魚之樂也〕”라고 하자, 혜시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子非魚 安知魚之樂〕”라고 반박하면서 벌어지는 호량의 토론이 《장자》 〈추수(秋水)〉 맨 마지막에 나온다.[주-D040] 영천(穎川)의 …… 꿈꾼다 : 고운이 세상의 영화 따위는 돌아보지 않고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기 뜻에 맞게 생활한 것을 가리킨다. 요(堯) 임금 때의 은사(隱士)인 허유(許由)가 일찍이 기산(箕山) 아래 영수(穎水) 북쪽에 은거하였는데, 요 임금이 제위를 맡기려 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귀를 씻었고, 또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자 어떤 사람이 표주박 하나를 주니 그것을 나무에 걸어 두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그 표주박까지도 번거롭다고 하며 내버렸다는 고사가 전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9
孤雲先生事蹟 / [事蹟]
靑鶴洞碑銘 【鄭東溟】 [鄭弘溟] *<>는 동명집이미지
崔學士孤雲碑序
曰:若高麗、百濟、新羅,國雖一域;<越>粤有蓬萊、瀛洲、方丈,山則三神。積氣扶<輿>桑,篤生奇異。嗚呼!檀木之<神>眞人一去,空餘太白之山;東明之麟馬不<歸>返,只有朝天之石。上古之玄風已遠,長生之秘<訣>計無傳。而況國<不尙文,人皆右武>*徒尙干戈戰爭*,論詩作賦之士,寥寥不聞;*人不知道德文章*,走馬控弦之<徒>輩,滔滔皆是。吾其左袵矣,海東無章<句>甫之儒;文不在茲乎,嶺南降瑚璉之器。勵鋩刃於學海,樹旗幟於詞林。
公姓崔,<名>諱致遠,<字>號孤雲。<在母胎七十載>生應天命,<五百歲出>家有祥瑞;陸出蓮花,質稟<神靈>海嶽。<生指李樹, 詩追雅頌, 洗後塵於齊、梁, 文並典謨, 軼先驅於秦、漢>
*才超秦、漢,學《堯典》、《舜典》之文章;禮變齊、梁,振《周南》、《召南》之雅頌。*
光焰萬丈,若列明月之珠;律呂相和,似奏勻天之樂。動蛟龍於紙上,集風<雲>雨於毫端。渤海<層>波*濤*,<因>仍健筆而益壯;扶桑<白>日*月*,得高名而<增>重光。
僻處三韓,每歎山河之隘;仰視八極,欲窮宇宙之寬。豈居陋巷柴門,將展桑弧蓬矢?東浮滄海,<却>卻<隨>逐漢使之槎;北學中<華>原,<爲>更悅周、<公>召之道。始知冀<野>郡有馬,莫謂秦國無人。魯庭經過,<慕觀樂於季札>慕季札之觀樂;蜀橋來渡,<學題柱於相如>學相如之題名。
齒雖<甘羅>弱冠,才雄<大陸>多士。<君>天門射策,紫極之皇帝知名;幕府飛<書>賦,綠林之盜賊屈膝。聲聞四海,石友贈儒<仙>宗之歌;飛上九天,金<奎通>丞遷翰林之<籍>職。顧非王仲宣之土,仍奏楚執圭之吟。【缺“仙骨出塵,方朔之星精下降。錦衣還國,老聃之紫氣東來。”】。國人<伏其>歎無奇才,女主授以貴職。値國朝之<將亂>多艱,恨我生之不辰,*吾道未展,所蘊難伸。*列宿高峯,往來於銀河、巫峽;靑松黃葉,歎息於鵠嶺、雞林。閶閤浮雲,空流賈生之涕;風塵世<路>俗,誰知伯牙之音?燈前萬里之心,物外<靑>千山之夢。<黃>紅塵眯<眼>目,挂衣冠而長歸;紫芝療飢,向林泉而高臥。
一溪松竹,半掩月影之<堂>臺;萬壑烟霞,遙連靑鶴之洞。*卻忘物我,正如伏羲之民;不知死生,怳在華胥之野。* 登高邱而淸嘯,<俯>臨碧流而長歌,彼何人斯?<遊方外者>*吾喪我也。* 心通 【缺 “玄牝,自得衆妙之門。藥鍊金丹,更續參同之契,養形神於物外。熊經鳥伸,脫軀殼於人間,蟬蛻龍變,不食五穀,吸風露而嘰瓊華。揮斥八區,乘雲氣而騎日月,揖子晉於緱嶺,訪廣成於崆峒,至人無名,混萬象而同體,神氣不變,曠千載而猶存,出入不知端倪,變化難窮終始。”】,雲山古迹,不沒上書之庄;樂府遺音,尙傳《伽倻》之曲。
<嗟>嗚呼!*上自公卿宰相,下至士庶兒童,莫不誦先生之姓名,想先生之風彩。若非道德過人者,安能景慕如是乎?惟我國家,接于遼羯,若稽自古,爲文幾人。* <瞻彼赫胥之城邑, 實惟先生之舊鄕, 在昔賢愚, 同歸磨滅, 縱有不朽, 皆在下風.> 朴堤上之忠誠,烈士而已;金庾信之英傑,【缺“文章”】 則無。
惟先生通<遏塞>塞遏之詞源,闢荒昧之學<路>海。掛秦鏡於宮殿,五臟皆<驚>見;揮禹斧於山川,九州始定。東方之氣習一變,國<爲文明>*以扶持*;北極之星辰<高居>*爲宗*,人皆瞻仰。是<故>以,配公于聖人<之>廟,諡公以文昌<之>侯。<俎豆>流聲千萬餘年,<差>比肩七十高弟。慕先<賢盛>聖德,至今祀之,使後世知<文>,其誰功也?
余濠梁<曠野>*《秋水》*,憶莊<叟>生之<逍遙>胷襟;穎<水箕山>川淸風,夢許由之<嘉客>氣像。讀劉向<列仙之>傳,誦屈原<遠遊之詞>辭。石門嵯峨,撫古今而長歎;雙溪淸淺,訪隱逸之遺蹤。<付萬物於無何, 是一馬也. 想眞人之不測, 其猶龍乎!>*先生之風,山高水長。*
[주-D001] 東 : 底本에는 “弘”. 《東溟集ㆍ崔學士孤雲碑序》에 근거하여 수정.
[주-D002] 缺 : 《東溟集ㆍ崔學士孤雲碑序》에는 “仙骨出塵,方朔之星精下降。錦衣還國,老聃之紫氣東來。”
[주-D003] 無 : 《東溟集ㆍ崔學士孤雲碑序》에는 “其”.
[주-D004] 缺 : 《東溟集ㆍ崔學士孤雲碑序》에는 “玄牝,自得衆妙之門。藥鍊金丹,更續參同之契,養形神於物外。熊經鳥伸,脫軀殼於人間,蟬蛻龍變,不食五穀,吸風露而嘰瓊華。揮斥八區,乘雲氣而騎日月,揖子晉於緱嶺,訪廣成於崆峒,至人無名,混萬象而同體,神氣不變,曠千載而猶存,出入不知端倪,變化難窮終始。”
[주-D005] 缺 : 《東溟集ㆍ崔學士孤雲碑序》에는 “文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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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선생집(東溟先生集) 卷之十 儷語
崔學士孤雲碑序
曰:若高麗、百濟、新羅,國雖一域;越有蓬萊、瀛洲、方丈,山則三神。積氣扶輿,篤生奇異。嗚呼!檀木之神人一去,空餘太白之山;東明之麟馬不歸,只有朝天之石。上古之玄風已遠,長生之秘訣無傳。而況國不尙文, 人皆右武,論詩作賦之士,寥寥不聞;走馬控弦之徒,滔滔皆是。吾其左袵矣,海東無章句之儒;文不在茲乎,嶺南降瑚璉之器。勵鋩刃於學海,樹旗幟於詞林。
公姓崔,名致遠,字孤雲。在母胎七十載, 生應天命,五百歲出。家有祥瑞;陸出蓮花。質稟神靈, 生指李樹。詩追雅頌, 洗後塵於齊、梁。文並典謨, 軼先驅於秦、漢。光焰萬丈,若列明月之珠;律呂相和,似奏勻天之樂。動蛟龍於紙上,集風雲於毫端。渤海層波,因健筆而益壯;扶桑白日,得高名而增光。
僻處三韓,每歎山河之隘;仰視八極,欲窮宇宙之寬。豈居陋巷柴門,將展桑弧蓬矢?東浮滄海,却隨漢使之槎;北學中華,爲悅周公之道。始知冀野有馬,莫謂秦國無人。魯庭經過,慕觀樂於季札;蜀橋來渡,學題柱於相如。
齒雖甘羅,才雄大陸。君門射策,紫極之皇帝知名;幕府飛書,綠林之盜賊屈膝。聲聞四海,石友贈儒仙之歌;飛上九天,金奎通翰林之籍。顧非王仲宣之土,仍奏楚執圭之吟。仙骨出塵,方朔之星精下降。錦衣還國,老聃之紫氣東來。國人伏其奇才,女主授以貴職。値國朝之將亂,恨我生之不辰,列宿高峯,往來於銀河、巫峽;靑松黃葉,歎息於鵠嶺、雞林。閶閤浮雲,空流賈生之涕;風塵世路,誰知伯牙之音?燈前萬里之心,物外靑山之夢。黃塵眯眼,挂衣冠而長歸;紫芝療飢,向林泉而高臥。一溪松竹,半掩月影之堂;萬壑烟霞,遙連靑鶴之洞。登高丘而淸嘯,俯碧流而長歌,
彼何人斯?遊方外者,心通玄牝,自得衆妙之門。藥鍊金丹,更續參同之契,養形神於物外。熊經鳥伸,脫軀殼於人間,蟬蛻龍變,不食五穀,吸風露而嘰瓊華。揮斥八區,乘雲氣而騎日月,揖子晉於緱嶺,訪廣成於崆峒,至人無名,混萬象而同體,神氣不變,曠千載而猶存,出入不知端倪,變化難窮終始。雲山古迹,不沒上書之庄;樂府遺音,尙傳《伽倻》之曲。
嗟呼!瞻彼赫胥之城邑, 實惟先生之舊鄕, 在昔賢愚, 同歸磨滅, 縱有不朽, 皆在下風。朴堤上之忠誠,烈士而已;金庾信之英傑,文章則無。
惟先生通遏塞之詞源,闢荒昧之學路。掛秦鏡於宮殿,五臟皆驚;揮禹斧於山川,九州始定。東方之氣習一變,國爲文明;北極之星辰高居,人皆瞻仰。是故,配公于聖人之廟,諡公以文昌之侯。俎豆千萬餘年,差肩七十高弟。慕先賢盛德,至今祀之,使後世知文,其誰功也?
余濠梁曠野,憶莊叟之逍遙;穎水箕山,夢許由之嘉客。讀劉向列仙之傳,誦屈原遠遊之詞。石門嵯峨,撫古今而長歎;雙溪淸淺,訪隱逸之遺蹤。付萬物於無何, 是一馬也。想眞人之不測, 其猶龍乎!
동명집 제10권 / 여어(儷語) / 최 학사 고운 비의 서〔崔學士孤雲碑序〕
고구려, 백제, 신라의 나라는 비록 한 구역이지만,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의 산은 바로 삼신산(三神山)이다. 이에 쌓인 기운이 상서로워 기이한 분을 탄생시켰다. 아아, 단목(檀木)의 신인(神人)이 한 번 떠나간 뒤에는 태백산(太白山)이 텅 비었고,동명왕(東明王)의 인마(麟馬)가 돌아오지 않으니 단지 조천석(朝天石)만 남아 있다.
상고 시대의 현풍(玄風)은 이미 멀어졌으며, 장생(長生)의 비결은 전해지지 않았다. 더구나 나라에서는 문(文)을 숭상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무(武)를 높이는 데이겠는가. 시(詩)를 논하고 부(賦)를 짓는 선비는 적막하여 들을 수가 없고, 어느 누구나 말을 타고 활을 당기는 무리들이었다. 우리나라가 좌임(左袵)을 하여 해동(海東)에는 경전을 외우는 유자(儒者)가 없었으나, 문(文)이 여기에 있으니 영남(嶺南)에서 호련(瑚璉)의 그릇이 태어났다. 그리하여 학해(學海)에서 칼날을 갈았으며, 사림(詞林)에서 깃발을 세웠다.
공의 성은 최씨(崔氏)이고 이름은 치원(致遠)이며, 자는 고운(孤雲)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70년 동안 있다가 태어났으며,하늘의 명에 응하여 500년 만에 탄생하였다. 집안에는 상서로움이 돌아서 땅에서 연꽃이 피어났으며, 부여받은 자질이 신령스러워서 태어나자마자 오얏나무를 손으로 가리켰다.시(詩)를 지음에 있어서는 아송(雅頌)을 추구하여 제량(齊梁)에서 후진(後塵)을 씻었고,문(文)을 지음에 있어서는 전모(典謨)를 아울러 익혀 진한(秦漢)에서 선구(先驅)를 내달렸다. 광염(光焰)은 만 길이나 치솟아 명월(明月)의 구슬의 반열에 끼일 만하였으며, 율려(律呂)와 서로 조화되어 균천(勻天)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같았다. 종이 위에는 교룡(蛟龍)이 꿈틀거렸고, 붓끝에는 풍운(風雲)이 모여들었다. 이에 발해(渤海)의 굽이치는 파도는 굳건한 붓으로 인하여 장엄함을 더하였고, 부상(扶桑)의 해와 달은 높은 이름을 얻어 광채를 더하였다.
궁벽하게 삼한(三韓)에 거처하면서 매번 좁은 산하를 탄식하다가, 우러러 팔극(八極)을 바라보며 드넓은 우주에서 놀고자 하였다. 어찌 누항(陋巷)의 사립문 안에서만 거처하겠는가. 장차 상호(桑弧)와 봉시(蓬矢)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다. 동쪽 푸른 바다에 배를 띄워 한(漢)나라 사신이 탄 뗏목을 따라갔으며,북쪽으로 중화(中華)에서 공부하여 주공(周公)의 도를 배우는 것을 기뻐하였다.처음으로 기(冀) 땅 들판에 말이 있음을 알렸으니,진(秦)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하지 못하였다.노(魯)나라의 궁궐 뜰을 지날 적에는 계찰(季札)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사모하였으며,촉(蜀) 땅의 다리를 건널 적에는 상여(相如)처럼 기둥에 글을 썼다.
나이는 비록 감라(甘羅)와 같았으나, 재주는 대륙(大陸)을 울리었다.임금이 있는 대궐에서 책문(策問)을 시험 보이니 자극궁(紫極宮)의 황제가 이름을 알았으며,장수가 있는 막부(幕府)에서 글을 날리니 녹림(綠林)에 있는 도적들이 무릎을 꿇었다. 온 천하에 명성이 퍼지니 석우(石友)가 〈유선가(儒仙歌)〉를 지어 선사하였으며, 구천 하늘 위로 날아오르자 금규(金閨)에서 한림(翰林)의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왕중선(王仲宣)의 땅이 아니었으니, 이에 초집규(楚執珪)의 노래를 연주하였다.
신선 같은 풍골(風骨)이 진세(塵世)를 벗어났으니 동방삭(東方朔)의 성정(星精)이 하강하였고, 비단옷을 입고 신라로 돌아오니 노담(老聃)의 자기(紫氣)가 동쪽으로 옮겨 왔다. 나라 사람들은 그 기이한 재주에 숨을 죽였고, 여왕은 고귀한 직책을 제수해 주었다.
나라의 사직이 장차 어지러워지려는 때를 만나서 자신의 탄생이 좋은 때를 얻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열수(列宿)와 고봉(高峯)은 은하(銀河)와 무협(巫峽)에서 왕래하였고,청송(靑松)과 황엽(黃葉)은 곡령(鵠嶺)과 계림(鷄林)에서 탄식하였다.모이고 흩어지는 뜬구름을 보고서 공연스레 가생(賈生)의 눈물을 흘렸거니,풍진 이는 세상에서 누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알겠는가.등불 앞의 만리의 마음이었고, 사물 밖의 푸른 산의 꿈이었다.
황진(黃塵)이 눈을 가리자 의관(衣冠)을 걸어 두고서 훌쩍 돌아가서는,자지(紫芝)를 뜯어 배고픔을 면하면서 임천(林泉) 속에서 높이 누워서 지냈다. 한 시내의 솔과 대는 월영당(月影堂)을 반쯤 가렸고, 만 골짝의 안개와 노을은 청학동(靑鶴洞)으로 멀리 이어졌다.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맑은 휘파람을 불었고, 푸른 시내를 굽어보면서 길게 노래를 불렀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방외(方外)에서 노니는 사람이었다. 마음은 현빈(玄牝)에 통하여 중묘(衆妙)의 문을 스스로 얻었고, 약(藥)은 금단(金丹)을 단련하여 참동(參同)의 계(契)를 다시금 이었다. 물외(物外)에서 형신(形身)을 길러 곰처럼 매달리고 새처럼 폈으며, 인간 세상의 구각(軀殼)을 벗어 매미처럼 허물 벗고 용처럼 변하였다. 오곡(五穀)을 먹지 않으면서 바람과 이슬을 들이켜고 경화(瓊華)를 씹었으며, 팔구(八區)를 떨쳐 버리고서 구름과 기운을 타고 일월(日月)을 잡아탔다. 구령(緱嶺)에서 자진(子晉)에게 읍하였으며,공동(崆峒)에서 광성자(廣成子)를 방문하였다.
지극한 사람이라 이름 붙일 수가 없어서 만상(萬象)에 뒤섞여 같은 몸이 되었으며, 신령한 기운이라 변하지 않아 천년이 지나서도 오히려 존재하였다. 출입하는 데에 그 단서를 알 수가 없었으며, 변화하는 데에 처음과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운산(雲山)의 옛 자취는 글을 올리던 집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악부(樂府)에 남은 음은 아직도 가야(伽倻)의 곡(曲)을 전한다.
아아, 저 혁서(赫胥)의 성읍을 바라다보니, 실로 선생께서 살던 옛 마을이다. 예전에 있었던 사람들은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함께 먼지로 돌아갔으며, 비록 썩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모두가 다 선생의 발 아래였다. 박제상(朴堤上)의 충성은 단지 열사(烈士)일 뿐이었고, 김유신(金庾信)의 영걸함은 문장(文章)이 빠져 있다. 오직 선생만이 꽉 막힌 사원(詞源)을 통하게 했고, 황폐한 학로(學路)를 열었다.
궁전에서 진경(秦鏡)을 거니 오장(五臟)이 모두 놀랐고,산천에서 우부(禹斧)를 휘두르니 구주(九州)가 비로소 정해졌다. 동방의 기습(氣習)이 일변하여 문명(文明)의 나라가 되었고, 북극의 성신(星辰)이 높이 떠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았다. 이 때문에 공을 성인(聖人)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고, 공의 시호를 문창(文昌)으로 정하였다.천만여 년 동안 조두(俎豆)를 바치니, 70명의 고제(高弟)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선현의 성대한 덕을 추모하여 지금까지 제사 지내거니,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글을 알게 한 것이 그 누구의 공이었던가. 나는 호량(濠梁)과 광야(曠野)에서 장수(莊叟)가 노닌 것을 생각하였고,영수(潁水)와 기산(箕山)에서 허유(許由)의 좋은 손님을 꿈꾸었다. 그리고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을 읽고, 굴원(屈原)이 지은 〈원유(遠遊)〉를 읊조렸다. 석문(石門)이 아득히 높으니 고금(古今)을 어루만지면서 길게 탄식하였고, 쌍계(雙溪)가 맑으니 은일(隱逸)의 남은 자취를 찾아보았다.만물을 무하(無何)에 부치니 바로 한 마리의 말이고,진인(眞人)의 헤아릴 수 없음을 생각하니 바로 용과 같은 분이다.
[주-D001] 최 학사 …… 서(序) : 이 글이 《고운집(孤雲集)》 〈고운선생사적(孤雲先生事蹟)〉에는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정동명(鄭東溟)의 잘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동명집》에 실려 있는 비문과 《고운집》에 실려 있는 비문을 비교해 보면 문장이 달라진 곳이 몇 곳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새길 적에 고친 것으로 보인다. 번역을 하면서는 일일이 대조하여 교감하지 않고 원문에 있는 대로 번역하였다.[주-D002] 봉래(蓬萊) …… 삼신산(三神山)이다 : 발해(渤海) 바다 가운데 세 산이 있는데, 하나는 방호(方壺)로 곧 방장(方丈)이고, 하나는 봉호(蓬壺)로 곧 봉래(蓬萊)이며, 하나는 영호(瀛壺)로 곧 영주(瀛洲)인데, 이들을 삼신산이라고 한다. 이 산들은 모양이 마치 병처럼 생겼으며, 그 속에는 신선들이 살고 불사약(不死藥)이 있으며, 새와 짐승이 모두 희고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拾遺記 卷1》[주-D003] 단목(檀木)의 …… 비었고 : 단목은 박달나무를 말하고 신인(神人)은 단군(檀君)을 가리킨다. 전설에 의하면,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으로 삼고는 평양에 도읍하고 단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 평양에 단군사(檀君祠)가 있다. 태백산에 대해서는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평안도 묘향산(妙香山), 백두산(白頭山) 등의 설이 있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평양부》[주-D004] 동명왕(東明王)의 …… 있다 : 조천석(朝天石)은 평양의 부벽루(浮碧樓) 아래 기린굴(麒麟窟) 곁에 있는 바위인데,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의 동명왕이 이곳에서 말을 타고 하늘에 조회하였다고 한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평양부》[주-D005] 현풍(玄風) :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의 사상을 말한다.[주-D006] 좌임(左衽) :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이르기를 “관중(管仲)이 아니었으면 나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게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주-D007] 문(文)이 …… 태어났다 : 영남 지역에서 도(道)를 담당할 인재가 태어났다는 뜻으로, 최치원(崔致遠)이 영남 지역에서 태어난 것을 말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6두품(六頭品) 출신으로, 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문(文)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도가 최치원에게 있었다는 뜻으로, 공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이미 별세하셨으니, 문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호련(瑚璉)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적에 쓰는 예기(禮器)로, 흔히 나라를 다스릴 만한 훌륭한 인재를 뜻한다.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자신은 어떤 그릇이냐고 묻자, 공자가 “너는 호련이다.”라고 하였다. 《論語 子罕, 公冶長》[주-D008] 학해(學海) : 학문(學問)의 세계를 이른다. 학문의 범위가 넓은 것을 바다에 비유하여 한 말이다.[주-D009] 사림(詞林) : 사단(詞壇)과 같은 말로, 학자나 문인들의 세계를 말한다.[주-D010] 어머니의 …… 태어났으며 : 어머니의 뱃속에 70년 동안 있다가 태어난 고사는 누구의 고사인지 분명치 않으며, 최치원의 설화에서는 이런 설화를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노자(老子)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81년이나 있다가 태어난 후 바로 말을 하였으며, 태어났을 때 머리가 이미 하얗게 세었다고 한다. 《列仙傳》[주-D011] 하늘의 …… 탄생하였다 : 최치원이 성인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예전에 중국에서는 천지의 정기(精氣)가 모여서 500년마다 한 사람씩 큰 성인(聖人)이 태어난다고 여겼다.[주-D012] 땅에서 …… 피어났으며 :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난 것은 누구의 고사인지 분명치 않다. 다만 최치원의 설화에 “최치원의 어머니가 금돼지에게 잡혀 갔다가 최치원의 아버지인 최충의 계략에 의하여 구출된 뒤 여섯 달 만에 최치원을 낳았는데, 최충이 금돼지의 아들인가 의심하여 아이를 내다 버리라고 하였다. 이에 종이 최치원을 내다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해 가고 밤이면 선녀가 내려와 보살펴 주었으므로 다시 연못에 버렸는데, 갑자기 연꽃 한 송이가 피어올라 최치원을 받들었고 백학 한 쌍이 날아와서 날개로 덮어주었다.”라고 하였다. 최치원에 관한 설화는 아주 많은데, 성임(成任)의 《태평통재(太平通載)》 권68에 〈최치원전(崔致遠傳)〉이 들어 있으며,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15에 〈선녀홍대(仙女紅袋)〉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주-D013] 태어나자마자 …… 가리켰다 :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뛰어났다는 뜻이다. 노자(老子)의 어머니가 노자를 낳을 적에 오얏나무 아래에서 낳았는데, 노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하여 오얏나무를 가리키면서 “이것으로 나의 성을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씨(李氏)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神仙傳 卷1 老子》[주-D014] 시(詩)를 …… 씻었고 : 시를 지으면서는 남북조 시대의 부화한 시풍을 씻어 냈다는 뜻이다. 아송(雅頌)에서의 아(雅)는 조정의 악곡(樂曲)이고 송(頌)은 종묘의 악곡인데, 《시경》에 이들 노래가 실려 있으므로, 전하여 《시경》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제량(齊梁)은 남북조 시대의 제(齊)와 양(梁) 두 나라에서 유행했던 시체(詩體)인 제량체(齊梁體)를 말하는데, 이 시기의 시풍은 성정(性情)의 표현보다는 성조(聲調)와 수사학(修辭學)적인 기교를 더욱 강조하였다. 후진(後塵)은 흔히 후배(後輩)를 뜻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뒷날에 일으킨 먼지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주-D015] 문(文)을 …… 내달렸다 : 문을 지으면서는 선진고문(先秦古文)을 추구하였다는 뜻이다. 전모(典謨)에서의 전(典)은 《서경》 가운데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을 가리키고, 모(謨)는 〈대우모(大禹謨)〉와 〈고요모(皐陶謨)〉를 가리키는데, 전하여 《서경》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진한(秦漢)은 진나라와 한나라 때의 문으로, 일반적으로 고문(古文)을 가리킨다.[주-D016] 명월(明月)의 구슬 : 명월주(明月珠)로, 대합에서 나오는 진주 비슷한 구슬인데, 밤에도 환히 비춘다고 한다.[주-D017] 율려(律呂) : 옛날에 악률(樂律)을 정하는 기구이다. 중국 황제(黃帝) 시대 영륜(伶倫)이 대나무를 잘라 통을 만들어서 통의 길이를 가지고 성음(聲音)의 청탁(淸濁)과 고하(高下)를 구분하였는데, 악기의 음은 이것으로 기준을 삼는다. 음양(陰陽)을 각각 여섯으로 나누어 양(陽)이 율(律)이 되고 음(陰)이 여(呂)가 되며, 이를 합해 12음이 된다.[주-D018] 균천(勻天)의 음악 : 균천은 하늘의 한복판으로, 천제(天帝)가 사는 곳이다. 균천의 음악은 하늘나라의 음악으로, 여기서는 대궐의 음악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옛날에 진 목공(秦穆公)과 조 간자(趙簡子)가 비몽사몽 간에 천제(天帝)의 처소에 올라가 그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列子 周穆王》[주-D019] 발해(渤海) :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있는 바다로, 중국에서는 동해로 칭하기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서해라고 칭한다.[주-D020] 부상(扶桑) :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나무의 이름으로, 흔히 해가 뜨는 곳에 있는 나라인 우리나라나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를 가리킨다.[주-D021] 팔극(八極) : 팔방(八方)의 아주 먼 곳으로 천하의 끝을 가리킨다.[주-D022] 상호(桑弧)와 봉시(蓬矢)의 뜻 : 천하를 유람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상호는 뽕나무로 만든 활을 말하고, 봉시는 쑥대로 만든 화살을 말한다. 옛날에 아들이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禮記 內則》[주-D023] 동쪽 …… 따라갔으며 : 최치원이 중국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간 것을 말한다. 한나라의 사신이 탄 뗏목은, 본디 한나라의 장건(張騫)이 무제(武帝)의 명에 의하여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 황하의 근원을 찾게 하였을 때 타고 간 뗏목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당나라 사신이 타고 온 배를 말한다.[주-D024] 북쪽으로 …… 기뻐하였다 : 최치원이 중국에 유학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는 뜻이다. 주공(周公)의 도는 유학(儒學)을 말한다. 최치원은 소년 시절부터 성격이 세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12세 때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였는데, 떠날 적에 그의 아버지가 “10년이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노력하라.”라고 하였다고 한다.[주-D025] 처음으로 …… 알렸으니 : 우리나라에도 인재가 있었다는 뜻이다. 기(冀) 지역은 예로부터 명마(名馬)가 많이 나는 지방인데, 흔히 인재가 나는 지방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당나라 한유(韓愈)의 〈송온처사부하양군서(送溫處士赴河陽軍序)〉에 이르기를 “백락(伯樂)이 한 차례 기북(冀北)의 들판을 지나가자 준마가 드디어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하였다.[주-D026] 진(秦)나라에 …… 못하였다 : 중국에서 최치원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사회(士會)가 진(秦)나라로 망명 가 있었는데, 진(晉)나라에서는 진(秦)나라가 사회의 계책을 쓸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계책을 써서 사회를 진(晉)나라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사회가 돌아올 때 진(秦)나라의 대부(大夫)인 요조(繞朝)가 사회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우리 진(秦)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여기지 말라. 나의 계책이 지금 쓰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13年》[주-D027] 노(魯)나라의 …… 사모하였으며 : 춘추 시대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이 노나라에 갔을 때 주(周)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려 달라고 청하자, 노나라 임금이 악공을 시켜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연주하게 하니, 계찰이 아름답다고 하였으며, 이 이후에 회(鄶)의 음악을 연주하자 “회 이하는 평론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29年》[주-D028] 촉(蜀) …… 썼다 : 과거에 급제하여 공명과 현달을 구하기로 맹세하였다는 뜻이다. 한(漢)나라 때 성도(成都)의 북쪽에 승선교(升仙橋)란 다리가 있었는데,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자신의 고향인 촉에서 장안(長安)으로 갈 적에 이 다리를 지나면서 다리 기둥에 글을 쓰기를 “말 네 마리가 끄는 높은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다시 건너오지 않겠다.”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73》[주-D029] 나이는 …… 울리었다 : 최치원이 12세 때 중국에 들어가 온 천하에 이름을 알렸다는 뜻이다. 감라(甘羅)는 전국 시대 진(秦)나라 사람인 감무(甘茂)의 손자로, 여불위(呂不韋)의 가신(家臣)이었다. 일찍이 여불위에게 등용되어 12세 때 조(趙)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나라를 설득하여 다섯 개의 성을 할양받고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영토를 획득하였다. 《史記 卷71 甘茂列傳》[주-D030] 임금이 …… 알았으며 :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18세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입격하여 황제에게 이름이 알려진 것을 말한다. 자극궁(紫極宮)은 옥황상제가 산다고 하는 하늘 위에 있는 궁전인데, 전하여 황제가 있는 궁궐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주-D031] 장수가 …… 꿇었다 : 최치원이 〈토황소격(討黃巢檄)〉을 지어 황소(黃巢)의 무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을 말한다. 장수는 고변(高騈)을 가리키고, 녹림(綠林)에 있는 도적들은 황소의 무리를 가리킨다. 879년(헌강왕5)에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들을 쳤는데, 이때 최치원은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4년 동안 군막에서 표(表), 장(狀), 서계(書啓), 격문(檄文) 등을 짓는 일을 맡았다. 귀국한 뒤에 이때 지은 글을 정선하여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을 완성하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은 명문으로, 황소가 이 격문을 보다가 “천하 사람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 땅 속의 귀신까지도 몰래 베어 죽이려고 의논하리라.〔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라는 구절에 이르러 놀라 앉았던 걸상에서 떨어졌다 한다. 《三國史記 卷46 列傳6 崔致遠》[주-D032] 석우(石友)가 …… 선사하였으며 :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오려 할 때 중국 사람으로서 최치원과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지어 송별한 것을 말한다. 석우는 정의(情誼)가 금석(金石)과 같이 단단한 벗으로, 여기서는 고운을 가리킨다. 〈유선가〉는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실려 있는데, 그 한 구절에 이르기를 “열두 살에 배 타고 바다 건너 와, 문장이 중화를 뒤흔들었네. 열여덟 살에 사원을 두루 누비며, 한 화살로 금문책을 깨뜨리었네.〔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하였다.[주-D033] 금규(金閨)에서 …… 올렸다 : 최치원이 황소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승차되고, 겸하여 비은어대(緋銀魚袋)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것을 말한다. 최치원이 한림학사에 제수된 것은 신라로 귀국한 뒤로, 귀국한 뒤에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금규(金閨)는 한(漢)나라 때의 궁궐 문인 금마문(金馬門)으로, 본디 학사(學士)들이 대조(待詔)하던 곳이었는데, 전하여 조정(朝廷)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주-D034] 왕중선(王仲宣)의 땅이 아니었으니 : 중국 땅이 최치원의 고국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중선(仲宣)은 한나라 말기의 시인 왕찬(王粲)의 자(字)이다. 왕찬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산양(山陽) 사람인데, 박식하고 문장이 뛰어나 건안 칠자(建安七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일찍이 한 헌제(漢獻帝) 때 난리를 피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15년 동안 의탁해 있었는데, 이때 시사(時事)를 한탄하고 고향을 그리면서 중선루(仲宣樓)라는 누각에 올라가 〈등루부(登樓賦)〉를 읊어 시름을 달래었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주-D035] 초집규(楚執珪)의 노래를 연주하였다 : 최치원이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슬픈 노래를 불렀다는 뜻이다. 초집규는 전국 시대 월(越)나라 사람으로 초나라에서 벼슬하여 규(珪)를 잡을 만큼의 고관 자리에 올랐던 장석(莊舃)을 가리킨다. 장석이 초나라에서 벼슬하여 높은 관직에 올라 부귀를 누리게 되었으나 고국을 잊지 못하여 병중에도 월나라의 노래를 불러서 고향을 그리는 정을 부쳤다. 《史記 卷70 張儀列傳》[주-D036] 동방삭(東方朔)의 성정(星精) : 동방삭은 전한 무제(前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만청(曼淸)이다. 해학과 직언을 잘하였고 선술(仙術)을 좋아하였는데, 하늘나라의 반도(蟠桃) 3개를 훔쳐 먹어 3천 년을 살았다고 한다. 성정은 별의 영기(靈氣)를 말한다.[주-D037] 노담(老聃)의 …… 왔다 : 노담은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노자가 일찍이 주(周)나라에서 사관(史官)으로 있다가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는 주나라를 떠났는데, 노자가 서쪽으로 가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으로 있던 윤희(尹喜)가 이에 앞서 함곡관 위에 자색 기운이 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얼마 뒤에 노자가 동쪽에서 푸른 소를 타고 왔다고 한다. 《列仙傳》[주-D038] 여왕은 …… 주었다 : 여왕은 진성여왕(眞聖女王)을 가리킨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하였는데, 이 시무책이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다.[주-D039] 열수(列宿)와 …… 왕래하였고 : 최치원의 연장(年狀)에 이르기를 “무협 중봉의 해에 무명옷 입고 중화에 들어갔다가, 은하 열수의 해에 비단옷 입고 우리나라에 돌아왔다.〔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土〕” 하였는데, 무협 중봉의 해는 무협이 12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12세를 뜻하고, 은하 열수의 해는 열수가 28수(宿)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28세를 뜻한다.[주-D040] 청송(靑松)과 …… 탄식하였다 : 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흥할 것을 알고는, 고려 태조에게 “곡령에 솔이 푸르고 계림엔 잎이 누르다.〔鵠嶺靑松 鷄林黃葉〕”라는 글을 올렸다.[주-D041] 모이고 …… 흘렸거니 : 최치원이 시무책을 올려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 하였으나,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 귀족들에 의해 개혁안이 거부되자,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떠나가면서 슬퍼한 것을 가리킨다. 가생(賈生)은 한(漢)나라 때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를 지낸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가의는 글을 잘 지었는데, 문제(文帝) 때 박사(博士)가 되어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服色)을 바꾸며, 법도(法度)를 제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켰다. 그 뒤에 장사왕의 태부가 되어 나가면서 상수(湘水)를 건너다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대개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것이다. 다시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로 옮겼는데, 양 회왕이 낙마(落馬)하여 죽자, 가의 역시 상심하여 죽으니, 그때 나이가 겨우 33세였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주-D042] 풍진 …… 알겠는가 : 최치원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었다는 뜻이다. 옛날에 백아(伯牙)는 금(琴)을 잘 탔고, 종자기(鍾子期)는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금을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가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였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가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 그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 《列子 湯問》[주-D043] 등불 …… 마음 : 최치원의 시 〈추야우중(秋夜雨中)〉에 이르기를 “가을바람에 처량하게 읊조리나니, 온 세상에 나의 음을 알아주는 이 없네. 창 밖에는 삼경의 비가 오는데, 등불 앞에 아물아물 만리의 마음이여.〔秋風唯苦吟 擧世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하였다.[주-D044] 사물 …… 꿈 : 최치원의 《계원필경집》 권17 〈재헌계(再獻啓)〉에 이르기를 “인간 세상의 요로와 통진은 눈 앞에 열리는 곳이 없고, 사물 밖의 청산과 녹수는 꿈속에서 돌아갈 때가 있네.〔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 하였다.[주-D045] 황진(黃塵)이 …… 돌아가서는 : 속세의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는 뜻이다. 황진은 누런 먼지로 속세를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사람인 공사(龔舍)가 일찍이 미앙궁(未央宮)에서 숙직하다가 거미줄에 날벌레가 걸려서 날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나의 삶도 저와 마찬가지다. 벼슬이란 것은 사람에게 거미줄과 같은 것이다. 어찌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관(冠)을 나무에 걸어 둔 다음 떠나갔다. 《漢書 卷72 龔勝龔舍傳》 《太平御覽 卷948》[주-D046] 자지(紫芝)를 …… 지냈다 : 산속에서 은거하며 지냈다는 뜻이다. 자지는 자색이 도는 고사리로, 진(秦)나라 말기에 동원공(東園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이 진나라의 학정을 피하여 상산(商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그들이 부른 노래에 이르기를 “아득하고 아득히 먼 상락 지역에 이르니, 깊고 깊은 산골짜기 길게 뻗었네. 반짝이며 빛을 내는 고사리 잎새, 굶주린 배 채우기에 충분하다네.〔漠漠商洛 深谷威夷 曄曄紫芝 可以療飢〕” 하였다.[주-D047] 월영당(月影堂) : 창원(昌原)의 남쪽 바닷가에 있는 월영대(月影臺)를 말한다. 최치원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하는데, 서거정(徐居正)의 시 〈월영대〉에 이르기를 “월영대 앞에 달은 길게 있건만, 월영대 위에 사람은 이미 갔네. 최고운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뒤, 흰 구름만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구나.〔月影臺前月長在 月影臺上人已去 孤雲騎鯨飛上天 白雲渺渺尋無處〕” 하였다.[주-D048] 청학동(靑鶴洞) : 지리산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최치원이 노닐었던 곳이다. 최치원은 관직에서 떠난 뒤에 경주(慶州)의 남산(南山), 의성(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창원의 월영대,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 등지에서 노닐었다고 한다.[주-D049] 방외(方外) : 방내(方內)와 방외란 말이 《장자(莊子)》에 나오는데, 방내는 세속의 법도 안에 사는 것을 말하고, 방외는 세속의 법도를 초월한 것을 말한다.[주-D050] 현빈(玄牝) : 만물을 생성하고 기르는 본원(本源)을 뜻하는 말로, 《노자(老子)》에 이르기를 “곡신은 죽지 않는데, 이것을 일러 현빈이라고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 하였다.[주-D051] 참동(參同)의 계(契) : 한나라 때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책인 《참동계(參同契)》로, 《주역》의 효상(爻象)을 빌려 금단(金丹)을 단련하는 법을 논하였다.[주-D052] 곰처럼 …… 폈으며 : 옛날에 행하던 일종의 양생법(養生法)으로, 곰과 같이 나뭇가지에 기어오르고 새처럼 다리를 쭉 뻗는 것을 말한다. 《장자》 〈각의(刻意)〉에 이르기를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여 심호흡을 하며,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듯 새가 다리를 쭉 뻗듯 체조를 하는 것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주-D053] 경화(瓊華) : 전설 속에 나오는 경수(瓊樹)의 꽃으로, 옥가루와 비슷하다고 한다.[주-D054] 팔구(八區) : 팔방(八方)과 같은 말로, 천하를 가리킨다.[주-D055] 구령(緱嶺)에서 자진(子晉)에게 읍하였으며 :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는 뜻이다. 자진은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이다. 도가(道家)의 고사에 “주나라 영왕의 태자 진이 칠월 칠석에 흰 학을 타고 피리를 불며 후산(緱山)의 마루에 머물러 있다가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했다. 《後漢書 卷82 王喬列傳》[주-D056] 공동(崆峒)에서 광성자(廣城子)를 방문하였다 : 공동산(崆峒山)은 계주(薊州)에 있는 산이고, 광성자는 중국 상고 시대의 선인(仙人)이다. 광성자가 공동산의 석실(石室)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황제 헌원씨(軒轅氏)가 그를 찾아가 함께 노닐면서 수신법(修身法)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주-D057] 운산(雲山)의 …… 않았으며 : 경주 금오산(金鼇山)의 북쪽 문천(蚊川) 가에 상서장(上書莊)이 있는데, 진성여왕 8년에 최치원이 이곳에서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지어서 올렸다고 한다.[주-D058] 혁서(赫胥)의 성읍 :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있었던 경주를 가리키는 듯하다. 혁서는 본디 혁서씨(赫胥氏)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혁거세의 음과 비슷하므로 따다가 쓴 것인 듯하다. 혁서씨는 아득한 옛날에 태평 시대의 제왕으로, 혁연(赫然)한 덕이 있어 백성으로 하여금 서로 따르게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혁서씨의 시대에는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서 즐거워하고 배를 두드리며 놀았다고 하며, 돌로 병기(兵器)를 만들고 나무를 잘라 궁실(宮室)을 만들었다고 한다. 《莊子 馬蹄》[주-D059] 박제상(朴堤上)의 충성 : 《삼국사기》에서는 박제상이라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김제상(金堤上)이라 하였는데, 박씨나 김씨의 성을 붙인 것은 후대의 일이고, 본래는 제상(堤上)이다. 신라가 402년(실성왕1)에 왜(倭)와 강화하기 위하여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보냈는데, 박제상이 미사흔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 신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인 듯 행세하였다. 그때 마침 백제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의하여 왜를 침입하려 한다고 참언하므로, 왜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미사흔과 박제상을 향도로 삼아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왜의 침략 세력이 신라를 치러 오는 도중에 박제상은 강구려(康仇麗)와 협력하여 왜병을 속여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 자신은 붙잡혀 왜왕의 앞에 끌려갔다. 왜왕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하여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하려 하였으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며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유형에 처해져 불에 타 죽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古代韓日文化交流硏究, 1990》[주-D060] 궁전에서 …… 놀랐고 : 최치원이 조정에 벼슬하여 당시 관료들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였다는 뜻이다. 진경(秦鏡)은 진 시황(秦始皇)이 가지고 있던 거울이다. 이 거울은 물건의 본질을 잘 밝혀 주므로 아무리 변형하여도 본질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오장(五臟)을 비춰 보면 그 사람의 질병은 물론 그 사람의 선악과 속셈까지도 다 드러나 보인다고 한다. 《西京雜記 卷3》[주-D061] 산천에서 …… 정해졌다 : 우부(禹斧)는 우 임금이 가지고 있던 도끼를 말한다. 우 임금이 천하 하천(河川)의 물길을 다스릴 적에 이 도끼로 용문산(龍門山)을 끊어 물길이 통하게 하였다고 하며, 중국 전체를 구주(九州)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한다. 《淮南子》[주-D062] 공의 …… 정하였다 : 고려 태조(太祖)를 도운 공이 있다고 하여 최치원은 1020년(현종11)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1023년에 문창후(文昌侯)에 추시(追諡)되어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주-D063] 천만여 …… 하였다 : 최치원이 문묘에 배향되어 공자의 제자들과 나란히 제사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70명의 고제(高弟)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재주가 뛰어난 72명의 제자를 말하는데, 대략의 수를 거론하여 칠십자(七十子)라고 칭한다.[주-D064] 호량(濠梁)과 …… 생각하였고 : 호량은 《장자》의 우화에 나오는 호수(濠水)에 있는 다리이고, 광야 역시 장자의 우화에 나오는 넓은 들판이다. 장수(莊叟)는 장자를 가리킨다. 장자가 혜자(惠子)와 더불어서 호수 가의 다리 위를 걷다가 “피라미가 나와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군. 피라미는 참 즐거울 거야.” 하니, 혜자가 “자네가 피라미가 아닌데 어떻게 피라미가 즐거우리라는 것을 아는가?” 하자, 장자가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가?” 하니, 혜자가 “나는 자네가 아니라서 본시 자네를 알지 못하네. 자네도 본시 피라미가 아니니 자네가 피라미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네.” 하였다. 또 천근(天根)이란 사람이 무명인(無名人)이란 사람을 만나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묻자, 무명인이 말하기를 “그대는 물러가라. 난 지금 조물자와 벗하려 하고 있다. 싫증이 나면 다시 저 아득히 높이 나는 새를 타고 이 세계 밖으로 나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노닐며, 끝없이 넓은 들판〔壙埌之野〕에서 살려고 한다.” 하였다. 《莊子 秋水, 應帝王》[주-D065] 영수(潁水)와 …… 꿈꾸었다 : 허유(許由)는 요 임금 때의 고사(高士)이고, 허유의 좋은 손님은 소부(巢父)를 가리킨다. 요 임금 때의 고사인 소부와 허유가 기산(箕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요 임금이 허유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허유가 그 소리를 듣고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영수의 물에 귀를 씻었다. 소부가 영수 가로 소를 끌고 와서 물을 먹이려고 하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물으니, 허유가 “요 임금이 나를 불러 구주의 장을 삼으려고 하므로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귀를 씻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소부가 그 귀를 씻은 물을 먹이면 소의 입을 더럽히겠다고 하면서,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서 물을 먹였다. 《高士傳 許由》[주-D066] 석문(石門)이 …… 찾아보았다 : 지리산(智異山)에 쌍계사(雙溪寺)가 있는데, 최치원이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골짜기의 입구에는 두 바위가 서로 마주 서 있어 대문의 모양새를 이루고 있는데, 최치원이 동쪽의 바위에는 ‘쌍계’, 서쪽의 바위에는 ‘석문’이라고 새겼다고 한다.[주-D067] 만물을 …… 말이고 : 무하(無何)는 《장자》에 나오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으로, 아무것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적막한 세계를 말하는데, 이는 장자가 설파한 이상향(理想鄕)이다. 혜자(惠子)가 장자에게 “위왕(魏王)이 나에게 박씨를 주어 그것을 심었더니 박이 열리기는 하였으나 너무 커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또 큰 나무가 있는데 너무 못생겨서 쓸모가 없다.”라고 하자, 장자가, “그 큰 박은 그대로 강호(江湖)에 띄우면 될 것이고, 그 나무는 무하유(無何有)의 고장, 광막(廣莫)한 들판에 심으면 될 게 아니냐.”라고 하였다. 또 ‘만물이 한 마리의 말’이란 말도 역시 《장자》에 나오는 것으로, 장자가 말하기를 “손가락으로써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손가락 아닌 것으로써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고, 말로써 말이 말이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말 아닌 것으로써 말이 말이 아님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한 마리의 말이다.〔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하였는데, 이는 천지 만물의 사이에 시비 진위(是非眞僞)의 차별을 두지 말고 모두 상대적으로 보아서 하나로 귀착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莊子 逍遙遊, 齊物論》[주-D068] 진인(眞人)의 …… 분이다 :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용과 같이 도(道)의 경지가 심오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진인은 신선(神仙)을 뜻한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 보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용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나 보았는데, 그는 용과 같은 존재였다.” 하면서 감탄하였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