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겔신학 I “비종교적 해석, 성숙한 세계, 예수, 타자를 위한 인간, 타자를 위한 교회”라는 공식은 모두 본회퍼가 1944년 4월30일부터 1944년 8월23일까지 기록한 50쪽 분량의 옥중서간에 들어 있는 표현들이다.
본회퍼는 그 소책자에서 오늘날 기독교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다루려고 했다. 그것은 「윤리」집필에 매진하는 가운데 이뤄진 한 쌍의 성찰, 곧 말년에 여려 사람을 만나면서 성찰한 것과 감방에서 독서에 집중하면서 성찰한 것을 담은 것이었다. 그 책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러한 주제에 부합하는 서신들과 간략히 스케치된 저술 초안 - “어떤 저서의 초안”- 만이 있을 뿐이다.(Widerstand und Ergebung. a. a. O., S. 413-416) 그는 8월 23일 이후에도 테겔 형무소와 프린츠 알브레히트 가에서 그 주제에 관해 상당히 많은 분량의 글을 썼던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집에 계신 아버지에게 부치지 않은 유일한 원고였다. 그가 그 원고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집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원고는 그가 처형당하는 와중에 분실되고 말았다.
현존하는 서신과 초안들은 그가 동료 신학자인 친구(베트게)에게 보낸 것들이다, 그것은 그의 숙고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동일한 개념, 표상 자료들, 신학적 경험 세게를 공유하는 인물에게 그 서신들과 초안들 가운데 일부를 기호로 써 보내기도 했다. 예컨대 그와 그의 친구가 이해한 “종교”개념은 당신의 루터교 전통 안에서 이해한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는 육체에서 비롯되고, 신앙은 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종교 이해는 신앙과 종교를 엄격히 구분하는 바르트의 종교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한 전제를 공유하지 않고 「저항과 복종」을 읽는 사람은, 본회퍼가 종교를 비판하면서 기도와 경건까지 제거하려고 했다는 오해를 하게 마련이다.
“비종교적 해석”은 그런 방식으로 종교를 비판한 신학자의 사유 세계에서 나온 개념이자, 성서해석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개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더 많은 내막이 있다. “성숙한 세계”라는 개념은 본회퍼가 1943-1944년 겨울에 딜타이의 저작을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그리고 그 전에 임마누엘 칸트를 알고 난 뒤에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임마누엘 칸트를 알고 난 뒤에 만들어 낸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 자신의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일컬어 계몽이라고 불렀다. “예수, 타자를 위한 인간, 타자를 위한 교회”는 본회퍼가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개념들이다. 그는 종교개혁이 내건 복음서의 구호 “나를 위하여” (pro me)를 “우리를 위하여”라는 복수형으로 이해하고자 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위하여”를 “타자를 위하여”(pro aliis)로 이해할 것을 촉구했다. “타자를 위하여”라는 단순하지만 심원한 구호는「윤리」의 말미와 테겔 형무소에서 작성한 “어떤 저서의 초안”에서 비로소 무르익어 진술되었다. 그것은 본회퍼가 던진 필생의 물음, 곧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에 대한 가장 짧은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테겔 신학은 본회퍼가 1944년 4월 30일에 보낸 유명한 편지에 명시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그는 뒤죽박죽이 되어 유예되어 버린 심리도 모든 불안이 지나가면 잘 풀리게 될 것이라며 친구를 안심시킨 뒤에 계속해서 써 내려갔다.
자네가 나의 신학 사상과 그 귀결에 놀라거나 염려할 지도 모르겠네. …… 기독교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내 마음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네. 신학적인 말이건 신앙적인 말이건 간에, 말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네. 내면성의 시대와 양심의 시대도 지나갔네. 즉 종교 일반의 시대가 지나간 것이네. 우리는 완전히 종교 없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네. 사람들이 지금의 모습으로는 더 이상 종교인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시대 말일세. …… 이제까지 이어져 내려온 “기독교” 전체의 기반이 사라지고 있네. 이제는 몇 안 되는 최후의 “기사”만 남아 있거나, 지적으로 불성실한 사람 몇이 남아 있을 뿐이네. 우리가 “종교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 뿐이네 . ……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때를 보내고 있는 몇몇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종교적으로 억눌러야 할까?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고, 서구 기독교의 모습을 완전한 종교 상실의 전 단계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에게서 어떤 상황이 빚어질까? 어찌해야 그리스도는 종교 없는 사람들의 주님도 되실까? 종교 없는 그리스도인이 존재할까? 종교가 기독교의 의복에 지나지 않고, 그 의복도 각기 다른 시대에 각기 다른 모습을 보였다면, 종교라는 옷을 벗어던진 기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우리가 답해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네. 종교 없는 세상에서 교회, 교구, 설교, 예전(禮典), 기독교적인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시대의 제약을 받는 전제들, 이른바 형이상학이나 내면성 등에 의지 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하나님”에 대하여 세속적으로 말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예전처럼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네) 우리가 종교 없는 그리스도인,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가 종교적 특권을 지닌 자가 아니라 완전히 세상에 속한 자. 에클레시아 곧 부름 받은 자가 되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답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는 더 이상 종교의 대상이 되지 않고 전혀 다른 무엇, 곧 세상의 주님이 되실 것이네…….
인간의 지식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거나 인간의 능력이 쓸모없게 되었을 때, 종교적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 마련이네. 하지만 그것은 종교적인 사람이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그럴듯하게 해결하기 위해, 아니면 인간적인 능력이 쓸모없게 되었을 때, 또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등장시키거나 인간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등장시키는 기계를 타고 내려오는 신(deus ex machina, 본래 연극에서 해결이 곤란한 장면을 처리하기 위해 신을 출현시킨 데서 유래한 표현 - 옮긴이)에 지나지 않네. …… 나는 삶의 끝에서가 아니라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나는 약할 때가 아니라 힘이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나는 죽을 때나 죄를 지었을 때가 아니라 삶과 인간의 선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한계에 다다라서는 입을 다물고 해결 불가능한 것은 미해결로 남겨 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네. 부활신앙이 곧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네. 하나님의 내세가 우리네 인식 능력의 내세인 것은 아니네! 인식론적 초월성은 하나님의 초월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네. 하나님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 피안으로 계시네. (Widerstand und Ergebung. a. a. O., S. 304-308.)
해석의 시도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비종교적 기독교”의 전체 모습도 중요하다.
5월 5일자 편지에는 첫 번째 편지에 기록된 포괄적 질문의 하위 질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본회퍼는 “비종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종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적으로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적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네. 두 가지 모두 성경의 복음과 오늘의 인간에게 맞지 않네.”(Widerstand und Ergebung. a. a. O., S. 312.)
성경의 복음은 초대교회와 중세교회가 자신들의 철학적 관점과 철학적 언어 - 본회퍼는 그것을 “형이상학”이라 부른다.-를 가지고 만들어낸 교리 체계와 동일시 될 수 없다. 오늘 날의 인간은 더 이상 그러한 “형이상학” 속에서 사고하지 않는다. 또한 성경의 복음은 자비로운 하나님에 관한 개인적인 물음과도 동일시될 수 없다. 첫 번째 편지에서 본회퍼는 복음을 변조시키고 교회를 통치자의 신하로 만들어 버린 두가지 요소를 특권과 권리로 꼽고, 복음을 비종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은 순수한 해석 문제의 영역에서 시작하여 교회의 형태에 손을 댄다, 그러니까 “비종교적 기독교”는 책상에서 완수할 수 없는 시도, 곧 교회의 자기 비판적 인 참회의 시도인 셈이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 지난 몇 년 동안 자기 보존을 위해서만 투쟁해 온 우리의 교회는 화해의 말씀과 구원의 말씀을 인간과 세상에 실어 나르는 자가 될 자격이 없네. 이전의 말들이 무력하고 아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네. 오늘 날 그리스도인다움은 다음의 두 가지에 있을 것이네. 기도하는 것과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 …… (교회의 형태를) 개조하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너무 일찍 교회를 도와서 조직적으로 권력을 신장시키려는 시도는 교회의 회개와 정화를 지체 시킬 뿐이네. 인간이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세상이 그 말씀에 의하여 변화되고 갱신될 날을 예언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네. 그러나 그 날은 올 것이네. 그것은 완전히 비종교적인 새 언어, 예수의 언어처럼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 주는 언어일 것이네. 사람들은 그 언어에 깜짝 놀라지만 그 언어의 힘에 압도되고 말 것이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언어일 것이네. …… 그때까지 그리스도인의 사정은 드러나지 않고 잠잠할 것이네. 하지만 기도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네.(Widerstand und Ergebung. a. a. O., S. 328.)
1944년 6월 초순에 “비 종교적 해석”이라는 개념을 보완해 줄 또 다른 개념이 본회퍼의 뇌리에 떠오른다. 그 개념은 다름 아닌 “성숙한 세계”다. 본회퍼는 어떻게 세계가 신이라는 미봉책을 뿌리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중세의 교회 의존에 맞서 자신의 “자율성”을 찾아냈는지를 기술한다, 이제까지 교회는 계몽주의를 향해 발전해 가는 것을 타락으로 간주해 왔다. 본회퍼는 교회에 반대하여 생겨난 무종교성과 자율성을 이 세계의 성숙성으로 적극 묘사한다.
(자신을 변증하는 교회는) 제아무리 성숙한 세계라도 ‘신’이라는 후견인이 없으면 살 수 없음을 증명하려고 하네.…… 나는 성숙한 세계에 대한 기독교 변증론의 공격을, 첫째 무의미하고, 둘째 비열하며, 셋째 비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네.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 공격이 성인을 사춘기로 되돌리려고 하는 시도, 더 이상 의존하지 안흔 사람을 뻔한 한 사실에 의존하게 하려는 시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문제 속으로 그를 밀어 넣으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네. 비열하다고 한 것은, 그 공격이 인간에게 낯설고 인간이 쉽게 긍정할 수 없는 목적을 위해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네. 비기독교적이라고 한 것은, 그 공격이 그리스도를 인간 종교성의 특정한 단계, 즉 인간적인 법칙과 맞바꾸기 때문이네. …… 문제는 그리스도와 성숙한 세계 일세.
한 달이 지난 뒤에, 본회퍼는 성숙한 세계에 대한 교회의 공격을 새롭게 비판하고, 시종(侍從)의 비밀을 상세히 폭로하는 교회를 비판하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가장 추하고 은밀한 장소에서 하나님과 암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세계와 성숙한 인간을 그냥 인정했으면 좋겠네. 현실적인 사람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그를 가장 튼튼한 자리에서 신과 대결시켰으면 좋겠네. 성직자 냄새가 나는 모든 술책을 포기했으면 좋겠네…….(Widerstand und Ergebung. a. a. O., S. 357 f, 360, 379 f.)
이제까지는 그리스도를 기술하면서 역사철학적이고 신학사적인 분석을 전면에 제시했다. 이제 본회퍼는 그리스도 사건 자체, 이른바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를 보다 깊ㅍ이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7월 16일자 편지에서 본회퍼는 여러 차례 윤곽잡기를 시도한 후에 이제까지 논의한 것으로부터 그리스도론의 결론을 아주 짧고 진하게 도출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치 하나님이 없다는 듯이”(etsi Deus non daretur)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정직해질 수 없을 것이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님 앞에서 인식한다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인식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시네. 우리가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삶을 완성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알려주시는 분이시네.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는 하나님이시네(막 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마주하는 하나님이시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살고 있네. 하나님은 자신을 이 세상에서 십자가로 내쫓으시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무력하고 연약하시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만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네. 마태복음 8장 17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전능이 아닌 자신의 약함과 고난으로 우리를 도우신다고 분명히 전하네.
바로 여기에 모든 종교와 구별되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네. 인간의 종교성은 이 세상에서 곤경에 처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능력에 호소하라고 지시하네.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네. 그 점에서 우리는 앞서 말한 성숙한 세계로의 발전이 그릇된 하나님 상(像)을 일소하고, 이 세상에서 무능을 통해 능력과 공간을 획득하시는 성경의 하나님을 보도록 눈을 활짝 열어 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네. 바로 여기서 “세속적인 해석”이 시작도리 수 있을 것이네.(Widerstand und Ergebung. a. a. O., S. 394.)
이처럼 본회퍼의 저작에서 드러나는 중심 사상은 이전의 작품, 특히「그리스도를 본받아」에도 나타난다. 그것은 전기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영국으로 망명한 조카딸 마리안네 라이프홀츠(Marianne Leibholz)가 견신례를 받자, 스위스에 있던 그는 1942년 5월21일 옥스퍼드에 있는 누이동생 자비네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고난과 하나님이 서로 대립되는 게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일찍부터 충분히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야. 내가 보기에, 하나님이 고난당하신다고 하는 사상은 기독교 교리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교리 같아(Gesammelts Schriften Bd. 6 a. a. O., S. 557.)
그러한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은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이 인간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가? 그리스도인은 “종교적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경험한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네.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살되, 이 세계의 하나님 상실을 종교적으로 은폐하거나 미화해서는 안되네. 인간은 “세속적으로” 살되,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네. 그는 “세속적으로” 살아도 되네. 말하자면 그는 그릇된 종교적 속박과 억압에서 해방된 것이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방법으로 종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네. 그것은 여하한 방법에 의거하여 자신을 죄인 아니 참회자나 성도로 여기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 유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하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인간을 창조하시네. 그리스도인다움은 종교적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네.
그것이 회개라네. 회개는 자신의 곤궁과 문제와 죄와 불안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들어서는 것, 말하자면 메시야 사건 속으로 들어가서 이사야 53장이 성취되게 하는 것이네……
“종교적 행위”는 언제나 부분적인 것이고 “신앙”은 전체, 곧 삶의 행위라네. 예수께서는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르시네. 그 삶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무능에 참여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쓰기로 하세(Widerstand und Ergebung. a. a. O., S. 395 f.)
그러나 그가 “다음번에”쓰기 전에 쿠테타가 좌절되고 말았다. “그 삶이 어떤 모습인지”알고 싶다면 1944년 7월 21일자의 편지를 보면 될 것이다. 그 편지에서 본회퍼는 자기 생의 결말과 죽음을 둘러싼 상황을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인상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7월 20일이 지나면서 그의 사형 집행이 연기되었다. 그 사이에 그는 “어떤 저서의 초안”을 베트게에게 발송했다. 그 초안은 본회퍼가 세 개의 장(章)으로 저술하려고 한 것을 짤막하게 밝히고 있다. 세 개의 장은 이러하다. “제1장, 재고조사. 제2장, 기독교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제3장, 결론” (Widerstand und Ergebung. a. a. O., S. 413-416.)
그 초안을 읽어 보면, 본회퍼가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주의 명제에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주의 명제는, 신학은 인간학에 불과하고 종교는 현세의 소원이 내세에서 성취도리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에 불과하며 기독교는 결국 인간의 필요를 끌어올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그러한 명제를 반박한다. 포이어바흐가 알고 있는 인간은 자신을 전능한 신에게 의탁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폭군 같은 신의 노예를 무신론자로, “내세의 지원자를 현세의 학생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본회퍼는 기독교와 성경의 하나님 경험에서 정반대의 것을 보았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신을 전능한 신에게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력하게 고난을 당하시면서 자신을 인간에게 의탁하신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와 마찬가지로 본회퍼도 종교가 말하는 전능한 신은 기계를 타고 내려오는 신에 불과하며 연장된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종교”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것은 예수께서 오로지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전 존재가 변화되는 경험이다,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야 말로 초월 경험이다! 자기 자신을 여의는 일에서, 죽을 때까지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일에서 비로소 전능, 전지가 비롯된다. 신앙은 그러한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대단히 높고 전능하며 가장 뛰어난 존재와 종교적으로 맺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참된 초월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타자를 위해 존재하고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도달하기 어려운 무한한 과제가 아니라 그때그때 주어지는 이웃이 초월적인 것이다. 근도의 종교들에서 보듯이, 섬뜩하고 무질서하고 멀리 떨어져 있고 소름끼치는 짐승 모양의 신, 절대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 무한한 것 등의 개념으로 포장된 신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희랍적인 신인(神人)형태가 아니라. 타자를 위한 인간으로 살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초월적인 것이다! (Widerstand und Ergebung. a. a. O., S. 414.)
• 출처 : Eberhart Bethge 저, 「Dietrich Bonhoeffer 디트리히트 본회퍼」김순현 역, (서울: 복있는 사람, 2006) 241-255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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