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윤회하는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세우는 계획은 범위가 무척 넓고 그 내용 또한 자세하다.
우리는 단지 삶의 시련만 선택하지 않는다.
부모를 고르고 (부모 또한 우리를 고른다),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를 고르며, 다니게 될 학교와 살게 될 집,
만나게 될 사람들과 갖게 될 관계들도 고른다.
방금 만난 사람인데 어디선가 본 듯한 친숙한 느낌을 받는다면
그 느낌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아마 태어나기 전에 만나기로 계획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장소나 이름, 이미지나 문구를 저음 접했는데도 이상하게 친숙하다면
그것은 태나기 전에 의논한 전쟁 계획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여러차례의 전생 계획 세션에서 이번 생에서 쓸이름을 사용해 보고,
이번 생에서 걸칠 육체의 겉옷을 입어본다.
바로 그러한 연습 때문에 물질계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일이 생긴다
기시감旣視感을 종종 전쟁 경험과 연결시키고는 하는데,
실제로 기시감은 전생 계획의 기억들인 경우가 많다.
지구로 들어올 때 우리는 영혼이었던 우리의 기원을 잊는다.
우리는 몸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처럼
자발적으로 기억상실을 택하리라는 것을 이니 알고 있다.
장막뒤benind the veil'(‘저승에’ 라는 뜻의 영어 표현)라는 표현은
이러한 망각 상대를 가리킨다.
신성한 영혼인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기억해 내는 과정을 통해
자기를 더 깊이 알게 될 것이기에 우리의 진짜 정체성을 잊는 쪽을 선택한다.
우리는 이처럼 더 깊은 앎을 얻기 위해 기쁨과 평화, 사랑의 세계인 비물질영역을 떠난다.
거기서는 자신의 반대항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빛만 있는 세계를 상상해 보라.
어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빛을 어떻게 이해하고 온전히 음미할 수 있겠는가?
빛이 무엇인지 더깊이 이해하게 하는 것,
궁극적으로 기억해 내게 하는 것은 바로 빛과 어둠의 대조이다.
물질계에는 이 대조가 존재한다.
물질계의 큰 특징이 다름 아닌 이원성이기 때문이다.
오름과 내림이 있고, 더움과 차가움이 있고, 좋음과 나쁨이 있다.
우리는 이원성에서 생기는 슬픔을 통해 기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혼란이 존재하기에 평화의 의미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으며,
때로 증오를 품기에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적인 면을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인간의 신성을 알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당신은 원래 온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는 곳에 살았다.
당신은 이 음악으로 지극한 기쁨과 눈시도록 빛나는 아름다움을 누린다.
당신의 생이 멈추지 않는 한 이음악이 늘 들려온다.
한 번도 끊긴 적이 없고, 다른 음악이 연주된 적도 없다.
어느 날 당신은 이 음악을 늘 들어왔기 때문에
실은 정말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다른 음악을 전혀 알지 못하기에
그 음악 역시 진짜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음악을 진실로 알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첫 번째 방법은
그 태초의 집Home에서 들리던 음악이 전혀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거기서는 어쩌면 불쾌하고 거슬리는 소리가 나는 다른 음악이 연주될 수도 있다.
당신은 이처럼 반대를 경험함으로써 태초의 집에서 그 음악을 새롭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태초의 집의 음악이 없는 곳으로 가
기억으로 그음악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감동적인 소리를 직접 만들어 내는 경험을 가지봄으로써
그 음악의 아름다움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훨씬 더 어렵지만 그만큼 더 확실한 세 번째 방법도 있다.
당신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바로 태초의 집의 음악이 연주되지 않는 곳으로 가서 그것을 다시 만들어내되,
그 소리를 깡그리 잊어버린 상태에서 다시 만들어낸다면 그
음악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란 것이다.
태초의 집의 음악을 기억해 내는 경험,
그리고 그 아름다운 교향곡을 새로 써보는 경험은
그 음악 안에 담긴 장대함을 가장 넓고 깊고 온전하게 알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당신은 세 번째 방법 을 쓸 수 있는 세계로 용감하게 여행을 떠난다.
집에서의 기억을 잃어버린 당신은 이곳에서 유일하다고 알고 있는 음악을 듣는다.
그 속에는 아름다운 노래도 있지만, 불협화음으로 귀를 괴롭히는 노래도 있다.
당신은 이처럼 귀를 괴롭히는 음악을 들으며 그
와는 다른 음악을 창조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고
결국 소망을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당신은 곧 직접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새로운 세계의 시끄러운음악 소리 때문에
혼란스럽고 음악에 마음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바깥 세상의 굉음을 멀리하고
마음속 선율에 귀를 기울이면서 점점 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간다.
마침내 명작을 만들어냈을 때 당신의 기억 속에서 무언가가 떠오른다.
당신이 만든 대작은 바로 태초의 집에서 연주되었던 그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사실도 떠오른다. 당신이 바로 그 음악 이라는 것!
그 음악은 당신이 밖에서 들은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음악이 곧 당신이었고, 당신이 곧 그 음악이었다.
그리고새로운 곳에서 스스로를 만들어냄으로써
당신은 이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다.
태초의 집 을 떠나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방식으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 갈망하는 경험이다.
영혼은 절대 신성the Divine의 불꽃이다.
인격체(인간)는 일정량의 영혼 에너지가 육체의 옷을 입은 것이다.
인격체는 육체의 생에서만 지속되는 일시적인 특징들과
죽음 이후 영혼과 다시 합쳐지는 불멸의 핵으로 구성된다.
영혼은 광대하며 비단 하나의 육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편 각 인격체는 영혼의 깊은 사랑을 받는다.
중요한 것은 인격체가 자유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시련들은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거부될 수도 있다.
지구는 인격체가 태어나기 이전에 쓴 대본을
그대로 따르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하는 무대와 같다.
우리는 삶의 시련에 분노와 적개심으로 대응할 것인지,
아니면 사랑과 연민으로 대응할 것인지 그 대응 방법을 선택한다.
시련을 우리 스스로 계획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가 분명해지며 선택은 훨씬 쉬워진다.
육체라는 옷을 입고 있을 때 영혼은 감정을 통하여 우리와 소통한다.
기쁨과 평화, 신남 같은 감정은 사랑의 영혼인 우리가
우리의 진실된 본성과 일치되게 행동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며,
두려움과 의심 같은 감정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놀랍도록 섬세하게 에너지를 받아들이는(또한 전달하는) 우리의 몸은
지금 내가 나를 표현하고 있는 방식이 진정한 내 자신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감정을 통해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