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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집에 핀 비올라
박 남 희
수업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동네 공원 쪽으로 향했다. 공원 풀밭에는 노란 민들레가 군데군데 피어 있고, 연못 옆에 나란히 꾸며놓은 화단에도 팬지가 올망졸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와, 벌써 꽃들이 많이 피었네.”
산책길 옆 꽃밭에는 이름도 모르는 작은 꽃들이 색색으로 피어 있었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유치원 아이들이 재잘 거리며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병아리 같이 노란 옷을 입은 아이들을 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노랑나비가 팬지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빠와 함께 나비축제에 갔던 것이 생각났다.
“아빠…….”
콧등이 찡해왔다. 나는 아빠를 생각하며 나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순간, 나비는 포르르 날아갔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팬지꽃을 바라보는데, 돌 틈 사이에 하얀 것이 보였다.
“뭐지?”
흰 종이쪽지였다. 세 번을 접은 쪽지에는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보물찾기 쪽지인 것 같았다. 일학년 봄 소풍이 생각나 빙그레 웃음이 났다. 보물찾기 쪽지를 하나도 찾지 못하고 울면서 집으로 온 나를 위해 아빠는 집 안에서 보물찾기 놀이를 해주었다.
‘아빠, 보고 싶어. 아빠도 날 보고 있는 거야?’
나는 공원벤치에 한참 앉아 있다가 집을 향해 걸었다.
“왜 이렇게 늦어. 학교 끝나면 곧장 와야지.”
떡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마가 떡을 포장하고 있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방과 후 교실이 조금 늦게 끝났어. 곧장 온 거야.”
언제부터인가 나는 엄마에게 조금씩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방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가게 안을 서성거렸다. 모처럼 엄마와 단둘이 있는 것이 좋았다.
“엄마, 뭐 도와…….”
“드르륵.”
오랜만에 가게 일을 도와줄 게 없나 물어보려는데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 당신이에요? 수지 담임은 만났어요?”
나는 놀란 눈으로 새아빠를 보았다. 아빠 면담하는 날이라고 일주일 전에 선생님이 가정통신문을 주었는데 보여주지 않았다. 새아빠가 학교 오는 것이 싫었다. 하필 선생님은 아빠 면담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빠 면담이 어려운 아이들은 다른 가족이 와도 좋다고 했지만, 그 말도 전하지 않았다.
“수지 학교 잘 다녀왔어? 담임선생님이 우리 수지 칭찬 많이 하시던데?”
“선생님도 참, 전 날 전화로 알려주면 바쁜 사람은 어떡하라고.”
엄마가 불평했다. 나는 속으로 움찔했다.
“아빠들 가능한 시간으로 정해주셔서 좋던데 뭐. 이래야 아빠들도 자식 학교에 가보지.”
새아빠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런데 이건 다 뭐예요?”
엄마는 새아빠가 들고 온 검은 봉지들을 보며 말했다.
“어, 오다 보니 공원에 꽃들이 피어 있어서, 우리 가게도 봄단장 하려고 화분 좀 사왔지.”
새아빠는 봉지 안에서 작은 꽃 화분들을 여러 개 꺼내놓았다. 나는 이층으로 올라가려다 무슨 꽃일까 궁금해서 화분 쪽으로 다가갔다.
“수지야, 예쁘지? 이 꽃은 데이지인데 평화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어.”
새아빠가 말했다. 공원에 피어 있던 꽃이었다.
“어머, 당신 꽃말도 알아요? 대단해요.”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단둘이 살 때 엄마는 늘 피곤하고 지쳐보였다. 갑자기 하게 된 식당일이 힘들어 나에게도 자주 짜증을 냈다. 그런데 새아빠와 살게 되면서 웃는 날이 많아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빠를 벌써 잊어버린 것 같아 서운했다.
“이건 비올라. 꽃말은 성실한 사랑이야.”
아빠가 화분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머, 당신 꽃이네. 당신은 한결같잖아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운데? 허허.”
엄마와 새아빠는 마주보며 웃었다. 나는 그 자리를 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같이 웃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엄마와 새아빠가 행복해할 때 나는 어색하고 불편했다.
비올라의 연한 꽃잎은 마치 나비의 날개 같았다.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수지야, 네 방에도 하나 놓아둘래?”
새아빠가 말했다.
“아뇨. 전 화분에 심어진 꽃은 안 좋아해요.”
나는 퉁퉁거리고 이층으로 올라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방 안에 있던 찰떡을 꺼내 책상 서랍에 넣었다. 서랍 안에는 학교 갈 때마다 새아빠가 간식으로 먹으라고 주었던 떡들이 뒹굴고 있었다. 오래되어 곰팡이가 생긴 것도 있었다.
“뭐야, 버리면 될 걸. 먹지도 않으면서 왜 못 버리는 거야.”
새아빠가 줬다는 이유만으로 떡을 먹지도 않고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한 내 행동에 짜증이 나서 서랍을 세게 닫았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새아빠가 사온 화분의 꽃들이 생각났다. 그 중에서 비올라는 꽃모양도 꽃말도 마음에 들었다.
‘성실한 사랑’ 참, 예쁜 말인 것 같았다. 나는 잠들 때까지 오래도록 비올라를 가슴에 담아두었다.
다음 날도 나는 공원으로 갔다.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꽃샘추위라고 했다. 바람에 팬지들이 떨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어?”
팬지들 사이에 하얀 쪽지가 보였다.
팬지, 사랑의 추억. 추억은 그리움이다. 추억은 마음의 일기장이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평생 꺼내볼 수 있는 마음의 일기장 하나 간직하고 있는 건 축복이다. 비록 추억이 희미해져 간다 해도 마음 한쪽에 남아 있으니 안타까워하지 마라.
나는 한참동안 쪽지의 글을 바라보았다. 꼭 나를 위로하는 글 같았다.
엄마가 새아빠와 결혼하자 할머니는 “이제 아빠는 잊고 새아빠와 잘 지내도록 해라. 아빠는 그냥 마음속 저 밑에 묻어두고.”하고 말했다. 하지만 난 아빠를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빠의 자리에 점점 새아빠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의 얼굴보다는 새아빠의 웃는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그럴 때 마다 아빠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추억은 없어지지 않고 마음 한 쪽에 남아있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쪽지를 가방 안에 넣고 집으로 갔다. 새아빠가 사온 꽃들이 진열대 위에 놓여 있었다. 작은 비올라 화분이 몇 개 더 는 것 같았다.
“네가 비올라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더 사오셨어.”
“내가 언제 비올라 좋아한다고 그랬어? 언제는 비올라가 새아빠 꽃이라며?”
나는 엄마 말에 비아냥거렸다.
“꽃말이 그렇다는 거지. 새아빠가 널 생각하는 마음을 알아줄 때도 되지 않았니?”
“누가 나 생각해 달래? 엄마만 생각해주면 되는 거 아냐?”
나는 자꾸 삐딱하게 굴었다.
“수지야, 너 언제까지 까칠하게 굴래? 네가 마음 열 때까지 기다리는 새아빠가 불쌍하지도 않니?”
엄마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새아빠가 불쌍해? 죽은 아빠가 불쌍한 거 아니고?”
나는 엄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엄마가 왜 새아빠와 결혼하려고 결심했는데. 네가 좋다고 했잖아. 아저씨와 결혼하면 엄마가 행복할 것 같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런 소리를…….”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몰라, 나도 모르겠다고!”
나는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수지야, 수지야!”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내처 달렸다.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 내렸다.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정신없이 뛰다보니 공원이었다.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공원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긴 의자에 앉았다. 계속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우리 엄마’라고 액정화면에 떴다.
“이제 나한테 엄만 없어.”
나는 전화를 받지 않고 대신 할머니에게 전화했다.
“할머니, 나 할머니 집에서…….”
“수지니? 할머니 집이 어떻다고?”
할머니 주위가 소란스러워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와 같이 살겠다고 큰 소리로 말하려다가 안부만 묻고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까지 걱정 시킬 수 없어.’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참으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소나무가 보였다. 소나무의 꽃말은 영원불멸이다. 이 세상에 영원불멸한 것이 있을까? 아빠를 영원히 기억할거라고 약속했으면서 벌써 잊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수지야.”
새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새아빠가 옆에 와 앉았다.
“수지야, 내가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오던 날, 공원에서 네가 보물찾기 쪽지를 보고 웃는 걸 봤어. 네 미소를 보고 있으니 그동안 네가 웃는 걸 보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단다.”
새아빠가 이어서 말했다.
“너도 나처럼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꽃말을 생각해 냈단다.”
“그럼. 그 쪽지가…….”
새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 가족이 생겨서 낯설고 힘들 거야. 하지만 서로 마음을 열고 가족으로 추억을 만들면 어떨까? 나에게 그런 기회를 주면 좋겠어.”
나는 새아빠의 말을 들으며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모르겠어요. 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혼란스러워요.”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말을 하고나니 오히려 편해졌다.
“수지야, 우리 천천히 가족이 되어가자.”
새아빠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저어…….”
“그래, 말해 봐.”
“새아빤 우릴 두고 떠나지 않으실 거죠? 우릴 두고 가지 않으실 거죠?”
마음이 울컥했다. 그제야 내가 정말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이별하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럼, 우리 수지 시집가서 아기 낳고 그 아기가 또 아기를 낳을 때까지 옆에 있을 거야. 나중에 늙었다고 구박이나 하지 마.”
새아빠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글썽이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새아빠는 내 등을 토닥여 주고는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새아빠와 나란히 걸었다.
“저기 있잖아요.”
“응, 말해 봐. 뭐가 있다는 거야?”
새아빠가 궁금한 눈빛으로 기다려 주었다.
“옥상에 꽃밭 만드는 거 어때요?”
“좋지, 우리 딸하고 같이 만드는 꽃밭 기대되는데?”
새아빠가 환하게 웃었다.
옥상 꽃밭에는 ‘믿음직한 사랑’인 과꽃도 심고, ‘기쁨’의 나팔꽃도 심고, ‘그대가 있기에 행복이 있네’라는 좀 긴 꽃말의 제라늄도 심을 것이다. 아, 서랍 안에 있던 떡들도 거름으로 써야지.
옥상의 꽃밭을 그려보면서 오니 어느 새 집 근처였다. 엄마가 떡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엄마의 얼굴이 비올라 꽃처럼 환해 보였다! 분명 가까이 있으면 등으로 손바닥이 날아 왔을 것이다. 나는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걸 참고 엄마를 향해 힘껏 달려갔다. 끝
출처: 2014 열린아동문학 봄호
첫댓글 세상을 살면서 혼자인 것 같은 외로움을 느껴본 적 있어요.
산다는 것은 늘 그렇죠. 하하 웃다가도 서러움에 눈물나는 날도 있죠.
새아빠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는 모습 감동적 이었습니다.~~^^***
꽃말이라는 소재를 통해 새아빠, 새가정에 적응해나가는 화자의 성장을 다룬 것이 감동적입니다.
새엄마가 아닌 새아빠네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생각해보기. 글 올려주셔서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이별이란 참 아파요. 어린 수지가 감당하기 힘든 부분을 재치있게 꽃말로 풀어 주는 새아빠!
이런 새아빠라면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행운인것 같네요. 잔잔한 감동이예요.
꽃말 하나하나에 묻어 나오는 희망적인 메세지가 향후 이 가정의 행복한 미래를 보여주는듯 해서 너무 좋았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아빠의 죽음과 새아빠의 등장은 꽤 충격이 클것이라 봅니다. 그렇게 딸의 아픈 마음을 소녀의 감성으로 조용히 그리고 따듯하게 감싸주는 새아빠의 메신저로 꽃(꽃말)을 내세운게 참 인상깊었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꽃말이 던져주는 메세지가 너무 감동적이고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재밌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딸의 사이가 호전되어 끝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꽃이 주는 메시지들로 인해 수지가 자연스럽게 새 가족을 받아들이고
두려워하던 이별에 대해 새아빠와 함께 해소하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주인공 수지가 걱정했던 것은 다시 이별하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는 것이 슬펐습니다. 이별이 무서워 사랑하기가 쉽지 않고 주저하게 된다는 것이 공감됩니다. 비단 어린 아이만 그런 건 아니겠지요.
또한 수지가 시집 가서 아기 낳고 그 아기가 또 아기를 낳을 때까지 옆에 있겟다는 새아빠도 감동적입니다. 수지가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떡들도 거름으로 쓴다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재혼 가정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재혼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이 동화를 읽고 새아빠나 새엄마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새아빠 새엄마가 이 동화 속 새아빠처럼 자녀를 사랑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수지의 행동들을 통해 수지의 마음이 잘 표현되었다. 안타까우면서도 수지의 마음이 열리길 바랬다. 다행히도 새아빠와의 갈등이 해소되었고 행복한 결말이 정말 좋았습니다.
새엄마가 아닌 새아빠라는 설정이 새로왔고, 새아빠와의 갈등을 해소해서 좋았습니다.
새 아빠에게 쉽사리 마음을 주지 못하는 수지의 모습이 또 다시 이별을 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엄마와의 갈등도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꽃이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수지와 새아빠와의 사이를 좁히도록 풀어나간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꽃과 새 아빠의 연관성을 잘 풀어냈습니다. 요즘같이 재혼가정이 많은 현실에 적절한 동화인 것 같습니다.
흐뭇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