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진조인(辰朝人)이라는 표현이 기록된 유물은 1919년 중국 낙양의 망산에서 출토된 부여융 묘지명(扶餘隆 墓誌銘)입니다.
부여융은 백제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의 태자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입니다. 이 묘지명은 그의 생애를 기록한 비석으로, 서문 첫머리에 그의 출신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공휘융자융백제진조인야(公諱隆字隆百濟辰朝人也)
"공의 휘는 융이고 자도 융이며, 백제 진조인이다."
진조인(辰朝人)의 의미
이 표현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 진국(辰國)의 후예: 백제의 뿌리가 삼한 이전의 고대 국가인 진국(辰國)에 있음을 강조한 표현이라는 설입니다. 이는 백제 왕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오래된 고대 국가에서 찾으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 마한의 계승: 백제가 마한의 땅에서 일어났으며, 그 원류가 진국에 닿아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봅니다.
부여융 묘지명의 중요성
* 출토 시기: 1919년 중국 하남성 낙양시 망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 사료적 가치: 백제 멸망 후 태자 부여융의 행적(당나라에서의 관직, 웅진도독 임명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핵심 금석문입니다.
* 가계 기록: 백제 왕실을 '하백의 자손'(河孫)으로 칭하며 고구려와의 친연성을 언급하는 등 백제의 건국 설화와 계보 연구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 묘지명은 현재 중국의 하남박물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의자왕(義慈王) 으로 이어진 가계도는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압송되거나 그곳에서 가문을 이어간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특히 융(隆, 부여융) 계열의 후손들은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묘지명들을 통해 그 실체가 명확히 드러난 인물들입니다.
부여융(扶餘隆)의 자손들 (당나라 정착 가계)
부여융은 당나라에서 웅진도독에 임명되었으나 결국 낙양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당나라의 관료로서 삶을 이어갔습니다.
* 문사(文思): 부여융의 아들입니다.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냈으며, 백제 유민들을 관리하는 역할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 문선(文宣): 부여융의 또 다른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덕장(德璋): 부여융의 손자입니다. 최근 중국에서 부여덕장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그의 구체적인 관직과 생애가 알려졌습니다. 그는 당나라에서 사농시승(司農寺丞) 등의 관직을 지냈습니다.
* 경(敬): 부여경(扶餘敬)을 의미합니다. 부여융의 손자로, 당나라에서 조산대부(朝散大夫)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백제 왕실의 가계를 당나라 내에서 유지했습니다.
의자왕의 다른 아들들 (부흥 운동 및 압송)
* 효(孝): 의자왕과 함께 웅진성에서 당나라군에 투항한 태자입니다.
* 태(泰): 사비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며 스스로 왕이 되기도 했으나 결국 항복했습니다.
* 풍(豊): 부여풍. 일본에 있다가 귀국하여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 연(演)·용(勇): 의자왕의 아들들로, 역시 660년 멸망 당시 당나라로 끌려간 인물들입니다.
孝 (부여효)
泰 (부여태)
豊 (부여풍)
隆 (부여융)
ㅡㅡ 文思 (부여문사)
ㅡㅡㅡㅡ 德璋 (부여덕장)
ㅡㅡ 文宣 (부여문선)
ㅡㅡㅡㅡ 敬 (부여경)
演 (부여연)
勇 (부여용)
1919년대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부여융 묘지명'에 이어, 2011년경 낙양에서 함께 출토된 부여덕장 묘지명(扶餘德璋 墓誌銘)은 백제 왕실 후손들이 당나라에서 어떻게 대를 이어갔는지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출신과 가계 기록
묘지명은 부여덕장이 백제의 고귀한 혈통임을 분명히 밝히며 시작합니다.
* 백제 진조인(百濟 辰朝人): 할아버지 부여융의 묘지명과 마찬가지로 '백제 진조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뿌리가 백제 왕실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 직계 가족: 의자왕의 증손자이자, 부여융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계도상 부여융 - 부여문사 - 부여덕장 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2. 당나라에서의 관직 생활
부여덕장은 당나라 조정에서 실무 관료로 활동했습니다.
* 관직: '사농시승(司農寺丞)'이라는 관직을 지냈습니다. 이는 국가의 농업, 창고 관리, 조세 수합 등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농시의 중견 간부급 직책입니다.
* 역할: 백제 유민 출신으로서 당나라의 행정 체계 속에 완전히 편입되어 충실히 복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망과 매장
* 사망 시기: 당나라 현종 시기인 개원(開元) 연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장지: 당나라의 수도였던 낙양의 망산(北邙山)에 묻혔습니다. 이곳은 부여융을 비롯한 백제 왕실 후손들의 묘역이 조성된 곳입니다.
4. 역사적 의의
* 백제 왕실의 존속: 백제 멸망(660년)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그 후손들이 당나라에서 '부여(扶餘)'라는 성씨를 유지하며 귀족 계층으로 살아남았음을 증명합니다.
* 묘지명 구조: 전형적인 당나라 고위 관료의 묘지명 형식을 따르고 있어, 이들이 문화적으로도 당나라 사회에 깊이 동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부여융 묘지명과의 연결: 부여융 - 부여문사 - 부여덕장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확정 지을 수 있게 되어, 백제 왕족의 당나라 망명 이후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첫댓글 백제진조인인란 목지국 진왕계 부여인이란 뜻입니다. 부여씨가 4세기 이후 목지국 왕성이었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진왕의 진은 크다는 뜻으로 대왕이라는 말입니다. 즉 목지국 진왕이란 그 휘하에 후왕들이 통치하는 여러 소국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진왕은 당연히 고조선 시대에 요동에 있다가 민족 대이동기에 한반도로 남하하여 진한과 변한을 이룬 진국과는 무관합니다. 진국은 만리장성의 역을 피해 온 북중국 이주민들이 요동 토착인들과 함께 만든 나라로 당시에 거대한 차이나타운이었습니다.
이런 혼란이 오지 않도록 아무래도 목지국의 건국에 관해 정리를 한 번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