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완도인에게 완도의 미래는 없다‘ 라고.
그렇다면 우리 완도인은 완도 역사를 제대로 다 알고 있는가?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 조선시대 이순신과 진린의 고금 묘당도삼도수군통제영, 보길 세연정의 윤선도 과연 이게 전부인까?
독후감 기고를 지인에게서 권유 받고나서 그 고마움에 거절을 못하고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책장속애서 발견한 책이 바로 淸海秘史(청해비사)다.
이 책은 소남 김 영현(1883~1971) 선생께서 1955년 처음 세상에 내 놓은 것을 완도문화원에서 2013년 한글로 번역하여 재발간한 책이다.
소남 선생께서는 향교의 학생들에게 위 내용을 가르치시고 시험까지 보게 하셨다는데 과연 현재의 우리는 어떠한가.
장보고와 이순신 그리고 윤선도 말고도 타 지역과 차별되는 가리포진 첨사, 가리포민란, 설군 등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제대로 숙지하고 알릴 수 있는 완도인이 되어야 한다.
淸海秘史(청해비사)의 저자 소남 김 영현(1883~1971) 선생은 고금 청룡리 출생으로 그의 부친 침천 김 광선이 바로 이 도재 공과 더불어 완도군 설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며 소남 선생은 불목리로 거처를 옮긴 후 고금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 완도항일독립운동의 주도자 역할을 한 여러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해방 후 원불교에 귀의하여 불목교당과 소남청소년훈련원 완도 설립에 기여한 분이다.
淸海秘史(청해비사)의 주요 내용 구성을 보면 먼저 ‘완도라는 이름의 유래’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 장보고 일대기, 고려인 송징 장군, 가리포진 첨사 선생안, 가리포 민란의 의인 허조(자는 사겸), 마지막부분은 완도군 설군과 향교 건설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특이 완도군 설군에 관한 애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예전의 우리 완도는 그 자체가 진도나 거제와 같이 그리 크지도 못하고 또 수 천년동안 타군(강진,영암,해남,강진)에 예속되어 있던 왜소한 섬이었다.
때는 고종 33년, 1896년 2월 3일 대한제국 칙령 제3호에 의해 완도군을 비롯 돌산군, 지도군 등 3개의 도서군이 설군하게 된다.
이에 따라 1521년 설진되어 374년 동안 운영된 가리포진은 수군진의 역사적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완도군 설군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알아보자.
1894년 갑오년에 고금도에서의 9년여 동안의 유배에서 해배되고 이듬해인 1895년 을미년에 이 도재 공은 전라감사로 부임하게 된다.
공은 섬 유배생활 중에 많은 지역민들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이에 감동한 주민들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었으며 그러는 동안 섬 주민들의 설움과 고충을 채득한 그는 그 보답으로 완도군민들이 그토록 소망하는 완도군을 창설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이다.
공은 즉시 김 광선을 전주로 오게 하고 고금도에 군 설치를 논의하게 된다. 광선은 답하기를 전도서를 합하여 군을 설치하는 데는 완도 가리포가 최적지일 것입니다. 가리포는 고대 청해진의 진지이오니 역사로 보아서도 편리한 위치올시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이 도재 전라감사는 말하기를 내가 직접 내려가서 실지를 답사하고 민의를 물어 보아 확정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듬 해인 1895년 봄, 이 도재 전라감사는 고금도로 내려가 덕동으로 주민 대표들을 불러 회의를 열어 군소재지를 문의하니 백성들은 떼를 지어 아뢰기를 대평리(지금의 덕동리)에 군을 설치하려면 토지를 매수하여야 하고 관사를 신축하여야 할 것이니 군민의 폐해가 막대할 것입니다. 하여 고대 청해진의 가리포에 정하게 하소서 하니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자 결국은 가리포로 정하게 되었다.
드디어 1986년 음력 4월, 초대군수 이 규승이 내려와 부임하였다. 김 광선은 향도유사가 되고 이 귀하는 이방이 되어 5월 15일에 완도객사에서 군민대회를 열어 10개 항목을 결의하였다.
이상이 완도군의 설치 과정에 대한 청해비사의 내용이다.
다음으론 완도군 설치와 향교 건설에 유공한 인물들로 대인 장자 이사극, 순진한 학자 황학래, 지모의 선비 손계국, 문무겸전 김광선, 덕망가 김성찬에 대하여 간략한 평을 실었다.
김 영현 공은 결론에서 꼭 기억해야 할 완도인으로 장보고를 최상단 중앙에 그 다음 줄엔 허조(사겸), 최여안, 문사순을 삼위일체로 하고 그 다음엔 이사극, 황학래, 손계국, 김광선, 김성찬 다섯분을 오위일체로 모시고 우리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이 도재 공도 그렇고 허 조(사겸) 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 우리 완도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공을 세운 부분에 대한 지나친 과소평가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 보자. 130여년전 섬들을 모아 군을 만든다는 이 엄청난 아이디어를 우리는 감사하고 재평가해야 된다. 만약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행정개혁이 없었다면 지금의 완도, 완도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섬의 가치는 무한하다. 물론 인구감소의 풍랑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과거 자신들의 관할이었던 섬들을 빼앗긴 인근 지자체들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조상들의 선택으로 지금 땅을 치고 통곡하고 있다.
육지보다 더 부유하고 그래서 점점 더 부러움을 받는 자본주의의 수혜를 만끽하고 있는 청정바다 수도 완도인은 옛 선조들의 앞선 선택을 존중하고 선양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후손들의 책무이기도 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라는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말이 떠오른다. 각 읍면별 인연도 소중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가 되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소지역주의에 매몰되어 백년대계를 훼손하는 일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한 군의 군민으로서 단합된 역량으로 미래의 발전을 선도하는 제2의 장보고 시대를 만들어 가자. 그러기위해선 그 밑바탕에 130여년전 설군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발상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이 지면을 통해 淸海秘史(청해비사)를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