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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유럽 1945~2005] 2권 22장
22장. 구유럽과 신유럽
만약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나는 문화로 시작하겠다. – 장 모네(유럽 통합의 아버지)
실제 작동방식에 이러저러한 결함들이 있다고 심각하게 지적될 때조차 유럽인을 하나로 결속시킨 이것은 바로 <유럽식 사회 모델 Eruopean model of society>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는 <미국식 생활 양식 American way of life>과 대비될 때 비로소 그 뜻이 더 분명해진다. (22장 맨 뒷 문장)
- 90년대 정치의 분열적 기질은 과거에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유럽 나라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유럽에서도 중앙집권적 통치의 구속을 벗어던지려는, 대규모의 행정적 지방분권을 경험했다.
- (스페인)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이 오랫동안 요구했던 자치가 신헌법에서 인정된 스페인에서는 카탈루냐가 한 세대만에 자체의 언어와 제도, 통치 의회를 갖추어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로 등장했다. 1993년 스페인의 17개 자치 지역중의 하나인 카탈루냐는 스페인의 국민 총생산의 5분의 1을 책임졌다.(수도 바르셀로나) 600만명의 카탈루냐는 번영했지만 200만 거주자중 대다수가 새로 이주해 들어온 바스크 지방(스페인 북부, 빌바오, 바스크 독립 무장단체ETA)의 오래된 공업지구는 쇠락. 이주자들은 분리주의 운동에 무관심. 바스크 지역 주민의 18%만이 지역 자치를 위한 독립에 지지를 표명.
-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반골 지역은 북부의 국경 지대. 현지 주민 대다수는 이탈리아어보다는 프랑스어나 독일어, 슬로베니아어를 사용. 이 지역들은 브뤼셀의 유럽연합이 교부하는 각종 지역보조금과 기타 장려금의 혜택을 입음. 이탈리아는 1970년 이후 다섯개의 자치주에 열다섯개 지역으로 세분. 지방의 창설은 이탈리아인들에게 부유한 북부와 의존적인 남부 사이의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불화를 일깨움. 그리고 이 때문에 초래된 분노가 정치적으로 표출될 기회를 제공.
-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는 매우 새로운 현상인 부자들의 분리주의가 나타났다. 1980년대 말 밀라노를 중심으로한 롬바르디아 주의 일인당 지역 총생산을 전국 평균의 132% 이탈리아의 장화 발가락 부분에 있는 칼라브리아의 총생산은 전국 평균의 56%에 불과.
- (프랑스) 미테랑 때 제한적인 행정상의 지방 분권이 시작되었고 제도와 재원을 지방에 분산하려는 시도가 있었음. 그러나 뚜렷한 역사적 정체성을 지닌 알자스나 프랑스의 바스크 지역조차 파리와의 유대를 끊는데 큰 관심을 보지지 않았으며 오직 코르시카섬만이 민족 분리운동이 등장.
- (영국) 웨일스는 1536년 웨일스 왕가의 자손이었던 헨리 8세 때 잉글랜드로 흡수되어 그 지배를 받았다.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으면서 공업의 쇠퇴와 실업으로 황폐. 스코들랜드 민족주의는 북해 유전 발견과 유럽 공동체의 지역정책으로부터 큰 수혜를 받음. 스코틀랜드는 1707년 통합법으로 잉글랜드와 결합되었지만 언제나 별개의 나라였다.(G-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독자적인 민족적 정체성과 영토를 가진 ‘나라’가 맞지만 외교나 국방 같은 국가의 핵심권한은 하나의 연합정부(UK 정부)가 행사.) 진정으로 그들이 자의식을 결정한 것은 우월감과 원한이 기묘하게 뒤섞인 감정
-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를 가르는 해협은 폭이 80킬로미터도 안 되지만 두 사회의 감수성 사이에 벌어진 간극은 지금까지도 광대하다. 스코틀랜드 민족주의가 다른 무엇보다 잉글랜드인에 저항에서 비롯했던 반면 얼스터(북아일랜드)의 신교도 주민의 민족주의적 애국심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연합>내에 남으려는 절실한 욕구에 있었다.
- (독일) 구소련 서쪽에서 유럽 최대의 국가였던 독일은 비교할 만한 분리주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다. 이는 독일 역사의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나치 시대 이후의 독일이 이미 진정한 연방 공화국이었기 때문이다. 현대 독일의 주는 국민의 일상생활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분야, 즉 교육과 문화, 환경, 관광, 지역의 공공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에서 실질적으로 재정과 행정의 자율권을 행사했다.
- (벨기에) 벨기에 이야기는 20세기 말 분리주의의 물결이 휩쓸고 간 이후에도 어째서 서유럽 국민 국가들은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는지 밝혀 줄수 있다. 1990년대가 되면 전통적으로 벨기에 산업 자원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탄광업과 제철업, 슬레이트 산업, 금속 공업, 섬유업 등이 사실상 소멸.
-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플란데런 지역(북부,네덜란드어)의 경제성장율은 왈론(남부,프랑스어)에 비해 거의 두배로 높음. 플란데런 사람들은 새로이 확보한 경제적 지배력에 걸맞은 정치적 이익을 점점 더 많이 요구. 길지 않은 벨기에의 역사 대부분에 걸쳐 가난한 농업지역이었던 플란데런 사회는 공업화된 도시 지역인 프랑스어권 왈론 사람들의 지배를 받았다. 벨기에는 세개의 지역, 즉 플란데런 지역, 왈론 지역, <브뤼셀-수도>로 분할되었고 각각은 (전국 의회에 더하여) 자체 의회를 가졌다. 그 다음에 네덜란드어권, 프랑스어권, 독일어권으로 이루어진 세개의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브뤼셀은 최소한 주민의 85%가 프랑스어를 사용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두 언어 사용지역으로 선포됨.
- 결과적으로 벨기에는 이제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고 두개의 국가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권위들은 서로 중첩되고 중복되어 천조각들을 이어 붙인 퀼트 이불보처럼 되어 버렸다. 모든 주류 정당들이 결국에는 언어와 공동체의 노선에 따라 분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벨기에 간단히 분할되면 그만일 텐데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1. 분리주의 대의는 세대가 거듭되고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그 절박함을 잃음. 종교 예배식이 쇠퇴하고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가 늘어났으며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가 이루어져 전통적 정당들의 지배력이 약해짐. 2. 벨기에는 부자 나라. 현대 벨기에의 주민 대다수에게 삶은 평온하고 물질적으로 충분. <플란데런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던 번영이 언어 공동체의 분노 정치를 완화함. 3. 경제보다는 지리와 관련. 서유럽 국가들이 이제는 자국 백성에 대한 권위를 독점하는 독립적인 민족 단위가 아니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점차 다른 무엇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 (유럽 연합) 완전한 유럽 연합을 향한 행동의 공식 장치는 1987년의 단일유럽법SEA에 제시되었다. 그 과정을 진척시킨 진정한 동력은 냉전의 종식. 단일유럽법에 따라 유럽 공동체의 열두개 회원국은 1992년까지 상품과 서비스, 자본, 인력의 전면적이고 자유로운 이동의 달성을 약속. 유럽연합 회원국들을 새로운 제도적, 재정적 협정으로 몰아넣은 것은 1992년의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5년 뒤에 이를 계승한 암스테르담 조약. 마스트리흐트에서 대중의 이목을 끈 것은 유럽공동통화를 제정한다는 합의. 유로화에 적용되는 독일 중앙은행의 재정 원칙은 낮은 인플레이션, 금융 긴축, 최소 적자의 원칙. 이는 낮은 이자율과 공공지출 증대를 요구하는 개별국가 유권자들에 반함.
- 영국과 덴마크는 기본 조약에 서명했으나 공동 통화 제안은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 두 나라의 국민은 초국적 기관에 주권의 상징을 넘기는 것을 다른 나라의 국민보다 더 많이 주저함. 영국은 연합을 하나의 유럽 초강대국의 전단계로 보고 심히 불안해함.(아마도 프랑스 주도의 연합 구성에 대하여)
- 마스트리흐트 조약으로 유럽의 대중적 의식에 변화가 발생. 조약은 어디서나 승인되었지만 <유럽>문제를 국내의 정치의제에 포함하는 것은 적지 않은 반대를 초래했다. 조약이 유럽 전체의 결합까지는 사실 아니었어도 최소한 그 서쪽 절반의 결합을 위한 길을 준비한 것은 사실. 스웨덴과 핀란드, 오스트리아가 곧 가입을 신청. 그러나 스위스와 노르웨이 국민은 가입을 부결시킴. 초국적 연합 속에서 자율권과 주도권을 상실할까봐 두려웠고 새로운 통화제도에 참여해서 얻을 이익에 회의적(G-현재 둘다 유럽연합 회원국은 아니지만 노르웨이는 유럽경제지역 협정을 통해, 스위스는 140여개의 개별 양자협정을 통해 경제적 교류나 국경이동면에서는 회권국과 다름없는 혜택을 받음)
- 그러나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유럽>의 일원이 되는 것은 유일한 대안이었다. <유럽이 당신들의 미래다> 그러나 유럽연합의 가입은 <민주주의 원칙을 통치 체제를 기반으로 삼은> 가입 조건에 동의한 모든 유럽 국가들의 권리였다. 조약은 북유럽의 신청국들에게는 어떠한 지장도 초래하지 않았지만 동유럽의 장래 후보들에게는 대단히 곤란한 장애물이었다. 유럽연합은 자체 헌장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유럽을 껴안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는 가능하면 배제하려 애썼다. 동유럽은 훨씬 가난했고 유아사망률은 유럽연합 평균치의 두배. 헝가리나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가 기존 회원국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유럽연합에 가입하도록 허용된다면 보조금과 지역원조, 기반시설조성비, 기타 교부금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유럽연합 예산을 망가뜨릴 것은 뻔했다. 탈공산주의 유럽에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다른 마셜플랜이었지만 누구도 이를 제안하지 않았다.
- 마가릿 대처가 조기 확대를 열정적으로 주장했지만 유럽연합의 전략을 지배한 것은 프랑스 방식이었다. 프랑스와 미테랑은 느슨하게 결합된 <유럽 연방>을 제안. 모든 신청국에 아무런 조건없이 개방되고 물질적 혜택은 없을 것. 그 대신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관계는 이후 몇 년간 쌍무적 무역협정 수준에 머무름. 그러나 서방의 관심은 새로운 공동통화로 이행하는 마스트리흐트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 모든 서유럽 수도의 주된 문제였다.
- 1997년 암스테르담 조약은 유럽시민권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업과 보건, 환경, 그리고 공동 외교 정책의 부재를 다룰 범유럽적 제도를 발전시키는 것. 유럽 연합은 1998년부터 동유럽 10개 신청국 전부와 키프로스의 가입절차를 개시. 그러나 터키는 보류.(G-60년 넘는 가입 도전기.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이후 민주주의와 인권 후퇴, 키프로스 분쟁, 8500만 이슬람교도)
- 21세기 초 탈공산주의 유럽에서 외국인 투자는 점차 감소. 이 나라들이 유럽 연합에 들어오자 동유럽 국가들의 임금과 기타 비용은 점차 서유럽 수준으로 높아짐. 그 지역이 인도나 멕시코의 공장들에 대해 갖던 비용 이점이 소멸.
- 유럽연합 예산의 40%가 정치적인 이유에서 <농장 지원>으로 쓰임. 그 대부분은 도움이 전혀 필요없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대규모 기계화된 기업농에 지원. 유럽연합의 수입은 고정된 비율의 관세와 농업세, 연합 전역의 간접 판매세(부가가치세), 그리고 특히 국민총소득의 겨우 1.24%가 상한선인 회원국들의 분담금. 전부가 개별 회원국들 내부의 정치적 압력에 취약함. 회원국들 대부분은 유럽연합 예산의 기여국이 아니라 그 부조의 수혜국. 2004년 유럽연합이 동유럽으로 확대된 이후 19개 회원국이 브뤼셀로부터 낸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음. 연합 운영비는 영국과 프랑스, 스웨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독일 등 6개 회원국의 분담금으로 충당.(G-현재 분담금 마지노선은 1.4~2.0 그러나 실제 분담금 총액은 0.6~0.9)
- 유로화 체제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나라들은 공채를 국내 총생산의 60% 미만으로 억제. 재정적자도 국내 총생산의 3% 미만으로 운영해야. 이런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 다른 유로화 지역 회원국들의 경제에 부당한 부담을 안겨주어 그 나라들이 공동통화의 안정 확보라는 짐을 지게됨. 프랑크푸르트에 설립된 유럽중앙은행ECB은 처음부터 이자율을 비교적 높게 유지하여 새로운 통화를 지탱하고 인플레이션을 방지하려 함.
- <브뤼셀>은 회원국 정부들의 동의가 있어야만 통치할 수 있었다. 유럽공동체/유럽연합은 회원국의 독립성을 중대하게 해치지 않으면서 그 복지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문제를 위기로 몰아 넣은 것은 스물다섯 개 국가로 연합을 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각료이사회 의장직은 6개월마다 돌아가며 맡았고 각국은 격년으로 열리는 유럽협의회를 주최. 25개 회원국을 대표하여 각각 거부권을 갖고 있는 유럽 이사회에 이르면 기능이 거의 멈추었다고 할수 있다. 유럽총회는 일종의 헌법 제정회의로서 확대된 <유럽>을 위한 실질적인 통치제도의 수립을 위임받았으며 총회 의장직은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 유럽 연합은 고질적인 유럽 대중의 관심 부족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거만하게 대중 일반의 견해를 무시하면서 새로운 <유럽>의 제도를 구축한 전문 관료들에게 대중은 무관심으로 앙갚음했다. 유럽연합은 심각한 <민주주의 결핍>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유럽의회의 직접 선거가 거듭되면서 투표율은 계속 하락. 프랑스 1979년 60% 2004년 43%, 독일 66%->43%, 네덜란드 58%->39%. 국내정치 선거 대비 20~43%p 하락. 이러한 유형은 너무나 일관적이라 각국의 환경에 원인을 돌릴수 없었다.
- 이는 대체로 자신들이 연합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널리 펴졌기 때문. 대부분의 유럽 정부들은 유럽연합이나 유로화 지역 가입 여부를 묻는 투표조차 시행하지 않음. 게다가 유럽의 대중 사이에는 유럽연합의 모든 제도들 중에서 유럽의회의 732명의 선출직 의원들이 가장 중요하지 않다는 의견이 널리 펴졌음. 진정한 권력은 각국 정부가 임명한 집행위원회와 각국 대표들을 포함하는 각료이사회. 또한 브뤼셀의 <일면식도 없는> 자들이 이제 진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각국 정부는 인기없는 법률이나 세금, 경제정책을 브뤼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지난 20년 동안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됨.
- 이러한 편견에 무책임한 주류 정치인들이 기름을 부었다. 부채질 한 자들은 민족주의 선동가들. 유권자들의 관심이 그토록 급격하게 하락한 200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유럽연합에 미친개처럼 반대했던 후보들을 드러내 놓고 지지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 그러나 모든 점을 다 고려할 때 유럽연합은 좋은 것이다. 단일 시장이 가져다준 경제적 이익은 영국의 가장 열렬한 유럽연합 회의론자조차 인정할 정도로 분명했다. 유럽연합의 어디서나 여행하고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새로운 자유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혜택. 부유한 지역에서 가난한 지역으로 재원을 이전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격차를 꾸준히 줄이는 재분배 기능. 그리하여 앞선 세대의 국가별 사회 민주주의 정책을 대체.
- 제2차 세계 대전이후 수십년 동안 유럽이라는 개념이 지닌 이점은 정확히 말해서 그 모호함에 있었다. <성장>이나 <평화>처럼 <유럽>도 효과적인 반대를 유인하기에는 지나치게 온건했다. 70대초 유럽연합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프랑스 총리 발라뒤르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게 장점이다> 프랑스 대통령 퐁피두 <기능을 마비시킬 교리적 논쟁을 피하기 위한 모호한 공식> 물론 이러한 공식적인 모호함 자체가 유럽연합 입법부의 지나치게 정확한 세부 지침과 결합하여 민주주의의 결핍을 낳았다. 유럽연합은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약4억5천만명을 느슨하게 연결된 단일한 공동체로 결합하면서도 놀랄 정도로 이견을 노출하지 않을수 있었다.
- 유럽연합은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대외 관세를 유지. 설탕 같은 상품의 자유무역을 금지함으로써 아프리카나 중앙아메리카의 농민들에게 손해를 입힘.
- 노동 자체가 변했다. 새로운 4계급 체제가 등장. 최상층-새로운 전문직 계층. 대도시 시민. 세계주의자. 부유한 교양인. 은행이나 기타 금융기관에 소속 두번째층-공장이나 서비스업 등 핵심 노동자. 안정적 직업과 전통적으로 받던 혜택의 유지 세번째층-가게 주인, 여행사 직원, 재단사, 전기 수리공등 소규모 사업과 서비스. 이민자 사회나 그 후손들. 이탈리아에서 국내총생산의 4분의 1, 포르투갈 22% 네번째층-여성과 청년 등 시간제 노동자. 국가 보조나 비용을 부담하는 직원 훈련 프로그램에 기한부 고용
- 유럽은 풍요속에 최하층 계급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산업시대가 종말을 고하면 새로운 임시직 노동자 계층이 탄생하게 된다. <노동자가 아닌 자들로 계급을 이루지 못한> 이 계층은 현대적 삶의 주변부에 처한 동시에 그 한가운데 있었다. 유럽의 최하층은 미국의 최하층처럼 빈곤과 실업뿐만 아니라 인종으로도 결정되었는데 후자가 점차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함. 90년대 중반 런던의 실업률은 흑인 청년의 경우 51%.
- 유럽에서 단연 최고로 관대한 난민시설을 보유한 독일에서 20세기말 난민 수는 가족과 식솔을 포함해서 500만명 정도로 추산. 서유럽이 불법이민자, 보호소 입소 신청자등 <경제 난민>들로 뒤덮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유럽연합의 확대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이유중 하나.
- 유럽연합은 다문화 사회가 되어 갈 뿐만 아니라 점차 다종교 사회가 되어감. 기독교도는 대부분 실천적인 종교인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압도적 다수 차지. 유럽 내의 주요 세계 종교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슬람교 신자들만 급증. 21세기 처음 몇 년 프랑스의 무슬림은 약 600만명. 독일에도 거의 동수. 유럽 전체에 총 1,500만명의 무슬림. 지금까지 압도적으로 세속적이었던 사회들에 무슬림이 등장하자 사회 정책에서 어려운 문제들이 제기. 공립학교에서 종교적 의복이나 상징물을 착용하는데 어떠한 규정을 두어야 하는가. 국가는 개별 문화의 제도와 시설을 얼마나 장려 또는 반대해야 하는가. 다문화 공동체들을 지원하는 것이 좋은 정책인가. 아니면 당국은 통합을 촉진하고 나아가 강요해야 하는가.
- 진정으로 놀라운 일은 새로운 무리의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의 출현이 아니라 이들이 1989년 이후의 혼란과 불만을 이전보다 더 잘 이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인들이 정치인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지라도 유럽통치체제의 핵심에는 가장 급진적인 반체제 정당들조차 감히 정면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지지를 얻은 무엇이 있다. 실제 작동 방식에 이러저러한 결합들이 있다고 심각하게 지적될때조차 유럽인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이것은 바로 <유럽식 사회 모델>이라 불리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