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의 시작이다.
늘 하느님께 온전히 머물기를 바라면서도
나태함으로 인해 일상으로 도피하고 기도를 게을리해 왔다.
신자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과 끝없이 대화한다는 것인 줄 알면서도.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 뜻에 맞갖게 살아가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와중에 문득 문득 하느님의 목소리가 가슴을 두드려
그분 안에 온전히 머물고 싶어졌다.
지난 해 12월 신자들과의 친목모임에서
"우리 이렇게 매월 만나 맛있게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데 뭔가 빠진 것 같아요.
신자들의 모임이니 1년에 한번만이라도 피정을 하는 게 어떨까?"
하고 발의를 해서 새해를 봉헌하는 마음으로
2015년 1월 모임은 성지에서 피정을 하기로 합의를 했다.
사실 혼자 피정을 갈 수도 있지만 하느님 나라는 함께 가는 길임을 알기에
번거로움을 감당해 보기로 했었던 일이다.
나에게는 잠시 시간만 내어 놓으면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지만 누군가에겐 번거로울 수 있으니
가급적 혼자서 감당해 보기로 했다.
교회공동체로 산다는 건 하나되기가 참 좋다.
하느님께서 중심에 있으니 선한 의도로 하는 일에 일치는 식은 죽 먹기다.
피정 전 팀원들에게 9일 기도를 공지하고
성령이 함께 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지향했다.
내 구체적인 기도 지향은
작년에 중학교 과학교사였던 둘째가 전공과목과 다른 생물과 지학부분을 가르치는 중학교가 싫다며
고등학교로 전직을 원했다.
교사일을 하겠다는 둘째,
직업적 선입견으로 좀 더 남들이 인정하는 직업을 갖기를 원하는 건 내 욕심이고
그래도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니
엄마로서 좋은 교사가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지향으로 삼았다.
첫째도 분당 차병원에 레지던트로서 둥지를 삼을 모양이다.
모쪼록 주변 사람들과 환자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인정 받았으면 좋겠다.
남편과 나, 우리 부부는 한 살 터울로 비슷한 시기에 인생의 갱년기에 접어들었으니
인생의 동반자로 애잔한 눈빛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건강하기를 기도지향으로 삼았다.
개인적인 기도거리는 곁에 적어두고 그 끈을 놓지 않고 매일 기도했다.
기도를 온전히 매달려 하기를 다짐하지만 언제나 마음은 흐트러지기 일쑤다.
피정 전 9일 기도를 방해하는 여러 변수가 생겼다.
둘째의 중국여행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난 짐 속에 먼저 9일기도 책부터 챙겨 담았다.
여행 떠나기 전에는 밤이면 홀로 부엌에 앉아 기도를 바쳤다.
기도에 성실을 기해본 적이 없는 지라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마음이었지만
놀랍게도 평화로운 기도 여정이 되었다.
아는 신자들 네 명이 함께 나서서
밤이면 따로, 또 같이 서로를 격려하며 기도를 이어나갔다. 하루도 게으르지 않게.
귀국한 날 밤에 피곤한 몸으로 자리에 누웠는데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준비가 부족한 탓에 잠자리에 누워 묵상거리를 챙기니 갈수록 눈이 똘망해졌다.
밤 12시가 넘어서자 잠들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피정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순서를 정하고 필요한 자료와 묵상을 챙겨 나갔다.
다음 날은 반주자, 선창자와 함께 성가를 뽑고,
묵주기도 방식을 정하고, 성체조배 시간도 정해서 시나리오를 만들고
필요한 일거리를 직책에 따라 정리해서 만들어 두었다.
오전 미사로 피정은 시작되었다.
서품20주년 기념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신부님은 도착하자마자 봉헌하는 미사도 성심을 다하셨고
점심은 우리 피정팀과 함께 드시며 식사전 기도를 이끄셨다.
참 설레고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한동안 못봤던 대모님도 오셨고 전에 성가대 하던 자매님들이 다 모였다.
가까운 이웃 성당의 자매들도 이런저런 연고로 모이고
성령으로 하나됨이란 이런 거겠지 싶었다.
모두들 반갑게 인사하고 성가를 부르며 오후 피정이 시작되었다.
하느님과 신자들을 이어주는 '무지개'라는 모임의 이름은 성서에서 골라 정했었다.
요번 피정은 무지개와 그 친구들을 위한 새해맞이 기도 피정이다.
신부님께서는 편안한 피정을 명하셨기에 침묵피정은 저절로 풀렸다.
반가운 이들과 맘껏 반가워할 수 있어 더 좋았다.
맨 먼저 한 일은 순서지 맨 앞 장에 자신의 기도 제목을 적는 일이었다.
이 기도는 피정의 모든 순서의 첫머리마다 지향을 붙들고 있는지 상기시켰다.
아침에 기도하고 일어나 밥 지으면서 잊기를 반복하는 건 나만이 아닐거니까.
피정 내내 최소한 오늘만은 온종일 기도에 푹 빠지길 ......
수면이 부족한 신부님을 위해 강의를 첫번째 순서로 조정했다.
신부님께서는 성지순례기를 정리해서 강의를 하셨는데
*먼저 긴 순례를 위해서는 짐을 비워야 한다는 말씀으로 시작하셨다,
혹시 필요할 지 몰라 챙겼다간 낭패를 보리라고 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군더더기를 주렁주렁 달고 가지 말고
단순한 어린아이처럼 순명하고 기뻐하라는 말씀 이셨겠다.
*또 순례길에 만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잠시 도와 줄 수는 있지만
계속되면 결국 둘 다 목적지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
-자기의 삶의 무게는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이셨겠다.
* 어느 수도원에서 수녀님들께 원장 수녀님이 제대 위의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묻자.
원장 수녀님은 제대를 장식하는 꽃이
다른 수녀님은 스스로를 태워 제대를 밝히는 초가 되고 싶다 했는데
한 어린 수녀님께서 제대가 되고 싶다고 하셨다는 이야기
이유: 젊은 보좌 신부님이 제대에 늘 친구를 하니까
라고 해서 왁자하니 웃음
-지루하지 않도록 가벼운 농담이셨겠지만
순수함을 잊지 않으면 가장 정곡을 찌른다는 말씀일 수도.
* 신부님들도 성지에 가서조차 조금만 불편하면 투덜대기도 하고
찡얼대기도 해서 우리와 같은 꼴들을 하고 있는데
미사 중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용서와 화해를 하니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시냐는 말씀
-누구나 삶의 꼴은 달라 울퉁불퉁 하지만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미사 안에서 일치하는 은총을 체험한다
* 따라서 우리도 주님 안에서 상대의 모자람을 포용하고
완전할 수 없는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셨다.
-자신이 바라는 자신과 현재의 모습은 다르고 모자란 자신에 대해 수용하고 화해하라는 말씀
다음의 묵주기도는 장미꽃 한송이를 피워 올리듯 환희의 신비를 아주 천천히 봉헌하고
선창하신 대모님은 묵상도 챙겨서 해 주셨다.
묵주기도가 끝나고 간식과 휴식시간엔 신부님 강론으로 영적 치유와
사랑이신 하느님으로 인한 담대함을 받았다는 기쁨에 모두 들떠 있었다.
감동적인 묵상을 서로 나누며 차도 마시고 과자도 먹고 서로 인사도 나누었다.
내겐 마치 초대교회의 은총처럼 작은 하느님 나라가 이런 모습이겠지 싶은 기쁨이 차 올랐다.
좀 일찍 가야만 한다던 언니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 왔다.
시작과 끝에 신나는 찬미성가를 부르니 성가대 출신들이 많아 화음이 아름다웠다.
오죽했으면 점심을 함께 하시던 신부님께서
"아침 미사때 성가를 참 잘 부르던데 다들 성가대냐?"
고 물으셨다.
매번 미사에 가지만 참석 인원에 비해 성가소리가 크고 누가 들어도 영성적이어서
나 또한 감동적으로 들렸다.
휴식후 입당을 할 때 필리피서의 말씀 중 뽑은 말씀카드를 무작위로 뽑고
성모님께서 시메온의 예언을 마음에 담듯 마음바구니에 담았다.
기도 지향을 다시 상기한 후 우리는 성체조배를 시작했다.
잦은 기침을 하는 자매님조차 숨을 죽였다.
고요다.
모두의 마음에 성령이 머무시겠지...
순서와 순서 사이에 잠시만 시간이 비어도 묵상으로 고요히 주님 앞에 머물렀다.
신부님 말씀을 위해 기다릴 때도 우리 팀 모두가 너무나 조용히 묵상을 해서
문을 열고 들어 오시던 신부님께서 깜짝 놀라
"떨린다, 정말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피정을 안해도 될 사람들이 꼭 피정을 한다."
고 하셨다.
허나 우리는 안다.
'본당에서 봉사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웃과 상처를 주고 받는지.
또 일에 몰입해서 주님을 잊고 사는지.'
그러니 본당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끔은 정말 손에서 봉사일을 놓고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성체조배는 신앙의 초심자였던 내게 많이 부담스러웠음을 기억하고
낯선 분들을 위해 기도지향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 동안만 했다.
그 후에 우리는 피정 동안 묵상나누기를 했다.
모두들 각기 다른 묵상이었지만
각자의 마음 그릇에 담을 만큼 담겼음을 느꼈다.
단지 필리피서 한 구절씩만을 성구로 뽑았는데
"내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다. 난 치유되었다. "
"난 위로 받았다. "
"힘을 얻었다. "
"정말 좋았다. "
참석인원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뻐하는 걸 보니 분명 성령강림 그날의 기쁨인 것이다.
뭔들 넘치게 준비되었겠는가!
마음이 일치하니 모자람도 넘침으로 느껴진 것일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바친 기도지향 편지를 불로 태우고
성모님께 우리의 마음을 촛불로 태워 봉헌했다.
주님의 심부름꾼으로 하루를 보낸 나는 요번 피정 준비만은 평화 안에서 해냈다.
잘난 체 한다는 말을 듣는 게 두려워 숨 죽인 날들이 도리어 부끄러웠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꼴값이라 여기고
그저 순명으로 누가 뭐라 하든 십자가를 잘 질 준비를 했는데
내게 주신 십자가는 언제나 가볍기만 하다.
그러니 감사기도만 드릴 밖에.
오랜만에 해설대 앞에 서서 흐린 날씨 탓에 추울까 걱정하며 두꺼운 외투를 곁에 두었는데
참 이상하다.
시작 전부터 등에서 불길이 닿은 듯 후끈 더웠다.
피정 내내 따뜻한 느낌이었다.
두려움이 사라졌나 보다.
하느님은 사랑이고 사랑은 두려움이 없으므로....
돌아오는 길에 기도 지향을 넣었던 둘째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큰애가 받더니
"성수는 잘 되었어요. 출근하면 된대요."
했다.
참, 좋으신 예수님!
새해맞이 피정은 주님께 함께 가는 작은 기도자리, 하느님 나라였다.
주님의 백성이 모여 그분을 찬미하는 작은 교회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