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지금처럼 망가지기 훨씬 전의 디시 역겔입니다.
약 2004~2005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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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첨부한 그림들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을 묘사한 그림인 몽고습래회사 중 일부입니다.)
몽고습래회사를 보면서 생각한건데 말입니다...
여몽 연합군이 어쩌면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순히 그림만 가지고 파악하기는 그런데 바다를 건너와서 그런지 몽골군에서
기병의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군요;;(뒤에 잘렸으려나...)
대량으로 말 수송이 불가능했는지 고려사를 봐도 얼마나 말을 동원했는지는 알 수 없더라구요;;
<몽한군 25000 아군 8000 초공 인해 수수 6700과 전함 900여소로써 일본을 정벌하는데 일기도에 이르러 1000여급을 격살하고 길을 나누어 써 나아가니 왜인이 달아나매 시체가 삼대같이 쓸어졌다. 일모에 이르러 늦추어주었더니 마침 밤에 큰 풍우가 있어 전함이 암애에 부딪쳐 많히 파손되고 김신은 익사하였다>
만약 기병이 충분했더라도 태풍에 쓸려갔기는 했겠지만;;
(어쩌면 일찌감치 미즈키로 도망가던 일본군 추격해서 개관광 시키고 그날 밤 육지에서 편히 보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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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일본군이 조낸 잘싸웠다는 셔로쿠나 일뽜들에게...
일본군이 잘 싸우기는 개뿔이...
->세도우라에서 平景隆은 일족의 郎黨(낭당: 武家의 家臣) 100기를 이끌고 서쪽의 가쓰모토를 향해 출진했지만, 中途의 히츠메城(勝本町 新城) 앞에 이르면 연합군의 대부대와 조우하게 된다. 景隆은 古來의 戰場儀式(전장의식)에 따라 휘하의 1騎에 명해 鳴鏑(명적: 소리 내며 나는 화살)을 쏘아 開戰의 신호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몽골군은 古代의 開戰 의식 따위는 아예 무시했다. 그리고는 鍾과 징을 요란하게 치면서 자신의 家系와 이름·戰績 등을 길다랗게 외치며 뛰어나오는 이 日本 무사를 에워싸고 개 패듯 때려 죽여버렸다.
다음은 역시 일본 측 사료 「本土防衛戰史」에 기록된 하카타 방어전의 모습이다.
10월19일 이마쓰(今津) 해안에 상륙한 몽골군 支隊는 이마쓰의 監視隊를 밀어내고 포진, 그 일부가 다음날 하카타灣 중앙부인 모모치(百道) 해변에 상륙할 主力軍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東進하여, 모모치하마의 남방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했다. 그때 祖原지구의 방어를 책임진 것은 하라다(原田) 一族과 마쓰우라(松浦)黨이었는데, 몽골군의 集團戰法과 新兵器의 위력 앞에 무참히 패퇴했다
하카타 地區 前線사령관인 카게쓰케(景資)는 고려軍의 상륙작전을 보고 아카자카(赤坂)지구를 맡고 있던 菊池武房에 출격을 명했다. 그럴 때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하고 있던 몽골軍 부대가 고려軍의 상륙부대를 엄호하는 가운데 격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軍은 白道原을 완전히 확보하고 東進하여 현재 후쿠오카의 중심부인 鳥飼·別府·赤坂를 강습했다. 하카타의 이키노하마 앞바다로 침입한 몽골軍의 主力도 이키노하마와 하코자키(箱崎)에 상륙하여 少貳·大友·島津의 부대를 패퇴시켰다. 이로써 일본군 측의 하카타灣 해안방위선 30km가 모두 붕괴되었다.
<일기도에 이르러 1000여 명을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왜인이 퇴각 도주하였는데, 죽어 넘어진 시체가 삼대 쓰러진 것처럼 많았으며, 날이 저물 무렵에 포위를 해제하였다>-고려사
일본군 죄다 붕괴되고 19~20일 이틀만에 다자이후 최후 방어선인 미즈키까지 밀렸소.
다시 한 번 말해줘야 하오?
더욱이 일본군은 戰鬪作法(전투작법)은 아직도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1인의 무사가 앞으로 나서 敵陣에 鳴鏑(명적: 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신호용 화살) 한 발을 쏘아 開戰의 신호로 삼았다. 전투가 개시되면 피아 1騎씩 나서 『나로 말하면…』이라고 운을 떼면서 자기의 家門 및 이름·벼슬·戰績 등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1대1 대결을 통해 서로의 勇力을 뽐내었다.
그런 절차를 거친 후에야 弓矢(궁시)의 合戰이 벌어졌고, 최후로 돌격을 감행, 백병전으로 승패를 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전적 방식은 조직적인 集團密集隊形(집단밀집대형)으로써 징과 太鼓(태고)를 치면서 돌격해 오는 몽골군과의 戰法에 비해 현격하게 후진적인 것이어서 처음부터 승패가 뻔했다. 그것은 近世的 군대와 中世的 군대의 合戰이었다.
P.S
플레이트를 입은 기사들이 활을 쏘는게 얼마나 효과적입니까?
모 판타지 소설에선 잘 만들면 80%의 움직임까지 재현할 수 있다고 하덥니다만;;
그렇긴 해도 확실히 활 쏘는건 힘들어보이는데... 만약 쏜다면 정확도나 연사력이 어느 정도나 되나요?
캐터프랙터들은 활이 두 번째로 중요한 무기였다고도 합니다만;;;;
송태조조광윤 죄다 틀렸소. 무슨 무사간의 전투를 토너먼트처럼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했고, 활이 강궁임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무기와 방어구:일본편의 의심스러운 묘사를 그대로 베껴왔고, 일본의 도래와종(도라이와슈)말들의 체격과 체력 문제도 감안 안하고 단지 빨랐다 속도에서 안 뒤졌다 하는 소리를 하는구려. 하치만 구도오키(八萬愚童記)같은 일본 사서에서도 나와있지 않은 전투장면을 창조해내는 슷하급센스가 놀랍고,
송태조조광윤 1차원정당시 몽골군에게 당해 다자이후 방면으로 퇴각한 일본군이 대체 언제 몽골의 주력을 저지하고 기동성을 살려 후방 우회를 했는지 관련 사료도 좀 보고 싶고, 2차침공에서 관동무사는 도착해서 전선 지원과 공세 저지가 한 일의 거의 전부였는데 모든 사실이 창조적인 새나라의 어린이?
송태조조광윤 220.130.221.247// 군대의 주력은 몽골군은 별로 없었소. 2차 원정에서 대부분의 전투를 담당한 것은 고려군이 주축을 이루는 동로군이었고, 총 4만 5천밖에 안되었던데다가 실 전투병력은 2만 5천에 불과했소. 그러고도 쓰시마, 이키를 제압하고 시키노시마에서 압도적인 일본군 병력을 맞아 8일이나 분전하였소. 쓰시마와 잇키에 예비병을 잔류시켜 군세가 줄어든 상태에서의 전투였고 그나마 300여척의 전함을 나가토 방면으로 출동시킨 상황에서 벌어진 상황. 그조차도 일본군 함대의 전멸과 사령관 미치아리 중상, 미치토키등의 수뇌부 전멸로 끝났소.
송태조조광윤 300척의 함대는 또다시 2대로 나뉘어 도이가하마, 야츠가하마에 상륙을 개시하였는데 양측 병력은 3500, 2000에 불과하였소. 그런데도 도이가하마의 나가토 국군과 正上左京亮의 막부 직속군이 패전하여 고센가하라까지 패퇴했다가 관동에서 출격한 아다치 모리무네의 증원 병력을 얻고서야 겨우 저지에 성공하오. 2000명의 분견대도 야츠가하마의 淸山玄蕃丞가 이끄는 군세와 나가토 국군의 연합으로 저지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淸山玄蕃丞사망, 아쓰모 분지까지 퇴각하고 증원을 받아서야 겨우 저지에 성공하오.
송태조조광윤 동로군은 더이상의 전과 확대를 포기하는데 이유는 위에서도 적은 바와 같이 실 전투병력의 숫자가 적었고, 병력이 적어 계속된 점령전을 수행할 역량이 부족하였으며, 병력을 분산해도 재지무사들의 게릴라전에 소모만 늘어날 것을 염려하여 주력 본대인 강남군의 도착을 기다려 강력한 요새지대가 된 하카타만을 공략하기로 최종 결정했기 때문이오.
송태조조광윤 그리고 동로군의 병력을 재편성하고 강남군의 최종 지시를 받아 공격 계획이 확정되고 하카타만에 집결한 그날 밤 태풍이 불어와 모두 전멸한 것이오. 보급과 예비병을 상실한 다른 지역의 소규모 잔류병은 제각기 소탕당하고. 전체적인 면을 본다면 내용상으로나 무엇을 보나 일본군측이 낙제요.
송태조조광윤 겐페이 합전시 관서지방의 타이라군만 동원한 병력수가 10만을 넘었소. 그리고 동로군의 실제 병력수가 매우 적었소. 1차때는 그렇다치고 2차때에는 일본군이 하카타만에 요새지대를 축조하고 막부의 명에 따라 출진하지 않는 재지무사에게는 엄한 징벌을 선포하는 등 국가총동원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황이었소. 그런 상황에서 고작 2만 5천의 실전투병력만으로도 저정도 전과를 올린 것은 상당한 것이오. 결국 저지될 운명이었다면 고작 천단위의 고려군에게도 초기에 밀리던 사실은 내용상으로 일본의 패전이나 다름이 없소. 주력부대인 남송병을 주축으로 한 강남군은 6월 말에나 도착하게 되고 합류는 7월 초에나 하게 되는데 강남군만 총병력이 10만이었소. 2만 5천밖에 안되는 고려군에게도 상륙을 허용하고 증원을 받아서야 겨우
송태조조광윤 전선을 유지할수 있었다는 것도 일본군의 초기 대응에 문제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오.
송태조조광윤 또 1차침공에 대해서도 본햏이 썰을 푼다면, 일본군이 용감히 싸우기는 했어도 그 내용 면에서는 처절함을 금치 못했다는 사실또한 알수 있으실 것이오. 함선으로의 철수는 몽고사령관 홀돈의 명령에 의한 것이고 고려군장 金方慶는 야영후 결전을 주장하다 묵살 당했소.
송태조조광윤 만약에 10만 강남군과 연합하여 하카타만의 거점을 붕괴하고 다자이후를 점령한후 어찌될 것인가라는 가정에 대해서는 하늘도 모를 것이오. 다만 전투경과를 보면, 내용상 일본군의 패배나 다름이 없소.
송태조조광윤 특히 패전사례는 「八幡愚童記」일본측 서적에 더욱 잘 나와 있소. 몽고습래의 연구가 자세할수 있었던 것도 몽고습래회사나 이 八幡愚童記같은 저작물들 덕택이기도 하오.
송태조조광윤 원사, 고려사의 해당 구절을 가져와 볼것. 무사단이 전공을 요구할수 있었던 근거는, 2차 침공때 큐슈 북부의 섬들을 점령하였지만, 폭풍으로 사가현 즈음의 해역에 진주하고 있던 함대가 폭풍으로 굉침되어, 나머지 병력은 보급과 연락이 끟긴 상황에서 절망적인 전투를 수행하였고, 무사단은 몽골군이 강할 때에는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다가, 몽골군의 함대가 굉침당하고 나서야 고립된 몽골군을 상대로 정규전을 펼쳐 요격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사단이 당당히 승리의 댓가를 요구한 것이다.
송태조조광윤 말하자면 몽고습래회사의 주인공이기도 한 타케자카 스에나가는, 1차 침공 이후에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다가, 2차침공이 실패로 돌아간 연후에, 당당히 은상을 요구하러 말까지 팔아가며 가마쿠라를 찾아, 지토에 임명된다. 1차때와 2차때의 이러한 그의 행동의 차이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것이야말로 해당 몽고습래의 차이를 극명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송태조조광윤 더군다나 2차침공때에 일본군이 언제나 몽골군을 격파하고 있었고, 대등한 입장에서 전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1차침공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친히 진두지휘하여 설치한, 하카타만 연안의 대규모 요새지대에서 몽골군이 큰 피해를 입거나, 또는 공격이 저지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전사를 살펴보면, 보자, 2차침공때는 고려에서 4만의 동로군을 동원하고, 남송에서 10만의 강남군을 동원한다. 동로군은 강남군보다 출발이 빨라, 시각을 살펴보면 1281년 5월즈음에 출항한 것을 알수 있으나, 6월 말에야 강남군과의 합류를 끝내고 본토 공격을 시작한다. 말하자면 1달 이상 적의 요새가 눈앞에 있는데도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며, 일본군 또한 동로군을 공격할 능력이 없었던 것을 의미한다.
송태조조광윤 더군다나, 글대로 여몽 연합군이 연전 연패를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일본의 영토는 그 유린 정도가 심하지 않았거나, 몽골군의 피해가 심했어야 하는데, 정작 여몽 연합군이 상륙을 시작한 6월 말 즈음에서 7월 1일까지, 이키 지역을 점령당하고 큐슈 북부의 섬들을 차례로 점령당하는 사태를 빚게 된다. 이후 가미카제가 온 것이 7월 말~8월 초 경이며,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은 바로 이 가미카제 이후에 이루어지며, 일본군에 의한 잔당 소탕도 9월경에나 완료된다. 이것은 몽골군이 보급이 끟기고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고립되어 전멸하였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형태의 군이라면 줄루족도 영국군을 관광시킬수 있었던 사실이 있는 것이다.
송태조조광윤 일본군의 몽고습래 당시의 상황은, 몽고습래회사, 그리고 당시의 수많은 정황이 진실이란 무엇인가를 친히 말해주고 있다.
송태조조광윤 1차침공 당시에는 도착한지 단 하루만에 폭풍이 휩쓸어감. 2차침공 당시에는 교두보를 확보하고 내륙으로 진격하려다 함선내의 주력이 폭풍으로 전멸. 큐슈 북부의 섬을 주로 공략중이었음. 상륙한 다수의 잔존병력 있었고, 보급과 지원이 끟긴 상황에서 일본군에게 조직적으로 소탕됨. 초반에는 하카타만의 방어거점 붕괴. 이걸 실력이라고 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