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은 숙종때 학자이고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우의정까지 제수받았다. 다만 소론의 영수로서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꼬장꼬장한 논쟁을 벌린 일은 한심하였다.
* 선생님의 만년인 1709년에 제자들이 선생님을 위하여 저택을 지어주었는데 그 집이 명재고택이다. 정작 선생님은 부근에 있는 초가에서 살았다. 거주하지 않았으므로 古宅이 아닌 故宅이 정확하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명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선행을 많이 하였고 그 덕으로 살아 남기도 하였다. 명재는 일족에게 서민들의 고수입원이 되는 누에를 치지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매년 3백석 이상을 풀어 빈민을 구제하고 손님을 대접했다. 육이오때 인민군이 사무실로 사용한 탓으로 미군이 폭격하려고 하자 마침 이 집머슴의 아들이 미군부대에 근무하다가 그 사실을 알고 역사적 건물임을 설명하고 적극 말려서 무사하였다고 한다.
* 이 집은 풍광이 아름다워서 사진 찍으로 오는 관광객이 많다. 배룡나무와 장독이 유명하다.
* 생기가 집중된 곳---
2. 노성향교
노성향교는 1878년 명재고택 백호쪽에 건립되었다. 보통사람의 눈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향교로 보일 것이나 대단한 음택 명당이다.
3. 풍수적 시각
이 곳은 태조 계룡산- 중조 노성산- 소조 옥재산- 주산 옥리봉의 행로를 거쳤다. 소조산에서 혈처로 가는 용의 모습이 힘차고 혈처는 청백이 4겹으로 정열하여 위엄이 있고 수십리 앞에는 조산(朝山)이 아련히 엎드렸다. 사람들은 명재고택이 옥녀탕금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양 옆에 기다란 다리가 있고 생기가 고택의 청룡쪽에 집중되어 있어서 산실(産室)로 적합하다. 무슨 물형일가? 향교는 입수룡이 묵직하게 일직선으로 내려와서 좌석을 만들었다. 대성당이 군신봉조형의 음택명당이다.
이 고택에 대하여 서(西)사택(舍宅)이므로 기사생인 윤증에게 맞는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 집은 윤증이라는 한사람으로 생명이 끝날 집이 아니다.(2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