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 - 이병률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 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컨의 한 자 안 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사라지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 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두운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 2003
# 이 시는 20년 전에 나온 이병률 첫 시집에 실린 시인데도 읽을 때마다 감동이다.
나는 요즘 이병률의 새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을 읽고 있는데 어느덧 일곱 번째 시집을 냈다.
가능한 유명 시인보다 덜 알려진 시인의 이야기를 쓰고 싶으나 오늘 문득 이 시가 생각나서 그의 첫 시집을 펼쳤다.
이 시를 다시 읽으며 떠올린 단어가 호시절이다.
실연을 당했던지 아니면 사는 일이 너무 막막해서든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시절도 돌아보면 아득한 추억이다.
전파사, 디스켓 등 지금은 아련한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진 단어들이 눈에 띄지만 한때 그토록 유용했던 삐삐처럼 한시절을 누렸던 것들이다.
제목부터 눈길을 사로 잡는 이 시를 읽고 나면 호시절의 역설을 공감할 수 있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아름다웠던 한때를 말한다는데 나는 이 단어를 시보다 왕가위 영화로 먼저 접했다.
한때는 영화에 목이 마른 나의 가슴을 시적인 영상으로 온통 색칠하게 만들었던 감독이 왕가위다.
아비정전, 동사서독, 중경삼림, 타락천사, 춘광사설, 화양연화, 2046, 일대종사,,
그의 영화 제목이 이토록 시적인 것도 왕가위가 영화를 시처럼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예전에 시골에서 혼자 사는 어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어머니의 지난 날을 듣기 위해 물어본 적이 있다.
명절 때와 아버지 제사에나 내려갔으니 일년에 고작 몇 번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어머니에게 물어 당신이 살아온 세월을 내 마음에 담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엄니는 언제가 제일 행복했었어?"
"행복이 뭐시간디?"
"그런 거 있잖아유. 아부지 처음 만났을 때 너무 좋아서 가슴이 떨렸다든지."
"오매, 부끄러워서 니 아부지 얼굴도 못 쳐다봤는디 행복은 무신,,"
"엄니두 좋은 시절이 있었을 거 아녀유."
"좋은 시절이 있었간디? 그냥 정신없이 살다보니 이렇게 나이를 먹었구만."
모진 세월을 살아온 어머니는 행복을 이런 식으로 투박하게 표현했지만 늦은 밤까지 두런두런 엄니의 과거를 듣던 그때가 좋았다.
### 달랑 이병률 시 하나 올려놓고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나의 시화(詩話)는 이런 식이다.
송나라 문인 구양수의 시화에도, 고려시대 이인로가 쓴 파한집에도 이런 시화는 없을 것이다. 나만의 방식으로 시를 읽고 느낌을 적는 이 자유가 참 좋다.
영화사에 빛나는 명작을 남겼던 왕가위도 요즘 뜸하다. 초반에 너무 힘을 뺐던 것일까.
아니면 밑천이 바닥났거나 영화보다 더 좋은 것에 몰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왕가위에게는 영화 화양연화를 만들 때가 분명 호시절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화양연화는 있기 마련이지만 내게는 딱히 떠오르는 호시절이 없다.
비록 밑천도 없고 근본이 없는 몸이지만 지금이 바로 호시절이라 여기며 산다. 호시절도 마음 먹기 나름인가.
슬픔도 내것으로 품을 줄 아는 앞으로가 나의 화양연화다.
*영화 화양연화 OST
첫댓글 슬픔도 내것으로 품을 줄 아는 앞으로가 화양연화다
마지막 글이 넘 좋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ㅎ 그런가요?
비가 내리는 봄밤에다 낼모레가 어버이날이기도 해서 떠오른 문장입니다.
슬픔을 잘 품으면 감정의 근육을 키워주는 보험같은 것이 되기도 하데요.
들길님, 마지막 연휴의 밤 평온하시길요.ㅎ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병률 시집 제목만으로도 설레임이 느껴집니다.
유현덕님 글을 읽으며 저도 이병률 시집을 꼭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시집 제목에 끌리셨다니 감성이 풍부하신 수피님이네요.^^
이 시집에는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많이 달지도 않은 사랑 시로 가득합니다.
요즘 제가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출퇴근 길에 몇 편씩 읽는 맛에 취해 사네요.
순수한 수피님에게 화양연화의 날이 많기를 바랍니다.ㅎ
그렇지요..누구나 좋은 시절 있겟고..
아픈 계절도 있었겠고..화무십일홍이고..
이리 봐도 저리 봐도 그런게 인생 아닌가~합니다.
그나저나
중국영화 하면 성룡 영화 정도 즐겨 봤으니
그 좋다는 화양연화는 아직도 안보았고..하지만 언젠가는 그 영화 보긴 봐야겠는데..ㅎ
물론 영화 보다
현실에서 먼저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때를 마음 편히 기다리고 기대하는 중입니다~~^^
ㅎ 이리 봐도 저리 봐도 화무십일홍 인생이라는 가을님 댓글이 영화 화양연화는 저리 가라입니다.
가을님이 배우 성룡을 언급하시고 저도 즐겨봤던 중국영화가 많으니 우리는 중국영화 애호가 동지네요.
님이 기대하는 것처럼 영화보다 현실에서 맛보는 화양연화가 진짜입니다.
글구, 울 엄니도 영화 화양연화를 못 봤으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길요.ㅎ
@유현덕 지난번에는
야구로 연결고리를 찾으시더니
오늘은 또 중국영화를 말씀하시는데..
사실 성룡 말고는 중국영화 잘 모릅니다..ㅎ
그보다는 유현덕님과 삼국지로 더 연결이 잘될거 같은데...
제가 장비나 조자룡 캐릭터를 참 좋아합니다.
유현덕님은 신사의 나라 영국 생활 경험도 있으시고..
그때가 화양연화 아니었을까~추정해 보는데..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오?
아무튼 성실하게 살다보면 우리들에게 좋은 날..화양연화를 만날 날이 있겠지요.
@가을이오면 야구든 야그는 삼국지든,,^^
조운을 언급한 가을님과의 동질감이 반가워 대댓글을 안 달 수가 없네요.
저는 무뚝뚝한 장비보다는 순한 장수 조운을 더 좋아했지요.
내 유일한 라이벌인 조조가 만년에 쓴 시 귀수수(龜雖壽) 구절을 추가로 답니다.ㅎ
신령한 거북이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반드시 죽는 날이 있고
하늘을 나는 이무기 구름 위에 올라도
끝내는 흙먼지로 돌아간다네
(중략)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시가(詩歌)로 그 뜻을 노래할 수 있으니
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누구든 화양연화가 올때를 기다리며 살지요.
다만,
화양연화였음을 지난 후에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지금이 화양연화라고 생각하면
평생을 화양연화 속에 살겠지요.
어머니의 화양연화를 생각하며
유현덕님은 어머니를 향한 思慕가 깊습니다.
자신에게는 겸양지덕이 깊고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할 적에 자주 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녹음 짙은 날에도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ㅎ 쉬운 문장에 심오함이 담긴 콩꽃님의 댓글에서 또 공부를 합니다.
어쩌면 저도 화양연화 속에 살면서 그것을 모르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네요.
봄바람에 녹음이 짙어가는 날이 아니어도 온에서든 오프에서든 콩꽃님을 뵙는다면 저도 기쁠 겁니다.
수필방에 큰누이처럼 느껴지는 콩꽃님이 있어서 참 좋네요.ㅎ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5.12 16:19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5.13 20:48
위의 글에서 호시절 이란 말이 나옵니다
나는 가끔 옛 추억을 생각 하면서 호시절이란 말 대신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 이런가 하노라 라는 시조의 한구절을 말하곤 합니다
과거의 좋은 추억을 생각 하는것두 좋은 소일거리 인거 같습니당
지금이 호시절 이라고 생각하면서 산다는거?
좋은 생각 이구 훌륭합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태평성대님이야 말로 닉에서부터 언제나 화양연화임로 여기고 사는 분임을 알 수 있겠네요.
언젠가 딱 한 번 뵙고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데 너그러운 성품을 느꼈답니다.
님처럼 가능한 태평하게 긍정의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호시절을 내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네요.
어디서든 또 뵙기를 바라옵니다.ㅎ
소개하신 시 에서
어릴때 살았던 정겨운 동네가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떠오릅니다
섬세한 표현으로 심금을 울리는
유현덕님 글에서 나의 호시절은 언제 였을까..
있기나 했던가..더듬어 봅니다^^
해솔정님이 떠올린 흑백영화 장면에서 저와 같은 마음을 보았습니다.
아파트 시대가 되면서 점점 사라지는 골목이 그리울 때면 찾아 나서 걷는답니다.
미장원과 비디오 대여점과 전파사가 있던 골목을 무지 사랑했습니다.
엄니와 나란히 누워 밤 늦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던 그때가 제겐 호시절이었네요.ㅎ
화양연화
이 단어를 bts를 통해서 알았네요
이 무지함
옛 어른들이 호시절이 다 갔다고 동네 정자나무 아래서 말씀하셨던 게 생각납니다
지금이 호시절이라 생각하고 살렵니다
동영상 재생이 되지 않아 검색해서 들어 봅니다
https://youtu.be/2rlFaIKZ-ms
화양연화 (花樣年華, 2000) | 이별 연습
PLAY
슬프면서도 한편 애틋한 장면이네요.
가리나무님의 친절함으로 제 눈과 귀가 호강을 합니다.
첨부해주신 귀한 영상을 보고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장면 하나하나가 시처럼 느껴지는 영상 잘 봤습니다.ㅎ
https://youtu.be/bOq_jnvDXV8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본 기억이 납니다만
유현덕님 덕분에 오늘 다시 감상합니다
PLAY
저도 님 덕분에 다시 감상해서 좋습니다.
영화 주요 장면과 OST가 아주 잘 어울리네요.
왕가위 영화의 특징이 시적인 영상과 음악의 조화이기도 하지요.
알뜰한 가리나무님 감사합니다.ㅎ
잘 읽고 갑니다.
어머님의 말씀이 짠하게 느껴지네요.
정신없이 살아왔다는...
아마도 대개는 그러할 겁니다.
조금씩 여유가 생기면서 어찌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되니까요.
그냥 오늘을 여유있게 살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이 카페의 산증인이자 수필방의 대부이신 석촌 선배님이야 말고 대단한 분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건강함을 선배님 글에서 오롯이 느낄 수가 있네요.
모쪼록 건강하셔서 오래 함께 머물기를 소망합니다.
선배님도 여유롭게 사시는 지금이 찬란한 화양연화입니다.ㅎ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충만해지는 이유는 뭘까요.
이병률시인의 시와
유현덕님의 덧붙이는 글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아
감동을 불러 일으키네요.
제게 호시절을 묻는다면
지금이라고 말 할 수 있어서
참 감사할 일입니다.
유현덕님
좋은글 감사드려요.
지금이 호시절이라는 제라님의 댓글이 반가워 저도 마음이 환해지네요.
이병률 시가 마음을 순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공감할 줄 아는 제라님이야 말로 시인 감성을 갖고 있는 분이네요.
연휴 내내 비요일이었다가 오늘은 흐리지만 내일부터 맑은 봄날이 된다고 합니다.
제라님도 언제나 좋은 날 되시길요.ㅎ
나하고 동갑인분이 25년다닌 대우건설을 퇴직하고 2008년 자전거로 미국대륙을 횡단하면서 남긴 여행기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세상살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란 꼭 어디가 어떻게 생겨서가 아니라 바라보는 마음에 있다는 것. 마음을 열고 보라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고 감동적인 순간 아닌 때가 없다. 대저 천삼라 지만상 두두물물이 일체유심조.. 이거늘! >
최근 백운대산행서 또 설악산산행서 만난 유현덕님. 힘내시기 바랍니다.
공감 백배의 댓글에도 제가 선배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니 이걸 어찌할까요.
제가 돌아서면 닉을 잊는 통에 더욱 그렇습니다.
다음에 만나거든 꼭 아는 체를 해서 친해지기를 기대합니다.
글이 통하면 말도 통하지 않겠는지요.
미국 대륙을 자전거로 횡단하신 친구 분도 대단합니다.
인생 후반전을 잘 즐기고 계시는 언덕저편님도 응원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