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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太史) 당고(唐皐)가 강을 건넌 지 사흘이 되어도 지은 시를 내놓지 않더니, 정주(定州)에 이르러 영훈루(迎薰樓)에 올라서 김태복(金太僕)의 시에 차운(次韻)한,
구름 산 천리에 바다가 멀고 아득한데 / 雲山千里海茫茫
머리를 북두성 자루에 돌리니 달이 일양이로다 / 回首璇杓月一陽
아름다운 글귀를 우연히 다락 위에 와서 보는구나 / 佳句偶來樓上見
나그네 회포는 다만 객지에서 슬퍼한다 / 旅懷祗向客邊傷
용이 나니 조서가 있어 고려에 내리고 / 龍飛有詔頒高麗
봉이 갔으니 어떤 사람이 초 나라 광자를 탄식할꼬 / 鳳去何人歎楚狂
영훈루에 기대어 옛 경치를 슬퍼하니 / 徒倚迎薰悲舊景
새 줄이 근심과 함께 길어지는 것을 그릇 의심하였노라 / 誤疑新線共愁長
라는 시를 밤 중이 되어서 내보였다. 용재(容齋)가 그때 원접사(遠接使)가 되고, 퇴휴(退休)ㆍ호음(湖陰)ㆍ안분(安分) 세 공이 종사(從事)가 되었는데, 용재가 여러 종사를 불러서 그 격(格)과 율(律)의 높고 낮음을 물었다. 호음이 두어 번 읽고 말하기를, “원숙(圓熟)하고 풍부하니 공의 강한 적수이다.” 하니, 용재가 말하기를, “격률(格律)은 알 수 없다.” 하였다. 안분도 호음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고 잘못된 부분을 상당히 지적하였다. 퇴휴가 늦게 다시 말하기를, “호음의 말이 옳다. 참으로 노련한 솜씨이다.” 하니, 용재가 말하기를, “
고려(高麗)의 여(麗) 자는 본래 평성(平聲)인데 높은 글자로 만들어 썼으니 잘못이다.” 하였다. 호음이 말하기를, “처음에 산고수려(山高水麗)로 나라 이름을 삼았으니, 이것이야 해될 것이 있는가. 중국 사람이 성률(聲律)에 정통하니 어찌 착오가 있겠는가.” 하니, 용재가 말이 없었다. 그 뒤에 연로(沿路)에서 지은 것이 매우 많은데, 총수령(葱秀嶺)에 이르러 오언장편(五言長篇)을 지었다. 용재가 화답하게 되었는데, 탄복해 마지 않으며 호음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신선의 재주이다. 자네의 지난번 말이 과연 옳다.” 하였다.
당태사(唐太史)가 올 적에 호음(湖陰) 등이 통역관으로 하여금 글씨 쓰는 자에게 청하여 시고(詩稿)를 보여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4편(篇)을 써서 보여주었는데, 그 곽산(郭山)의 효녀(孝女) 시에 이르기를,
곽산 효녀의 효도가 어떠한가 / 郭山孝女孝如何
손가락을 잘라 죽을 끓여 어머니 병을 치료하였다 / 斷指炊麋療母痾
입에 들어가매 한 술이 병을 낫게 하였으니 / 入口一匙令疾愈
팔뚝을 세 번 꺾은 양의도 공을 양보함이 많도다 / 折肱三度讓功多
풍성은 예전부터 번왕이 수립하였다고 말을 들었고 / 風聲舊說藩王樹
상압은 영광스럽게 조사를 따라 간다 / 霜押榮隨詔使過
말을 운흥에 쉬게 하며 한갓 감개할 뿐이고 / 歇馬雲興徒感慨
쇠잔한 비갈을 거듭 만질 수가 없구나 / 末由殘碣爲重摩
하였다. 기생을 물리친 시에는 말하기를,
신선 조서를 새로 바닷가를 따라 반포하니 / 仙詔新徒海上頒
조용히 제기에 예로 행하는 자리로다 / 從容樽俎禮筳間
귀로 봉황 곡조를 들으니 한갓 감회를 더하고 / 耳聞鳳曲徒增感
마음은 용의 수염에 간절하나 거머잡을 수 없구나 / 心切龍髯未就攀
푸른 물은 바람을 시켜 곡조를 끌게 하지 말라 / 靑水莫敎風引調
끊어진 구름은 마땅히 달과 함께 산으로 돌아가리라 / 斷雲宜與月歸山
꽃다운 술잔으로 조금 서쪽에서 온 뜻을 다할 뿐이니 / 芳樽少盡西來意
어찌 기생들로 하여금 웃는 얼굴을 짓게 하랴 / 肯使桃花笑面顔
하였다. 안흥(安興)에서 눈을 만난 시에 이르기를,
들에는 굶주려도 먹을 것이 없고 긴 바람만 불고 / 野無飢啄只長風
숲에는 늘어진 가지에 잎이 져서 앙상하다 / 林有樛枝脫苦空
아마도 천지 사이에 언 가루가 내림이라 / 應是兩間霏凍屑
짐짓 육화(六花 눈송이를 뜻한다)를 시켜 봄일을 문채낸다 / 故敎六出絢春工
삼한의 수면은 분보다 희고 / 三韓水面勻於粉
산두는 하룻밤에 할아비같이 늙었다 / 一夜山頭老似翁
당경이 참으로 쓸쓸한 것이 우습다 / 却笑唐庚眞落莫
다만 시과를 가져다 주머니 속에 부친다 / 只將詩課付中中
하였다. 그 석문령(石門嶺) 시에는 이르기를,
백 사람이 일제히 말로 지껄이니 / 百人齊力語□嘈
아마도 똑같은 소리로 고개가 높다는 것을 경계함이리라 / 應是同聲戒嶺高
끄는 군졸이 어찌 미는 군졸보다 용감하랴 / 挽卒豈於推卒勇
산에 내려가는 것이 도리어 산에 오르는 노고와 같다 / 下山還比上山勞
이리 저리 달려도 두 발은 여전히 한가하다 / 驅馳尙自閑雙足
지고 이는 것이 어찌 반백이 된 사람을 지치게 하랴 / 負戴寧當病二毛
저물녘에 신안에 이르러 처음 객관에 드니 / 薄暮新安初就館
이 마음 병에 걸려 정히 근심스럽도다 / 此心懸疚正㣼㣼
하였다. 이 네 편은 당태사가 모두 내어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황화집(皇華集)》 속에 실려 있지 않으니, 필시 그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사(詔使)가 동국에 와서 그 작품을 함부로 보여주지 않음이 이와 같다.
곽산군(郭山郡)에 효녀 김사월(金四月)이 있는데, 나이 열아홉에 어머니가 미친 병에 걸려 1년이 지나도 낫지 않아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 김사월은 산 사람의 뼈가 병을 고칠 수 있단 말을 듣고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서 약을 만들어 먹였더니 병이 곧 나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문려(聞閭)를 정표(旌表)하고 조세(租稅)와 부역을 면제하고, 또 짧은 돌을 세워 효녀 사월의 마을이라고 새겼다. 모든 중국 사신으로 내왕하는 자가 모두 시를 지어 찬미하였다. 근년에 군수가 그 정문(旌門)을 고쳐 전보다 조금 크게 하고 그 새긴 돌을 없애버렸다. 만일 중국의 길가에 이런 일이 있다면 표창하고 드러내는 방법이 반드시 장대하고 또 장대할 것이다. 지금 다만 정문 하나만 세우고 비(碑)에 기록한 것도 없으니, 중국 사람들이 어찌 우리 나라를 절의를 숭상한다고 하겠는가. 태사 당고(唐皐)가 이곳을 지나다가 시를 짓기를,
사신의 수레가 왕래하다 해가 저물어 / 使軺來往値殘年
자취를 운흥에서 찾으매 마음이 섭섭하다 / 訪跡雲興思惘然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는 일이 거칠어지고 기업이 고쳐졌으니 / 蠲復事荒基業改
집안 사람이 어찌 다시 부전의 세금을 피할 수 있으랴 / 家人那更避夫廛
하였으니, 그 뜻은 세월이 오래되고 일이 황폐해져서 다만 도설(棹楔)만 새롭게 하여 그 자손이 면제를 받지 못하는 것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슬퍼하고 탄식하는 뜻을 붙인 것이다. 또 동규봉(董圭峯)의 시에,
쇠잔한 비갈을 다시 만질 길이 없다 / 未由殘碣爲重摩
하였으니, 지금 짧은 돌마저 없어졌으니 뒤에 조사(詔使)가 찾는 일이 있다면 어떻다 하겠는가.
당태사가 전송하는 여러 군자를 머물러 작별하는 시를 짓고 그 끝에 발문(跋文)을 쓰기를, “내가 안산(鞍山)에서 자는데 추관(秋官) 방사도(方思道)가 시어(侍御) 양윤성(楊允成)을 그리워하며 벽에 쓴 시를 보고, 인하여 입으로 한 율시를 지어서 사군(史君)에게 말하였더니, 사군도 한 율시로 화답하였다. 뒤에 방사도와 양윤성을 요동성에서 만나 각각 창화(唱和)한 것을 내어 서로 보이고 다투어 서로 화답하여 수십 편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모아서 책을 만들고, 《사집(槎集)》이라고 이름하였다.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압록강에 이르러 변방 서울에 있는 여러 군자 및 이참찬(李叅贊) 제군과 작별한 것이 생각나 또한 전에 지은 운자(韻字 정두(飣餖))를 달아서 두 율시를 지어 아울러 번경(藩京)의 여러 군자에게 부친다. 내가 생각하건대 번경에도 《사집》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용재(容齋) 이공(李公)과 소퇴휴(蘇退休)ㆍ정호음(鄭湖陰)ㆍ이안분(李安分)이 연도(沿道)에서 중국 사신과 주고받은 시가 많았는데, 사신이 돌아간 뒤에 편찬하여 한 권을 만들고 이름을 《동사집(東槎集)》이라 하였으니, 그 뜻이 태사에게서 근본한 것이다.
정공(鄭公) 자당(子堂)이 일찍이 제사 집사관(執事官)으로 선릉(宣陵)에 있으면서 시를 지어 연산군(燕山君)을 조롱하기를,
입을 모아 근심하는 백성들은 활활 타오르는 화로 속 같은데 / 嗷嗷赤子熾爐中
취하고 부유한 수황은 도리어 귀를 막은 것 같다 / 醉當隋皇反似聾
표범이 종묘에 들어와도 소식은 감감하고 / 伐豹入宗聞邈邈
우레가 대궐을 흔들어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 丁雷掀殿視矇矇
혜성이 을년 여름에 보였으니 하늘이 더욱 노하였고 / 彗星乙夏天愈怒
흙 눈이 신년 겨울에 내렸으니 변괴가 가장 흉악하다 / 土雪辛冬變最凶
혼전에는 오랫동안 향화의 심지가 차갑고 / 魂殿久寒香火炷
묘정에는 전렵의 발자취가 얽혀 있도다 / 廟庭交錯獵畋蹤
3천의 준마는 찾아내어 마굿간에 가득하고 / 三千駿馬揷盈廐
1만 창기는 뽑아서 궁에 들였도다 / 一萬娼兒選入宮
대비는 정히 개구리 끓듯 하는 것을 꺼리고 / 母妃正忌催蛙沸
선릉 빈전 초상의 슬픔에 사슴을 쏘는 것과 같았다 / 宣殯初哀射鹿同
두 명의 빈을 칼로 죽였으니 고혈이 풀에 적시고 / 兩嬪刃身膏潤草
여섯 훈신의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렸다 / 六勳刑骨碎飄風
오만한 전교는 성인의 사당을 헐어 치웠고 / 慢敎撤虛師聖宇
짧은 표석은 사민의 풍속을 허물어뜨렸다 / 短表殘毁士民風
간사한 영웅들이 입술과 이처럼 도와주니 웃는 칼이 늠름하였고 / 姦雄唇脣齒笑刀凛
충효 있는 사람의 심간은 원한의 피가 붉었다 / 忠孝心肝怨血紅
공업은 이미 서한의 곽광에게 돌아가고 / 功業已歸西漢霍
귀신과 사람은 모두 진양의 용을 그리워한다 / 神人咸屬晉陽龍
새벽에 옛 대궐을 떠나니 근심스러운 얼굴이 참담하였고 / 曉離舊闕愁容慘
밤에 교동 나루터를 건너니 놀란 물결이 흉흉하였다 / 夜渡喬津駭浪洶
거리의 아이들은 춤을 추며 다투어 꾸짖고 조롱하니 / 街童鼓舞爭譏刺
지독한 병이 마침내 눈동자가 머는 것 같았다 / 惡疾終酬眇目瞳
가시로 성을 쌓아 드물게 해를 보니 / 疊棘置城稀見日
머리를 숙이고 만지고 찍고 울며 동인에 임하였다 / 低頭捫斫泣臨銅
10년을 임금 노릇하는 동안에 남 모르는 부끄러움이 많으니 / 十載御朝多隱愧
무슨 얼굴로 지하에 가서 성종을 뵈올꼬 / 何諺地下拜成宗
하였다. 또 절구(絶句)를 짓기를,
14운의 시를 쓰고 울며 / 題詩十四韻
옛 능단에 호소한다 / 泣訴古陵壇
황령이 만일 감림함이 있다면 / 皇靈如有鑑
응당 한 치 만한 심간에 비추리라 / 應照寸心肝
하였다. 상고하건대, 정공(鄭公)의 시가 외어 전하는 데서 나왔는데, 때때로 율격에 어긋나는 점이 있고, 또 대구를 한 것이 혹 정밀하고 절실하지는 못하나, 연산의 일을 갖추어 실었으므로 기록한다.
가정 갑오년에 정호음(鄭湖陰)이 동지(冬至) 하례사(賀禮使)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꿈에 상서(尙書) 하공(夏公)을 만나 시를 짓기를,
황가의 인물은 의관의 연수인데 / 皇家人物衣冠藪
뿔이 하나인 상서로운 기린은 네 가지 영물의 으뜸이다 / 一角祥麟冠四靈
왕희지ㆍ왕헌지의 필법은 독보로 추앙하고 / 義獻筆鋒推獨對
반고ㆍ양웅의 문장은 높은 이름을 날리었다 / 班楊賦手擅高名
남조에 예대한 것은 시론에 의한 것이요 / 南曹庀禮歸時論
궁보에 은혜를 받는 것은 북극성에 간절하였다 / 宮保承恩切極星
황곡과 흙 벌레가 스스로 차별이 있음을 아나 / 黃鵠壤虫知自別
혼으로 사귄 것을 오히려 분명히 볼 수 있다 / 魂交猶得覩分明
하였는데, 공의 《조천일록(朝天日錄)》 속에 실려 있다. 뒤에 오용진(吳龍津)이 공에게 편지를 부치기를, “《조천일록》이 간행되거든 한 부나 두세 부를 은밀히 통사(通事)를 시켜 보내 주기 바란다. 하계주(夏桂洲) 각로(閣老)가 호음(湖陰) 같은 어진 재상의 꿈에 나타났다는 시를 대단히 기뻐하여 한 부를 보고 싶어 한다.” 하였다. 이는 오용진이 사신으로 왔을 때에 공의 《조천일록》에 서문을 썼기 때문에 꿈에 하공(夏公)을 보았다는 시를 보고 계주(桂洲)에게 말한 것이다. 공운강(龔雲岡)이 정호음과 주고받은 시가 많고, 서로 대단히 좋아하였는데, 호음의 《조천일록》에 서문을 쓰기를, “내가 그 시집을 보니 침착(沈着)하고 충담(沖淡)하여 화려하고 곱게 치장하는 말을 쓰지 않았으니, 당 나라 사람의 남긴 뜻을 볼 수 있었다.” 하였다. 조정에 돌아간 뒤에 자기가 지은 무이도가(武夷櫂歌)와 기행시(紀行詩) 도합 40수를 부쳐 오고, 오용진도 기행시 10수를 부쳤는데, 모두 종이를 붙여 화답을 요구하였다. 그때 호음이 벼슬을 그만두고 영남 시골 집에 있었는데, 중종이 특별히 차운(次韻)을 명하여 역마를 달려 바치게 하여 경사(京使)에 조회하는 사신에게 주어 공운강과 오용진 두 사람에게 부쳤다 한다. 오용진이 또 편지를 부쳐 자기 부친의 경수시(慶壽詩)를 청구하고 또 말하기를, “가군(家君)이 지난해 70세였는데, 지금 한 자급(資級)에 올려졌고, 전에 태의원사(太醫院使)를 지냈으며, 가형(家兄)은 갑오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근자에 성상의 은혜를 받들어 생관(生官)으로 계급이 올랐으며, 가군은 정4품이다.” 하였다. 뒤에 본국 사신의 돌아옴을 인하여 여러 번 구하여 마지않으므로 호음이 율시 두 수를 지어 부치기를,
하늘이 이름난 집을 허여하여 덕을 부여하기를 온전히 하였는데 / 天與名家賦德全
몸에 모인 여러 복 중에 나이가 가정 먼저이다 / 萃身諸福齒居先
신령한 춘나무는 홀로 풍상속에서 왕성하고 / 靈椿獨旺風霜裏
붉은 계수나무는 연하여 우로 가에 퍼졌도다 / 丹桂聯敷雨露邊
북쪽 사립문에 은고가 내렸으니 예전 법전에 의한 것이요 / 恩誥北扉推舊典
남극에 수성이 빛났으니 새 별 자리가 움직이도다 / 壽星南極動新躔
성한 일이 노래와 읊음에 돌아감을 알겠도다 / 定知盛事歸歌詠
권축이 지금 몇 편이나 장대해졌는고 / 卷軸于今侈幾篇
일찍 가만히 공을 쌓은 팔뚝 뒤의 방문이 / 早積陰功肘後方
과연 상서와 경사를 모아 백미가 어질도다 / 果鐘祥慶白眉良
소장으로 항쟁하여 이미 맑은 조정의 청문을 용동시켰고 / 抗章已聳淸朝聽
조서를 받들어서 먼 곳 사람의 바램에 응부하였도다 / 擎詔還孚遠俗望
쾌하게 붕과 기린이 맞이하는 수고를 다하는 것을 보았고 / 快覩鳳麟傾迓勞
넉넉히 편집을 머물려 향기를 뿌렸도다 / 賸留篇什播芬芳
□당에 올라서 헌수하는 술잔을 드릴 길이 없도다 / 缺無路升堂薦壽觴
하였다. 중국 사신이 돌아간 뒤에 반접(伴接) 재상에게 편지를 보내 시를 써 주기를 구한 것은 예전에 없는 일이다.
공운강이 호음과 함께 조용히 술을 마시며 진정을 토로하여 마치 오래 사귄 친구 이상과 같았다. 그러므로 문자의 의심나는 것과 중국 조정의 전고(典故)에 대하여 호음이 질문한 것이 많았다. 하루는 옛사람이 말한 한십팔(韓十八)의 뜻을 물으니, 공운강이 써서 답하기를, “한십팔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형제들의 차서이다. 지금 중국의 큰 문족(門族)의 형제 항렬이 많게는 수천에 이르고, 다음은 수백, 그 다음도 수십은 된다. 해가 같지 않고 달이 같지 않으며, 날이 같지 않고 시(時)가 같지 않게 출생한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만, 그 중에는 동월 동일에 출생한 자도 있고 동시에 출생한 자도 있으니 무엇으로 분변하겠는가. 이것으로 인하여 태어난 때의 선후를 가지고 형제간의 차서를 삼아서 형제의 장유(長幼)를 정하여 번갈아 차례를 정하면 조금도 틀리지 않아서 한 번 서로 모이는 사이에 연치(年齒)로 장유를 알 수 있다. 모두 하나에서 시작하여 혹 번갈아 천이나 백, 수십에 이르는데 모두 이것과 같다. 두시(杜詩)에 말한 고(高) 서른 다섯째, 허(許) 열한 째, 최(崔) 아홉째니 하는 것이 이것을 이름이다. 할아비는 할아비와 같은 항렬이 있고, 아비는 아비와 같은 항렬이 있으며, 아들은 아들 항렬의 연배가 있어서 서로 능멸하거나 범하지 못한다. 《중용(中庸)》에 말하기를, “잔치할 때에 모발의 색깔대로 차례하는 것은 연치를 서열하는 것이라 한 것도 이 뜻이다.” 하였다. 또 그 뒤에 발문을 쓰기를, “판서가 만일 묻는 것이 있으면 내가 일찍이 사실대로 고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으니, 사문(斯文)의 한 기운의 유아(儒雅)함을 볼 수 있다. 걸어가는 예가 나갈 때에는 문지방 동쪽으로 좌(左)를 삼고, 들어올 때에는 문지방 서쪽으로 좌를 삼았으니 자세히 보지 않을 수 없다.
공운강이 여방(厲房)을 먹기를 좋아하여 그것을 삶는 방법을 써서 호음에게 보이기를, “여방을 삶는 방법은 절대로 본래의 그 국물을 버려서는 안 된다. 만일 따로 물을 부으면 맛이 없어진다. 또 그 방법은 돼지 기름을 많이 써서 끓이고 여방을 그 속에 넣고 젓가락으로 저어서 익을 때 쯤 술이나 밀가루를 조금 섞는다. 비록 밀가루 탕(湯)이라도 그 방법은 물에 밀가루를 타되 너무 되게 하지는 않는다. 반드시 술을 써야 비린내가 없어지는데, 많아도 안 되고 적어도 안 된다. 적당한 양을 넣어야 먹을 수 있다. 바다 생선을 삶는 데는 모두 반드시 술을 써야 하니, 비록 조금이라도 좋다. 그래야 비린내를 없앨 수 있다. 모든 바다 생선은 남풍을 만나면 곧 썩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고 또 사람에게 해가 된다. 여방(厲房)을 삶는 데는 두어 가지 방법이 있는데, 앞에 말한 것이 묘법이고 이 밖에는 껍질채 끓여 먹는 방법이 있고, 껍질채 쪄 먹는 방법이 있으며 그 살만 발라서 밀가루와 섞어 먹는 방법이 있으니, 이것은 모두 바다의 상품(上品)이니 알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