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
이용우
예를 들어
불면은
해가 지지 않는 백야
같은 거고
그 근원은
홧병이거나
열병이다
홧병은
자신을 태우는 불이고
열병은
꿈을 이루는 불꽃이다
---이용우 시집 {너의 서쪽은 나의 동쪽이 된다}(근간)에서
하루는 24시간이고, 이 24시간 안에서 우리 인간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진다. 아침에 일어나 8시간은 일을 하고, 8시간은 휴식과 취미생활을 하고, 나머지 8시간은 에너지의 재충전을 위하여 잠을 잔다. 밝은 대낮은 일과 놀이를 하기 위한 시간이고, 어둡고 캄캄한 밤은 잠을 자기 위한 시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과 휴식이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듯이, 깨어남과 잠도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은 불면이고, 만일,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왜, 그처럼 어렵고 힘든 불면증에 시달려야만 하는가? 이용우 시인의 설명대로라면 “예를 들어/ 불면은/ 해가 지지 않는 백야/ 같은” 것이고, “그 근원은// 홧병이거나/ 열병”이라고 한다. “홧병은/ 자신을 태우는 불이고”, “열병은/ 꿈을 이루는 불꽃이다.”
이용우 시인은 홧병을 불이라고 부르고, 열병을 불꽃이라고 부른다. 불과 불꽃은 우리 인간들의 마비된 의식을 일깨우고, 어둡고 컴컴한 밤을 대낮처럼 밝힌다. 우리 인간들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지만, 그러나 이 홧병과 열병의 원인은 우리 인간들의 욕망(꿈)일 수밖에 없다. 모든 생명체는 불쾌를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이 꿈과 욕망은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을 당하고 그것이 불면증의 주요 원인이 된다. 수많은 이성들과의 성적 욕망이든, 만인들 위에 군림을 하고 싶은 권력 욕망이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든지간에, 우리 인간들의 꿈과 욕망은 그것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이러한 꿈과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첫 번째는 상호경쟁적인 관계 때문일 수도 있고, 두 번째 비록 실현이 가능하다고 할 지라도 도덕과 법률에 의하여 더욱더 커다란 불이익과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이드)은 도덕과 부도덕 따위와는 관계없이 그 꿈과 욕망을 추구하려고 하고, 의식(자아)은 현실원칙에 따라서 실현 불가능한 것을 억압하고, 초자아(슈퍼 에고)는 “잘했어/ 잘못했어”와도 같은 상벌기능으로서의 자아의 행동양식을 관리하고 감독한다.
하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원초적 욕망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속에 남아서 의식의 약한 고리를 틈 타 그 주체자들을 괴롭힌다. 순결을 맹세한 사제에게 창녀처럼 달라붙는 성모 마리아상이 그것을 말해주고, 더없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범시민에게 소위 ‘모든 영웅들은 대사기꾼들이었다’라는 역사 철학자들의 말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 꿈과 욕망, 불가능하지만 너무나도 고귀하고 간절한 이 꿈과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억압된 욕망이 그 억압당한 심급을 통해서 밤마다 되살아나 그를 괴롭힌다. 모든 예술작품은 창조적 천재의 범죄의 산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가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며 그 꿈과 욕망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다면 그의 불면증은 치유되고 아름답고 멋진 잠을 자게 될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꿈과 욕망을 실현시키는 데에도 쾌락이 따르지만, 그러나 그 욕망을 적절하게 억압하고 관리함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도 있다. 전자는 유아론적인 것이고, 후자는 불쾌함까지도 예술로 승화시키는 성숙한 어른의 시선일 수도 있다. 홧병과 열병, 즉, [불면]은 잠시 잠깐 동안의 나쁜 꿈에 지나지 않게 되고, 모든 불행과 고통이 예술로 승화됨으로서 그 아름답고 멋진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사’를 보면 성적 욕망이 사라지고, 부처의 초상을 바라보면 돈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고, 뭉크의 ‘절규’를 바라보면 모든 권력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다.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고, 그토록 기나긴 밤의 ‘불면’의 소산이 세계 최고의 명작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