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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섭리 안에서 드러나는 악 1
- 주님께서 악을 보여 주시는 방식과 그 깊이 /
자신의 악을 보는 것에도 여러 깊이가 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신다.
그리고 그 선이 사람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자라면,
그 빛 가운데 지금 다루어야 할 악을 드러내신다.
다시 말해, 주님은 항상
생명을 먼저 공급하시고 그 다음 치료를 시작하신다.
그런데 사람은 흔히 이 질서를 거꾸로 바꾸려 한다.
먼저 모든 악을 찾아내고, 그 다음 주님의 도움을 기다리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를 뒤집는 일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하려고 하면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이 생긴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깨닫게 되는 방식은 언제나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평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악이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갑자기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강한 양심의 가책이나 충격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반면 성경이나 신앙 서적을 읽다가
‘이런 악이 내 안에도 있구나..’ 하고 조용히 깨닫기도 한다.
또 특별한 감정도 없이
한 문장을 읽다가 자신의 모습을 잠시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견되는 악을
모두 똑같이 ‘주님께서 보여 주신 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순히 신앙 서적을 읽다가
어떤 악이 자기 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깨닫는 것과,
실제 삶에서 그 악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는 것은
같은 차원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주님께서 사람 안에 먼저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그 생명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악을 드러내신다고 한다면,
모든 악의 인식은 그에 앞서 반드시 먼저 주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영적 준비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말씀을 읽고 진리를 배우는 평범한 과정 자체도
주님께서 사람 안에 진리를 공급하시는 과정에 포함되며,
그 진리가 훗날 자신의 악을 실제로 바라보게 하는 빛으로 사용되는 것일까?
여기서 또 하나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의 악을 깨닫게 되는 강렬함의 정도가
반드시 그 영적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강렬한 충격을 통해 자신의 악을 깨닫지만,
어떤 사람은 아주 조용하고 평범한 깨달음 하나를 통해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따라서 ‘얼마나 강하게 느꼈는가?’만을 기준으로
주님께서 역사하신 정도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악이 어떤 경로로 발견되었느냐보다,
진리의 빛이 그 사람의 실제 삶을 어떤 식으로 비추고 있는가에 있다.
단순히 ‘이런 것이 악이다.’라고 아는 것과
‘이 악이 바로 내 안에서 이런 사랑과 목적을 가지고 작용하고 있었구나..’라고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는 것은 다르다.
또한 자신의 악을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진리를 따라 그 악에서 돌아서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발견한 모든 악이 주님께서 지금 거듭남을 위해
특별히 드러내신 악인가?’라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판단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책을 읽다가 스쳐 지나간 깨달음은 단지 지식일 뿐이므로
영적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오늘은 단순한 지식처럼 보였던 진리가
훗날 실제 삶에서 자신의 악을 비추는 빛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자신의 악을
한 번에 모두 알아보도록 요구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이미 주신 진리와 기억, 삶의 경험과 양심까지 사용하시면서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모습을 점차 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악이 드러나는 방식과 그 강렬함에는 여러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든 과정을 하나의 단순한 공식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악을 얼마나 강하게 느꼈는가가 아니다.
어떤 진리가 우리의 삶을 비추었을 때 그 진리를 단순한 지식으로 머물게 하는가,
아니면 그 빛을 따라 자신의 악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에서 돌아서려 하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이 주제를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어떤 깨달음은 아직 지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있고,
어떤 깨달음은 양심을 일깨우며 실제 삶을 비추기 시작할 수 있으며,
또 어떤 경우에는 실제 유혹과 실패를 통해
그 악이 자신의 의지와 사랑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까지 드러날 수 있다.
이처럼 악을 보는 데에도 여러 깊이가 있으며,
그 각각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
‘악을 알게 되는 모든 순간이
곧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해 그 악을 직접 드러내신 순간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지나치게 넓은 해석이 된다.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더 정확하게 적용하려면,
악을 ‘아는 것’과 악이 자신의 삶 안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자기 악을 여러 경로로 알게 된다.
성경을 읽다가 문득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고,
신앙 서적을 읽다가 ‘이것이 내 안에도 있구나..’ 하고 깨달을 수도 있다.
설교나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알 수도 있고,
실제 사건이나 유혹을 겪으면서 강하게 자기 악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동일한 영적 의미’로 볼 수는 없다.
가장 먼저 지식으로 악을 아는 단계가 있다.
예를 들어 ‘자기사랑은 악이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다’,
‘질투는 잘못된 사랑이다’라는 것을 서적 등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사람은 자기 안에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그 악이 자기 삶의 실제적인 사랑(애정)과
결합되어 있는 방식까지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중요한 원리는
사람이 자신의 생명의 사랑을 이해력의 빛 가운데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DP 281항에서 사람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생명의 사랑이 이해력의 빛 가운데 나타나야 자신의 악을 알고
그것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책을 읽다가 ‘나도 이런 면이 있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귀중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이미 거듭남의 치료 과정에서
주님께서 그 악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셨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단계가 더 깊어진다.
어떤 진리를 읽었을 때 단순히 ‘그렇구나..’ 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자신의 실제 삶과 연결되기 시작할 수 있다.
‘아, 내가 저 사람을 싫어했던 이유가
단순히 그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무시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구나.’
‘나는 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구나.’
이렇게 되면 단순한 지식이 자기 삶을 비추는 진리로 바뀐다.
진리가 자기 안의 사랑과 결합된 부분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악’에 훨씬 가까운 상태다.
그리고 더 깊은 경우에는 실제 상황에서 그 악이 강하게 솟아오른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유난히 분노가 일어나고,
어떤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질투가 올라오며,
이미 잘못이라고 알고 있는 행동을 또 하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이때는 단순히 ‘분노와 질투라는 악이
존재한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악이 지금 나의 의지와 생각과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강렬함의 정도 측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어떤 때는 책을 읽으며 지나가듯 깨닫는다.
어떤 때는 ‘이것도 나에게 있구나..’ 하는 작은 찔림이 있다.
어떤 때는 과거의 행동을 돌아보다가
자신의 동기를 발견하고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또 어떤 때는 실제 유혹이 일어나는 순간 자기 안의 악한 사랑이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가장 강한 경우에는 충격에 가까운 깨달음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충격의 강도’가 주님께서 역사하신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강하게 느껴졌다고 반드시 더 깊은 거듭남의 작업이라는 뜻도 아니고,
아무런 감정적 충격이 없었다고 단순한 지식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기준은 ‘그 진리가 나의 실제 삶을 비추고 있는가,
그리고 그 빛 앞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책을 읽다가
‘자기사랑이 악이다.’라는 사실을 알고 별다른 감정이 없을 수 있다.
그런데 몇 달 뒤 실제 사건을 겪으면서 그 말이 자기 안에서 살아난다.
그때 그는 ‘전에 읽었던 그 말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러면 처음의 독서는 단순한 지식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진리가 나중에 사용될 수 있도록 기억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그 순간 반드시 사람에게 ‘이것이 네 악이다.’라고
직접적인 내적 음성을 들려주실 필요가 없다.
이미 말씀과 신앙교육을 통해 사람에게 주어진 진리가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적절한 상황에서 그것이 다시 떠오르고 서로 연결되면서
자기 삶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악을 보여 주셨다는 것은
반드시 특별한 영적 체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삶 속에서 이미 알고 있던 진리가 갑자기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게 만드는 경우가 매우 중요하다.
- 질서의 ‘먼저’와 인간이 경험하는 ‘먼저’
<주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신다.
그리고 그 선이 사람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자라면,
그 빛 가운데 지금 다루어야 할 악을 드러내신다.
다시 말해, 주님은 항상
생명을 먼저 공급하시고 그 다음 치료를 시작하신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주님께서 먼저 생명을 공급하시고 그 다음 악을 보여 주신다.’는 문장을
너무 기계적인 시간 순서로 이해하면 안 된다.
즉, 주님께서 먼저 ‘선을 일정량 공급하시고 그 다음 악 하나를 보여 주시고
그 다음 악을 제거하시고 다시 선을 공급하신다.’라는 식의
획일적인 과정으로 말할 수는 없다.
주님의 섭리는 그렇게 단순한 순차적인 작업이 아니다.
그보다는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면서 동시에 악을 드러내시고,
악이 드러나는 가운데 다시 선과 진리를 더 깊게 받아들이게 하시는
상호적인 과정에 가깝게 역사하신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하다.
‘주님께서 먼저 생명을 공급하시고 그 다음 악을 보여 주신다.’는 말을 대할 때,
우리는 ‘먼저’라는 말을 쉽게 시간적인 선후로 받아들인다.
마치 주님께서 어느 정도의 선과 진리를 먼저 사람 안에 넣어 주신 다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악을 보여 주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먼저’는 반드시 시간적으로 먼저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거듭남의 질서에서 무엇이 다른 무엇의 근거가 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여러 가르침을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하다.
어떤 것이 질서 상 먼저라고 해서
반드시 우리의 ‘의식’이나 ‘경험’에서 그것이 먼저 일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악이 먼저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자신의 악을 깨닫기도 하고,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비로소 자신 안에 있던 악이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악을 악으로 알아보고 그것을 진리 앞에서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사람 안에 그 악을 비출 수 있는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이 먼저이고 악의 드러남이 그 다음이다.’라는 말은
인간의 경험에서 반드시 생명이 먼저 느껴지고
그 다음 악이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악을 알아보고 거부할 수 있게 하는 선과 진리가
그 악을 드러내는 근거로서 먼저 존재한다는 뜻이다.
악이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 악을 비추는 진리와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선이 함께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주님의 섭리를
하나의 단순한 시간표처럼 이해할 필요도 없어진다.
‘먼저 선을 주시고, 그 다음 악 하나를 보여 주시고, 그것을 제거한 뒤
다시 선을 주신다.’라는 식으로
거듭남의 과정을 일정한 순서로 나누어 놓을 수는 없다.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면서 그 빛 가운데 악을 드러내시고,
사람이 그 악을 진리 앞에서 인정하고 거부하는 과정에서
다시 더 깊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구별해야 할 것은
‘질서상의 우선성’과 ‘경험상 또는 시간상의 우선성’이다.
질서상으로는 선과 진리가 악을 알아보고 거부하게 하는 근거로 먼저이다.
그러나 경험상으로는 사람이 악을 먼저 발견한 것처럼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사건이나 말씀을 통해 악이 먼저 마음에 부딪힌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차이를 알게 되면 스베덴보리의 여러 가르침을 읽을 때 생기는
혼란도 상당 부분 줄어든다.
저서에서 ‘먼저’, ‘그 다음’, ‘원인’, ‘결과’라고 표현되는 것 가운데에는
실제 시간의 선후를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것이 다른 것의 근거가 되거나 그것 없이는 다른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영적 질서의 선후를 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으면
주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먼저 생명을 공급하시고 그 다음 악을 보여 주신다.’는 말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악을 보고 그것을 거부할 수 있도록
먼저 선과 진리의 생명을 마련하신다.
그리고 그 생명의 빛 가운데 지금 다루어야 할 악을 드러내신다.
다시 말해, 거듭남의 질서에서 악의 치료는
그 악을 먼저 찾아내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보고 거부할 수 있는 생명이 사람 안에 마련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사람은 흔히 이 질서를 거꾸로 바꾸려 한다.
먼저 자신의 모든 악을 찾아내고, 그것을 하나씩 분석하고 제거한 다음
주님의 도움을 기다리려 한다.
그러나 거듭남은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먼저 해부한 뒤
주님께 치료를 요청하는 과정이 아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 안에 마련해 주신 선과 진리의 생명으로
사람이 자신에게 드러난 악을 알아보고 그것을 거부하며,
그 과정에서 다시 더 깊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다만 여기서도 ‘주님께서 먼저 심으시고
그 다음 악을 보여 주신다.’를 시간적인 순서로 오해하지 않도록
앞에서 정리했던 원칙은 그대로 살아 있다.
여기서 ‘먼저’는 시간적으로 먼저라기보다
악을 알아보고 거부할 수 있게 하는 생명의 근거가
먼저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지 이번 주제에만 적용되는 구별이 아니다.
신앙의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질서상 먼저인 것을 시간상 먼저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눈에 보이는 사건들을
단순히 차례대로 배열하는 방식으로만 역사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이미 주신 것을 새로운 상황에서 사용하시고,
사람이 그동안 알고 있던 진리를 다시 불러내어 현재의 삶을 비추게 하시며,
그 빛을 통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순서만으로
주님의 섭리의 질서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같은 악이 한 번 드러났다고 해서
그것을 이제 완전히 다 알게 된 것도 아니다.
이미 주어진 진리가 더 깊어지고 삶의 경험과 결합할 때,
동일한 악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깊이에서 다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악에 대해서도 여러 번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나는 화를 잘 내는구나.’ 정도로 안다.
나중에는 ‘내가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 화가 나는구나.’를 안다.
더 나중에는 ‘무시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자기 사랑 때문이구나.’를 알게 된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내가 옳아야 한다는 욕망 자체가
다른 사람보다 나를 높이고 싶은 사랑과 연결되어 있었구나.’를 볼 수도 있다.
같은 악이지만 진리가 깊어질수록 그 악의 뿌리가 더 깊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악은
반드시 한 번의 강렬한 폭로가 아니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던 악이 새로운 진리의 빛 아래 점점 더 깊은 의미로
드러나는 것도 포함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다시 처음의 문구를 살펴보면,
그 의미를 조금 더 정확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는 먼저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어 주시고,
그 선과 진리가 자라 영혼을 지탱할 수 있게 되면
그 빛에 비추어 악을 드러내신다.>
이 문장은 거듭남의 기본적인 질서를 설명하는 데에는 매우 적절하다.
다만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사람이 어떤 악을 인식할 때마다 반드시 그 직전에 특별한 선과 진리가
새롭게 공급되어야 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기서 ‘먼저’는 시간적인 선후라기보다,
악을 알아보고 그것을 거부할 수 있게 하는 생명의 근거가
선과 진리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시고,
이미 주어진 진리가 이해와 삶 속에서 점점 깊어지게 하신다.
그리고 그 진리의 빛이 자라나는 만큼
사람은 자신의 악을 새로운 깊이에서 보게 된다.
그러므로 악이 드러나는 방식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말씀을 읽다가 작은 깨달음으로 자신의 악을 알아볼 수도 있고,
양심의 찔림을 통해 그것을 느낄 수도 있으며,
실제 유혹이나 실패를 겪는 가운데
비로소 자신 안에 있던 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이처럼 악이 마음에 나타나는 방식과 강도는 서로 다르다.
어떤 경우에는 강한 충격과 함께 자신의 악을 깨닫지만,
어떤 경우에는 별다른 감정 없이 지나간 듯한 작은 깨달음이
훗날 실제 삶의 상황에서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악을 얼마나 강하게 느꼈느냐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주어진 진리의 빛이
그 사람의 삶을 실제로 비추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 빛 앞에서 자신의 악을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그리할 때 아주 중요한 균형이 생긴다.
‘스쳐 지나가는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지식이 곧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해 드러내신 악이다.’
라고 과장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감정의 강도가 아니라 그 이후에 나타나는 변화다.
어떤 깨달음이 나에게 실제 삶을 돌아보게 하고,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게 하고,
그 악을 정당화하지 않게 하며, 주님의 진리를 따라 행동을 바꾸도록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선다.
반대로 책을 읽고 아주 강한 충격을 받았지만 며칠 지나 아무런 삶의 변화도 없고,
오히려 ‘나는 이런 깊은 악까지 발견했다.’는 자기분석의 만족만 남는다면,
그 강한 감정 자체를 거듭남의 증거라고 볼 수도 없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주님께서 악을 보여 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자기 영혼에 대한 더 뛰어난 분석가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그 악에서 돌아서게 하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질문은 ‘내가 내 안의 악을 얼마나 깊이 발견했는가?’가 아니라
‘내게 보여진 악 앞에서 나는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행동했는가?’가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앞서 계속 이야기했던 섭리 중심의 회개가 다시 연결된다.
사람은 자기 안을 최대한 정직하게 살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영혼 전체를 스스로 수색하여
모든 악을 찾아내야 한다는 의무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다.
오늘 진리가 비추어 준 곳에서는 피하지 말고 응답하되,
아직 보이지 않는 곳까지 자기 힘으로 억지로 파헤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기 성찰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섭리 안에서 제자리를 찾게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어둠을 한꺼번에 보여 주어 우리를 압도하시지 않고,
이미 주신 진리와 삶의 경험까지 사용하여
우리가 지금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씩 자신을 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 작은 깨달음 하나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도 말고,
반대로 그것을 계기로 영혼 전체를 뒤져야 한다는 부담에 빠지지도 말아야 한다.
오늘 주어진 빛에 충실한 것,
그것이 주님의 섭리에 응답하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 DP 281 연산
- 그러면 스베덴보리의 글에서 질서상의 선후와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상의 선후를 어떻게 구별해서 읽을 것인가.
스베덴보리의 저서를 읽다 보면 때때로 한 가지 미묘한 혼란을 만나게 된다.
어떤 것은 ‘먼저’이고 다른 것은 ‘그 다음’이라고 설명되는데,
실제 우리의 경험에서는 오히려 그 순서가 뒤집혀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서의 글을 읽을 때 질서상의 ‘먼저’와 경험상의 ‘먼저’를
구별해야할 필요에 대해 정리해보려 한다.
우리는 흔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그것을 경험하고, 그 다음에 생각하고,
마침내 그 원인을 이해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먼저’라는 말을 시간적인 선후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먼저’ 가운데에는
시간적으로 먼저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다른 것의 근거가 되고, 그것 없이는 다른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질서상의 먼저도 있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으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반대로 이 차이를 이해하면, 서로 모순되어 보이던 여러 가르침이 사실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같은 질서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분명한 예가 목적과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다.
스베덴보리는 목적, 원인, 결과를 서로 분리된 세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목적을 첫째 목적, 원인을 중간 목적, 결과를 마지막 목적이라고 부르며,
이 셋이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DLW 167항에서는
목적과 원인과 결과가 모든 것 안에 함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적이 먼저다’라는 말이
목적이라는 사건이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발생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적은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방향이라는 의미에서 먼저이다.
원인은 그 목적이 작용하는 중간 단계이고,
결과는 그 목적이 가장 바깥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을 사람의 삶에 적용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여 선을 행한다고 하자.
우리가 밖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먼저 행동이다.
그다음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게 되고, 더 깊이 들어가면
그 행동을 일으킨 사랑과 목적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질서에서는 그 반대 방향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랑이 목적이고, 그 사랑이 이해력 안에서 생각과 판단을 형성하며,
마침내 행동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시간상 가장 마지막에 나타난 행동이
오히려 영적 질서에서는 가장 바깥에 있는 결과인 것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서를 인간의 사랑과 이해와 행위에도 적용한다.
그는 사랑 또는 의지가 인간의 생명이며,
사랑이 이해력과 결합하여 생각과 행위로 나타나는 과정을 설명한다.
특히 사랑은 목적에, 지혜 또는 이해는 원인에,
행위(사용)는 결과에 상응한다는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볼 때도 한 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이 반드시 그 사람 안에서 가장 먼저 작용한 것은 아니다.
행동은 가장 바깥에 나타난 결과일 수 있고,
그 안에는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생각과 의도와 사랑이 있을 수 있다.
바로 이 원리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악을 보는 과정’에도 연결된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겪고 나서 갑자기 자신의 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경험적으로는 사건이 먼저이고 악의 발견이 그 다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악을 악이라고 알아볼 수 있게 한 진리가
이미 사람 안에 들어와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은 어떤 말씀을 읽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특별한 감동도 없었고,
그것이 자기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런데 훗날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그 말씀이 갑자기 자기 삶을 비추기 시작한다.
그때 인간의 경험에서는 사건이 먼저이고 진리의 깨달음이 나중이다.
그러나 질서의 관점에서는 그 사건을 통해 악을 알아볼 수 있게 한
진리의 빛이 이미 그보다 앞선 근거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가 먼저 심어지고 그 다음에 악을 본다.’는 말을
반드시 ‘먼저 진리를 읽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 악을 발견한다.’는
시간표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 진리가 악을 악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근거라는 뜻에서
먼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할 때 더욱 중요해진다.
우리의 삶에서는 많은 일이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를 따라 일어난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사건을 겪고,
그 결과로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는 존재한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자연적 원인이 있다는 사실이
섭리적 원인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연계의 모든 결과에 더 깊은 영적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더 깊은 곳에는 목적이 있다고 설명한다.
AC 5711항에서 그는 자연계의 모든 것이 결과이며,
그 결과의 원인은 영계에 있고,
그 원인의 목적은 더욱 깊은 곳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우연히 어떤 책을 읽었다고 느끼는 것과
그 일이 섭리 안에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은 반드시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우연히 이 책을 읽었다.’
이것은 경험의 차원에서는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는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주님께서는 내가 자유롭게 그 책을 읽는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훗날 나에게 필요한 진리를 기억 속에 마련하셨을 수도 있겠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원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인 과정 자체가
주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 점은 기도 응답을 이해할 때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기도하면 주님께서 직접 어떤 생각을 마음에 넣어 주시거나
특별한 느낌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기도한 뒤 조용히 기다리면서
‘주님께서 무슨 생각을 주실까?’ 하고 찾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응답이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말씀을 통해 배운 진리가 기억 속에 들어 있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현재의 상황에서 다시 사용하게 하실 수 있다.
사람은 그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비교하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고, 관련된 진리들을 서로 연결해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의미가
하나의 깨달음으로 떠오를 수 있다.
그때 인간에게는 ‘내가 생각해서 알게 되었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그 생각할 능력과 이해할 수 있는 진리와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말씀까지
모두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주님의 응답과 인간의 이해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이해하는 그 과정 자체가
섭리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자유의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유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DP 97항에서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면서
그 자유를 통해 사람을 악에서 멀어지게 하고 선을 심으신다고 설명한다.
그는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눈의 동공을 지키듯’ 보호하신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실제로 이런 경험이 있어야 한다.
‘내가 생각했다.’ ‘내가 판단했다.’ ‘내가 선택했다.’ ‘내가 악을 거부했다.’
만일 이것이 실제 경험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유도, 책임도, 거듭남도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에게 ‘내가 했다’고 경험되는 것이
곧 ‘내가 모든 것의 궁극적인 근원이다’라는 뜻은 아니다.
여기에서도 경험상의 주체성과 영적 근원성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와 능력과 생명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스스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는
인간의 행위를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데 있다.
DP 97항은 바로 이러한 자유의 보존과 주님의 인도를 함께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배제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경험에서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선택한다.’가 사실이고,
더 깊은 질서에서는 ‘그 자유와 능력을 주님께서 보존하시고
그 안에서 나를 인도하신다.’가 동시에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 어느 한쪽을 없애려고 하면
스베덴보리의 사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때로는 결과를 통해 원인과 목적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먼저 행동을 경험한다.
‘내가 왜 이렇게 화를 냈지?’
그다음 그 행동을 일으킨 생각을 살펴본다.
‘아, 내가 무시당했다고 느꼈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생각을 일으킨 사랑을 본다.
‘나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구나.’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사랑의 방향을 본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보면 처음에 보았던 화는 새로운 악이 아니었다.
이미 존재하던 사랑과 의지의 방향이
처음에는 행동이라는 가장 바깥의 결과로 나타났다가,
진리의 빛이 깊어짐에 따라 그 안에 있던 생각과 동기와 사랑이
점점 더 깊은 곳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같은 악을 여러 번 새롭게 보는 것’과도 연결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는 화를 잘 낸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는 ‘무시당하면 화가 난다.’고 알게 된다.
그 다음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본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인정받고 싶은 사랑 안에
다른 사람보다 나를 높이고 싶은 사랑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같은 악이 여러 번 드러난다는 것은
반드시 같은 악을 반복해서 발견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이미 있던 악의 생명과 구조가 더 깊은 진리의 빛 가운데
단계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수 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묶어 볼 수 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에서 ‘먼저’라는 말을 만났을 때
우리는 곧바로 시간표를 그리지 않는 것이 좋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이 먼저는 시간적으로 먼저라는 뜻인가,
아니면 이것이 다른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라는 뜻에서 먼저라는 것인가?’
‘원인’이라는 말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시간적으로 먼저 발생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이것이 다른 것을 발생시키는 더 깊은 근원이라는 뜻인가?’
이 질문 하나만 가지고도
스베덴보리의 저서를 읽는 방식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특히 ‘먼저’, ‘그 다음’, ‘원인’, ‘결과’, ‘근원’, ‘나타남’ 같은 표현을 만났을 때
그 말들이 모두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을 설명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것은 시간적 순서를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존재의 깊이와 인과의 질서를 말한다.
그리고 때로는 두 질서가 동시에 들어 있다.
인간의 경험에서는 사건이 먼저 일어나고 깨달음이 나중에 올 수 있다.
그러나 영적 질서에서는 그 깨달음을 가능하게 한 진리가
이미 그 사건보다 근원적으로 앞서 있을 수 있다.
인간의 경험에서는 내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영적 질서에서는
그 자유와 능력을 주님께서 보존하시고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
인간의 경험에서는 자연적 원인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더 깊은 질서에서는
그 자연적 과정 역시 섭리의 통로로 사용될 수 있다.
인간의 경험에서는 행동이 먼저 보인다. 그러나 영적 질서에서는
그 행동을 낳은 사랑과 목적이 더 깊은 근원으로 먼저 존재한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를 읽는 데 필요한
아주 중요한 독해 원리가 나온다.
경험의 순서와 영적 질서의 순서는 반드시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주님께서 먼저 선과 진리를 주시고
그 다음 악을 보여 주신다.’는 말도
지나치게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게 된다.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주신 뒤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악 하나를 보여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을 거부할 수 있게 하는 생명과 진리가
그 악을 보는 영적 근거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의 실제 경험에서는 악이 먼저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제야 과거에 배운 진리가 떠오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앞의 질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볼 수 있다.
‘내가 지금 비로소 발견한 것처럼 보이는 이 악을 알아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안에 진리의 빛을 마련해 두셨을 수도 있구나.’
이것이 섭리를 시간의 표면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거듭남에 관한 매우 중요한 신앙적 태도도 들어 있다.
사람은 모든 것을 미리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악을 억지로 찾아내려고
자신의 영혼을 끝없이 파헤칠 필요도 없다.
주님께서 이미 주신 진리와 현재의 삶을 충실히 대하면서,
지금 드러난 것을 진리의 빛 가운데 보고 그것에 응답하면 된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시간의 흐름 안에서 일하신다.
다만 그 섭리의 깊은 질서는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의 순서보다 더 깊다.
그래서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저서를 읽을 때도, 삶을 바라볼 때도,
기도에 응답을 구할 때도 한 가지 질문을 마음에 둘 필요가 있다.
‘지금 내가 먼저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질서 상 먼저인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그렇게 경험되었을 뿐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독해 기술을 넘어선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내가 먼저 보았다고 해서 그것이 가장 근원적인 것은 아니다.
내가 나중에 깨달았다고 해서 그 진리가 그때 처음 주어진 것도 아니다.
내가 우연히 만났다고 해서 섭리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했다고 해서
그 생각의 생명까지 나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악을 지금 처음 발견했다고 해서
그 악이 지금 처음 생긴 것도 아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눈에 보이는 시간의 표면보다
더 깊은 곳에서 질서 있게 역사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길에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질서를 자기 손으로 미리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주어진 진리를 받고, 지금 보이는 악을 진리의 빛 가운데 인정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선을 자유롭게 행하면서 그보다 깊은 것은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갈 때 사람은
자기 삶의 모든 원인을 알아야만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주님께서 더 깊은 질서를 가지고 일하고 계심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스스로 하는 것처럼 하되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과도 맞닿아 있다.
사람은 자기 자리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회개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깊은 곳에서 질서를 세우시고,
이미 주신 것을 적절한 때에 다시 사용하시며,
자연적인 사건과 인간의 생각과 자유로운 선택까지도
서로 연결하여 사람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억지로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사건을 자연적인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자연적인 질서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더 깊은 섭리의 질서를 함께 보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믿되 경험만을 절대화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를 사용하되
자신의 이해를 주님의 섭리보다 앞세우지 않게 된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우리가 이 구별을 배우는 가장 깊은 이유일 것이다.
주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이해하는 것보다 더 깊은 질서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읽고 우리가 신성한 섭리를 운용하시는
주님에 대해 마음 깊이 느껴야 하는 감동이 있다면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내가 이제야 깨달았다고 해서
주님께서 이제야 일하신 것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일 것이다.
내가 오늘 발견한 진리도, 오늘 드러난 악도, 오늘 떠오른 생각도,
오늘 만난 사람과 사건도 주님께서 오늘 처음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주님은 이미 내 안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시고,
내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보존하시면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때에 그것을 삶 가운데 연결해 주고 계셨을 수 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는
바로 이런 깊이에서 인간의 삶을 이끌어 간다. DP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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