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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____한국신화의 수수께끼·6
제주 삼을나 신화의 수수께끼
이태희
오랫동안 탐라라 불리던 섬. 탐라는 섬라, 담라, 탁라 등으로 표기되었으며, 섬이라는 뜻을 음차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탐라가 제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중엽부터인데, 제주라는 말은 서울에서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있는 땅이란 의미이다. 제주라는 이름을 얻고 탐라의 역사는 소외되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와 함께 존재했던, 해상활동을 통해 한반도와 중국, 일본 등과 교류하면서 독자적인 문명을 일구었던 고대국가였으나 중세적 국가체제로 발전하지 못하여 탐라국의 역사는 망각되고 신화는 묻혔다. 그런데, 오히려 본토로부터 떨어져 있었기에 어느 곳보다 풍부한 신화 유산을 간직한 섬이 되었다. 어느 연구자는 제주 신화가 그리스로마 신화보다 훨씬 폭이 넓고 깊다고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책속에 있지만, 제주신화는 말과 노래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번 회에서는 탐라국의 건국서사시였을 삼을나 신화로의 여행을 떠나보기로 한다.
1. 세 신인이 땅에서 솟아났다?
여기서 다루려는 제주 삼성신화 혹은 삼을나 신화를 전하는 자료는 대부분 15세기에 기록되었다. 1416년 정이오의 『성주고씨전』, 1450년 고득종의 서문이 있는 『영주지』, 1454년 편찬된 『고려사지리지』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고려사지리지』에 실린 내용을 소개한다.
고기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이 한라산 북녘 기슭의 모흥혈에서 솟아났다. 맏이를 양을나, 둘째를 고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세 신인은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사는데, 하루는 자줏빛 흙으로 봉하여진 나무함이 동쪽 바닷가에 떠밀려 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그 안에는 돌함과 사자가 있었다. 돌함을 열어 보니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와 송아지·망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인데 우리 임금이 세 딸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쪽 바다에 있는 산에 신자 셋이 태어나시어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며 신에게 명하시어 세 따님을 모시고 가도록 하여 이곳으로 왔사오니, 마땅히 세 따님을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라고 하고 사자는 구름을 타고 떠났다. 세 사람은 나이 차례에 따라 장가들고, 물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아가 활을 쏘아 거처할 땅을 정하였는데, 양을나가 거처한 곳을 제일도라 하고, 고을나가 거처한 곳을 제이도라 하였으며, 부을나가 거처한 곳을 제삼도라 하였다. 그런 다음 비로소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르니 날로 살림이 풍요로워졌다.
위의 삼을나 신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이야기는 세 신인이 땅에서 솟았다는 이야기다. 삼을나 신화는 주소 성씨시조신화로 계승되고 있으나 탐라국의 건국서사시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삼을나를 건국신화의 주인공으로 간주할 때, 본토의 건국신화들과 가장 두드러진 점이 바로 신인이 바로 땅에서 솟았다는 이야기다. 단군신화나 주몽신화 혁거세신화 수로신화 모두 건국의 영웅들은 하늘의 혈통을 따르고 있다. 단군과 주몽은 천신인 환웅과 해모수의 아들이며, 혁거세와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 반면 제주 탐라의 삼을나는 땅에서 솟아난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유례가 드문 매우 독특한 점이다. 우선 이와 같이 땅에서 솟았다는 이야기는 제주도가 화산의 폭발로 생긴 섬이기에 자연 생성의 성격을 신화에 반영했다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또한 땅에서 솟아남은 대지의 품속에서 생명이 산출된다는 원초적 사유의 반영이라고 해석된다. 즉, 대지의 생식력을 토대로 한 지모신 신앙이 내재해 있으며, 세 신인이 땅 속에서 솟았다는 것은 곡식이 땅에서 자라나오는 상징이거나 지모신이 신인을 출산하는 행위라고 풀이된다.
세 신인이 땅에서 솟아나는 이야기는 본토의 신화와 비교하면 매우 독특한 요소이지만, 제주에 전래되는 다양한 신화 속에서 신성스런 존재가 땅에서 솟아나는 것은 매우 흔하다. 위의 삼을나 신화에서는 세 신인만 땅에서 솟아나고, 그 배필이 되는 여인들은 바다를 통해 도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나, 제주 서사무가로 전해져 오는, 어쩌면 삼을나 신화의 원형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천자또마누라본>에서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크고 좋은 나라에서 솟아났다고 그려진다. <천자또마누라본>의 주인공 소천국은 제주섬에서 솟아났고, 그의 배필이 되는 백주또는 백모래밭에서 솟아났다. 여자가 태어난 곳은 강남천자국이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원형적 신화에서는 신령스런 남녀 모두가 땅 속에서 솟아났다는 이야기였는데, 전승과정을 거치면서 어떠한 이이유로 변형되어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신이나 인간이 땅에서 솟아났다는 이야기 드물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유럽과 북미의 초기 창조신화는 최초의 인간이 식물처럼 대지로부터 솟아올랐다고 상상한다. 또 서태평양 도서지방에서 인류의 시조가 땅에서 솟았다고 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것은 원래 땅 속에서 살다가 땅 위로 올라왔다는 뜻이란다. 어쩌면 최초의 인간, 혹은 신령스런 존재들의 탄생을 말할 때, 땅에서 솟아났다는 이야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보다 선행했을 지도 모른다. 무수한 생명은 땅으로부터 솟아나고 땅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위대한 존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강력한 지배계급의 등장과 이를 옹호하기 위한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요청된 것일 수도 있다.
2. 삼을나의 순서와 이름의 뜻?
삼을나 신화에 나타나는 신들의 탄생담은 제주 신화가 가진 원형적 혹은 원시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삼을나 신화는 탐라국 건국 신화의 모습도 지니고 있으면서 성씨시조신화의 성격을 겸하기도 한다. 곧 고씨, 양씨, 부씨의 성씨 시조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성씨시조신화가 건국신화로 이어졌다고 보기도 하고, 건국서사시로 불렸던 이야기가 부족국가의 해체와 함께 성씨시조신화로 둔갑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 자리에서 선후를 따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쪽으로든 그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건국서사시가 형성되는 고대부족국가 탄생시기에는 아직 성씨 관념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인정된다면, 부족국가가 해체되고 다음 단계로 발전되지 못한 상황에서 부족국가의 건국서사시였던 노래를 성씨시조신화로 변형시켰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삼을나 신화를 성씨시조신화로 읽게 되면 고씨, 양씨, 부씨 시조의 유래담이다. 그런데, 그 순서에 대해 논란이 많다. 위에서 인용한 『고려사지리지』에는 첫째가 양을나, 둘째가 고을나, 셋째가 부을나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고씨 집안의 족보에 있는 『영주지』에는 고을나-양을나-부을나의 순서이고, 뿐만 아니라 이 세 신인이 각각 군—신—민의 관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위의 『고려사지리지』에서는 군—신—민의 구별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세 신인이 각각 여인을 맞아 거처한 곳을 명명하면서, 양을나가 제일도, 고을나가 제이도, 부을나가 제삼도에 거처했다하여 그 순서의 위계를 분명히 드러냈다. 기록의 선후를 따져 『영주지』가 『고려사지리지』에 앞선다면, 『고려사지리지』의 기록은 그 편찬에 참여한 양성지(1414~1482)에 의해 바뀐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을나>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서도 이설이 많다. 우선, 남부지방에서 사용되는 <얼라>, <알라>, <알래> 등에 주목하여 <을나>는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한자어라고 말한다. 신라 김알지신화에서 알지가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백제 지역에서 왕을 <어라하>라고 부른다는 중국의 문헌 기록을 토대로 <을나>가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접근한 예도 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당초부터 성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고을나와 양을나는 뜻을 옮긴 훈차로서 ‘높은 이’, ‘어진 이’를 뜻하고, 부을나는 음차로서 ‘밝은 이’를 뜻한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3. 세 여인이 일본에서 왔다?
세 신인이 배필을 만나는 장면도 흥미롭다. 먼저 앞서서 다룬 신화들에 나타난 <배필 구하기> 화소를 되새겨 보자. 단군신화에서 단군은 웅녀와 환웅의 결합으로 인해 탄생하고 있다. 비록 천신인 환웅이 곰이었던 웅녀에게 과제를 주어 사람으로 변하게 하였지만, 짝을 구하는데 적극적이었던 것은 오히려 웅녀였다. 여성의 구애. 주몽의 부친인 해모수와 모친인 유화는 웅심연에서 처음 만났다. 이 첫 만남은 매우 돌발적이었으나, 해모수가 하백의 궁전으로 가는 방법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그 방법을 일러준 것은 바로 유화였다.
현대의 남녀들은 남자가 먼저 구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현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고대 신화가 보여주는 풍경은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수컷과의 만남을 조율하고 지연시키고 결정하는 것은 암컷의 몫이다.
혁거세와 알영은 같은 날 태어나 13세가 되어 임금과 왕후가 되었다. 이들의 결합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마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수로왕과 허황옥의 만남은 당사자들의 적극적 의지를 바탕으로 한다. 수로왕은 자신을 데려다 키워준 구간 등이 자신들의 딸들 가운데서 배필을 구하라고 요청했을 때 이를 거절하고 허황옥의 도래를 기다린다. 삼을나의 배필이 되는 여인들이 바다로부터 도래한다는 점에서 수로신화와 닮았다.
허황옥의 도래 장면과 세 여인의 도래 장면을 비교해보자. 허황옥은 야유타국으로부터 여러 신하와 진기한 보물들을 싣고 도래하였다. 각종 비단과 보석을 가지고 왔다는 점에서 해상무역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세 여인은 나무함 속에 든 돌함을 타고 온다. 그러고 보니 세 여인은 이름이 없다. 이름만 없는 게 아니라, 말도 없다. 허황옥은 자신이 야유타국에서 왔으며, 부모의 꿈에서 하늘이 정해준 배필을 찾아왔노라고 당당하게 밝히는데, 세 여인이 일본국의 공주이며 세 신인의 배필이 되기 위해 왔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여인 자신들이 아니라 돌함과 같이 온 사자이다. 여인들이 매우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여인들이 함께 돌함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다. 돌함 속에는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와 송아지·망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던 것이다. 세 여인과 함께 온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씨는 곧 목축과 농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 신인들이 땅에서 솟아나,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는 서술과 대비된다. 즉 여인들의 도래는 수렵문화로부터 목축-농경문화로 이행하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세 신인이 원주민이라면 세 여인은 이주민인데, 이주민은 원주민보다 앞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원주민과 이주민의 결합과 새로운 생업의 개척이 탐라국 건국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여기서 따져볼 것은 세 여인이 ‘일본국’에서 왔다는 기술이다. 세 여인을 데리고 온 사자는 분명 자신을 일본국 사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과연 고대 제주와 일본국의 교류를 통하여 탐라국이 형성되었던 것일까? 이는 좀 더 따져볼 요소가 있다. 우선, 삼을나 신화를 전해주는 여러 자료에서 세 여인의 출발지에 대한 설명이 엇갈린다. 『고려사지리지』와는 달리 『영주지』 계열에서는 세 여인이 동쪽 바닷가로 들어왔고, 그 출자처는 <벽랑국>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삼을나 신화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몇몇 <당본풀이>에서는 <강남천자국> 또는 <중국> 또는 <서울>에서 출자했다고 한다. 이 중 <서울>, <중국> 등의 기록은 분명 후대의 변이로 생각된다. 반면, <강남천자국>이나 <벽랑국>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나라의 이름이 아니라 가상의 나라이다. <일본국>은 가상의 나라가 아니나, <벽랑국>이 ‘바당’(바다)의 의미에 가깝듯이 <일본국> 동해 먼 바다의 <일출처>에 온 구체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일본국>을 굳이 역사적으로 실제 했던 일본이라고 해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세 여인이 출자한 곳은 다른 곳이 아닌 본토라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세 여인이 앞선 목축과 농경문화를 가지고 본토에서 들어온 것으로 이해해야, 제주도 말이 본토말과 다르면서 같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원주민과 이주민의 결합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는 제주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4. 삼을나의 후손들은 어디로 갔나?
그런데, 다른 건국신화들에 비하여 탐라의 삼을나 신화는 2세대 이야기가 없다. 흔히 신화의 ‘삼대기’구조를 말한다. 단군신화와 주몽신화를 예로 들면, 환인-환웅-단군의 삼대기가, 환인-해모수-주몽의 삼대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물론 주몽신화는 유리까지 이어지니 사대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동명왕편에 제시된 유리 이야기는 덧붙여진 흔적이 있다. 기본 골격은 삼대기였다고 볼 수 있다. 혁거세신화나 수로왕신화의 경우 왕위를 물려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혁거세를 이어 태자 남해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있고, 수로왕신화를 담은 가락국기 역시 수로왕의 아들인 제2대 거등왕 이야기로부터 제10대 구형왕이 561년 신라에 항복하기까지 약 오백여 년의 일을 추가로 기술하고 있다.
『고려사지리지』에 소개된 탐라 이야기는 세 신인과 세 여인이 혼인하고 각자의 거처를 정한 후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르니 날로 살림이 풍요로워졌다>는 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대 손인 고후와 고청에 이르러 곤제 3인이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탐진에 이르니 때는 신라의 번성하던 시기였다. 이때에 객성이 남쪽 방향에 나타나므로 태사가 아뢰기를, ‘이국인이 내조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신라에 들어오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첫째를 성주라 칭하고[그 성상을 움직인 때문에] 둘째를 왕자[왕이 고청으로 하여금 가랑이 밑으로 지나게 하여 사랑하기를 친자식과 같이 한 까닭으로 그 이름을 지었다.]라 칭하고 막내를 도내라 하였으며, 읍호를 탐라라 하니 그것은 올 때 처음 탐진에 상륙하였기에 때문이다. 각각 보개와 의대를 주어 보냈다.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공손히 신라를 섬기니 고을나로 성주를 삼고 양을나로 왕자를 삼고 부을나로 도상을 삼았고 뒤에 또 양을 고쳐 양으로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요약하면, 고을나의 15대 손 3명이 신라에 조공하였고, 각각 성주·왕자·도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양’을 뒤에 ‘양’으로 바꾸어 칭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신라의 왕이 고을나 후손 삼인에게 칭호를 내리는 장면이 예사롭지 않다. 첫째인 고후에게는 성주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들이 신라에 들어올 때, 성상 즉 별자리를 움직인 까닭이라 했다. 성주라는 명칭이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탐라의 우두머리 곧 탐라국의 왕을 칭하는 명칭이 된 연유이다. 둘째인 고청에게 왕자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런데 그 이유가 심상치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왕이 고청으로 하여금 가랑이 밑으로 지나게 하여 사랑하기를 친자식과 한 까닭이라 했다. 이 무슨 궤변인가. 신라의 왕이 자신의 가랑이 밑으로 탐라의 우두머리를 지나가게 하고는 친자식과 같이 사랑하였다니.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탓에 실상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매우 굴욕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주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는 그나마 나은 형편이다. 조선 초 태종 때에 이르러 중앙 행정력이 강력해지자, 조선 정부는 탐라국의 성주와 왕자라는 명칭을 없애고 각각 좌도지관, 우도지관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무렵부터 목사와 현감이 다스리는 군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주의 인구 증감에 따라 강제 이주 또는 출륙금지 조처를 내리게 되는데, 조선 인조 때로부터 순조 때에 이르는 200년의 기간 동안 출륙 금지 조치가 이루어져 제주도는 말 그대로 ‘떠 있는 감옥’의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고립된 섬이라는 이유로 조선조 500년간 거의 200여 명에 달하는 유배인들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수난의 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대에 와서도 제주도의 아픈 역사는 계속 되었다.
제주도의 잊혀진 역사, 그 수난의 역사가 신화와 옛 기록 속에 비치고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풍광의 섬 제주. 망각되고 묻힌 역사 속의 탐라. 풍부한 신화유산을 바탕으로 역사 속으로의 여행은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태희 / 196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래 익은 사랑』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