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린다. 산천이 온통 눈으로 덮여 경계가 없어지고 어두운 세상은 하얗게 변해 간다. 창문을 열고 쌓인 눈을 바라본다. 지상의 모든 상처 위에 소복이 눈이 내린다. 하늘에서 여리고 가여운 생명들이 내려 이 헐벗은 지상의 남루함을 모두 걷어내고 눈부신 동거(同居)를 준비한다. 어두워진 사람들의 집에서는 겨울연가가 흘러나온다. 세상살이로 얼어붙은 마음에도,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에도 눈은 차곡차곡 쌓인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눈 속에 묻히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숫눈이 쌓인 날에는 마음이 바빠진다. 눈송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달려가고 있다. 눈의 세계에는 단절도 외면도 없다. 밖으로 뛰어나가 먼저 첫 발자국을 찍고 싶다. 소복이 쌓인 눈을 밟으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던 시간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좋아 무작정 동네를 걸었다. 눈밭을 만든 눈의 작은 입자들 속에는 사람들이 주고받은 맹세와 다짐이 알알이 담겨 있다. 눈송이는 손길과 눈길이 닿으면 금세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된
대설주의보다. 전국에 계속 눈이 내리고 제주에도 며칠 동안 폭설이 내렸다. 제주도에 폭설이 내리면 하늘길과 바닷길은 모두 막힌다. 눈으로 고립된 섬은 모든 일상을 멈추게 한다. 옛날부터 육지와 단절된 섬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폭설은 축복이면서 재앙이었다. 여유로운 사람들에게 눈 내리는 겨울은 따듯한 난로 곁에서 언 몸을 녹일 수 있는 낭만적 시간이지만, 나날의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는 눈 내리는 밤이 길고 두렵기만 했
대설주의보가 내린 제주의 그해 겨울은 잔인했다. 순백한 흰 눈의 기억이 나에게는 어둠의 경보로 출렁였다. 축복같이 흰 눈이 소복소복 내리던 날, 어두운 병실에서 생명의 경각을 다투는 남편의 얼굴은 갈수록 어두워져 갔다. 병실의 바깥에는 펑펑 눈이 내려 나무도 사람도 가로등도 희미한 형체만 보일 뿐이다. 육지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오려고 하던 아이들도 발길이 묶였다. 아이들은 숨 가쁘게 전화만 해댄다. 떠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서 있던 나는 창밖의 어둠을 내다보며 올 수 없는 아이들을 기다렸다. 어디서나 단절은 무서웠다. 육지와 섬, 삶과 죽음의 경계는 단절을 만들고, 단절은 모든 희망의 끈을 가혹하게 절단한다. 어두운 창밖에서는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가로등은 창백했다. 눈발 사이, 밤의 어둠은 형광빛 속에서 번득이고 있었다. 내 검은 눈에는 흰 눈이 거침없이 내렸다. 눈, 눈, 눈· · ·
눈보라는 누구도 함께해 줄 수 없는 나의 통증같이 자꾸 깊어 갔다. 눈은 축복처럼 수직으로 내리다가, 고통의 파편처럼 흩날리다가, 슬픔이 되어 지상에 떨어졌다. 눈에 윤곽이 없듯이 슬픔에도 윤곽이 없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밝음은 어둠으로 바뀌고, 사랑도 미움으로 변했다. 허둥대며 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겨울 저녁의 행인들이 귀가를 재촉한다. 뒷모습을 눈보라에 맡기고 어딘가로 달려간다. 자정이 지나자 창밖에서 날리던 눈이 더욱 거칠어진
눈은 잠들지 못했고 나도 잠들지 못했다. 눈은 착하다. 착한 것들은 눈처럼 부드럽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부드러운 것이 반드시 착하지 않다는 것이 슬프다. 나에게 찾아왔던 짧은 축복은 다 잊어버리자 그리고 다시는 과거는 말하지 말자 부드럽게 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어디서 착하게 꽃으로 다시 피거나 어디서 따뜻한 불빛으로 다시 만나리. 가자, 저 눈 속으로 달려가 세상의 고통 다 잊어버리자. 어떤 시간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이 부재의 무게, 긴 긴 밤은 밤새 날리는 눈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갔
창문 사이로 새벽 여명이 다가왔다. 강한 눈보라에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려 있는 나뭇잎에게서 질긴 생명을 본다. 이파리 뒤에서 번득이던 수많은 눈알, 나도 나뭇잎처럼 가볍게 혹은 무겁게 흔들렸다. 툭툭 세찬 바람 속에 부대끼던 잎들이 젖은 바람 속에서 마지막 춤을 춘다. 죽음의 탱고가 레테의 강을 건너간다. 망각의 강물 따라 나는 여기까지 흘러왔구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저 흰색 눈동자, 모든 생명은 숨 쉴 때 따뜻하지만 죽으면 싸늘하게 차가워진다. 죽어간다는 것은 차츰차츰 식어가는 것이다. 눈도 식어가고 나도 식어간
눈처럼 나도 오래 남지 못한다. 오래 남아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왜 순백의 눈으로 남아 세상과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눈이 금세 녹아버리듯이 인생의 모든 것은 덧없다. 인생은 사랑이 아니라 이별을 닮았다. 인생은 불협화음 속에 끊어질 듯 이어지고 굽이굽이 돌다가 마침내 종말에 도착한다. 지상의 모든 상처가 흩날리는 눈 속에 담겨 있다. 사랑은 언제나 봄날처럼 뒤늦게 오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은 그리도 힘들다. 겨울의 헐벗은 나무 위의 새들도 모두 떠나고 마음 하나 잡지 못한 눈보라는 떠돌고 있
대설과 함께 맹추위가 기승을 부릴 거라는 예보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짤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빨간 자선냄비가 등장했다. 사랑해야 할 마음만 하얗게 모여 기도하고 있다. 겨울바람은 창문을 흔들면서 아픔을 녹여줄 봄이 올 때까지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밤에도 낮에도 눈은 계속 내린다. 눈은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바라보며 아무리 세상이 바람 불고 추워도 순백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
이파리 하나 품지 못한 앙상한 저 나무에도 겨울이 지나면 새순을 띄울 수 있을까.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의 위태로워 보이는 삶 속에서 희망의 불씨는 다시 피어오를까. 겨울나무가 말없이 푸른 싹을 준비하듯이 그들의 삶에도 언젠가는 새봄이 돌아올 것이다. 창을 열고 밖을 보니 하얀 눈이 세상을 뒤덮어 온 마을을 순백으로 만들어 놓았
새벽부터 ‘딩동〜’ 안전안내문자가 연신 울려온다. ‘대설로 인해 1100도로, 516도로, 비자림도로 대소형 차량 통제입니다.’ 하늘에서는 계속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내일이면 대설주의보가 풀릴
까.다.다.다.다.다.다. .다.다.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