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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윤리적 주체"에 관한 연구>
-철학적 인간학의 근본물음과 레비나스의 만남-
김연숙
Ⅰ. 서론
Ⅱ. 향유적 자아와 타자
1. 몸- 향유- 분리
2. 타자와의 거리지움과 타자에로의 열림
Ⅲ. 타자와 윤리적 자아
1. 감성과 타자
2. 윤리적 자아의 주체성
Ⅳ. 결론
Ⅰ. 서론
본 논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철학적 인간학의 근본 물음에 대한 레비나스의 인간해명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랫동안 인간은 신이나 동물과의 비교를 통해서 설명되기도 하고 또는 인간의 고유한 탁월성으로 주장되는 이성을 통해 설명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되어 왔다.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인간학의 근본물음을 중지할 수 없음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자신을 형성해 가는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자기이해는 자기형성의 문제와 직접 관련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범을 선택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시대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관은 합리적 자아, 이성적 자아 또는 심지어 이들을 극단적으로 왜곡․축소하여 변형시킨 이기적 자아론이 설득력 있게 수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이르러 인간에 대한 문제는 탈주체․주체의 해체라는 극단적 주장에 도달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중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는 에고․이성중심의 인간이해에 대한 구조주의자들의 비판적 논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같은 대립을 하버마스는 언어철학적 전환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사소통적 합리성론과 이에 근거한 담론윤리학은 인간에 대한 문제보다는 이상적 담론의 조건에 관한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이들보다 윤리적 주체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성중심의 서양철학전통을 근본적으로 해체시켰던 미셀 푸코였다. 푸코는 주체의 근원으로 간주되던 이성 그 자체가 지닌 폭력성을 드러내면서 이성을 해체시켰고 주체까지도 해체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최후의 작업은 윤리적 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집중되었다. 그래서 '권력과 지식'의 미시적 그물망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던 희랍세계와 스토아 철학에서 윤리적 주체정립의 가능성을 찾았다. 그런데 윤리적 주체에 관한 그의 저서『성의 역사 』Ⅱ, Ⅲ의 부제 "자기에의 배려"와 "자기함양"이 암시하듯이 푸코는 윤리학의 문제를 '자기와의 관계'로 설정하게 되었다. 결국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리스적 철학의 전통에 머물렀고 그의 윤리적 주체안에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는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자기에의 배려'와 '자기함양'을 강조하는 푸코의 윤리적 주체는 정념에 대한 이성의 통제를 중시하는 동시에 자아와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지배-제어의 권력관계로 전환된다. 심지어 윤리적 주체에서 능동성과 자율성의 상실은 존재론적 질서에 어긋나는 것으로 된다.
이 같은 흐름과 달리 레비나스는 에고․이성중심적 주체성의 문제와 탈주체․주체의 해체의 문제를 동시에 극복하는 윤리학자로서 주목받고 있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그는 현상학의 자아론적 한계를 파악하였고 이후 후속연구에서 인간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시각의 전환을 통해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를 밝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용적 감성에 기반하여 인간의 독특한 고유성과 유일성의 의미가 인간이 지닌 윤리성에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란 자아의 외부성, 자아 밖에 존재하는 것을 총칭한다. 『전체성과 무한』의 부제 '외재성에 관한 논의'에서 말하는 외재성은 바로 타자를 의미한다. 타자(taut autre)는 구체적으로 사물세계․다른 사람(autrui)․신의 관념(le tres - Haut)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구분은 어디까지나 설명의 편의를 위해 단순화시킨 것이다. 피상적으로 본다면 사물세계의 타자성은 이기적 자아의 전체성으로 동화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나 신은 어떤 경우에도 자아에게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 다름, 절대적 타자성을 지니고 있다. 타자윤리에서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고려되는 관계에서는 사물세계와의 관계까지도 전환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사물로서의 타자는 향유적 자아에게서 욕구의 대상․노동의 질료․소유의 대상이지만 다른 사람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사물과의 관계는 욕구의 절제, 탈소유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본 논문은 레비나스가 어떻게 '윤리적 주체'로서 인간의 주체성을 정초해 가는가를 다루겠다는 논지에 따라 인간의 윤리적 자아성에 관한 설명을 중심내용으로 한다. 레비나스의 윤리적 주체로서의 인간해명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가 인간을 이성적 존재이기에 앞서 몸적 존재․향유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음이다. 요컨대 이성에 앞서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감성의 의미를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성으로부터 윤리적 주체의 고유성을 정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 논문은 이 점을 감안하여 ①타인이 들어오기 전의 인간의 존재방식을 향유의 개념과 관련지어 논하고 각각 이기적으로 분리되어진 자아들이 어떻게 ②윤리적 소통의 구조를 가지게 되는가를 열망과 초월의 개념을 통해 살펴보고 ③타자를 통해 형성되는 윤리적 자아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살펴 보겠다.
Ⅱ. 향유적 자아와 타자
1. 몸- 향유- 전체성
레비나스는 인간존재를 근원적으로 몸적 존재․감성적 존재로 본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 몸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인식과는 다르다. 몸을 가진 생명체로서의 자아는 요소적 물질세계에 놓여진다. 거대하고 익명적인 물질의 요소성으로부터 자기를 보존하면서 유지시켜 가는 것 이것은 몸을 지닌 생명 존재의 자기보존성(canatus essendi)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요소적 환경세계의 타자와 몸적 존재․생명체로서의 인간존재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레비나스는 이를 향유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향유를 의미하는 불어 jouissance는 j'ouis sens, 즉 '나는 의미를 듣는다'이다. 몸을 지닌 인간의 존재양식, 몸적 존재․감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향유라 할 때 '향유란 삶의 양식이자 영양과 내용이 되는 누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향유로서의 삶의 방식은 물질적 대상과 자아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옷, 주택, 음식, 펜, 컴퓨터, 자동차 등의 일상용품과의 관계에서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우리가 하이데거에게서 삶의 세계가 실존의 기투와 관련된 도구적 대상으로서의 의미가 강조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레비나스의 '향유'의 개념이 갖는 의미차이를 알 수 있다. 인간존재를 추상적․관념적․의식적 존재로만 이해한다면 이들은 단순히 도구적 의미가 되겠지만 몸적존재로서의 인간에게서 이들은 누림과 고통의 내용이다. 옷은 몸을 보호해주고 장식해준다. 음식은 살과 피가 되고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영양이다. 몸적 삶은 욕구 충족을 위해 외재성에 의존하게 된다. 자기 밖의 외재성으로부터 삶을 유지해 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향유적․몸적 존재의 구체적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생명체의 자기보존 욕구․자발성․육체성․벌거벗고 굶주린 원초적 육체성과 세계의 타자성의 관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나의 이로 씹는 세계의 실재, 음식물들은 나에게로 동화된다. 즉 타자의 힘은 나의 힘으로 되고, 내가 된다. 이 같은 의미에서 몸적 존재로서의 자아의 정립은 단순히 '나는 나다'라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타자성이 나의 욕구에 의해서 정복되고 자아에로 통합된다면 이는 타자에 대한 착취와 다르지 않다. 사실상 욕구는 동일자의 운동이다. 향유적 자아는 자아 밖의 것, 비아 속에서 유지된다. 즉 "자기 밖의 다른 것"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몸․육체와 세계사이에 놓여진 거리는 결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물적 욕구는 투쟁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춥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피난처를 찾는 것, 세계와 관련된 이 모든 의존은 욕구가 되고 익명적 위협으로부터 본능적 존재를 만든다.
그런데 이 같은 몸적 삶이 인간을 구속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욕구로 번창하고 행복하다. 이 같은 점에서 레비나스는 근본적으로 생명의 자발성에 동의한다. 생명의 유지는 자기를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 세계안에서 자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구축하는 것이다. 사실상 플라톤 이래 서구 전통철학은 욕구의 만족에 수반되는 쾌락을 허상으로 부정하면서 욕구에 대한 부정적 관념을 고착시켜왔다. 레비나스는 이에 대하여 욕구를 단순히 결핍으로 이해하는 것은 양심도 없는 것, 오만한 유심론(spiritualism)이라고 비판한다. 인간의 노동은 향유와 요소의 간극을 즉 생명체와 요소적 환경세계의 거리를 메워준다. 노동은 익명성으로 나타나는 물질을 원료로 하여 그로부터 사물을 만들어내며, 물질을 자아의 목표에 맞게 규정한다. 통제할 수 없는 요소의 소요와 불가해한 요소의 깊이는 노동에 맡겨진다. 노동은 세계의 타자성을 자아에로 환원시키고 동화시키는 힘이다. 노동은 소유와 경제를 통해서 자아의 분리를 가져온다. 분리된 존재는 수집하며, 수집은 거주 또는 집, 주거로 구체화된다. 집의 내면성은 생명에 영양을 주는 요소들 안에서의 특수한 장소이다. 나는 주거에서 나 자신에게로 몰입할 수 있다.
향유적 자아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행복은 충족시키는데 있지 억제하는데 있지 않다. 이는 행복의 '이기주의'적 측면인 것으로 향유로서의 자아는 "각자 그 자신을 위해서"라는 표현처럼 그 자신을 위한다. 이 말은 남의 말을 들을 귀를 갖지 않은 자가 빵 한 조각을 위하여 살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자신을 위하고, 과식하는 사람이 배고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굶주린 사람을 생판 모르는 남처럼 대하는 것처럼 그 자신만을 위한다. 이 같은 의미에서 향유의 자기충족성은 이기주의, 동일자의 동일성의 지표이다. 향유 안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나이다. 타자에 대한 참조가 없는 이기주의자로서 고독할 것도 없이 나 혼자이다. 전적으로 타자에 대하여 귀 막고, 모든 의사소통을 거부하면서 나 혼자이다. 향유․행복은 개별화의 원리이자 자아의 내면성을 말해준다. 향유가 열어주는 내면성은 분리 그 자체이다. 분리는 자신의 집에 머무는 것이며, 자아에로 몰입하는 것이다.
2. 타자와의 거리지움과 타자에로의 열림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향유적 자아는 자기중심적인 자기동일시(l'identification du moi)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자기이외의 것 즉 타자를 자기안으로 흡수한다. 이것이 바로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la reduction de l'autre au meme)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자아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인간의 내면성은 타인(autrui)의 내면성과 충돌할 수 밖에 없는가? 필연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사르트르가 말하듯이 적대적일 수 밖에 없는가? 적어도 레비나스에게서는 그렇지 않다. 레비나스 타자윤리의 강점은 바로 생명체로서 인간의 자기보존성, 즉 자아의 내면성을 향유의 측면에서 인정하는 동시에 타자의 내면성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확립하는데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향유의 이기주의는 타자에 의존하여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자기를 유지한다. 즉 타자로부터의 자신을 분리시킨다. 향유적 자아의 내면성, 분리는 자아의 개별화를 의미한다. 내가 되는 것, 자신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집에 있음, 나의 시간, 분리, 행복 이들은 모두 같은 맥락에 있다. 이기주의, 향유, 감성, 내면성 등은 모두 자아들의 분리를 설명해준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자아들간의 절대적 분리, 나와 너의 분리, 자아와 타자의 분리는 윤리적 관계의 성립에 절대적으로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내면성에 의해 자아와 자아들 사이의 근본적 분리가 이루어지며, 이는 동시에 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침해나 자기화, 섣부른 동화나 통합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아와 자아들 사이의 분리가 이처럼 절대적으로 확고하다면 이들 사이의 상호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동시에 자아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내면성의 개별화로 말미암아 자아와 타자사이에 무너질 수 없는 경계가 그어진다면, 이들 사이에 자기동일시나 폭력적 소통이 불가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윤리적 소통의 실마리도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제기도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만일 자아와 자아들 사이에 즉 자아와 타자, 동일자와 타자, 나와 너 사이의 소통이 가능하다면, 더욱이 윤리적 소통이 가능하다면 어떤 계기를 통하여 가능해지는가? 또한 자기보존성을 지닌 이기주의적 존재가 어떻게 타자의 타자성을 빼앗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에 들어가는가?
여기에서 레비나스는 전통적인 이성적 인간이해로부터 근본적인 시각의 전환을 가진다. 레비나스는 모든 의미를 자아로부터 구성하는데서 타자에 대한 폭력이 초래된다고 본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세계의 모든 것,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과거의 모든 것,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 한치 앞도 예측불가능한 나의 남은 생, 나의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들, 더욱이 분명이 있는 것이지만 도무지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죽음, 그리고 인류의 전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는 인간의 얼굴의 현현! 자아는 이들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아 표상하고 개념짓고 규정지을 수 있는가? 유한한 자아로서의 그릇은 무한으로 나타나는 존재의 타자를 담아낼 수 있는가? 나를 넘쳐나는 충만한 존재를 유한한 자아의식의 능동적 사유작용에 근거짓는 작업이 지닌 문제는 무엇인가? 보다 작은 그릇이 보다 큰 내용물을 담아낼 수 있는가?
자아의 이기성에 대해서 무한한 윤리적 저항을 현현하는 타인의 얼굴과 그 같은 현현에 노출되어 있는 유한한 자아, 이 같은 상황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유아론적 자기중심성을 고집할 수 있는 것일까? 타인의 있음, 존재사실, 타인의 얼굴을 마주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자아의 사유작용를 중심으로 타자를 구성하는 표상(re-presentation)의 방식이 문제된다면, 보다 공정하게 타자를 대하는 방식이 있는가? 우리가 공정한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타인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적어도 그를 나에게로 통합시키거나 나의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의식의 능동적 작용에 의거하는 타자와의 관계말고 또 다른 인식의 방법이 있는가? 자아와 타자 사이에 분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연결시키는 윤리적 관계 형성이 어떻게 가능한가?
레비나스는 향유의 내면성에 의해 형성되는 자아들간의 분리, 닫힘, 패쇄성이 내면성으로부터의 탈출을 방해해서는 않된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기를 유지하면서 거주하는 자아에게서 세계의 타자성은 자아의 영향권으로 떨어진다. 이 같은 의미에서 물질적 세계의 타자성은 형식적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의미하는 윤리적 타자, 형이상학적 타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아의 지배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내용으로서의 타자성이다. 다시 말하면 타인으로서의 타자는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로 통합시킬 수 없는 내면성, 절대적인 다름(absolument autre), 절대적인 타자성을 지녔고 아울러 이같은 타자성을 존중해주는 관계에서만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절대적 타자성으로 나타나는 타자와 자아가 윤리적 관계를 맺는 방식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레비나스의 답은 타자에로의 초월(la transcendance)과 타자를 향한 열망(desir)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을 안으로 향하여 자기중심적 내면성을 유지하는 존재인 동시에 밖으로 향하여 타자를 향한 존재로 설명한다. 내면성을 통하여 분리되어진 자아들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패쇄적으로 분리된 운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열망한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적 내면성을 지닌 자아성으로부터 다른 자아에로 향하여 초월해 간다. 이 같은 초월, 자아로부터 타자에로의 초월, 나로부터 타인에로의 초월이야말로 윤리적 관계형성의 올바른 계기라 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열망과 타자에로의 초월이야말로 자아가 타자를 대상화하여 자아 안으로 포섭하고 자기화하고 장악하고 동일시하는 방법과 구분된다. 이 같은 초월적 관계에서 타자의 근본적 다름, 타자성은 절대적으로 보존되며, 존중받을 수 있다.
열망의 개념은 욕구(Besoin, need)의 개념과 비교하면 그 뜻이 더 분명해진다. 욕구는 항상 만족을 얻고자 한다. 이는 자신에게 결핍된 것, 불완전한 것을 얻으려는 인간의 지향을 나타낸다. 이에 반하여 열망은 자신의 빈 곳을 채우려는 몸짓이 아니다. 열망은 자아의 바깥을 향해 있는 것으로 외재성, 타자의 다름, 낯섬을 향한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채워질 수 없다. 외재성에 대한 열망은 만족될 수 없으며, 채워질 수도 없으며, 완성될 수도 없으며, 통합될 수도 없다. 열망은 열망하는 것에 도달할수록 커진다. 타자에 대한 열망은 타자를 타자로서 열망할 뿐이지 타자를 자기에게로 통합시키거나 동화시키는 구조가 아니다. 그리고 타자가 독립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요컨대 자아는 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타자에게로 향한다. 타자윤리에서 열망은 유한한 자아가 무한한 존재의 타자를 대하는 방법이다. 타자를 열망하는 태도는 타자를 자기 안으로 통합시키거나 자기화하는 작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열어 젖히고 헌신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열망과 초월은 자아의 열림, 개시, 내 집의 현관문을 열어 주고 타자를 환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자에게로 열려진 문, 그것은 타자에 대한 초월적 열망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와의 충만한 관계,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Ⅲ. 타자와 윤리적 자아
주체성속에서 본질, 존재자, 차이의 연관성이 느슨해지는 예외를 이해하는 것; 주체의 실체성속에서, 내 안의 유일한 것의 단단한 알맹이에서 유사하지 않은 나의 정체성 속에서 타자를 대속하는 것을 아는 것; 의지에 앞서서 어떤 감사도 없이 수용성, 정념, 유한성보다 더 -그리고 다르게- 수동적인 수용성에 따라서 초월의 충격에 노출되는 것과 같은 이 같은 희생을 생각하는 것; 이같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민감성(susceptibilite)으로부터 세상 안의 이론과 실천을 끌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l'au dela de l'essence 라고 이름 붙인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1. 감성과 타자
그렇다면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의 몸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가? 더욱이나 인간의 몸과 윤리적 자아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몸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에서 몸만큼 다의적 함의를 지닌 경우도 드물다. 修身․禁慾․靈魂의 監獄․生慾之官․生體制御․살 덩어리․살.... 비록 이들 몸에 대한 다양한 언표들이 복합적 함의를 지닐지라도 이들은 모두 몸이 인간이해에 중요한 한 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타자윤리에서 몸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앞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몸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형성하는 생명의 자기보존성, 생명체로서 자기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향유적 자아의 자아성(ipseite du moi), 존재의 전체성을 지니고 있다. 요소의 익명성으로 나타나는 무한한 자연 앞에서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유지해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요소적 세계로부터 배불리 먹고 마시고 휴식하면서 영양을 취하는 것이다. 생명체의 자기보존성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인간은 그야말로 귀 막고 눈 감고 오직 자기자신의 욕구의 충족에 몰두하는 독불장군, 이기주의자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요소적 자연세계에서의 생명체로서의 몸적 존재의 존재양태가 전체성을 띌 수 밖에 없다면 타자로 이행한다는 것, 타자를 열망하고 타자에로 초월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극히 개인의 자아성(egoity)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감성이 타자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부버에 의하면 몸은 자의식안에 단독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보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몸은 그것이 나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이를 "존재의 바깥에 존재의 무게중심을 두는 것"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이 의미를 우리의 감관 즉 눈․코․귀․입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눈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다. 눈과 관련된 한자어 見은 "볼 견"과 "나타날 현"의 두가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주의깊에 보는 것도 있지만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보여지는 것도 있음을 나타낸다. 귀 역시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 입은 우리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행위는 대다수가 타자가 있기 때문에 행해진다. 이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본다면 인간의 감관은 자아의 능동적 측면 뿐만 아니라 타자로부터 영향받는 수용성의 측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자에게 노출되고 보여지는 감성적 측면의 의미를 다시 한번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의식․이성․인식이 추상적이라면 감성은 대상에 직접 부딪히는 직접성․민감성․상처받을 수 있음을 그 특징으로 한다. 감각의 직접성은 상처에 노출되는 것, 향유에 젖는 것이다. 더욱이 감각적 즉자성은 더 할 수 없는 풍부함, 만족이자 요소의 심층에 닿는 것이다. 몸을 배제한 채 인간을 관념적․추상적 존재로만 이해할 때 인간은 이론적 관상과 고요함의 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때 지각․기억․기대 등은 본질적으로 이미 감각으로부터 멀어져 무감각한 것으로 되며 의지․욕구․배고품 등으로부터 이미 멀어져 있다. 이에 반하여 향유는 이미지로 향하지 않는다. 몸적 존재, 피와 살을 지닌 인간존재는 더 이상 '자기-확실성'으로 나타나는 주체가 아니다. 먹거리와의 관계는 인식과 행위의 모험이 아니며 외연으로부터 분리된 사유하는 자아, 몸으로부터 분리된 코기토가 아니다. 몸에서 피와 살을 지닌 개별화된 주체는 주제화되거나 일자에로 통합될 수 없는 존재의 저편에 있다.
그런데 세계 안에서 몸적 존재 그 자체를 결핍이라 할 때, 타자를 인식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타자를 인식하는 것은 배고픔을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수사학이나 관념론을 넘어서는 타자와의 관계를 볼 수 있다. 감성은 이제 타자를 위한 것으로 전환되어, '다른 이의 필요에 배려하는 것', '베푸는 것'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향유도 에고의 만족에 자족하여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찢어내는 희생으로 전환된다. 이를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감성은 '다른 이의 필요에, 즉 그의 불운함과 잘못을 배려함'으로써, 즉 주는 것으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주는 것은 나자신을 희생하면서 나로부터 찢어내는 것일 때만 의미를 가진다. 나를 희생하면서, 나로부터 찢어냄은 향유의 특징으로 자기 안에서 만족해 있는 존재로부터 즉 자신의 입으로부터 빵을 넘겨주는 존재의 경우를 의미한다. 타자를 위한 존재(l'un-pour-l'autre)는 단지 피와 살의 존재들 사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타자적인 것은 주체에 저항하고, 고통을 통해 내면성의 주체에 영향을 준다. 감성․몸은 자기 안에 만족해 있는 향유이자 타자에 대한 보여짐으로서 상처 입을 가능성이자 타자를 위한 존재의 조건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감성은 상처받을 수 있음, 타자에게 보여지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지만, 냉정한 초연함에서가 아니다. 타자를 위한다는 것은 '맛을 음미하는 입'으로부터 빵을 잘라내는 것이다. 요컨대 자족해 있는 향유에서 자기-동일성에 대하여 가하는 공격이다. 이같은 개방성은 지갑을 여는 것, 내집 대문을 여는 것, '내 밥그릇을 굶주린 사람에게', '불쌍한 사람을 나의 집으로 들이는 것'이다. 요컨대 감성의 직접성은 나의 신체성이지만, 윤리적으로 본다면 신체성의 근본적 의미는 타자를 위한 것이다.
2. 윤리적 자아의 주체성
이제 논자는 본격적으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인간의 인간임, 인간의 고유성과 유일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윤리적 주체에 관하여 논할 것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고유함,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주체성의 근거를 구조주의자들처럼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데카르트-후설-하이데거-사르트르에 이르는 의식철학자들에게서처럼 인간 주체성의 근거를 에고의 사유․의식에 두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특징짓는 고유성과 유일성이 될 수 있는가? 현대 사상의 흐름에 있어서 극단적인 개인의 자율성은 극단적 구조 결정론에 의해 비판되기도 하고 일부는 탈중심화, 탈주체화, 주체의 완전분해로까지 치닫고 있다. 레비나스의 경우 철저히 자아론적 의식철학은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의지의 개별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의 개별성과 단독성이야말로 역사의 심판 앞에 사죄하고, 타인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설명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형성되는 윤리적 주체의 고유한 주체성의 문제를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를 넘어서』에서 철저히 해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체의 고유성은 자기 밖으로부터 선택받고 불리어지는 존재, 타자의 지명에 의해 형성되는 대체될 수 없는 존재, 타자의 불리움을 받고 응답해야할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의 의미를 통해 정초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경우인가? 먼저 타자가 나를 부르고 나를 지명하는 경우를 살펴본다. 길을 묻는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물가로 아장아장 다가가는 갓난 아가는 나에게 무엇을 현현하는가? 이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로서 보여주고 계시하고 현현하는 바는 무엇인가? 인간은 인간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레비나스는 모든 인간이 존재사실로서 보여주는 윤리적 요청을 '타자의 얼굴'로 설명한다. 그러면 타자의 얼굴은 나의 얼굴을 향해 무엇을 말하는가? 타자로부터 오는 책임, 주체의 수동성으로부터 오는 책임은 자기-의식에 기원하지 않는다. 즉 자기책임이나 자기근원적 자발성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온다.
레비나스는 이같은 상황을 가까움(proximite)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가까움은 타자를 완전히 자기화하는 통합이나 타자에 대해 완전히 무관한 분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타자의 가까움은 타자에 대해서 무심할 수 없이, 자기의 동일성 속에서 편안히 거할 수 없이, 타자의 어려움과 이웃의 고난을 방관할 수 없는 자아성을 설명한다. 그래서 편안히 자기 자신을 유지하면서 자기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부터 태양아래의 자기자리를 부끄러워하는 마음, 타자에게로 향하고 접근하면서 타자와 가까워지는 영혼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웃의 가까움으로부터 오는 책임은 자발성과 무관하게 타인에게 영향 받는다.
타자에 대한 책임, 타자를 위한 책임(responsabilite pour les autres)은 어떤 선행적 위임 없이 응답하는 것으로, 이것은 어떤 자유로운 선택보다 근원적인 것, 선행하는 것이다. 타자로부터 오는 책임의 요청의 개념이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윤리적 맥락에서는 쉽게 이해된다. 예를 들어 보자. 유치원 어린이들의 캠프장에서 일어났던 "씨랜드 화재사건"에는 어린아이들을 구하고 자신은 숨져간 한 선생님의 일화가 있다. 거기에는 화재 속에서 도움을 호소하는 어린아이들과 선생님인 나와의 관계가 있다. 울부짖는 어린이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선생님의 자유의지로부터 오는 책임인가? 그것은 선생님의 주체에 근원을 두고 있는가? 보다 근원적으로 그것은 그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들의 호소를 받아들이는 선생님과 선생님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어린 타자들의 관계가 문제된다. 선생님은 그 사건에서 사실상 자기 자신에 근거를 두고 있는 어떤 권리나 의무를 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선생님에게 직접적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면에서는 그와 무관하게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자기 원인적 책임을 넘어서는 곳으로부터 과중하게 그의 목숨까지도 담보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상황은 어떻게 적절히 설명될 수 있는가?
바로 이와 같이 타자의 호소를 냉정하고 초연하게 외면하지 못하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타자에게 귀기울이는 존재자를 레비나스는 에고와 구분하여 윤리적 자아(soi)라고 구별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윤리적 절박성은 고통과 희생을 요구한다. 이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왜 레비나스가 '어떤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une susception plus passive que la receptivite)으로서 감성의 윤리성을 강조할 수 밖에 없는 가를 이해할 수 있다. 아무도 자신의 희생을 즐겨하지 않는다. 그러나 타자의 시선에 노출되어지는 사람, 타자에게 불리어지고 지명되는 사람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영향받게 되는 수동성으로 나타난다. 지명받는 이로서 '주체의 수동성'은 합리적이고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자율적 주체'의 개념과 분명히 구분된다. '주체의 수동성'은 선택이 아닌 선택되어지는 것이며, 어떤 수동성보다도 더 수동성으로 나타나는 책임을 말해준다. 타자에게 지명되는 수동성에서 타자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감수한다는 것은 사실상 타자를 대신하여 고통받는 것이고 타자를 위해 희생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레비나스는 이를 '代贖(substitution)'으로 설명한다. 대속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적 자아의 핵인 것으로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감수함, 타자의 가까움의 극치라 볼 수 있다. 대속은 자신의 합리적 선택에 의한 행위이기 보다는 자신과 무관한 것에 대해서 즉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에 대해서까지도 또는 다른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고통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지는 존재를 의미한다. 타자의 호소․부름․요청을 감수하는 윤리적 자아에게서 자아는 형상(에이도스)에 의해 주조되는 무감각한 재료가 아니다. 레비나스는 존재의 고통을 타자로부터 영향 받고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 상처로 노출되는 존재, 타자에게 보여지고 고통을 대리하고 볼모로 잡힌 존재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존재를 무엇으로 부를 수 있는가? 여기서 레비나스는 전환을 강조한다. 전환은 실체변화․초실체화를 의미한다.
"전환은 주체를 육화하는 궁극적 비밀이다. …… 이 같은 전환, 자기의 이익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존재사건과 다른 것이 바로 주체성이다. 전환은 박해의 상처속에서 박해자에 대한 분노로부터 책임으로 이행해 가는 것, 이 같은 의미에서 고통으로부터 타자에 대한 속죄로 이행하는 것이다. "
레비나스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전환은 자기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히지 않는 존재, 자신의 존재관심을 넘어서 타자로부터 오는 윤리적 절박성을 받아들이는 자, 박해받는 고통속에서 살아남은 자가 박해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으로 향하는 것, 다른 사람의 고통을 돌아보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전환은 에고의 수축이자 동일성의 이면으로 가는 것이며 양심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기적 자아로부터 윤리적 자아로의 전환을 통해 형성되는 주체성을 '동일자안의 타자'로 나타낸다. 그것은 내가 타자의 호소와 요청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내 안에 타자의 크기가 켜져 가고 그에 비례하여 타자에 대하여 더욱 큰 책임을 느끼면서 커져가는 윤리적 자아를 의미한다. 즉 이기적 자아로부터 윤리적 자아로 돌아가면 갈수록, 나의 이기심을 버리면 버릴수록, 나는 더욱 더 나 자신이 도덕적 짐을 진 사람임을 깨닫는다. 타자에로 불리어지고 타자에게 보여지는 감성적 수동성에서 타자에 대해 책임을 짊어지는 주체성을 레비나스는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동일자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수축, 내 안에 있는 존재의 원리를 깨뜨리면서 휴식의 저편에서, 자기 자신만 염려할 수 없음, 동일성의 경계 저편에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내 안에 있는 타자에 의해 즉 가까움에서 체험되는 수동성은 동일성의 소외가 아니라, 윤리적 자아로의 전환의 수동성이다. 이같은 과정은 소외가 아니다. 왜냐하면 대속에서 나는 대치될 수 없는 사람으로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웃에 대한 책임, 열망, 인질로서의 대속이야말로 주체의 주체성이자 고유성이다. 이웃에 의해 지명되어 부담 지워지는 자아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대치될 수 없는 존재이자, 선성의 담지자이다. 타자의 요청에 응답하는 자아의 고유성은 타자에 의해 사로잡히는 존재와 고통받는 상처에서 가능해진다. 여기서 상처는 타자가 요구하는 도덕적 요청의 부담 속에서 고통받는 이, 타자에 의해 고무된 일자를 표현한다. 윤리적 자아는 이웃에게 다가가며 대가를 바람이 없이 응답한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아의 고유성이 발생한다. 가까움에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자아의 고유성 그것은 동일자 안의 타자이다. 그것이 바로 나이고, 다른 이에 대하여 인질인 나이다. 대속에서 나의 존재는 나에게 속할 뿐, 다른 이에게 속하지 않는다. 대속에서 나는 윤리적 주체의 고유성을 확보한다.
Ⅴ. 결론
앞의 논의에서 논자는 레비나스의 인간이해 즉 윤리적 주체로서의 인간해명을 살펴보았다. 윤리적 자아로서 인간의 인간임을 주장한 사람은 레비나스 이전에 수 많은 선현이 있었다. 그런데 유한한 자아로서의 인간이 무한성을 계시하는 존재의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인간의 윤리적 주체성의 형성이 가능하다고 해명하는 레비나스의 작업은 그 이전의 철학적 윤리학자들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특히 현대사상의 흐름에서 레비나스의 공헌은 탈주체화되어가는 인간의 주체성을 윤리적 주체로 재정립했다는 점이며, 윤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관념화되고 추상화되는 윤리학으로부터 인간의 감성적 수용성에 기반한 실천윤리학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앞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레비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등과 같이 인간의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성에 앞선 감성, 의식에 앞선 몸이 인간에게 보다 근원적인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 타자와 분리되는 몸․생명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해되는 자아․세계․타자와의 관계는 윤리학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윤리로의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생명체로서의 몸과 환경세계와의 관계는 욕구와 향유의 관계로서 인간은 실로 탐욕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의 향유적 자아는 그가 비판하는 전통철학에서 타자를 자기화하는 동일자의 전체성과 다를 것 없다. 그러나 인간의 몸․감관은 동시에 타자로부터 영향받는 수동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기 의지를 벗어나 그 스스로를 현현하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너는 나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와 같은 무한한 윤리적 저항을 현현하는 타인의 얼굴에 자아는 노출되어진다.
그렇다면 타자에게 노출되어지는 존재로서 자아의 자아성의 특징은 무엇인가? 타자에로의 열망과 초월, 타인의 얼굴의 현현에 맞닥뜨리고 타인의 윤리적 호소에 노출되는 몸적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타자의 소리를 듣고 타자의 존재를 보고 타자의 요청에 귀기울이는 자아, 그것은 바로 타자를 위한 존재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는 타자의 호소에 응답의 책임을 지는 주체를 의미한다. 타자에게 노출되고 타자에게 열려지고 타자에게 제공되어지는 인간의 몸은 타자에게 응답하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연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감성의 형태에서 존재의 자기보존성의 전도를 보게 된다.
타자에게 보여지고 노출되어지는 자아는 이제 심지어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부터 오는 도덕적 책임을 강요받는다. 타자로부터 오는 도덕적 책임은 사실상 주체에게 부담이고 고통스럽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미 추상적이고 관념적 자아가 아닌 몸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서 타인에게 노출되어지고 타인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신의 빵, 자신의 살과 피,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내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 같은 윤리적 자아의 절박성은 바로 그 누구에게도 아닌 나와 관련된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자신의 빵을 향유하는 것으로부터 타자의 기아와 요청에 귀기울여 나의 빵을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이기적 자아로부터 윤리적 자아에로의 실체변화가 구체화되는 실천(Praxis)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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