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피우는 데 필요한 공간에 대하여_송파 책박물관
221031. 송혜영
한 달에 한 번 참석하는 그림책 모임이 있다. 10월에는 '민들레는 민들레'라는 책으로 모였다. 김장성님이 간결하고 담백하게 시를 쓰셨고 오현경님이 그려내어 평범해보이는 작은 생명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은은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모임은 질문지를 바탕으로 비경쟁적 토론방식- 어떤 의견이든 존중하며 자유로이 생각을 나누게 되는데 가끔 강사님이 생각의 물꼬를 트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신다.
'여기서도 민들레/ 저기서도 민들레/ 이런 곳에서도/ 민들레는 민들레'
바람에 흩날려 마침내 어디든 정착한 민들레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 꽃을 피운다. 가로수 나무 아래 조그만 공간에도, 시멘트 벽돌 사이 틈에서도, 오래된 한옥의 지붕 기왓장 위에서도 민들레꽃이 피었다. 대뜸 강사님이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보자며 질문을 한다. "당신이 꽃을 피울 수 있는 당신만의 공간은 어디인가요?" 소설가들은 개인작업공간이 있거나 아니면 창작력이 불타오르는 자기만의 까페가 있다고 하지요. 윤희영작가는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주방의 식탁이 그러한 곳이라 했어요. 당신의 장소는 어디인가요? 잠시 생각하다 속으로 '거실의 6인용 원목책상 제일 안쪽 자리'라 대답한다. 노트북 충전선이 콘센트에 닿는 딱 그 자리, 주변에 책과 종이들을 쌓아두고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는다. 그러면 옆에 아이들이 있으면 있는대로 함께 공부하고 없으면 없는대로 책 읽고 글을 쓰는, 조용한 생명이 흐르는 자리가 된다.
옆동네에 있는 길빛도서관 오픈서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이라며, 근처 C까페에서 인생 아이스라떼를 먹는 것까지 멋진 코스를 소개하는 벗님의 이야기부터였나. 주제는 자연스레 공공건물은 어떤 모습으로 공간이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김현경 작가의 <사람,장소,환대>라는 책을 보면 공간이 주는 힘이 있다고 한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라는 3시간이 넘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공공도서관의 역할에 대해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한다. 팬데믹시대에도 도서관과 학교, 발달장애아동센터 등은 제일 마지막에 문을 닫아야 하는 곳이 아니었었나 하는 이야기며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만 한다는 것은 일반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분들의 입장을 더 생각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 그러고 보면 어린이도서관에서도 어느 정도 긴장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사뿐사뿐 조용히 책을 보는 것이 도서관 예절이라 배우고 가르쳐 왔으니까.
요즘 새롭게 여는 도서관은 좀 다르다며 옆 동네 이야기를 하는데 나도 얼마 전 다녀온 한 군데가 생각났다. '송파 책박물관'- 여기는 1년 전에 온라인수업으로 먼저 알게 된 곳이다. 6,7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반짝반짝 동그라미책' 이라고, 우주의 행성이며 꽃, 내 얼굴 처럼 동그라미로 나타낼 수 있는 것들을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하며 책을 꾸며보는 프로그램이었다. 가은이가 아빠와 나란히 앉아 ZOOM으로 수업을 했다. 처음 보는 선생님과 친구들이라 낯설 법도 한데 곧잘 따라 해서 선생님이 참 진행을 잘하신다 싶었더랬다.
조만간 가 봐야지 to do list에 담아놓았던 곳인데, 미취학 아동만 예약해서 들어갈 수 있는 '북키움'이라는 공간이 인기가 많아 주말에 예약하기가 쉽지 않다. 예약창이 열릴 때를 알람 맞춰 놓고 서둘러 예약하여 마침내 다녀왔던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가은이는 엄마와 짝을 이뤄 북키움에 들어가고 초2 첫째는 아빠와 바로 옆의 어울림홀에 자리잡았다. 가은이는 헨젤과 그레텔이 잡힌 과자집을 초콜렛, 빵 등의 강력자석 벽돌로 붙여 꾸미고, 세 켤레의 빨간 구두 중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 신고는 화면에 나오는 하와이안 훌라 댄스를 따라하며 너무 신이 났다. 잭과 콩나무 코너의 그물과 계단을 타고 오르락 내리락, 1인용 트렘플린에서 퐁퐁 뛰느라 북키움 한가운데 지혜의 샘에서는 무슨 책이 있나 겉표지만 잠시 살피다 시간이 다 되어 나와야 할 정도였다.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서은이가 읽은 것을 자랑한다. 어울림홀 자체가 매력적이었는데 1층부터 시작된 계단은 2층 끝까지 이어져 계단 곳곳에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 계단 양 옆으로는 유아부터 성인을 아우르는 꽤 많은 양의 책들이 꽂혀 있고 책장 사이 사각형 모양으로 앉는 공간이 또 있다. 계단보다 폭신하고 공간이 넓은데 서은이와 아빠는 여기에 자리잡아 아예 배를 깔고 누운 것이다. 조경희님의 <엄마자판기>와 <아빠자판기>를 큐레이션 해 주는 것에 이어 <책 먹는 여우>시리즈 두 권을 가져다 놓았다. 세상에나, 프란치스카 비어만이 이 매력적인 여우아저씨 이야기를 계속 써 온 줄 이제사 알았다. 얼마 전 알게 된 구도 노리코의 시리즈 중 처음보는 책이라며 <우당탕탕 야옹이와 바다 끝 괴물>도 읽어보라니 엄마의 구미를 확실히 알고 추천해 주는 너는 최고의 북 큐레이터구나!
2층을 오르면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이 크게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눠지는 것 같다. 선현들의 책 읽는 문화, 3대가 책을 읽는 환경을 꾸며놓고, 책 만드는 과정을 소개한 코너도 있었다. 따분한 듯 무심히 지나가다가도 군데 군데 아이들의 시선이 반짝 하고 멈출 때가 있다. 유교경전을 적어 외울 때 사용한 죽간과 읽고 이해한 횟수를 기록하는 서산은 자신도 활용해 봐야겠다며 사진을 찍는다. 필사를 하는 멋진 공간에서 가은이가 소설의 한 글귀를 따라 쓴다고 애 쓸 동안 서은이는 자작시를! 한 편 지었다. 활판 인쇄기를 꾸욱 눌러 책갈피를 만들고, 11월 초까지 운영되는 '잡지 전성시대' 기획전시는 비치된 학습지의 퀴즈를 풀며 잡지를 꾸미는데 재미를 붙였다.
박물관 전시를 보고 나오면 미디어 라이브러리가 있는데 여기서는 전자책이나 영화 등을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요즘에는 공간 디자인을 너무 잘 하는 것 같다. 미혼일 때 내가 주로 다녔던 도서관의 영상실은 앞에 pc와 헤드셋이 있다는 것만 다를 뿐 독서실의 한 코너마냥 좁고 딱딱한 공간이었는데 여기는 산뜻한 노랑에 까페처럼 분위기 있고 붐비지 않아 또 좋다. 건물 어디든 벽 쪽에는 머물러 앉고 싶게 만드는 의자들이 놓여 있고 군데군데 둥근 모양의 서가와 의자가 책이랑 더 놀다 가라고 부른다. 오늘처럼 비 오는 연휴, 날씨 적응도 안 된 우리를 놀래키듯 찬바람 불어대는 날은 정말 하루 종일 놀다 가기 딱 좋은 곳인데! 건물 안에 한식 메뉴만 있다면 말이다^^;
비바람을 뚫고 50여분.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생각한다. 우리 집 근처에 이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 수업 끝나고 이런 도서관으로 바로 달려갈 수 있는 환경이면 얼마나 좋을까! 맘에 드는 의자에 앉아서 책 읽다가 이 공간 저 공간 옮겨가며 놀 수 있는 넓은 공간. 책과 안 친한 사람도 들러서 인터넷도 하고 담소도 나누며 앉았다 쉬어 갈 수도 있는 공간, 함께 어울리는 교육과 전시, 여러 행사들로 지역 문화를 이끄는, 책으로 하나되는 장을 만드는 공간 말이다.
그렇지만 뭐, 우리 동네 도서관도 집밥으로는 꽤 괜찮지 않나 싶기도 하다. 어린이도서관이라 어른책이 없는게 가장 아쉽지만 상호대차 신청하면 다음날 째깍 가서 찾아올 수 있고 아이들이 하굣길에 들러 책읽다 가기엔 거리나 비치된 책에 부족함이 없다. '민들레는 민들레' 책에서 한옥 지붕 위에 기와 사이로 민들레 꽃을 피운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옆에 벌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민들레 홀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을 때만 꽃을 피우나? 기왓장 사이라도 자기 있는 곳에서 자양분을 찾아가며 꽃을 피운다. 그리고 벌이 날아드는 생태계를 만들어 낸다. 생명력이 있는 새로운 시작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있는 곳에서 자신의 몫을 하며, 자신의 꽃을 피워내는 민들레. 공간이 나를 만들기도 하지만 내가 공간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우리 집 거실 책상 위를 항상 깔끔하게 유지하여 앉자마자 집중할 수 있는 공간, 생각이 꽃피는 공간으로 가꿀 수 있다. (마음 같아서는 화병을 올려놓아 화사함을 더하고 싶지만 아이들 손이 휙휙 지나갈 때마다 화병 깨질라 조마조마 할 것 같아 패쓰) 매주 목요일 하는 꿈꾸미 책모임은 아이들이 속을 풀어낼 수 있고 책과 친해지는 공간이기에 계속되어야 한다. 또한 도서관 4층 회의실에서의 그림책 모임, 다르게 보고 깊이 있게 보며 책으로 하나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는 소중한 공간이다. 이 공간들에 감사하며 가꾸어 가는 것. 꽃을 피울 때까지! 그것이 내가 '민들레는 민들레'를 보고 얻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