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鼎湖[dǐng hú]
鼎湖,地理名称。“鼎湖”地名有两处,一处位于广东肇庆,另一处位于今河南灵宝。“鼎湖”一词在古代常用于鼎成龙去和龙去鼎湖(指代帝王去世)。古代传说黄帝在鼎湖乘龙升天。
《史记·封禅书》云:“公孙卿曰:‘黄帝采首山铜铸鼎于荆山。鼎既成,有龙垂胡髯,下迎黄帝。黄帝上骑,群臣后宫从上者七十余人。龙乃上去,余小臣不得上,乃悉持龙髯,龙髯拔堕,堕黄帝之弓。百姓仰望黄帝既上天,乃抱其弓与胡髯号,故后世因名其处曰鼎湖,其弓曰乌号。’”这就是说,轩辕黄帝仙逝升天于鼎湖。现河南灵宝阳平镇所在地,位于小秦岭之北、荆山脚下。据考远古时期,这里是一处湖泊,因黄帝在此汲水铸鼎而名曰鼎湖。
黄帝铸鼎塬
黄帝铸鼎塬,为黄帝铸鼎之处,位于河南省三门峡市灵宝市阳平镇,距三门峡市80公里,国家2A级旅游区(点)。据《史记·封禅书》记载:“黄帝采首山铜,铸鼎於荆山下。鼎既成,有龙垂胡髯下迎黄帝。黄帝上骑,羣臣后宫从上者七十馀人,龙乃上去。”
黄帝铸鼎原现存的《轩辕黄帝铸鼎原碑铭并序》是现存最早的记载有黄帝铸鼎内容的碑刻,唐贞元十七年岁次辛巳正月九日癸卯。”碑阴亦镌刻有碑文,内容大致与碑阳类同,为楷书。此碑为现今国内发现的专为记述轩辕黄帝事迹的最早碑铭,它较陕西省黄陵县桥山黄帝陵前的石刻碑铭早700多年,是国内研究炎黄二帝历史的重要史料。
灵宝铸鼎塬聚落遗址群,是国务院公布的第五批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并被列入中华文明探源工程六大遗址首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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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二 / 詩○五言絶句 / 五月四日
此日知何日。孤衷上帝臨。侵晨痛哭後。抱膝更長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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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衷上帝臨 한수재집(寒水齋集) 권상하(權尙夏)생년1641년(인조 19)몰년1721년(경종 1)자치도(致道)호수암(遂庵), 한수재(寒水齋), 황강거사(黃江居士)본관안동(安東)시호문순(文純)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적전제자(適傳弟子). 정호(鄭澔), 이여(李畬), 박광일(朴光一) 등과 교유
寒水齋先生文集卷之二十二 / 題跋 / 題刻泣弓巖詩後
此日知何日。孤衷上帝臨。侵晨痛哭後。抱膝更長吟。
先生嘗於孝廟諱日。曉起痛哭於巖上。仍吟一絶。後人號其巖曰泣弓。蓋取荊湖故事也。歲丁酉。方伯尹公憲柱謁廟訖。大書泣弓巖三字。刻石以示後。尙夏謹書先生絶句。仍略記之。
한수재선생문집 제22권 / 제발(題跋) / 읍궁암(泣弓巖)에 새긴 시의 뒤에 제함
이날은 알리라 어떤 날인지 / 此日知何日
외로운 이 충정 하늘은 알리 / 孤衷上帝臨
이른 아침 통곡을 마치고 나서 / 侵晨痛哭後
무릎 안고 다시 길이 읊네요 / 抱膝更長吟
선생께서 일찍이 효묘(孝廟)의 휘일(諱日)을 만나 새벽에 일어나서 바위 위에 올라가 통곡을 하고 인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읊었는데, 후인들이 그 바위를 읍궁(泣弓)이라 호칭하였으니, 대체로 형호(荊湖)의 고사를 취한 것이다. 그런데 정유년에 방백(方伯) 윤공 헌주(尹公憲柱)가 사당 배알을 마치고 ‘읍궁암(泣弓巖)’ 세 글자를 대서(大書)하여 돌에 새겨 후인들이 보도록 하였다. 그래서 나는 삼가 선생의 절구를 쓰고 인하여 그 사실을 대략 기록하는 바이다.
[주-D001] 형호(荊湖)의 고사 : 형호는 형산(荊山) 아래의 정호(鼎湖)를 말한다. 황제(皇帝)가 여기서 솥을 주조하고는 용(龍)의 수염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황제의 활[弓]만 땅에 떨어지므로 신하들이 그 활을 안고 통곡을 했다는 고사로, 전하여 임금의 죽음을 슬퍼함에 비유한 것이다. 《史記 封禪書》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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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皇帝)가 여기서 솥을 주조하고는 용(龍)의 수염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황제(黃帝)
*임금님 승하하심 : 원문은 ‘읍궁(泣弓)’으로, 유궁(遺弓)에 읍함을 의미하는 것이니, 세상을 떠난 제왕에 대한 추모의 정을 뜻한다. 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신하와 후궁 70여 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고, 이때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졌다. 백성들이 그 활을 안고 부르짖으면서 울었다고 하여 그 활을 오호궁(嗚呼弓)이라고 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정조대왕은 1800년(정조24) 6월 28일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다.
泣弓巖(읍궁암) : 화양구곡의 제3곡에 있다. 운영담(雲影潭)의 남쪽이며, 시냇가에 있는 희고 둥글넓적한 바위이다. 《한수재집》 권22 〈읍궁암에 새긴 시의 뒤에 제함[題刻泣弓巖詩後]〉에서 이르기를, “선생께서 일찍이 효묘(孝廟)의 휘일(諱日)을 만나 새벽에 일어나서 바위 위에 올라가 통곡을 하고 인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읊었는데, 후인들이 그 바위를 읍궁(泣弓)이라 호칭하였으니 대체로 형호(荊湖)의 고사를 취한 것이다. 정유년에 방백(方伯) 윤헌주(尹憲柱)가 ‘읍궁암’ 세 글자를 대서(大書)하여 돌에 새겨 후인들이 보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형호(荊湖)의 고사는 임금의 죽음을 슬퍼함을 의미하는데, 형호는 형산(荊山) 아래의 정호(鼎湖)를 말한다. 황제(皇帝)가 여기서 솥을 주조하고는 용(龍)의 수염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황제의 활[弓]만 땅에 떨어지므로 신하들이 그 활을 안고 통곡을 했다는 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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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부록 제19권 / 기술잡록(記述雜錄) / 채지홍(蔡之洪)
화양(華陽)의 초당(草堂) 밑에 옛날 홍매(紅梅) 한 그루가 있어 매우 무성하였는데, 기사년 초에 우연히 말라 죽었다가 갑술년 봄에 다시 살아나 꽃과 잎이 예전과 같았다. 그리고 선생이 또 효종의 휘신(諱辰)에 일찍이 오언시(五言詩) 일절(一絶)을 지었으므로, 여러 선비들이 이를 빗돌에 새겨 읍궁암(泣弓巖) 선생이 매년 5월 4일인 효종의 휘신(諱辰)에 반드시 이 바위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곡을 하였기 때문에 읍궁(泣弓)이라 이름한 것이다. 위에 세워 놓았는데, 신축년에 갑자기 물에 떠내려갔다가 을사년에 나무꾼에 의해 모래 위에서 다시 찾게 되었으니, 이상한 일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창 (역) | 1981
宋子大全附錄卷十九 / 記述雜錄 / 蔡之洪
華陽之草堂下。舊有紅梅一樹甚盛。己巳初。無端枯死。至甲戌春復生。花葉依舊。先生又於孝廟諱辰。嘗作五言詩一絶。多士刻石爲碑。植于泣弓巖 先生每年五月四日諱辰。必西望哭臨於此巖。故名以泣弓。 之上。辛丑。忽漂沒水中。至乙巳。樵人得之沙上。可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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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 초구(貂裘)에 대한 기록
선문왕(宣文王)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 있다가 돌아와서는 개연히 복수할 뜻을 품었으니, 하루라도 심양에 있던 날을 잊을 수 없어서였다. 이때 명(明) 나라가 망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청(淸) 나라가 이미 천하에서 뜻을 이루어 세계만방을 예속시킴에 따라, 중국 천하의 사대부들이 모두 이미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었으며, 그 조정에 나아가 그 임금을 섬기는 자들 역시 이미 있었으니, 천하에 다시 명 나라 왕실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선문왕의 뜻만은 언제나 명 나라의 왕실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선문왕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뒤 맨 먼저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 )을 초빙하여 빈사(賓師)의 예로써 대우하고, 위대한 명 나라〔大明〕의 원수를 갚고 선왕(先王)의 치욕을 씻을 방법을 도모했으니, 이는 먼저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대하려는 것이었다.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아뢰었는데, 왕이 그 말을 즐겨 들음으로써 산중에 은거하던 선비들이 모두 나와서 왕의 조정에 줄을 잇게 되었다.
하루는 선생이 대궐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세자가 무릎을 꿇고서 왕이 손수 쓴 편지를 직접 건네주므로, 선생은 달려나아가 조정에 입시(入侍)하였다. 왕이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초구(貂裘)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연계(燕薊)에는 추위가 일찍 오니 이것으로 바람과 눈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왕에게 있는 힘을 다할 것을 약속하였으니, 대개 앞으로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물자를 비축한 뒤에 대의(大義)를 천하에 떨쳐, 비록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군중(軍中)에서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왕이 승하하고 나자 산중에 은거하던 선비들도 차차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떠나갔다. 선생은 이미 물러나 파곡(葩谷)에 살고 있었는데, 늘 혼자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 가슴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으며 초구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적신(賊臣)들 중에 음해하고자 하는 자들이 많아 유언비어를 만들어 청 나라에 넌지시 알리니, 청 나라 사람들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렀다.
선생이 안으로는 이미 적신들에게 자주 배척을 당하고 밖으로는 청 나라 사람들에게 협박을 받았지만, 배우는 사람들과 더불어 반드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여 선왕(先王 효종(孝宗) )의 뜻을 밝히니, 선왕에게서 뜻을 얻지 못한 자들이 선생을 많이 원망하여 선생을 여러 번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선생은 바닷가로 귀양 가서도, 춘추대의를 펴지 못하고 종주국(宗主國 명 나라 )이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원통히 여기고, 매양 선왕을 추모하며 초구를 안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침내 죄인들이 다 처벌을 받고 선생은 돌아오게 되었으나, 선왕의 유신(遺臣)들은 이미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다시는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일을 말하지 않고, 아득한 40년 세월 동안 조공(朝貢)하는 사신이 해마다 연계(燕薊)의 교외를 달려가게 되었다.
급기야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적신들이 다시 정권을 쥐자, 선생이 선왕에게 불만을 품어 종통(宗統)을 폄하시키고 복(服)을 낮추었다고 하여 끝내 죽음에 몰아넣고 말았으니, 국내에서는 마침내 초구에 대한 일에 관해 말하기를 꺼렸다. 문인들이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파곡(葩谷)에 사우(祠宇)를 세워 명 나라 현황제(顯皇帝 신종(神宗) )와 열황제(烈皇帝 의종(毅宗) )를 제사하였다. 숙종(肅宗) 때 금원(禁苑)에 대보단(大報壇)을 쌓아 두 분 황제를 아울러 제사하면서도, 파곡의 사우를 보존하여 선생의 의리를 잊지 않게 하였다.
지금 임금〔今上 영조(英祖)〕32년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게 되어 선생의 자손이 선생의 유상(遺像)과 초구를 받들어 임금께 올리니, 임금께서 찬(贊)을 지어 내렸다. 3월 19일은 열황제가 사직을 위해 순절(殉節)하신 날이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이후 세 번째 돌아오는 갑신년(1764, 영조 40)에 임금께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친히 대보단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즈음하여 마을 안의 부형들이 성(城) 서쪽에 있는 송씨의 우사(寓舍)로 가서, 선생의 초상에 절하고 초구를 꺼내어 대청 가운데에 펼쳐 놓고 서로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모두 나에게 부탁하기를,
“곡부(曲阜)의 공자 후손들은 공자가 신던 신발을 보배로 여겼고, 정호(鼎湖)의 신하들은 떨어진 황제(黃帝)의 활을 안고 울었다네. 더구나 이 초구는 선왕께서 하사하시고 선생께서 받으신 것이 아닌가. 더더구나 열황제가 순절하신 때가 바로 이해요 이날이 아닌가!”
하기에,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공손히 손 모아 큰절하며 수락하였다. 다음과 같이 시를 덧붙인다.
우리 선왕에게도 / 維我先王
위에 임금 있었나니 / 亦維有君
대명의 천자님은 / 大明天子
우리 임금의 임금일레 / 我君之君
선왕에게 신하 있었나니 / 先王有臣
이름은 시열 자는 영보라 / 時烈英甫
천자님께 충성하길 / 忠于天子
제 임금께 충성하듯 했네 / 如忠其主
선왕에게 원수 있었나니 / 先王有仇
저 건주 오랑캐라 / 維彼建州
어찌 단지 사감(私憾) 때문이리 / 豈獨我私
대국의 원수로세 / 大邦之讎
왕께서 복수코자 / 王欲報之
대로 불러 상의하며 / 大老與謀
힘쓸지어다 / 王曰懋哉
초구를 하사하노라 하셨네 / 賜汝貂裘
서리 만난 갖옷은 / 秋毫啣霜
북쪽 변방에서 빛을 발했을 텐데 / 紫塞騰光
큰 공을 못 이룬 채 / 大功未集
왕이 문득 승하하셨네 / 王遽陟方
대로는 상심하여 / 大老其寒
갖옷 안고 눈물 흘리니 / 抱裘而泣
그 눈물 땅에 가득 / 其淚滿地
벽옥으로 변했고야 / 化而爲碧
갖옷 아니면 추워서가 아니라 / 匪裘不溫
미처 입지 못한 때문이요 / 未服是矣
선왕께서 내린 명령 / 先王之命
좌절된 때문일레 / 命獘是矣
오늘 저녁이 어느 땐고 / 今夕何辰
세 번째 돌아온 갑신년이라 / 甲其三申
우리는 망한 명 나라의 백성이요 / 明之遺民
선왕은 성인이셨네 / 先王聖人
[주-D001] 선문왕(宣文王) : 효종(孝宗)이다. 효종은 시호(諡號)가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다.[주-D002] 빈사(賓師)의 예로써 대우하고 : 빈사는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군주로부터 귀빈 대접을 받는 사람을 이른다. 대본은 ‘待□以賓師之禮’인데, ‘待’ 자 다음에 ‘之’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주-D003] 선왕(先王) : 청 나라에 항복한 인조(仁祖)를 가리킨다.[주-D004] 먼저 …… 것 : 군주가 현인(賢人)을 초빙할 경우 신하로 삼기 이전에 먼저 스승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탕왕(湯王)은 이윤(伊尹)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왕도(王道)를 행하였고,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하였다.[주-D005]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학문 : 《대학(大學)》을 이른다. 여기에서 군주가 자신의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화평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서도 《대학》의 말을 인용하고 나서 “옛날의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뜻을 성실히 하는 이는 장차 그럼으로써 큰 일을 하려는 것이었다.” 하였다.[주-D006] 초구(貂裘) :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갖옷을 말한다. 값비싼 방한복이다.[주-D007] 연계(燕薊) : 유계(幽薊)라고도 하며, 옛 연(燕) 나라 땅인 유주(幽州) 계지(薊地), 즉 지금의 북경을 포함한 하북성(河北省) 일대를 가리킨다.[주-D008] 10년 …… 뒤에 : 원문은 ‘生聚十年’인데, 이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원년(元年) 조에 월(越) 나라가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물자를 비축하며, 10년 동안 백성을 잘 가르치면〔十年生聚 而十年敎訓〕” 20년 뒤에는 오(吳) 나라가 월 나라에게 망할 것이라고 우려한 오자서(伍子胥)의 말에 출처를 둔 것이다. 그러므로 상하가 합심해서 부국강병을 도모하여 원수를 갚는 것을 ‘생취교훈(生聚敎訓)’이라 한다.[주-D009] 파곡(葩谷)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에 있는 화양동(華陽洞) 구곡(九曲) 중의 제 9 곡인 파곶(葩串 : 또는 巴串)을 말한다.[주-D010] 적신(賊臣)들 …… 알리니 : 1650년(효종 1)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 나라에 조선의 북벌계획을 밀고한 사실을 이른다.[주-D011] 춘추대의(春秋大義) : 《춘추》에서 강조한바 주(周) 나라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의리를 이른다. 여기서는 명 나라를 존숭하고 청 나라를 배척하는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의리를 이른다.[주-D012] 바닷가로 귀양 가서도 : 효종비(孝宗妃)의 상(喪)으로 인한 갑인년(1674)의 예송(禮訟)에서 서인(西人)들이 남인(南人)들에게 패함에 따라 우암도 파직, 삭탈되고 경상도 장기(長鬐)와 거제도(巨濟島) 등지로 귀양 간 사실을 이른다.[주-D013] 죄인들이 …… 되었으나 : 1680년(숙종 6)의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들이 정계에서 숙청되고 서인들이 복귀한 사건을 이른다. 당시 우암은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고, 이어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주-D014] 급기야 …… 말았으니 : 1689년(숙종 15)의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들이 숙청되고 남인들이 재집권한 사건을 이른다. 당시 숙종이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궁 장씨(張氏)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해 우암이 상소를 올려 다시 반대론을 제기하자, 이에 격분한 숙종은 우암을 비롯한 서인들을 축출하고 남인들을 불러들였다. 우암은 세자 책봉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기해년(1659)의 예송(禮訟)에서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둘로 나누고 효종이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의 복상을 삼년복(三年服)이 아닌 기년복(朞年服)으로 강등시켰다는 공격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주-D015] 사우(祠宇) :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가리킨다.[주-D016] 성(城) …… 우사(寓舍) : 대본은 ‘宋氏城西之寓舍’로 되어 있으나, 이본에 의거하여 ‘宋氏之城西寓舍’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17] 곡부(曲阜)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공자의 고향이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동평헌왕창(東平憲王蒼)에 “노(魯) 나라 공씨(孔氏)들이 아직까지도 중니의 수레, 가마, 관(冠), 신발을 간직하고 있으니, 훌륭한 덕을 지녔던 사람은 그 영광이 멀리까지 미침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주-D018] 정호(鼎湖)의 …… 울었다네 : 정호는 옛날에 황제(黃帝)가 솥〔鼎〕을 만들고 난 뒤 승천(昇天)했다는 곳이다. 《사기》 권28 봉선서(封禪書)에, 황제가 용을 타고 신하와 후비(后妃) 70여 인도 함께 용에 올라타고 승천하자 남아 있던 신하들이 함께 가려고 용의 수염을 잡았는데, 용의 수염이 빠지면서 신하들은 추락하고 황제의 활과 검도 함께 떨어졌다고 하였다. 제왕(帝王)의 서거를 슬퍼하는 고사로 쓰인다. 화양구곡(華陽九曲)에 읍궁암(泣弓巖)이 있다.[주-D019] 건주(建州) :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남 지역으로, 이곳의 여진족(女眞族)들이 중심이 되어 청 나라를 세웠다.[주-D020] 대로(大老) : 덕망 높은 노인이란 뜻으로, 노론에서 송시열을 높여 대로라고 불렀다.[주-D021] 벽옥으로 변했고야 : 《장자》 외물(外物)에 주(周) 나라 영왕(靈王)의 어진 신하인 장홍(萇弘)이 쫓겨나서 촉(蜀) 땅에서 배를 갈라 죽었는데 그 피를 3년 동안 간직해 두었더니 벽옥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충신열사가 흘린 피를 벽혈(碧血)이라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燕巖集卷之三 潘南朴趾源美齋著 / 孔雀舘文稿○記 / 貂裘記
宣文王歸自瀋質。慨然有復讐之志。葢未甞一日而忘在瀋也。是時 明亡十餘年矣。淸旣得志於天下。臣妾萬邦。而天下之士大夫皆已薙髮左袵。立其朝而事其君者。亦旣有之。則天下不復有明室矣。然而獨王之志。未甞不存明室也。王旣承大統。首聘尤菴宋先生。待之以賓師之禮。謀所以復大明之讐。雪先生之恥。蓋將學焉而後臣之也。先生朝夕告王以誠意正心之學。王旣樂聞其言。而巖穴之士。皆出而列於王朝矣。一日先生直禁中。世子跪授王手書。先生趨侍于朝。王屛左右。出貂裘以賜曰。燕薊早寒。可以禦風雪。於是先生遂許王以驅馳。蓋將生聚十年。然後奮大義於天下。雖君臣同死行間。不怨也。旣而王薨。巖穴之士。稍稍自引而去。先生旣退居葩谷。而每獨入深山。拊膺呼天。未甞不泣貂裘也。賊臣多陰害之者。爲飛語以風淸。淸人盛兵臨界上。先生內旣數絀於賊臣。而外爲淸人所持。然與學者必講春秋之義。以明先王之志。其失志於先王者。多怨先生。數置之死。先生流離海上。痛大義之未伸也。宗國之將危也。每追念先王。未甞不抱裘而泣也。罪人皆伏其辜。先生旣還。而 先王之遺老。已無在者。則不復言復雪之事。而漠然四十年之間。皮幣之使。歲走燕薊之郊矣。及議禮起。賊臣復執國命。以爲先生不滿於先王。貶宗而降服。卒置之死。國中遂諱言貂裘事矣。門人以先生遺命。立祠葩谷。祀明顯皇帝及烈皇帝。明陵時築壇苑中。並祀二帝。存葩谷之祠。以識先生之義也。今上三十二年。以先生從祠孔子。而先生之子孫奉其遺像及貂裘進於上。上作贊而賜之。三月十九日。烈皇帝殉社之日也。崇禎紀元後爲三甲申。上率群臣。親祀大報壇。於是里中之父兄。至宋氏城西之寓舍。拜先生之像。出貂裘。陳之於中堂。相與歎息流涕。咸屬某曰。曲阜之後。世寶其遺履。鼎湖之群臣。泣其墜弓。則况是裘也。先王之賜而先生之所受歟。况乎其是年而是日歟。某不敢辭。乃拜手稽首。係之以詩曰。
維我先王。亦維有君。大明天子。我君之君。先王有臣。時烈英甫。忠于天子。如忠其主。先王有仇。維彼建州。豈獨我私。大邦之讎。王欲報之。大老與謀。王曰懋哉。賜汝貂裘。秋毫啣霜。紫塞騰光。大功未集。王遽陟方。大老其寒。抱裘而泣。其淚滿地。化而爲碧。匪裘不溫。未服是矣。先王之命。命弊是矣。今夕何辰。甲其三申。明之遺民。 先王聖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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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巖集卷之二 潘南朴趾源美齋著 / 煙湘閣選本○神道碑 / 嘉義大夫行三道統制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謚忠烈李公神道碑銘 幷序
嗚呼。當淸人建號之初。刦執我使。必欲一得其庭拜。是固將聲噪於天下曰。朝鮮禮義之邦。率先諸國而帝我也。爲使者。噫其急矣。其頭可斫而不可叩。其膝可斷而不可跪者。苟非如故統制使李公之爲。使環東海數千里之國。將何以自明於天下乎。力可以拔瀋陽擧全遼。而不能勝弱國一介之使。威足以服蒙古四十餘王。不終朝而破杜松二十萬之衆。不能折匹夫之腰而膝之庭。獲玉璽陳符命。沛然自以爲得之于天者。若彼其易焉。其得我使之一拜。若是之難也。然而事在疆域之外。有非國人之所快覩。則身旣生還。跡涉受書。當時辱國之論。惡可已乎。其後明邊帥之奏天子。中原遺民之所圖畫。稍稍得之於傳聞之中。而國疑漸釋。始加褒贈之典。然其敵庭强悍之蹟。尙在國人信惑之間者。于玆百有四十餘年。此固萬世公議之所不能泯。而淸皇帝之所不得掩也。謹按公諱廓。字汝量。系出璿派。其所自祖曰王子敬寧君
。考諱裕仁。文科咸鏡道觀察使。倭寇時被害。贈禮曹判書。妣貞夫人慶州崔氏。萬曆庚寅生公。三歲而孤。及長。身長八尺。聲如巨鍾。膂力絶倫。屹然將帥材也。李文忠公恒福憐其孤貧。勸武中甲科。除宣傳官。猛虎入禁苑。公射殺之。賊臣脅文武百官。庭請廢大妃。公不參班。人皆危之。勸公稱疾。公怒曰。不病則當參乎。光海日悖亂。有探公意者。公謝曰。我有母在。未敢從公等。然第努力無我疑。及靖社有密期。東城君申景禋要公俱去。公不應。公時帶御營千摠。朴承宗素信公。急招公謂曰。有告若與大將李興立叛者。吾不若疑。急聚軍敦化門外。以備非常。公遂令軍中曰。今日我特將專號令。敢違者斬。夜義旗指門。軍中擾擾。告有外兵。公乘馬東向立曰。視我馬首。有行且字公者。公陽爲不聞。呼公者東城君也。事定。諸功臣疑公。欲並誅之。延平君李貴力爭曰。使廓不讓陣。誰敢入者。延平君以平山府使擧義。而超拜扈衛大將。則力保公爲中軍。復薦公代平山以庇之。然承宗以首相誅。而嘗爲其所厚。則無以自晰。常鬱鬱不得意。明年适叛報至。公適在理。趣召見。賜弓釖禦敵。猪灘兵潰。自投江。賊購公急。及得公馬死浮水。謂公已死。乃去。公乘流屍得不死。赤身赴都元帥張晩軍。軍中疑公賊諜。欲斬之。晩赦公爲先鋒。使立功自贖。遂破賊復京城。功疑不得勳。出爲安岳郡守。尋移慈山府使。姜弘立引滿州陷義州。列郡瓦解。觀察使尹暄急招公援平壤。道聞平壤已陷。而慈亦失守。狼狽失所。據檄召諸邑兵。將赴節度使。及金起宗代暄爲觀察使。疑公在道顧望不急援平壤。欲斬之。會朝廷屬公能捕誅金德卿,高汗龍者。二賊俱西陲小譯。投滿洲。德卿僞署安州牧使。公請擒二賊自贖。遂設計斬汗龍。擒德卿。擊賊半渡。奪還俘口。追高遮博氏。射殺二從騎。起宗握手歡飮曰。恨相知晩也。遂留爲中軍。悉以軍事委之。敵退。入拜同知中樞府事。出爲慶源府使。旋移永興府使。入爲都摠府副摠管。復出爲濟州牧使。還拜同樞兼摠管。尋除會寧府使。以母老辭不赴。時滿洲已據瀋陽。數侵擾山海關。盡服屬蒙古諸番。然猶以隣道待我。不絶聘報。崇禎九年丙子。滿洲使英兒阿代,馬福塔來遺書。辭甚悖慢。所望非前日者。臺閣及太學諸生。交章請斬其使。凾首奏天子。英兒阿代等。大恐跳出舘。奪馬馳去。棄國書道中。是時士大夫皆避使瀋中。乃以公充回答使。持書追至龍灣。時春信使羅德憲先公發。方留灣上。遂偕行入瀋陽。汗見公等。益慢不肯受幣。迭使舘中誚讓十餘事。汗將郊天。先使鄭命壽誘脅萬端。公拔佩刀。授命壽曰。持我頭去。明日滿洲數十騎。鞭門大呼曰。朝鮮使趣整服。公歎曰。今日死得所矣。遂與羅公東向四拜。遙辭國。手自裂袍。踏壞紗帽。以示不復服。自解髻。騈首交綰。兩相抱持臥。汗遣壯士。挾持公等。驅至壇下。貝勒八固山番子等皆班立。蒙古騎數十萬環壇而陣。汗衣柘黃袍。執圭升壇。受尊號曰寬溫仁聖皇帝。建有國之號曰大淸。改元崇德。壯士擁公立。公輒擲身伸脚臥。壯士爭前執其臂股。抑首揭尻。四擧而覆之地。公則大呼翻身背臥。有近前者。臥輒踢其面。鼻潰血濺。是日觀者。駭惡不忍視。遂倒曳鎖于舘。明日復祀東郊。又擁公等去。公等益暴抗裂眦大罵。眞悖戾不可當。滿洲群臣請釁鼓威衆。汗曰。彼方自求殺。今殺之。反適其願。且有殺使名。不如赦還。遂爲書置裝中。使百餘騎押公。馳至鴉鶻關而去。公等始檢裝。果得汗書。驚曰。書封新印。其中可知。萬一發書。有不中舊式者。將奈何。遂置書店中。馳還脫出柵。邊上讙言。公等拜蹈敵庭。觀察使洪公命耈馳啓。請梟示境上。於是三司及太學生交章請誅。金文正公尙憲力言兩使不驗問。奈何獨先斬之。得末减。公謫宣川。羅戍白馬城。久之朝廷得都督沈世魁奏天子手本。始知公等抗義狀。兩司姑停梟首之啓。然言者猶謂沈帥詐報天朝。及馬福塔以店中所棄書。至盛怒言皇帝郊天。使臣當執禮惟恭。乃廓等悖亂。廷辱天子。何不殺是賊。以謝大國。於是從行譯官申繼愔等。始發舒鳴寃。釋公等謫。是年冬。滿洲大擧襲我。上入南漢城。時公丁崔夫人憂。命起復。入覲圍中。使守城。遣中使勸肉。又親臨勞勉。督戰御史金益煕,黃一皓,金壽益,李厚源,林墰諸公。見公備禦有奇略。許以國士。始信前使瀋中事。圍解。請歸葬崔夫人。制終。拜同樞摠管。出爲忠淸道兵馬節度使。擢拜三道統制使。其在瀋陽。被捶敺。瘀血內腫。下軆不仁。年老田居。屢辭除拜。顯宗乙巳。卒于家。葬楊根郡北鬱業里坐乙原。配貞夫人興陽李氏。應培女。生三男一女。益章,益常,益行。女適尹世美。益章,益常無後。益行五男。誢,訢,譓,諝,諒。林將軍慶業入登州。爲馬弘胄所執。送北京。道見一畵。乃公等不屈狀也。先是。皇明烈皇帝。遣御史黃孫茂。奬諭公節義甚盛。而椵島已破。詔書竟莫能傳。自是天子之使。不復至朝鮮矣。及今淸皇帝論述歷代帝王。以及汗建號時事。題曰御題全韻詩。詩刊五卷。布行天下。詩有朝鮮使不拜獨乖之語。親自詳註言。太宗旣受尊號。而朝鮮使臣李廓羅德憲。獨不拜。太宗諭群臣曰。使臣無禮。欲朕先啓釁戮其使。加我以敗盟之名。朕終不肯逞忿于一時戮其使。其勿問。尋遣歸廓等。其所稱太宗者。汗也。今上三年。特命購其書。覽而嘉歎之。命旌其閭。而謚之曰忠烈。嗚呼。是奚特公等百年之疑快卞於一朝哉。使天下萬世。益義我朝鮮獨不帝滿洲於當時也。遂爲之銘曰。
維我先王。亦維有君。大明天子。我君之君。淸未受命。卽我强隣。入據遼瀋。揮戈四瞋。鄂羅回回。杜爾伯特。扎賴翁牛。烏珠土默。莫不稱臣。益强以傲。羞稱可汗。謀僭大號。我有虎將。曰廓汝量。聘在彼舘。元不忘喪。彼雖自帝。若飽于夢。必借公拜。以誇其衆。辮髮朱帽。焰瞳鬼齶。前擁後驅。若霆摧嶽。淸之帝不。係公一俯。撑宙亘宇。確植如柱。項領土梗。腹背瓮盎。屠膓刳胃。任汝飫脹。獨保此膝。爲天下伸。彼亦赧義。以儆厥臣。巡遠不剮。武騫生還。國言沸騰。喙喙郵訕。謂公媚敵。蹈躍拜舞。洵若斯者。其咽可斧。于存于歿。跡穢名衊。挽河爲盥。誰爲滌之。斲華爲觹。誰爲摘之。幽昧暗黮。誰爲晰之。淸今四葉。號登乾隆。親作歌詩。頌厥祖功。訝公不拜。謂志獨乖。獲此一言。若天難階。觀其所註。理當粉骸。詈公悖常。卽公義勇。自述宏度。非爲公頌。大書特書。非爲公寵。孰章賂帝。孰與慫慂。胡靳一殺。刻公百年。無直不伸。可質蒼天。我聖家法。攘夷尊周。環東爲國。一部春秋。有臣若公。曠世如昨。爰命太常。政府舘閣。考文選號。以旌毅魄。綽楔有儼。揭名列爵。顯報旣崇。九原可作。視此豊珉。色庶無怍。
通篇以疑字爲案。叙事奇崛。得史遷神髓。銘亦奇極典極。學昌黎而換脫得玅。
李羅姓名。見於一統志。在全韵詩。前特無人表章。故百餘年寥寥無聞耳。
假使當時萬有一或者。心欲偃而力不能不覆。彼將權認爲拜。公將奈何乎。此幸天賦公熊虎之材。以當此境。而其時諸公孰不斥和。而大抵皆文儒也。心剛骨則軟。貌毅質則弱。雖節義建天地。血憤撑宇宙。未必能勇力麤豪如將軍。我爲念此。未嘗不怵然心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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巖棲先生文集卷之八 / 書 / 與金滄江
貂裘記旣是少作。文亦不甚高。意此老已芻狗之。觀其詩中四句摘用於李統制碑銘。可知矣。而今特表而存之。恐未爲允。且其語及南人處。每以賊臣目之。非但此近讀者多懷不平。而此老晩年通達高曠之趣。亦爲此所翳。可歎。其他有不必深論。而五行未甞相生之說。令人捧腹。此老曾不知春夏秋冬之爲五行之氣乎。相生者氣也。相克者質也。今以質而論氣。輒謂無相生之理。文章家之不窮理而輕立說類如此。此農巖所以譏申象村也。谿谷亦有是病 大集雜言中似此者亦尙有數端。如中庸說觀心說 恨未並刪以就潔凈耳。
암서집 제8권 / 서(書) / 김창강에게 드림〔與金滄江〕
〈초구기(貂裘記)〉는 이미 소싯적의 작품이라, 문장도 그리 고상하지는 않습니다. 생각건대, 이 어른(연암)이 이미 소용없다고 버린 것〔芻狗〕으로 생각되니, 그 시 가운데 네 구를 이 통제(李統制)의 비명(碑銘)에다 따다 사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특별히 드러내어 그대로 두었으니, 아마도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 말이 남인(南人)을 언급한 곳에는 매번 적신(賊臣)으로 지목하였으니, 단지 이 근방의 독자들만이 대부분 불평함을 가질 뿐만이 아니라, 이 어른이 만년에 통달하여 높고 넓었던 식취(識趣)도 또한 이 때문에 가려졌으니, 탄식스럽습니다.
그 밖의 것은 반드시 깊이 논할 것은 아닙니다만, 오행(五行)은 일찍이 상생(相生)하지 않았다는 설은 사람으로 하여금 배를 잡고 웃게 만듭니다. 이 어른은 곧 춘하추동이 오행의 기(氣)인 줄도 알지 못했단 말입니까. 상생(相生)하는 것은 기(氣)이고, 상극(相克)하는 것은 질(質)입니다. 지금 질을 가지고 기를 논하면서 문득 상생의 이치가 없다고 하였으니, 문장가들이 이치를 궁구하지 않고 경솔하게 설을 세우는 것이 대략 이와 같습니다. 이것이 농암이 신상촌(申象村)을 기롱하였던 까닭입니다. - 계곡(谿谷)도 이런 병통이 있습니다. - 집사의 문집 중 잡언(雜言) 가운데에도 이것과 비슷한 것이 또한 오히려 몇 가지가 있으니, - 〈중용설(中庸說)〉ㆍ〈관심설(觀心說)〉과 같은 것입니다. - 함께 삭제하여 깨끗하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주-D001] 초구기(貂裘記) : 연암 박지원이 28세 때 지은 작품으로, 송시열(宋時烈)이 효종(孝宗)에게 북벌의 뜻으로 초구(貂裘)를 하사받았던 일에 대하여 쓴 것이다. 김택영은 연암집 중간본을 편찬하면서 〈초구기〉 제하(題下)에 “전아(典雅)하고 침울(沈鬱)하다. 동국(東國)에서 우암(尤庵)의 일을 기술한 것이 많으나 모두 이에 미칠 것이 없다. 선생 28세에 지은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연암집(燕巖集)》 권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에 실려 있다.[주-D002] 소용없다고 버린 것〔芻狗〕 : 추구(芻狗)는 풀을 묶어서 개 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것인데, 제사가 끝나고 나면 바로 내버리기 때문에, 소용이 있을 때만 이용하고 소용이 없을 때는 버리는 천한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주-D003] 이 통제(李統制)의 …… 것 : 이 통제의 비명은 《연암집》 2권에 실려 있는 〈가의대부 행삼도통제사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겸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시충렬 이공 신도비명(嘉義大夫行三道統制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謚忠烈李公神道碑銘)〉을 가리킨다. 이것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역임한 이확(李廓 1590~1665)의 신도비명인데, “우리 선왕에게는 또한 임금이 있었으니, 대명의 천자가 우리 임금의 임금이었네.〔維我先王, 亦維有君, 大明天子, 我君之君.〕”라는 네 구절을 〈초구기〉에서 그대로 따다 옮겨 놓았던 것을 말한다.[주-D004] 신상촌(申象村) : 신흠(申欽, 1566~1628)을 말한다.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ㆍ상촌(象村)ㆍ현옹(玄翁)ㆍ방옹(放翁),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정귀(李廷龜)ㆍ장유(張維)ㆍ이식(李植)과 함께 고문4대가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상촌집(象村集)》ㆍ《야언(野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남춘우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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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집 제3권 / 서(書) / 아무개 송성규에게 답함〔答宋□□ 聖圭〕
뜻밖에 편지를 받고 안부가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되니, 소식이 막혔던 터라서 매우 위로가 됩니다. 읍궁암비(泣弓巖碑)와 산수공(山水公)의 기문(記文)이 이와 같다면 보내주신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은 안될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비(碑)를 세우던 처음에 나중에 수해를 입을 것을 알고도 조금 높은 곳을 택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그 암에 직접 가서 그 실상을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옮겨 세우는 것이 혹 합당하지 않은 점이 없겠습니까? 보내주신 질문을 받고 간략하게 우견(愚見)을 말씀드렸으나 또한 감히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자세히 살피시고 처리하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주-D001] 읍궁암비(泣弓巖碑) : 읍궁암은 화양구곡(華陽九曲) 중 제3곡으로,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효종(1619~1659)이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승하한 것을 크게 슬퍼하여 새벽마다 한양을 향하여 활〔弓〕처럼 엎드려 통곡하였다’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읍궁암비는 읍궁암 입구에 세워져 있다.
[주-D002] 산수공(山水公)의 기문(記文) : 산수공은 영조(英祖) 때의 문신으로 호가 산수헌(山水軒)인 권진응(權震應)이다. 권진응은 읍궁암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三曲巖如泛壑船 / 삼곡의 바위는 골짜기에 떠있는 배와 같은데
貂裘泣血問何年 / 담비 갖옷 하사받고 피눈물 흘리기 몇 년인가
君民大計空遺廟 / 임금과 백성의 큰 계획 만동묘에 남아 있으니
社宇聲性聽可憐 / 만동묘에 통곡하는 소리 가련하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노재준 박해당 권민균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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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水齋先生文集卷之二十二 / 題跋 / 題刻泣弓巖詩後
此日知何日。孤衷上帝臨。侵晨痛哭後。抱膝更長吟。
先生嘗於孝廟諱日。曉起痛哭於巖上。仍吟一絶。後人號其巖曰泣弓。蓋取荊湖故事也。歲丁酉。方伯尹公憲柱謁廟訖。大書泣弓巖三字。刻石以示後。尙夏謹書先生絶句。仍略記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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泣弓巖(읍궁암) : 화양구곡의 제3곡에 있다. 운영담(雲影潭)의 남쪽이며, 시냇가에 있는 희고 둥글넓적한 바위이다. 《한수재집》 권22 〈읍궁암에 새긴 시의 뒤에 제함[題刻泣弓巖詩後]〉에서 이르기를, “선생께서 일찍이 효묘(孝廟)의 휘일(諱日)을 만나 새벽에 일어나서 바위 위에 올라가 통곡을 하고 인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읊었는데, 후인들이 그 바위를 읍궁(泣弓)이라 호칭하였으니 대체로 형호(荊湖)의 고사를 취한 것이다. 정유년에 방백(方伯) 윤헌주(尹憲柱)가 ‘읍궁암’ 세 글자를 대서(大書)하여 돌에 새겨 후인들이 보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형호(荊湖)의 고사는 임금의 죽음을 슬퍼함을 의미하는데, 형호는 형산(荊山) 아래의 정호(鼎湖)를 말한다. 황제(皇帝)가 여기서 솥을 주조하고는 용(龍)의 수염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황제의 활[弓]만 땅에 떨어지므로 신하들이 그 활을 안고 통곡을 했다는 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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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2권 / 시(詩)○오언 절구(五言絶句) / 5월 4일〔五月四日〕
이날이 무슨 날이던고 / 此日知何日
외로운 충정 상제께서 내려다보시리 / 孤衷上帝臨
새벽에 통곡하고 나서 / 侵晨痛哭後
무릎 안고 다시 길게 시 읊었노라 / 抱膝更長吟
[주-D001] 5월 4일 : 효종(孝宗)의 기일(忌日)이기 때문에 우암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홍기은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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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부록 제19권 / 기술잡록(記述雜錄) / 채지홍(蔡之洪)
화양(華陽)의 초당(草堂) 밑에 옛날 홍매(紅梅) 한 그루가 있어 매우 무성하였는데, 기사년 초에 우연히 말라 죽었다가 갑술년 봄에 다시 살아나 꽃과 잎이 예전과 같았다. 그리고 선생이 또 효종의 휘신(諱辰)에 일찍이 오언시(五言詩) 일절(一絶)을 지었으므로, 여러 선비들이 이를 빗돌에 새겨 읍궁암(泣弓巖) 선생이 매년 5월 4일인 효종의 휘신(諱辰)에 반드시 이 바위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곡을 하였기 때문에 읍궁(泣弓)이라 이름한 것이다. 위에 세워 놓았는데, 신축년에 갑자기 물에 떠내려갔다가 을사년에 나무꾼에 의해 모래 위에서 다시 찾게 되었으니, 이상한 일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창 (역) |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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硏經齋全集外集卷三十 / 尊攘類○華陽洞志 / 古蹟第五
泣弓巖碑。在冽泉齋之外。大老哭孝宗諱辰處也。刻詩一絶。
此日知何日。
孤衷上帝臨。
侵晨痛哭後。
抱膝更長吟。
門人權尙夏題其背曰。先生甞於孝廟諱日。曉起痛哭於巖上。仍吟一絶。後人號其巖曰泣弓。盖取荊湖故事也。歲丁酉。方伯尹公憲柱謁廟訖。大書泣弓巖三字。刻石以示後。尙夏謹書先生絶句。仍畧記之。
蔡之洪華陽洞異蹟說。人固靈於物。物亦有靈於人者。天所賦予之理。初豈豊於物而嗇於人哉。人爲欲所蔽。往往失其天而冥然無知覺。物則不蔽於欲。故其得於天而昭昭者自在。或能知氣化之盛衰。而發禎祥以示人。若是者不可謂不靈於人也。華陽之草堂下。舊有紅梅一樹甚盛。己巳初。無端枯死。至甲戌春。復生花葉依舊。先生又於孝廟諱辰。甞作五言詩一絶。多士刻石爲碑。植于泣弓巖 先生每年五月四日諱辰。必西望哭臨於此巖故名以泣弓。 之上。辛丑。忽漂沒水中。至乙巳。樵人得之沙上。可異也。彼頑然一樹石。顧何與於斯文之興廢。世道之翻覆。而其一枯一榮。一沈一出。若有所相關者何也。豈以天地之氣。人與物無間。故吉㐫消長之際。自不無相感者而然歟。抑大賢人屈伸榮辱。實陰陽否泰之一機會。故雖木石之無知者。亦隨而變動也耶。在物尙然。况最靈之人。不復知有先生者。禀何氣歟。噫。梅固歲寒姿也。其貞節異徵。可與孔廟之檜。幷傳於無窮。而後人看護不謹。根株今無存者惜也。且其碑之沈水。意若不偶然者。而不待深谷之爲陵。復出於地上者。又何意也。無乃荏苒之間。奄忽滄桑之變耶。未知自今以往。混沌世界。凡幾開而幾闔也。吾將從造化翁問之也。洞僧輩又言每當時事變嬗之時。洞中大松輒多萎黃者。余甞屢至而目擊之。其言果不誣。事亦可異。故並書此以爲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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硏經齋全集外集卷三十一 / 尊攘類○華陽洞志○詩文上○詩
泣弓巖碑
一片溪邊石。孤臣不盡哀。鬼神應感泣。天日尙昭回。
白鼠曾漂去。靑蛇復出來。斯文同顯晦。玆事亦奇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