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집(眉巖集) 유희춘(柳希春)생년1513년(중종 8)몰년1577년(선조 10)자인중(仁仲)호미암(眉巖), 연계(漣溪)본관선산(善山)시호문절(文節)특기사항최산두(崔山斗),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김인후(金麟厚)와 교유
眉巖先生集卷之五 /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 戊辰 皇明隆慶二年我宣廟二年
선조 | 1 | 1568 | 무진 | 隆慶 | 2 | 56 | 4월, 응교가 되다. ○ 朝講 후 탑전에 나아가 趙光祖의 推崇을 건의하다. ○ 外祖인 崔溥의 「錦南集」을 교정하다. |
十五日。太學儒生詣闕上疏。請趙光祖,李彦迪,金宏弼,鄭汝昌四先生文廟從享云云。上答曰。爾等以太學之士。游心道學。追慕眞儒。封上疏章。請以四賢從祀文廟。爾等趨向之正。亦可知矣。然一朝至於從祀。似爲重難。聖上嘉納善言。至矣。○副正白惟仲和云。公之名甚美。有是實故有是名云。
眉巖先生集卷之六 /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 戊辰下
선조 | 1 | 1568 | 무진 | 隆慶 | 2 | 56 | 4월, 응교가 되다. ○ 朝講 후 탑전에 나아가 趙光祖의 推崇을 건의하다. ○ 外祖인 崔溥의 「錦南集」을 교정하다. |
初四日。吏曹啓目。向前鄭夢周及深源。忠臣爲國亡身。金宏弼,鄭汝昌段。皆厲志聖賢之學。有功於斯文。趙光祖,李彦迪。相繼而起。講明斯道。學行如彼卓卓然。而其子孫有未及敍者。誠爲闕典是白昆。上項鄭夢周以下六人等奉祀子孫。乙巳。曾授職爲白在果。未授職人員乙良。依尹根壽進啓。量付西班軍職。以奉其祭。且世其祿。其中可用之人乙良。東西班職良中。隨才隨敍。以示國家褒賢勸忠之典爲乎矣。右良辭緣。移文兵曹啓依允。此誠百年公議定之美事。足以慰天人之心。而起後學之氣矣。
初一日。以議諸儒述作事。被右相招。詣光化門。俟開門而入。余與大司成奇大升,副提學盧守愼。特被選右相招。議東方之儒。余等以禹倬等十人爲對十大儒。卽禹倬,鄭夢周,吉再,金宗直,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金安國,徐敬德也。余草禹倬,吉再,趙大憲,金慕齋之學行。奇明彥草李晦齋,徐敬德。兩校理草金寒暄堂。盧君草鄭文忠。若金佔畢,鄭汝昌。則用輿地勝覽及前年所述。七月
眉巖先生集卷之七 /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 庚午 隆慶四年我宣廟四年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58 | ○ 安東에서 「續蒙求」를 인출하다. ○ 8월, 「六書附註」를 편차하다. ○ 9월, 신병으로 潭陽 집에 돌아가다. 「國朝儒先錄」 2책을 진상하다. ○ 11월, 諸葛亮, 司馬光, 陸贄, 朱子 등의 글을 모아 「獻芹錄」을 편차하여 올리다. |
二十四日。昨日館學儒生等伏闕上疏。乞崇獎賢儒。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從祀文廟。以爲明士趨養元氣之地。末云。國家自己卯斲喪之後。又經乙巳之禍。國是未定。士氣摧折。爲學尙懷於疑懼。檢身猶戒乎駭異。伏願殿下更加重道之誠。益隆崇儒之禮。許以四臣配享文廟。一以追報其功。一以勸勵斯世。則士林知有所宗。而學術皆出於正矣。上答此疏曰。今又特上疏章。復請從祀文廟。辭懇意正。三復歎賞。第以事甚莫大。豈可容易處之。前亦將此已諭其意。是以玆未副多士之望。今日。上又敎臣希春令捜訪金,鄭,趙三先生著述以進。上之好賢崇儒之誠。至矣。近世人主所未聞也。
初八日。朝以四賢文字校正入啓事。早與玉堂。仍爲一會。與李仲虎,申湛,宋應漑,柳成龍。同校四賢文字。多改誤處。未時。持詣承政院。見右副李忠綽。談說是文字。又見左承旨宋賀,左副俞泓。請承傳色入四賢文字冊。仍啓曰。金宏弼,鄭汝昌,趙光祖文字搜訪。而所得甚少。謹校正以入。此後若有所得。當隨入。 傳曰。四人文字收拾校正以入。至爲可嘉。隨後隨所得入納事。如啓。
眉巖先生集卷之八 /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 庚午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58 | ○ 安東에서 「續蒙求」를 인출하다. ○ 8월, 「六書附註」를 편차하다. ○ 9월, 신병으로 潭陽 집에 돌아가다. 「國朝儒先錄」 2책을 진상하다. ○ 11월, 諸葛亮, 司馬光, 陸贄, 朱子 등의 글을 모아 「獻芹錄」을 편차하여 올리다. |
初三日。李精來寫乞加土上疏。○李後白送鄭陽德所封上成宗御筆答辭參奉疏。乃汝昌公事也。希春覽後還送。○奇別書吏誤書希春進上司馬光稽古錄云。可笑甚訛。○黃海監司金啓製送公服來。知我無公服而救之也。
眉巖先生集卷之十 /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 癸酉 萬暦元年我宣廟七年
二十二日。聞館中諸生以二十六日上疏請四賢從祀。余以爲必鄭一蠧行狀呈于太常然後議諡。賜諡然後印儒先錄。御覽之詳然後從祀之請可申。不可欲速而無序。通簡于大司成具鳳齡。使諭止之。
眉巖先生集卷之十一 /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 甲戌 萬暦二年我宣廟八年
선조 | 7 | 1574 | 갑술 | 萬曆 | 2 | 62 | 1월, 승정원에 나아가 脾胃 조리법을 아뢰고, 食療單子를 써서 올리다. ○ 進講을 위해 「大學或問」을 교정하다. ○ 2월, 「新增類合」을 편차 교정하다. ○ 4월, 문무관 시험 출제에 참여하다. 金安國의 자손을 서용할 것을 주청하다. ○ 연석에서 「綱目」 인출을 아뢰다. |
二十四日。政院以昨日朝講。諸經筵官所建白事無發落。取稟。臣希春所啓校書著作趙憲質正官改差。使監校朱子語類。鄭汝昌儒先錄所載行狀。遣奉常寺議諡事。上特從之。其餘諸臣所啓。皆不施行。伏念微臣猥以無似。遇知聖主。凡所陳達。多蒙採施。誠千一之嘉會。奈衰老尫羸何。
二十三日。夕。今日朝報來。以余欲速見金堯選事故也。政院啓。經筵官所啓金宏弼鄭汝昌諡號。令校理一人。備東壁不足之員。弘文館南床。位雖不滿。三員擬望事。金安國子孫百執事可當之人除官事。山陵守護軍。盡數充定。竝依數給位田事。前朝各陵禁其樵牧事。魯山君墳墓。禁其樵牧修補事。竝無發落。取稟。傳曰。諡號事。爲玉堂則爲之。何必東壁而往乎。陵寢守護軍充給事。言于各該曹。金安國子孫相當職除授事。言于吏曹。弘文館南床位事。臨時爲之。上之從善至矣。如魯山君護墓事。最爲希世之義擧。尤爲嘆服。
眉巖先生集卷之十六 / 經筵日記 / 庚午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58 | ○ 安東에서 「續蒙求」를 인출하다. ○ 8월, 「六書附註」를 편차하다. ○ 9월, 신병으로 潭陽 집에 돌아가다. 「國朝儒先錄」 2책을 진상하다. ○ 11월, 諸葛亮, 司馬光, 陸贄, 朱子 등의 글을 모아 「獻芹錄」을 편차하여 올리다. |
五月初四日。午時入經筵。講孟子西子惡人章。臣曰。唐明皇開元初。勵政爲治。委任姚宋。而天下治安。及天寶。怠於政事。縱於奢慾。淫太眞。任林甫,國忠。寵祿山。以致傾覆天下。所謂西子蒙不潔者也。太甲初年。顚覆湯之典刑。及徂桐宮居憂。克終允德。漢武初年淸明。中間三十餘年。征伐四夷。治宮室求神仙。以多慾勞弊天下。戶口減半。盗賊蜂起。幾至於亡。至年六十八。晩而悔悟。付託得人。漢室乃安。此二主。所謂惡人齋戒沐浴。此人主所當戒之觀之者也。又曰。西子蒙不潔者。此猶望後至晦之月。初善而漸向不善者也。惡人齋戒沐浴。此猶朔日至望之月。始黑而漸向明白者也。天下之理。不進則退。人主之德業。惟審向背進退而已。又講智者行其所無事云云。見別錄。別錄軼不傳 又講天之高也。星辰之遠也一段。上問以晝夜相環推之。此人世。亦有窮盡之時乎。以邵康節元會運世之說推之。天開於子會。地闢於丑會。人生於寅會。至戌會亥會。則人消物盡。又復混沌五六萬年。然後又開闢云。修撰柳成龍曰。大槩世道漸下。末俗不如古。上曰。此說不然。若如此言。秦在漢前。秦之風俗。遠不及漢。何也。希春曰。誠如聖諭。若以人之壽夭之類論之。則秦漢以下。固不及三代以上。若人心世道。在君上挽回之如何。是以。自唐至五季。壞亂極矣。而宋德隆盛。治敎休明。聖賢輩出。風俗一變。雖漢亦不及焉。觀於此。益可知矣。閩地自五代爲元惡之窟。司馬光對神宗亦曰。閩人狡險。及朱子出。而人心風俗。翕然丕變。至爲鄒魯禮樂之鄕。尤可見矣。上以爲然。講畢。希春進陳曰。
頃承命探訪金宏弼,鄭汝昌,趙光祖等製述。金宏弼疏則李忠綽得之。其他文每人之作。臣各得數首。蓋此人等。皆遭士禍。故所著散亡零落。今所得至小。臣於卷末。添錄行實行狀等。此事如何。上曰。如此甚好。又希春講天下之理。莫非自然。順而循之。則爲大智曰。凡人主擧大事。必廣收庭議。以順人心。宋理宗追崇周敦頤,程顥,程頤,張載。以及於朱子贈爵與諡。從祀孔子廟庭。其後。又以卲雍,司馬光從祀。又其後。以張栻,呂祖謙從祀。蓋宋以九大儒從祀。人不以爲多。唐之時。惟韓愈而人不以爲少。蓋惟人心公論之從而已。又進曰。金宏弼等所作雖小。記其行實雖略。自上觀此。亦可知其有德有學。興起斯文之功矣。是時。儒生請四賢從祀。而人或以爲過多。故希春云然。
十五日。未時。入夕講。至大學或問物格知至章。講義在別錄。講畢。進榻前陳曰。頃承命略探金宏弼,鄭汝昌,趙光祖文字及事實行狀。進入矣。但此四人文字事實。私處固難盡得而見。請御賢畢後還降。臣略載李彦迪文。正書更入。自上命印出頒賜公卿大夫。則人皆知四人之實。又此錄之名。伏乞賜之。上良久乃曰。更添印出。則誠好矣。冊名則玉堂爲之可也。臣拜而退。
眉巖先生集卷之十七 / 經筵日記 / 甲戌
선조 | 7 | 1574 | 갑술 | 萬曆 | 2 | 62 | 1월, 승정원에 나아가 脾胃 조리법을 아뢰고, 食療單子를 써서 올리다. ○ 進講을 위해 「大學或問」을 교정하다. ○ 2월, 「新增類合」을 편차 교정하다. ○ 4월, 문무관 시험 출제에 참여하다. 金安國의 자손을 서용할 것을 주청하다. ○ 연석에서 「綱目」 인출을 아뢰다. |
又陳儒先錄久欲印進。而以金宏弼,鄭汝昌贈諡。然後幷錄爲計。金宏弼行狀則已呈於該司。獨鄭汝昌子弟一門。無能具行狀以呈者。其實汝昌之行狀事實。已具於儒先錄。乞命該曹考儒先錄而爲之。不勝幸甚。又陳朱子大全。臣方躬自校。語類前日所看。當錄紙頭則已 缺缺 矣。著作趙憲。盡心看詳。詳密莫甚。今差不緊質正官。趙憲年少。可以退遣於明年。請量其緩急而遞差。何如。右尹尹根壽啓曰。徐敬德雖學主於數。然其德義立言。高出常儒。只贈佐郞。請更隆贈。希春曰。敬德學術主數。若邵康節,蔡元定之於程朱。故李滉論其不的。然道德踐履則有之矣。說畢退。
又啓曰。金宏弼,鄭汝昌之謚。久未能成者。以玉堂東壁眞提學,典翰,應敎,副應敎中二人往參。而東壁二員。頃年常患未充。或不久而遞。若變通則校理一員。往充東壁之數。何妨。上曰。議諡。但取其公論之如何耳。東壁西壁。何足拘也。臣又曰。玉堂南行位。乃取學問名望之最優者。所錄不多。而今必備三望。是錄三人而用一 a034_481d人於南行也。自中廟,明廟朝。凡南床位之望。不必備三望。只二員亦爲之。乞命疏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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眉巖先生集卷之七 /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 庚午 隆慶四年我宣廟四年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58 | ○ 安東에서 「續蒙求」를 인출하다. ○ 8월, 「六書附註」를 편차하다. ○ 9월, 신병으로 潭陽 집에 돌아가다. 「國朝儒先錄」 2책을 진상하다. ○ 11월, 諸葛亮, 司馬光, 陸贄, 朱子 등의 글을 모아 「獻芹錄」을 편차하여 올리다. |
二十四日。聞都承旨李公後白以爲東國儒先錄。東國不若國朝。此說有理。余從之。又聞咸鏡監司送人上來。修書于文川郡守趙容。令搜送文正公銘箴之類。
眉巖先生集卷之十六 / 經筵日記 / 庚午
二十一日。申時。希春進講或問傳之首章。因曰。氣稟太剛者。失之剛而不能明德。氣稟太柔者。失之柔而不能明德。聲色貨利之慾蔽之。則不能明之。又曰。資稟高邁之君。於聲色貨利之慾。固超然矣。然或以英氣太過。於臨下聽言之際。不能寬弘。此大病也。伏願省察焉。臣又言及氣以成形而理亦附焉。上曰。然則所謂有是理而後有是氣者。何也。臣對曰。未生人物之前。先有是理。及生人物。則理附於氣。蓋有形氣。然後此理有掛搭處。講畢。進陳前日金宏弼等文字。伏請自上錫名。上敎令玉堂議定。臣與同僚議之。則東國儒先錄。庶乎其可。此名何如。上曰。好矣。臣又曰。四人名下。先列行狀事實。次錄其人文字。一依伊洛淵源錄之例。上又曰。此亦好好。臣等退後。傳敎曰。今後限日候淸涼。晝講退行于申時可也。六月初十日。夕講。希春與承旨宋賀,特進官李澤,南應雲修撰尹卓然同入。講或問傳三章仁或流於姑息。敬或墮於阿諛。孝或諂父而慈或悖子。且其爲信。亦未必不爲尾生,白公之爲也。因論仁固主於慈祥生育。然除害去惡之刑。不可不用也。敬固主於鞠躬盡禮。然責難陳善之誠。不可不盡也。孝而從親之令。使親得罪於鄕黨州閭。是爲陷父。慈而不知敎戒。使其長惡於放僻奢侈。則是謂誖子。復言重諾。固與人交之信。若至於義當變通。不能爲貞而不諒。則是爲尾生,白公之信。又梁武帝恩勝於威。紀綱不立。因以姑息敗亂。其子江陵王繹。以父過於柔懦。遂謂暴無傷。促亡於數歲之內。蓋恩威寬猛。要在不偏耳。講畢。臣進陳曰。小臣自頃日伸冤誅姦之言論箚疏之起。嘗一侍晝講。以臣乙巳年正言坐罪。丁未年竄濟州,鍾城。故不能無避嫌之心。不敢陳達其時之事。今則公論。比下文字。闕漏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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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유선록(東國儒先錄) : 나중에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으로 책명이 바뀌었다. 유희춘이 1570년(선조4)에 편찬한 것으로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의 행적을 담았으며, 5권 4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은 이후백(李後白)이 썼다. 권1은 김굉필, 권2는 정여창, 권3은 조광조, 권4ㆍ5는 이언적 편으로 이들의 글과 유사(遺事) 등을 모은 것이다. 김굉필 편은 《경현록(景賢錄)》에서 뽑았으며, 정여창과 조광조는 견문을 수집하고 〈경연일기〉 등에서 뽑았다. 이언적 편은 《회재집(晦齋集)》에서 뽑았다. 당시 홍문관 부제학이던 유희춘이 선조의 어명으로 편찬한 것이다. 선조 즉위년 이후 사림 정권 성립을 계기로 기묘사화에 희생된 사람들을 신원하는 운동이 여러 방면에서 일어났는데, 이 책도 그런 사업의 하나였다. 내용도 군왕의 도리ㆍ지치(至治)ㆍ도학 정치에 관한 상소나 글들이 많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