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71
10월7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연중 제27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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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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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6lRdEaZnI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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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께서 내 가까이 계신다는 느낌, 내 인생 여정을 밀착 동반하신다는 느낌!>
제 지난 성소 여정을 소개하는 한 인터뷰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밤늦은 시간 두시간 넘게 인터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제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니 참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감사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서 내린 결론 한 가지는 주님께서는 부러져버린 갈대도 꺾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정말이지 제게 큰 자비를 베푸셨구나, 하는 느낌이 인터뷰의 결론이었습니다.
인터뷰하면서 제가 가장 간절히 기도했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십여년간의 긴 초기 양성기를 끝내고 종신서원을 목전에 둔 때, 제대로 큰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성소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긴 초기양성 기간동안 차곡차곡 쌓였던 스트레스가 원인이었습니다. 돌아보니 제 성향이 오랜 회사 생활에 길들여있었던 터라 수도원 들어와서도 예스맨이었습니다. 싫어도 싫다고 내색하지 않고 늘 겉으로만 웃으며 지낸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뚜렷한 병명도 모른 채 2년 가까이 투병 생활을 했습니다. 어떻게든 한번 회복해서 종신서원도 하고 부제품도 받아야지 하는 강박관념이 병을 더 키웠습니다. 마침내 공동생활도 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적 심리적으로도 맛이 가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저희집 근처에 큰 규모의 성모당이 있었는데, 루르드의 성모님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한 생각에, 틈만 나면 거기 가서 하느님께 어찌 제게 이러실 수 있냐며 따졌습니다. 그리고 항상 손에 묵주를 들고 셀 수도 없이 많은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렇게 밤낮없이 묵주기도를 바치던 어느 날 제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이런 느낌이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 가까이 계신다는 느낌!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향해 뭔가 부탁하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수님, 이 불쌍한 아이 좀 잘 봐주세요. 젊은 애가 잘 먹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얼마나 가련합니까?
거기다 건강 문제로 수도원까지 나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꼭 좀 일으켜 세워주세요.”
그 친밀하고 따뜻한 성모님 현존의 느낌, 그것이 저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언제나 주님께 저를 위해 전구해주신다는 느낌 그 이후에, 기적처럼 불안하던 마음이 편안해졌고, 원인 모를 병도 조금씩 사라져갔습니다.
성모님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셨던, 아니 너무 과하게, 지나치게 사랑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이런 멋진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성령과 성모님의 현존과 동반에 대한 명료한 의식은 활기찬 신앙생활을 위한 첫째가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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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
<내가 더 주었다고 믿는 것이 율법주의>
한나라 5대왕 무제는 귀천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주매진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집이 가난하여 나무를 베어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매진은 나무를 하면서도 글 읽기를 좋아하여 길을 가면서도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의 무능력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내는 함께 나무를 이고 가면서 남편을 책망했습니다.
“천한 나무꾼의 신세로 길에서 글을 읽고 다니면 남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으니 제발 그만 좀 하시죠.”
그러나 주매진은 들은 척도 않고 더욱 높은 소리로 읽으니 아내가 더이상 못 참겠다며 남편을 떠나려했습니다. 반면 남편은 웃으면서 50만 되면 크게 성공할 테니 몇 년만 참으로 될 것이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러다가는 굶어죽기 딱 알맞다며 욕을 하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주매진은 여전히 나무를 팔면서 다니다가 그해 인부로 뽑혀서 수도성에 들어가게 되었고, 좋은 기회가 생겨 임금에게 글을 지어 바쳤습니다. 임금은 그의 글솜씨를 보고는 바로 주매진의 고향 군수로 임명하였습니다.
그가 말 탄 경호무사들과 백여 대의 수행마차를 거느리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고향으로 입성하니 사람들은 다 그 귀공자가 누구인지 보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새 군수의 높은 관모를 쓰고 비단 관복을 입은 위엄은 당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 나무 짐을 지고 다니던 주매진이 새 군수가 되었음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매진을 버린 여인도 새 남편과 함께 길을 쓸러 나왔다가 그를 보고는 부끄러워 도망쳐버렸습니다.
이것을 안 주매진은 그 부부를 정중히 모시고 태수관사의 정원 끝에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아내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남을 못마땅하다고 여기는 이면에는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자신이 이만큼이나 하는데 그것에 합당한 몫을 상대가 못해주고 있다고 믿을 때 서운해하고 화를 내고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율법주의자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란 자신이 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의 위치를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열심히 살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보다 못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옛 계약, 즉 구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율법을 잘 지키면 하느님께서 계약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겠다는 약속이 구약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폐지될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누구도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행위로는 하느님 앞에서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달으라고 그 오랜 시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계약, 즉 신약의 시대가 오는데, 행위가 아니라 예수, 즉 구원하시는 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 의롭게 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신약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내 안에 품음으로써 내 존재가 변화되어 구원되는 것이 신약입니다. 이 신약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단 하나의 행위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내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기에 사실 구원을 위해서는 다른 부수적인 행위들은 불필요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특징은 “내가 이러저러한 계명을 지키고 공을 세웠으니 합당한 보상을 주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하여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공로를 감소시키며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바오로가 걱정하는 것은 신약을 받아들인 이들이 다시 구약으로 되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으로는 구원이 불가합니다. 나의 행위가 구원을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하니까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는 그렇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그 행위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약을 사는 이들의 특징은 ‘감사’입니다. 나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받았기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수도 없고, 항상 기쁘고, 감사하여 결코 구약으로는 되돌아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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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셰익스피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습관은 가장 좋은 하인이거나 가장 나쁜 주인이다.” 저는 이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게 가장 좋은 하인이 되고 있는 습관들이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하루를 풍요롭게 하는 좋은 습관입니다. 매일 2시간 이상을 걷는 것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습관입니다. 덤으로 건강에 보탬이 되는 좋은 습관입니다. 책을 가까이 하는 것도 인생에 거름이 되는 좋은 습관입니다. 매일 아침 묵주기도를 하는 것도 영혼을 지켜주는 좋은 습관입니다. 지나간 일들은 잊어버리고, 아직 오지 않은 걱정은 날려버리고 지금 현재를 기쁘게 지내는 것도 좋은 습관입니다.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할 수 있는 부탁은 기쁜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도 좋은 습관입니다. 제가 31년 사제생활을 큰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저에게 좋은 하인이 되어준 습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저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나쁜 습관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친교를 나눈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음주를 하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나쁜 습관입니다. 사람이 좋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지나치게 많은 일에 관여되는 것도 저만의 시간을 빼앗기는 나쁜 습관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 않고, 저만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쉽게 판단하는 것도 나쁜 습관입니다. 꼼꼼하고 신중하게 일을 하면 좋은데 대충, 건성으로 일을 하는 것도 그래서 실수를 반복하는 것도 나쁜 습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진다고 하셨는데 31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나쁜 습관입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타인에게 의탁하려는 것도 나쁜 습관입니다. 이렇게 나쁜 습관인줄 알면서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도 나쁜 습관입니다.
신학생 때 선배들에게 많이 들었던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Consuetudo est altera Natura!(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능력과 재능은 타고 날 수 있지만 습관은 노력하면 충분히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사제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좋은 습관들을 만들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저녁기도가 끝나면 연학실에서 공부하도록 하였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연학실에서 공부해야 했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사제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무일도, 아침미사, 양심성찰, 묵주기도, 저녁기도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기도는 사제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글은 어쩌면 오래된 라틴어 격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습관은 계속 지켜가고, 나쁜 습관은 과감하게 버리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신비를 생각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와 구원의 역사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환희의 신비에서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의 탄생은 성령으로 인한 것이고,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께서 제정하신 ‘빛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음을 묵상합니다. 고통의 신비는 주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것을 묵상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피, 땀을 흘리시고, 매를 맞으신 주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영광의 신비는 주님의 부활을 묵상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모님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들도 충실하게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묵주를 손에 들고 다니시는 분들은 하느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리는 분들입니다. 오늘 하루 묵주기도의 신비를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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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15-26: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
군중들은 예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는 그분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는 하늘의 표징을 보이라고 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짓부순다는 사실을 알라고 하신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면”(20절) 여기서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을 뜻한다. 그러면 팔은 누구를 말하는가? 아드님이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모든 일을 하신다. 몸-팔-손-손가락은 한 몸이다. 그러므로 마귀를 쫓아내시는 일은 하느님한테서 오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행위이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성령 안에서 이루신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분이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낸다면, 인간 본성이 그분 안에서 먼저 하느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사탄의 힘을 꺾고 더러운 영들을 꾸짖음으로써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 하신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사탄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하느님의 것인 양들을 멋대로 끌고 다니며 자기 우리에 가두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자 사탄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전리품이 되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사탄에게 매여 불경과 잘못을 저지르던 자들을 구원하시어 진리 안에서 아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 이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23절) 사탄은 예수님 편이 아니고, 그분을 반대한다. 예수께서 모으신 것을 흩어 버리려 하는 사탄이 예수님을 도와 자기를 무너트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더러운 영이 우리 안에 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비로 우리를 받아주셨고, 우리 마음의 집은 모든 죄가 깨끗이 치워졌다. 그 안에는 성사들이라는 가구로 채워졌다. 그 집은 어떤 집이어야 하느냐?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성전이 되지 못하면 또다시 더러운 영이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26절)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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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을 일컫는 여러 호칭 가운데 ‘구원자’(구세주)라는 호칭이 있습니다. 인류가 예수님의 공로로 진정한 자유와 해방과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활동은 악의 세력과 종말론적인 전투를 벌이는 대결의 이미지로 자주 그려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구마 이야기에서 악령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며 구원 활동을 펼치시는데, 이를 곡해하려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들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우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명백합니다. 당신께서 만일 베엘제불(사탄)과 한패셨다면, 같은 편으로 인식되는 마귀들을 결코 쫓아내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마 행위는 오히려 그분께서 베엘제불의 세력을 공격하러 온 적대자이심을 알리는 표징이 됩니다.
사탄은 완전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키는 힘센 자로 비유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힘이 센 자가 나타나 철옹성 같은 보안을 뚫고 들어갑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그 집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안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명백한 대결 구도에 서 있는 두 세력 가운데 어느 편에 설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게 합니다. 구원을 받은 여러분들은 어느 편에 서 계십니까? 확실히 예수님 편에 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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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김정대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손가락과 우리의 손가락>
어렸을 때 배앓이를 하면 어머니는 나를 뉘어놓고 가락에 맞춰 ‘엄마 손은 약손’을 반복하며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러면 배앓이가 없어지곤 했다. 지금도 가끔 배가 아플 때 배를 쓰다듬곤 한다.
언젠가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 타지에서 약 한 달을 지냈는데, 어느날 샤워를 마치고 나오다 갑자기 허리 근육이 잘못되어 그 자리에서 폭 쓰러졌다.
간신히 침대로 기어가 한참 쉰 다음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물리치료사는 정성을 다해 허리 마사지를 해주었다. 다음날 허리는 한결 나아졌다. 사람의 손은 이렇게 대단하다.
나는 집이나 상점 축복식을 할 때 주로 오늘 복음을 읽는다. 특별히 손으로 무엇을 하는 가게를 축복할 때 이 말씀은 주인에게 큰 위로를 준다.
그런데 사람 손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상점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이는 손으로 사람을 안내도 하고, 어떤 이는 손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기도 한다.
음식 맛은 손맛이라고들 한다. 또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말도 있는데, 음식을 만드는 손은 분명 하느님의 축복이다.
모든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상도덕을 지킨다면 이는 분명히 하느님이 당신의 손으로 마귀를 쫓아내듯 우리도 손으로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된다.
모든 사람이 다 손으로 올바른 일을 하게 된다면 이것 역시 하느님의 위대함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가 맞닿아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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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율법은 생명의 말씀(신명 32,47 참조)이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저주와 멸망을 불러옵니다.
모세 성인은 죽기 전에 하느님의 백성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제시합니다.(신명기 30장 19절 참조)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하며 구세주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하느님의 진리를 담고 있으나, 한시적이고 불완전한 상태로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당신의 현존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와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이 하느님의 나라는 믿음의 순수한 안목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구원을 볼 수 있는 원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시고 믿음의 후손이 되게 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복음 1장 15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언자들이 예고하였던 믿음의 시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적 차원의 공로와 업적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는 죄악의 요소들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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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암 수술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잘 관리하여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비슷합니다. 악에서 해방되고 난 뒤에 더 큰 악이 찾아오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었지만 이후 그에게 찾아온 시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배신자라고 낙인찍어, 그는 죽음의 위기를 겪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지 못하고 경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기까지 10년의 세월 동안 바오로는 홀로 지내야만 하였습니다. 언뜻 생각하기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아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하였고, 회심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그 이후의 삶이 탄탄대로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경우는 정반대였습니다. 은총의 체험 뒤에 더 큰 시련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체험이 있으면 그다음부터 좋은 일보다는, 그 체험으로 얻게 된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도록 더 큰 시련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무릇 그 은총에 맞갖게 살아가려는 굳센 마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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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과 악>
루카 11,15-26 (예수님과 베엘제불, 되돌아오는 악령)
그때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선과 악>
더하거나
덜하거나
선은 선이요
덜하거나
더하거나
악은 악이지요
덜한 선이
더한 선보다
더 악한 것이 아니라
다만 덜할 뿐이요
덜한 악이
더한 악보다
더 선한 것이 아니라
다만 덜할 뿐이지요
악과 맞서는 것은
그보다 덜한 악이 아니라
더하거나 덜하거나
다만 선일뿐이지요
그러니
그것이 선이면
기꺼이 해야 하고
그러니
그것이 악이면
어떻게든 하지 말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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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
마귀라는 말은 ‘중상자’, ‘고자질쟁이’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에 대적하는 이 세상의 왕 또는 악한 세력입니다(루카4,6. 2코린4,4).
그래서 하느님을 사칭하고(2테살2,4), 하느님 일에 반대하며(마태 16,23), 악인을 조종(에페 2,2)합니다. 인간을 모함(욥기 1,9-11)할 뿐만 아니라
유혹(2코린 11,3)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유혹(루카 4,5-7)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좆아 내셨는데 그에 대한 반응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했고,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군중의 반응은 이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고도 뺨 맞는 격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지만, 마귀는 선한 것 안에서 악한 것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악한 영은 더 큰 악을 불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참과 거짓의 대립을 놓고 심판관을 자처한다면 아마도 그곳은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 중상, 모략의 마음을 버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는 상태는 이미 천국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게 될 터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가슴 안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지 내 뜻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루카 4,1-14)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12장 28절에는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가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에페 4,26-27)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 하십시오”(에페 6,1) 하고 권고합니다.
묵시록에서는 “우리 형제들은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진리의 힘으로 그 악마를 이겨냈다.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기까지 싸웠다.”(묵시 12,11)라고 말합니다. 결국, 마귀를 물리치는 길은 말씀과 성령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힘과 위로가 되고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며 살고 있다면 그를 천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흉보며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마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선을 선으로 볼 수 있고 악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길 희망하며 마귀를 물리치는 사람 되시길 빕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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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대학 입시에서 수학을 120점 만점 중 딱 1점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는 과연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도저히 갈 수 없어서 재수를 선택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수학에서 19점을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입시를 준비했고, 가까스로 대학에 들어가 힘들게 졸업했습니다.
이제 졸업 후 회사 입사 시험이 문제였습니다. 30번의 입사 시험을 봤지만 모두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KFC 매장 직원 채용에 응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원자 24명 중 유일한 탈락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키도 작고, 형편없는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눌한 말투 역시 탈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어디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업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8번이나 연거푸 실패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현재 중국에서 가장 큰 기업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입니다. 그의 재산은 한화로 약 58조라고 하지요. 모든 조건이 좋지 않은 상태를 극복하고 그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이가 그의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꼽습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에도 자기 미래에 대해 결코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스스로에게 성공할 수 있고 잘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부정적 표현을 써야 할 때도 그 표현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좋은 말과 생각이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다면 자기 말과 생각에 대해 늘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의 좋은 결과는 여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어도,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셔도 또 어떤 행적을 보여주셔도 부정적인 생각으로 부정적인 판단을 해버리니 하느님의 일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과연 하느님 나라가 와 있게 될까요?
주님을 믿지 않는 곳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이 쫓겨난 깨끗한 곳에서만 하느님 나라가 와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마귀들이 쫓겨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마귀들과 함께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주님의 일을 축소해 마귀가 판치는 세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긍정적인 생각으로 주님과 언제나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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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승리>
- 하느님 중심의 삶 -
“저의 입은 당신 찬양으로 가득 찼나이다. 온종일 당신 영광을 찬미하나이다. 당신께 노래할 때, 제 입술에 기쁨이 넘치리이다.”(시편 71;8.23)
엊그제와 어제 양일간 강론 주제는 “기도”였습니다.
오늘 역시 영적승리에 기도가,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나 원래의 명칭은 ‘승리의 성모 축일’이었습니다.
참 오늘 축일의 유래는 대단합니다.
정확히 지금부터 451년 오늘, 1571년 10월7일 레판토 해전이 벌어졌던 날입니다. 유럽의 운명이 달린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해전이었습니다. 스페인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사보이아 공국, 구호기사단, 토스카나 대공국, 시칠리아, 나폴리 왕국, 성 라자루스 기사단, 우리비노 공국, 교황령등 11개국이 연합한 신성동맹 함대와 오스만 제국이 벌인 해상전투로 오스만이 참패했습니다.
1543년 콘스탄니노폴을 함락시킨 오스만 제국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며 급속히 세력이 팽창하였고, 발칸반도와 동유럽을 서서히 점령하며 유럽을 향해 전진하면서 동지중해를 장악한후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가던 중에 격돌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전투는 15세기부터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던 오스만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고, 기독교 세계에겐 “기독교의 영원한 적”으로 여긴 투르코족의 몰락이라는 염원을 고취시켰습니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은 함선의 대부분과 3만명의 병사 대부분을 잃었고, 서구 역사가들은 이를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이래로 가장 결정적인 해전으로 여깁니다. 유명한 <돈키호테> 소설을 쓴 스페인의 보병 연대장 세르반테스는 이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었다 합니다. 역사가 파울은 말합니다.
“이 오스만의 패배는 지중해에서의 오스만의 확장을 저지시켰고, 서부의 주도권을 유지하였으며, 예전에는 저지할 수 없었던 오스만을 격퇴할 수 있다는 서방의 자신감을 신장시켰다.”
1571년 10월7일은 10월 첫주일이었고, 오전부터 시작된 해전은 오후 4시쯤 서방의 승리로 결판이 납니다. 신성동맹을 성사시킨 분은 당시 교황 비오 5세였고 이날은 로마를 비롯한 신성동맹국들은 온종일 로사리오 기도를 통해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며 하느님께 승리를 빌었습니다. 교황 비오 5세는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려고 묵주기도의 성모를 칭송하는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고, 후에 명칭은 오늘의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바뀐 것입니다.
10월 묵주기도 성월의 유래는 바로 여기서 유래합니다. 가톨릭교회의 보편적 신심기도가
“성로신공”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주신공” 묵주기도입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해도 마지막 감각있을 때까지 바칠수 있는 묵주기도요, 묵주는 천국 입장 시 패스포드라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묻힐 때 손에 묵주기도를 쥐어 줍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로마에서 연수 때 어느 수녀님이 선물한 묵주반지를 끼고 묻혔습니다. 제가 어머니 임종 전 방문했을 때 다 돌려 주었지만 묵주반지는 그대로 끼고 돌아가셨습니다.
영적승리를 위한 하느님 중심의 삶에 묵주기도는 물론 공동전례기도 및 모든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기도는 간절하고 한결같아야 하고 끊임없이 바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참으로 탁월한 하느님의 전사이자 기도의 전사이기도 했습니다.
문득 어제 떠오른 다시 확인하여 나누고 싶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부끄러워할 것은 “병”이 아니라 “죄”요, 정말 두려워할 것은 병으로 인한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죄로 인한 “영혼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섬기는 중에 얻은 병고나 어려움은 영적전투중 영적부상으로 잘 받아들여 보속이나 대속으로 여겨 주님의 수난에 합류시킴으로 주님을 닮는 계기로 삼는다면 축복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섬기는 일상생활에 충실하는 것이겠습니다.
요즘 특히 강조하는 것이 선택의 은총입니다. 본의 아니게 주어진 것은, 바꿀수 없는 것은, 관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삶의 중심 으로 선택하여 기쁨과 감사, 희망과 평화의 낙관적 긍정적 하느님 중심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래서 살 줄 알면 행복이요 살 줄 모르면 불행이라는 말도 유래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천국도 지옥도 선택인 것입니다. 그러니 참 좋은 선택을 위한 간절하고 한결같은 기도입니다.
여러모로 힘들어도 더욱 열심히, 겸손하고, 자비롭게 살아야 겠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어떤 상황중에도 열심을 잃지 말아야 하고 겸손과 자비의 수행으로 삼을 때 비로소 주님의 전사요 영적승리의 삶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마귀들의 전투를 묘사합니다.
영리한 마귀들에게 자중지난은 없다는 것이며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턱도 없는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가장 힘센자로 견주며 영적전쟁중 승리의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있는 것이다.”
어떤 힘센 마귀들도 가장 힘센 하느님의 전사인 예수님을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양자택일을 요구하십니다. 영적전쟁에 중립은 없다는 것이며, 주님은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전사인 당신 편에 설 것을 촉구합니다.
“내 편에 서지 않은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것이다.”
주님 반대편에 서서 흩어버리는 분열이 아닌, 주님 편에 서서 하느님 중심의 모아들이는 일치의 삶에 온힘을 쏟으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마귀들의 온갖 침입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복음 후반부도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회개로 깨끗해진 마음안에 성령의 주님을 모셔야 악령들의 놀이터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갔던 악령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음으로 그 사람의 끝은 처음보다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악마는 진공을 좋아합니다. 하느님 중심 자리를 진공으로 비워두면 악마가, 우상들이 그 자리에 자리 잡습니다. 이래서 성 베네딕도는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부지런한, 열심한, 겸손한, 자비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전사인 바오로가 강조하는 바도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성령의 삶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삽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이르러, 우리가 약속된 성령을 믿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으로 살 때 성령의 선물이요 성령의 은총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강화해 주고 하루하루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어제 성 브루노 기념 미사때 기도문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저희가 번잡한 이 세상에서도, 죄악에 물들지 않고, 하느님만을 생각하며, 절제하며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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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11,20)
<나 자신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자!>
오늘 복음(루카11,15-26)은 '예수님과 베엘제불'과 '되돌아오는 악령에 대한 말씀'입니다.
베엘제불은 마귀의 우두머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에 들려 말을 못하는 이를 고쳐주시자, 군중 가운데에 몇 사람이 예수님께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당신께서는 베엘제불이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고, 그런 구마기적이 일어나는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다.' 라는 의미의 말씀과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마귀와 싸워 승리하는 구마기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인의 삶'은 너와의 싸움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시탐탐 나를 노리는, 나를 무너트리려고 하는 '나쁜 영(마귀)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 편에 서서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우리의 전구자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오늘은(10.7), 1571년 그리스도교 연합군이 이슬람 제국의 군대를 무찔러 승리한 날입니다. 이 승리가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의 힘입어 승리했다고 여겨진 것에 기인해서 만들어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와 하느님의 손가락(힘)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과 마귀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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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3APFHTFLt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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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 26)
묵주기도는
모든 시간에
함께하는
우리 삶의
가장 정겨운
기도입니다.
묵주기도에는
우리 삶의
이야기로 가득
합니다.
우리 삶이 있는 한
묵주기도또한
계속 이어집니다.
기도의 무게는
사랑의 무게입니다.
사랑이
기도가 됩니다.
어울리고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여정을
성모님처럼
만나게됩니다.
주님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묵주알과 함께
지나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 묵주기도로
이 마음을 바칩니다.
묵주기도는
우리삶의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환희와 고통
영광과 빛의 신비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복음을 만납니다.
여전히 묵주기도는
주님을 만나게 하는
가장 다정한
기도의 길입니다.
.
+++++++++++++++++
(2)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 23)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고
믿어주시는
기도의
어머니가
계십니다.
기도로
본받아야 할
기도의
마음입니다.
어머님의 손길은
묵주 기도의
손길이 됩니다.
어머님의 삶이
기도이며
어머니의 기도가
삶이 되었습니다.
사랑을 이어주는
기도가 되셨습니다.
어머니가 없다면
우리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모아들이시는
어머니입니다.
고마움과 소중함
간절함과 존귀함을
일깨워주는 특별한
우리 삶의
묵주 기도입니다.
어머님과 함께
사랑을 빚어내시는
예수님의
여정이었습니다.
묵주기도를 통해
우리 삶의
지향성을
만나게 됩니다.
지향은 삶의
소중한
방향이 됩니다.
소중한 방향은
어려운 상황마저
기도하게 만드는
기도의 새날
새하루가
됩니다.
어머니는
우리 삶의
가장 고운
묵주 기도입니다.
우리의 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기도의 새빛입니다.
묵주 기도의
기도의 마음으로
기뻐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어머니의
삶입니다.
언제나 기도같은
어머니가 계십니다.
우리 삶의
어머니는
묵주 기도의
어머니이십니다.
묵주 기도로
다시 올려지는
우리의 고운
일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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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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