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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예수께서 앞장 서서 가셨다. 제자들은 놀랐고, 뒤따라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곁에 불러 놓으시고,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일러주시기 시작하셨다.
33.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 줄 것이다.
34. 그리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뒤에 살아날 것이다."(막10:32-34)
32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now on the road going up to Jerusalem. Jesus was going ahead of the disciples, who were filled with alarm; the people who followed behind were afraid. Once again Jesus took the twelve disciples aside and spoke of the things that were going to happen to him. 33 “Listen,” he told them, “we are going up to Jerusalem where the Son of Man will be handed over to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They will condemn him to death and then hand him over to the Gentiles, 34 who will make fun of him, spit on him, whip him, and kill him; but three days later he will rise to life.”
미국에서 우리나라의 발전을 실감했습니다.
대형 마트의 입구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한국산 가전제품이었습니다.
길거리를 가다가도 삼성 LG 상품을 담았던 상자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많은 한국 차가 미국 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K 팝을 즐깁니다.
먼 과거가 아닙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나라를 후진국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친척 어르신은 암치료를 거부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손자 손녀들이 대학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병원비로 돈을 다 써버리면 손자 손녀가 학교를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실은 그런 희생을 통해 이런 발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미래의 후손에 대한 소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런 발전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죽어도 사는 그 나라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들이 누릴 영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죽을 죄인 아닌가요?
죽을 죄인이 영생을 누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주제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같은 주제를 세 번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그 세 번째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해한다면 실은 기독교를 다 이해한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때 그들은 부활의 소식을 듣고 함께 모여서 기도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12명의 제자가 모조리 바다에서 배 타고 물고기 잡고 있었습니다.
“너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
너는 무덤에 가서 확인을 했다면서?
물고기는 왜 이렇게 한 마리도 잡히지 않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예수님께서 같은 장소에서 이 말씀을 세 번 반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이 도대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장미꽃 100송이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일까?
헌금 많이 하는 것일까?
주님은 이 세 번의 반복을 통해 바로 그 사랑을 이르신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믿음
여러분은 지금 교회에 있습니다.
집에서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며 누워 계실 수도 있습니다.
김밥을 싸 가지고 바닷가로 놀러 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에 나오는 수고를 하신 것입니다.
무슨 목적으로 이런 수고를 하신 것입니까?
교회 교우들과 친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서 교회에 온 것입니다.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왔듯이 예수께서 3년의 공생애를 보내셨는데 그 공생애의 목적이 있습니다.
과연 그 예수님의 공생애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공생애가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마귀가 예수님께 나타났습니다.
물론 마귀는 예수님의 목적을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마4:3)
인류는 태어나자마자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야했습니다.
제 먹을거리 것을 챙기기 위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기아로 죽어갔습니다.
그런 세상에 대고 굴러다니는 돌을 집어서 떡을 만들어보세요.
두 번째 마귀는 이 요구를 했습니다.
6.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마4:6)
지금은 고래 사냥이 금지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고래 한 마리가 잡혀 오는 밤이면 포항은 밤새 슬피 우는 고래의 울음소리를 들었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미 고래의 죽음을 두고 우는 새끼 고래의 울음 혹은 새끼의 죽음을 두고 우는 어미 고래의 울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의 존재들에게 영적 호기심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 중에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 자신도 그 문제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이 죽음의 문제는 창조자가 우리에게 주신 과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영적 세상에 대한 입증은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마귀는 성전 위에 예수님을 세우고 거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습니다.
그를 통해서 영적 실재를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해 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입증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미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목적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주님이 사람을 구하실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제안은 예수님께서 돌로 떡을 만드는 일로 10분
또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10분
딱 20분을 투자하셔서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에게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칠판 위에 “예수=그리스도”라고 쓰고 그것을 암기시키실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 고백을 받기 위해 3년을 제자들과 함께 사셨던 것입니다.
그 3년이 지나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을 몰아내시고 병자를 치료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시고.......
그를 통해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제자들이 이 예수님의 계시를 잘 읽어 냈을까?
수학 공식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을 잘 푸는 사람이 있고 못 푸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바로 그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이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보장합니다.
물론 이 고백은 그리스도와 삶의 공유를 통한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서 기적을 과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교회를 두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가르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목사인 나의 행위를 보면서 교회를 회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를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목사가 삶의 현장에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3년의 삶을 제자들과 공유하심으로 그들의 입에서 그리스도 신앙 고백을 끌어내셨던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로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지체없이 말씀하셨습니다.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16:21)
사랑
살다 보면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자신에게 질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삶이 고통스러운 경우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런 일이 없으셨습니다.
28.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마20:28)
주님은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저함이 없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떡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당장 필요를 채워주심으로 그리스도를 입증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성전 위에서 뛰어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간증처럼 그런 종교적 기적을 통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방식으로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수용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우리 육신의 눈에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회초리질에 피흘리고 그 분을 몸을 십자가에 못이 박혔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죽임을 당하심으로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참한 죽음은 이런 의미에서 승리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덴의 금단의 열매가 온 인류를 죽이고 남을 맹독성을 가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로 인류가 죽게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에덴의 아담과 이브 이래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장소가 십자가였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신 것을 두고 우리는 승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불손종으로 사람에게 죽음이 왔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죽을 죄인들이 영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2.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속죄제물이 되셨으니, 우리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그렇게 되셨습니다.(요일2:2)
그렇게 주님의 승리는 죽음의 절대 세력이 그 힘을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15:55)
주님은 그 승리를 소망하시면서 그 고난의 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던 것입니다.
32.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예수께서 앞장 서서 가셨다.
32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now on the road going up to Jerusalem. Jesus was going ahead of the disciples,
그 예수살렘 길은 주님만이 걸으셨던 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장서시고 또한 제자들이 그 뒤를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8:34)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32. 제자들은 놀랐고, 뒤따라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였다.
32 who were filled with alarm; the people who followed behind were afraid.
결국 제자들은 그들이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누가 제 삶이 아닌 죽음이 기다리는 장소를 향해 길을 가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택하는 반대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제자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누명을 씌울 때에 너희는 복이 있다.(눅6:20-22)
그들은 이 땅에서 가난한 것 굶주린 것 슬피 우는 것 그리고 사람들의 미음을 받고 배척당하고 욕을 듣고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을 복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헌재의 고통이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보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불편과 고통인 것입니다.
주님은 세 번에 걸쳐서 말씀하심으로써 이 일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섭리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32. 예수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곁에 불러 놓으시고,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일러주시기 시작하셨다.
32 Once again Jesus took the twelve disciples aside and spoke of the things that were going to happen to him.
이 길이 얼마나 중요한가!
예루살렘을 향하는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
예수님께서는 떨고 있는 12인에게 다시 주의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12 명의 제자들에게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일”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닥칠 일은 우리가 누릴 영생을 이릅니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사53:4)
이 일은 우리 죄인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탕자는 아주 개판으로 살았습니다. 제 상속을 챙기더니 먼 나라로 갔습니다.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았으니 이제 꼼짝없이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더 이상 돼지 사료를 훔쳐먹으며 살 수 없어서 집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는 자신을 목욕시키고 먹이고 새 옷 입히고.......
자신의 행위에 근거했다면 아버지는 자신을 쫓아내셔야 했습니다.
그는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자비를 누린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닦칠 일을 주목해야하는데 그 예수님의 당하신 일이 곧 나의 영생을 이르기 때문입니다.
32.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일러주시기 시작하셨다.
32 spoke of the things that were going to happen to him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일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주님이 로마 군인에게 잡혀서 십자가에서 KO 패를 당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죽인 장소가 로마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장소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칼과 창을 든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성경이 들려있었던 것입니다.
33.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33 “Listen,” he told them, “we are going up to Jerusalem where the Son of Man will be handed over to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그들이 가장 신뢰했던 도시가 그를 배반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나 양이나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3. 소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자는 사람을 쳐죽이는 자와 같다. 양을 잡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는 개의 목을 부러뜨리는 자와 같다. 부어 드리는 제물을 바치는 자는 돼지의 피를 바치는 자와 같다. 분향을 드리는 자는 우상을 찬미하는 자와 같다. "이러한 제사장들은 나의 뜻을 묻지 않고 제 뜻대로 한 자들이다. 오히려 가증한 우상숭배를 즐겼다. 가증한 우상들을 진정으로 좋아하였다.(사66:3)
그런데 소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살인한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양의 희생이 개의 목뼈를 부러뜨린 것입니다.
부어 드리는 제사가 돼지의 피를 바치는 일입니다.
분향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백성을 속이는 말을 한 사람들은 제사장이었습니다.
특별히 성전을 두고 거룩하다고 강조하는 것이 거짓말이었습니다.
4. '이것이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렘7:4)
부흥회에서 아멘 할레루야를 외쳤던 간증 안에 천국은 없었던 것입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2,23)
하지만 엉뚱한 사람이 정말 엉뚱한 장소에서 그리스도를 제대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한 로마의 백부장은 전혀 다른 장소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읽어 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였습니다.
신음과 피비린내 나는 곳이었습니다.
39.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막15:39)
34. 그리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34 who will make fun of him, spit on him, whip him, and kill him;
주님은 그 물리적인 육체 고통에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뺨을 때렸습니다.
소망
주님은 그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못 박히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로마 병정은 창을 들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렸습니다.
죽음이란 무엇도 소망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망은 바로 이 죽음의 장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소망할 수 있는 것을 소망한다면 그것을 두고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소망을 둘 수 없는 장소에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바로 그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죽음의 장소에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소망을 두어야 할 주소지를 분명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처절한 죽음 뒤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