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귓속은 겨울 / 남궁선
전나무 숲엔 하얀 꼬리의 여우들이
알전구처럼 빛난다 눈이 내리고 있구나
나는 까치발을 들고 창밖을 바라본다
다정한 밤의 풍경
검은 손의 너는 내 어깨 위로 기어오르고
가느다란 팔로 목을 감싼다
우리는 한 번의 겨울도 가져 본 적이 없지, 검은손거미원숭이야
눈밭 위에 맨발로 꽃잎을 그려 넣을 때
나는 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아야겠구나
발가락에 닿는 차갑다는 그 감촉은 어떤 느낌일까
발꿈치를 내리고 침대로 돌아와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는다
나는 투명하고 뾰족한 얼음조각에 스며드는
어떤 열기에 대해 상상한다, 검은손거미원숭이야
내 목을 감싸고 있는 날카로운 손톱을 조금 더 눌러준다면
아주 붉은 것이 부드럽고
따뜻한 퐁듀처럼 흘러내릴 텐데
하얀 꼬리의 여우들은 볼 수 있을까, 내 방 가득 차오르는 눈물의 깊이
얼음가시에 찔려 빨갛게 터지고 싶은 내 두 발
- 2011년 <시작> 신인상 당선작
■ 남궁선 시인
- 1973년 인천 강화 출생
-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 시집 <당신의 정거장은 내가 손을 흔드는 세계> 외
《 심사평 》
신인상 심사를 시작하면서 심사위원들은 요즈음의 신인 발굴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는 신춘문예를 비롯하여 주요 문예지들의 신인상 당선작들이나 당선자들이 적잖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 공감을 했다. 그 하나는 소위 신춘문예 스타일이 따로 있다고 할 정도로 ‘판박이’ 작품이 당선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작품은 대개 인생이나 세계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이나 개성적인 표현을 향한 치열한 도전정신이 결여된 한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문제작보다는 문제가 없는 작품, 즉 무난하고 단정한 작품이 당선되는 사례가 많다고 하겠다. 다른 하나는 당선자들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성별도 여성 편향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나 남성이 신인 공모에 당선되는 사례가 드문 것은 요즈음 우리 시단이 지닌 문제적 측면이 아닐 수 없다. 시의 능력에서 남녀나 노소에 의한 차이가 있을 수는 없겠지만, 시의 경향에서 편협한 성별의식이나 세대의식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마음 한 구석에 밀어놓고 엄정하고 신중하게 심사를 진행해 나갔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시편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너무 단정하거나 그저 무난한 시들은 외형적인 완성도가 높을지라도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히려 약간의 무리가 따르더라도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참신하고 예리한 언어 감각을 도전적으로 보여주는 시편들에 눈길을 주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남궁선의 「너의 귓속은 겨울」 외 4편, 이문경의 「기린의 입과 심장의 거리」 외 5편, 황경철의 「흑백사진」 외 4편, 강민정의 「천사금렵구」 외 4편, 전형주의 「그늘제조법」 외 7편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시적 새로움에 대한 고민과 다양한 창작 경험이 충실히 반영된 것들이어서 심사위원들을 매우 고민스럽게 했다. 하여 다시 꼼꼼하게 윤독을 하고 토론을 하는 과정을 거쳐서 결국 남궁선과 이문경을 수상자로 선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나머지 세 사람들도 기성 시인 못지않은 믿음직스러운 역량을 갖추고는 있으나, 아직 언어를 장악하는 능력이나 시상 전개의 안정감이 다소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남궁선의 시는 비극적 세계 인식을 감각적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성이 돋보인다. 요즈음 시에서 비극적 세계관 자체도 흔치 않지만, 그것을 감각적 언어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도 평범하지는 않다. 비극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은 서로 모순되지만, 이 모순이 오히려 그녀의 시에 개성을 부여한다. 이 모순으로 인해 비극은 더 비극적인 것으로 강조되는 동시에, 단순한 슬픔의 재현을 넘어 삶의 진실을 현현하는 통로의 구실을 하게 된다. 당선작인 「너의 귓속은 겨울」은 “내 방”과 “창밖”의 공간적 대립 구도와 선명한 감각의 언어들을 통해 삶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시이다. 삶의 비극성은 “내 방”의 “나”와 “검은손거미원숭이”는 순수성과 야생성을 상실했다는 데서 온다. 반대로 “하얀 꼬리의 여우들”이 있는 “창밖”의 “겨울”은 순수성과 야생성이 살아 있는 세계이다. “나”가 지향하는 “알전구처럼 빛나”는 “하얀 꼬리의 여우들”를 소망하거나, “나” 자신의 “아주 붉은” 피가 “퐁듀처럼 흘러내리”기를 염원하는 것은 그러한 세계를 지향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또한 「스테인드글라스」의 “희망의 계획서가 사라진 검은 수첩”이나, 「나는 하얀 장미를 원했고 장미 위로 눈이 내렸다」의 “창문에서 나뭇가지에서 강변에서 멀지는 눈”도 그런 비극성과 관련된 세계를 흥미롭게 형상화한다.
이문경의 시는 삶의 궁극적 가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안정감 있는 언어로 전개해 나간다. 성찰의 대상은 요즈음 시에서 시적 대상으로 직접 취택되는 사례가 아주 드문 편에 속하는 진실, 자유, 순수 등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는 관념적인 언어들이 자주 등장하여 고답적이고 교훈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참신하고 적실한 메타포들을 찾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러한 인상을 충분히 불식시켜 주고 있다. 당선작인 「기린의 입과 심장의 거리」에서 “그물눈의 문양을 온몸으로 가진 기린은/진실을 거르는 그물을 가진 것”, “기린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기린의 입과 심장과의 거리가/너무 멀기 때문”이라는 식의 에피그램(epigram)은 인상적이다. 내면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을 ‘기린’의 외적 이미지와 생리적 특징을 통해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진 적이 없는 돌」과 「거리의 발레리나」에서도 버림으로써 소중한 것을 얻는다는 역설적 깨달음, 속박당하는 삶에서의 일탈 욕구와 같은 관념적 내용에 맞춤으로 어울리는 형상을 찾아내는 솜씨가 마뜩하다.
이번 신인상 공모에도 경향 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응모해 주셨다. 시를 향한 열정과 시작 신인상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당선자로 선정된 두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보들레르가 노래했던 ‘알바트로스’처럼 지상에서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날개’를 소유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시의 하늘을 향한 비상을 꿈꾸고 도전해야만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 아닐까 한다. 부디 고루한 시와 시단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지지 말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세계를 오롯하게 개척해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 심사위원:
예심 - 박판식 박상수
본심 - 유성호 김춘식 이형권 홍용희
☆ 경시대회 참가하세요!
달팽이가 세상에서 제일 빠릅니다.
하루에 한 뼘을 가는 달팽이. 그 느린 걸음이 어느 순간엔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자신의 몸 밖로 진물을 흘리며 걷는 달팽이처럼 우리도 내 몸에서 진물이 흐르는 일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고통없이 희망을 품을 수 없습니다. 시는 맨몸으로 문질러댄 전신의 고통 속에서 탄생합니다. 고통받는 것이 싫어서 멈춘다면 희망도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맙니다. 멈추면 죽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달팽이가 제일 빠른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거든요.
경시대회 작품을 내는 것은 달팽이가 한 뼘의 길이만큼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전진이 모이면 엄청난 거리가 됩니다. 늦지 않게 출발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