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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同床異夢)에서 동상동몽(同床同夢)으로
2013년 12월 15일 오후예배 / 행 1:6-11
고사성어 가운데 ‘동상이몽(同床異夢)’ 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중국 남송(南宋) 때의 학자인 진량(陳亮)이 한 말입니다. ‘한 침상에서 자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각기 딴생각을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시작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로 ‘적과의 동침’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분명히 서로 적대적인 관계인데, 전략적으로 자기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함께하는 것을 말합니다. 적과의 동침 역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이 두 표현은 긍정의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같은 침상에서 같은 생각, 같은 말, 같은 꿈을 꾸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직후의 모습일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을 다시 타락하기 전으로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현재 나와 너의 관계를 우리로 바꿀 수는 있으며 또 그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마 18:19-20 / 내가 또 진정으로 말한다. 만일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 위에서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육의 것을 추구하며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모습에서는 다툼과 분열이 있었지만 성령 안에서는 순교까지 각오하며 서로 돕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과 17장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이지만(요 15: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요 17:11 이제 나는 세상을 떠나 이들을 뒤에 두고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친히 이들을 돌보아주소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돌보셔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같이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하시고).
▶ 서로 다른 생각과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은 서로의 목표가 다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라고 하는 분들에게도 동상이몽이 너무 많습니다. 겉으로 교회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기에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 2:2-5 /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지 말고 남에게도 눈을 돌려 그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5)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으십시오.
문제는 사람들과의 동상이몽보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다른 것이 큰일입니다. 예를 든다면 예수님과 당시의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가장 좋은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과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일치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며,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여전히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동상이몽의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의 동상이몽을 벗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1. 같은 뜻을 품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 함께 있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꿈을 꾸는 것일까요? 동상이몽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서로의 기대와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동거동락을 할지라도 지향하는 목표가 다르면 다른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뜻과 제자들이 기대하는 목표가 달랐습니다.
4-5절에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던 어느 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보내실 성령을 기다려라. 내가 말해 온 대로 너희가 전에는 요한에게 물로 침례를 받았지만 이제 곧 성령으로 침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예수님께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행 1:6 /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7-8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행 1:7-8 / 그때가 언제인가는 아버지께서 정해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은 동문서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대와 사도라고 불릴 제자들의 기대 사이에 차이가 아직도 있음을 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상시에도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 것”(마 6:33)을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관심은 아직도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관심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아래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정도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로마 황제의 힘과 권력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부활하신 전능하신 예수님을 압제당하고 고통 받는 민족을 해방 시켜줄 메시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려는 것조차도 모르고 로마의 정치적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제자들이 로마로부터 감옥에 갇혀 있던 상황은 아닙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국민으로서 국가와 국민들을 염려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로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동상이몽의 상태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이런 엄청난 관점의 차이가 발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서로의 초점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뜻에 함께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안경을 쓰는 이유는 눈과 사물 사이의 초점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경의 목적은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영적 나라의 회복인 반면에 제자들의 초점은 조국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도 초점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딴소리를 하면 얼마나 낭패스런 일입니까?
제자들이 초점을 맞추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 일은 어느 정도 이미 예견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에 맞아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막 10:32-34).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고 요청합니다.
막 10:37 / 저희는 주께서 영광받으실 때 주님 다음의 자리에 앉게 되기를 원합니다. 한 명은 주님의 오른편에 한 명은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순간이 바로 정치적인 메시야로서의 승리의 자리라고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적어도 우리들이 지난 삼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주님을 모셨는데 적어도 국무총리나 장관 자리는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권력의 청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청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 너희가 내가 마셔야 할 쓴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의 침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며 이해하지 못하는 아리송한 대답(동문서답)을 하십니다. 그런데도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들은 예수님의 뜻도 모른 체 “물론이지요. 저희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장담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한심한 모습이 계속 나옵니다.
열 명의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권력을 청탁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를 냅니다.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도 여전히 예수님과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막 10:42-45 /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의 왕이나 지위가 높은 자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큰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44) 그리고 너희 중에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주려고 온 것이다.”
제자들의 관심은 세상의 힘과 권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유익을 얻으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생명까지 포기하는 결단을 하셨는데, 여전히 제자들의 생각은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동상이몽인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나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봅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2012년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가운데 기독교인의 신앙생활 이유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38.8%,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31.6%, 건강, 재물, 성공 등 축복을 받기 위해서 18.5% 였습니다. 약 90% 정도가 자기중심적인 이유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나의 이기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자기만족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마음의 평안을 얻고,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 것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선을 넘어야 합니다.
▶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해야 합니다.
롬 12:2 /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새로워져서 딴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방법이 실제로 얼마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여러분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이나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 마시는 것과 같은 현세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불의가 사라지고, 하늘의 평화가 넘쳐나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 신앙생활의 좌표(座標, 어떤 위치나 점의 자리를 나타내는 데에 표준이 되는 표. ② 사물이 처해 있는 위치나 형편의 비유)를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나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지요? 동상이몽의 자리에 있다면 속히 하나님의 뜻 앞에 내 모든 이기적인 모습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에서 동상동몽(同床同夢)으로 다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하나로 일치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성령의 능력을 받자.
동상이몽에서 벗어나려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약속은 받았지만 아직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동상이몽을 하게 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수학문제의 정답을 아는 것과 문제를 푸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 뒤에 있는 답안지를 보고 답을 아는 것은 실제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문제를 붙잡고 씨름을 해서 문제를 풀어야 답을 아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약속을 받고(일반적인 약속과 개인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다름), 성령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성령의 능력이나 권능을 받는 것은 별개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내가 받아야 성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입지 못하면 언제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들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갈 5:16-17 /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르십시오.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어디로 가야 할지, 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 살면 여러분은 육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17) 우리는 성령께서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로 악한 일 하기를 좋아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 살며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본성의 욕망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두 힘은 서로 우리를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양쪽 틈에 끼여서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은 언제나 대적합니다. 육체의 생각을 따라가면 결국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둡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따라가면 영생을 거둡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따라 사는 길만이 육체의 욕심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다른 어떤 노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충만함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을 물리칠 수 있고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승패는 성령충만함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기 전의 베드로처럼 계집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할 것인지? 아니면 성령의 권능을 받은 후의 베드로처럼 강하고 담대하려는지?
막 14:70-72/ 베드로는 다시 이를 부인하였다.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니 예수와 한패인 게 틀림없소.” 하고 말하자 71) 베드로는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만난 적도 없소. 내 말이 거짓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소.”라고 맹세까지 하였다.
행 4:19-20 /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마치 하나님께 복종하기보다는 당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듯이 말하는군요! 20)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과 말씀을 보고 들은 대로 말할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성령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의 비결은 간단합니다. 먼저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렘 29:13-14 / 너희는 지금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이제 너희가 나만을 찾는다면 내가 직접 너희 앞에 나타나겠다.
잠 8:17 /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현대어 성경 / 나를 가슴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나의 사랑을 받으며 덕을 입지. 그런 사람만을 사랑한단 말이지. 나를 못보고는 견디지 못하여 새벽같이 일어나 내게 찾아오는 사람만 나를 만나 깨달음을 얻지.)
눅 11:9-13 / 기도도 이와 같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아버지된 사람으로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느냐? 12) 아들이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초대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 약속하신 성령님을 받기 위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행 1:14). 성령님의 역사는 혼자 기도할 때도 임하지만 공동체 전체가 한 마음으로 함께 간절히 기도할 때 역사합니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합니다. 결국 우리들이 성령충만함을 사모하며 간구하며 성결함으로 나아갈 때 불같은 성령, 바람같은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령충만하지 않고 예수 믿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에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에서 여기서 권능은 바로 ‘뒤나미스’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dynamite가 나왔습니다. 다이너마이트는 작지만 불이 붙으면 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것 같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하늘의 능력, 영적인 능력입니다.
슥 4:6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죄를 물리치고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빛 가운데 걸어가게 합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사역하면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새롭게 변화합니다.
엘리야의 제단에 임했던 성령의 불이 임하면 우상의 세력이 떠납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850대 1의 싸움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임하면 우상의 세력은 파괴됩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도 역시 성령의 능력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봉사하면 금방 지쳐버립니다. 금방 싫증이 나고, 인간의 방법이 앞섭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하면 끝까지 달려갑니다. 바울처럼 목숨까지도 던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날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성결된 마음으로 항상 깨어서 간절히 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거할 때 우리는 세상의 욕심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향해 달려가자.
성령의 사람은 비전의 사람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보며 살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아직 동상이몽인 이유는 바로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지만 아직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동상이몽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승천을 보면서 망연자실한 모습입니다. 그때 흰 옷 입은 두 사람, 천사가 그들 곁에 서서 말씀합니다.
행 1:10-11 / 그들이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나타나서 11) 말하였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여기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러나 훗날 그분은 올라가시던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여기서 ‘갈릴리 사람들아’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멸시와 천대를 받던 갈릴리 출신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 무식하고, 천대받던 그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땅 끝이 어딘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그런데도 ‘갈릴리 사람들아’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낮은 곳에 있는 자들, 버림받고, 천대받는 자들... 그러면서도 곧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는 자들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에 인간적인 아쉬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때 주의 천사들을 통하여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있느냐” 책망하십니다. 이제는 현실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언제나 거기에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변화산에서 영광의 주님을 본 베드로가 초막을 짓고 싶어 했듯이 말입니다.
교회가 은혜가 충만하고, 평안하고, 가족같은 분위기가 되면 그 상태로 머물고 싶어합니다.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컵 속에 있는 개구리와 같습니다. 온도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한 개구리가 컵 속의 물이 뜨거워지는 줄도 모르고 즐기다가 결국 죽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현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비전을 품고 달려가야 합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환상과 꿈을 꾸며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좋은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땅 끝으로 보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이 가야할 땅 끝은 바로 불신 영혼들이 있는 그곳입니다. 가정일 수도 있고, 일터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업장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 종족일 수도 있습니다. ■ 스위스 제네바 태생의 앙리 뒤낭(Jean Henry Dunant 1828~1910)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유명한 은행장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황제인 나폴레옹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최고의 황제이기 때문이고, 다른 이유는 불란서와 경제협력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야망을 품고 파리에 왔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전쟁터로 떠난 뒤였습니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황제를 만나기 위해 전쟁터로 따라갔습니다. 마침 프랑스 군대와 오스트리아 군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생명의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의사를 도와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황제를 만나 개인의 야망을 채우겠다는 꿈은 사라졌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꿈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 평화에 대한 꿈입니다. “이 세상에서 전쟁은 없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부상당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해야 하겠다.” 이 새로운 꿈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몇 명의 친구와 함께 평화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바로 빨간 십자가 상징을 가진 국제적십자입니다. 이 적십자사는 세계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앙리 뒤낭은 첫 번째 노벨 평화상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그는 개인의 야망은 접었지만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는 거룩한 열망의 꿈을 이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가슴에 품고 있는 꿈은 무엇인지요?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꿈을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충만함으로 채우십시오. 그리고 하늘 비전을 품고 달려가십시오. 바로 여러분을 통하여 땅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비록 갈릴리 사람 같은 존재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열망을 품고, 믿음으로 도전할 때 주의 뜻이 이뤄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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