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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장 히든 카드
나도 우리집안에서 철이 없었긴 했지만 중학교 3학년 때 난 서진이 같지는 않았다. 하긴…좀 더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서진이 만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라라가 이 집에 온 후로 서진이가 자신의 막내 자리를 갑자기 뺏기고 온 식구들의 관심은 라라에게 집중되었으니…
엄마를 잃은 서진이의 마음을 위로받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서진이가 아빠의 주목을 받는 순간은 언제나 서진이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 뿐이었다. 서진이가 학교 성적이 나쁘면 석훈은 서진이를 불러다 얘기를 나눴고 과외 선생님을 바꾸어주었고 서진이가 선생님께 반항하면 석훈은 학교를 찾아갔다.
서진이는 주위에 불만사항이 많을수록 석훈에게 전화하는 횟수가 많아질 수 있었다. 서진이가 바쁜 석훈에게 전화해서 뜬금없이 ‘아빠 사랑해’ 할 수가 없으니 대신 서진이는 ‘아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하며 수시로 전화를 해대는 것 같았다.
서진이가 라라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 책에다 낙서하면 어떡해? 이게 뭐야?”
라라가 서진의 교과서에 크레용으로 낙서를 해놓았다.
“너 정말 언니한테 혼나 볼래? 누가 내 방에 들어오래? 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져?”
라라가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다가가니 서진이가 즉시 방어를 했다.
“라라가 내 책에다 한 짓을 봐! 다 너 때문이야. 너가 라라를 내팽개치고 있으니까 이런 일이 생기지.”
내가 라라를 보며 말했다.
“울지 마, 라라. 언니가 화를 왜 내는 줄 알지? 언니 책에다 너가 막 그림을 그렸잖아? 하얀 종이에다 해야지. 자, 봐봐. 이 책엔 이렇게 글자들이 다 쓰여 있지? 이런 종이에다 그림 그리면 안 돼. 알았지?”
내가 서진이를 보고 말했다.
“서진아, 라라가 내 말을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너가 라라가 확실하게 알도록 가르쳐줘. 여기 테이블 위에 하얀 종이랑 글자가 쓰인 종이랑 놓고 라라가 어느 종이에다 그림을 그리는지 실험을 해보자.”
서진이가 흥하고 비웃었다. 예상했던 바다.
“난 지금 라라 간식 만들어야 되서. 부탁해.”
“싫어. 니 일을 왜 나 시켜!”
“라라를 알아듣게 가르쳐 놔야 이런 일이 또 안 생기지. 난 이런 방법밖에 모르겠으니까 니가 더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너가 직접 시도해 보고.”
서진의 불평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잠시 후 조용히 올라가 보니 서진이가 라라에게 비록 땍땍거리고는 있었지만 선생님 흉내를 내듯이 라라를 가르치고 있었다. 라라가 흰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자 서진이는 “잘했어. 자, 다음.”하며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라라가 눈치를 보며 다시 동그라미를 그리자, “좋아. 자, 이번엔 네모. 너 네모 알아?”하고 물었다. 라라가 고래를 저었다.
“너 바보니? 여태 도형도 안배우고 뭘 한 거야?”
서진이는 답답한 듯 종이에 네모를 그렸다.
“자, 여기 네모랑 똑같이 생긴 네모를 우리 방에서 찾아봐.”
라라가 두리번거리다 책을 집었다.
“맞았어. 그것도 네모고. 그럼 이번엔 세모. 세모는 이렇게 생겼어. 이 방에 세모모양이 뭐가 있어?”
라라가 두리번거리면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책상 위 접시에 놓인 네모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서진이 짜증을 냈다.
“바보같이 그건 네모잖아! 세모가 아니라.”
라라가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샌드위치를 먹어?”
라라가 샌드위치 한쪽을 다 베어 먹고 그걸 들어서 서진이에게 보여주었다. 라라는 샌드위치의 한 쪽 면을 먹어서 세모를 만들었던 것이다. 서진이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내 동생이 아주 바보는 아니었구나..”
역시 이 집 아이들은 다 똑 부러지게 영리했다. 라라는 늦게 가는 듯 보이지만 다른 길을 가는 그런 아이였다. 라라는 화산이나 지진, 번개, 천둥, 비, 눈, 등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또래 아이들보다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라라가 그림을 그릴 때 색을 쓰는 걸 보면 다시 한번 라라의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라라 할아버지가 여전히 날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고 느꼈지만 그것도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반전이 되었다. 사실 사건이랄 것도 없었는데 그건 바로 수제비 덕분이었다.
그날은 웬일로 라라 할아버지가 점심때에 집에 들어 오셨었다. 주로 이사장을 맡고 계시는 학교와 모임 그리고 산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시는데 그런데 그날 라라 할아버지는 갑자기 들어와서 아줌마에게 수제비를 만들라고 하셨다.
“수제비요?”
“그래, 수제비 몰라?”
아줌마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도 제 수제비 맛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이번엔 제대로 만들어 봐!”
할아버지가 정원에 나무에 물을 주고 계시자 아줌마가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수제비 장사로 자수성가한 줄 모르나? 가끔 저렇게 수제비를 찾으셔. 근데 그 옛날 당신이 드시던 수제비 맛을 내가 어떻게 똑같이 내냐고? 당신이 직접 끓여 드시던가. 아휴, 큰일이네.”
“아줌마, 제가 도와드려요?”
“선생님 수제비 잘 끓여?”
“엄마한테 배운 비법이 있거든요.”
아줌마를 도와 오랜만에 엄마가 해주시던 대로 수제비를 끓였다. 식탁에 앉아서 라라 할아버지가 수제비 한입을 드시는 걸 아줌마와 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할아버지는 한 수저 드시더니 그릇을 뒤적뒤적하셨다. 그리곤 국물을 다시 드셨다.
“이거 아줌마가 끓였어?”
“아니요.”
아줌마가 나를 밀었다.
“여기 정선생님이 글쎄 뭐 비법이 있다느니 하면서 자기가 한다고 해서. 죄송해요. 제가 다시 끓일게요.”
“다시 끓이긴! 이게 백배는 맛있고만.”
이게 웬일이람?
“선생도 같이 들지?”
할아버지와 단둘이 식사를 하느니 굶는 게 낫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여기다 꽃게 넣었소?”
“네.”
“그건 어디서 났는데?”
“집에서 가져온 게장이 있어요.”
“원래 선생님 집에서도 수제비를 이렇게 해먹어요?”
“네. 엄마가 게장을 잘 담그세요. 그래서 된장찌개에도 넣고 수제비에도 넣고 그렇게 자주 먹었어요. 수제비에 넣을 땐 나중에 수제비 다 끓고 나서 꽃게를 꺼내서 살만 다시 발라 넣어요.”
할아버지가 맛있게 수제비를 비우시고 물었다.
“그래, 어머님한테 잘 먹었다고 인사 전해주시요. ..어머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나?”
“예, 김자 옥자 자자 쓰세요.”
할아버지가 물을 드시다 사레가 걸려서 기침을 했다.
“괜찮으세요?”
그가 손사래를 치더니 내게 물었다.
“아버님은 뭘 하시는데?”
“인테리어일을 하셨는데 지금은 그만두셨어요.”
“그래, 원래부터 그 일을 쭉 하신건가?”
“아니요, 원래 국문학과 다니셨다는데 형편 때문에 중간에 그만두셨다고 들었어요.”
그가 왜 이렇게 구구절절이 우리 부모에 관해서 물어보는지 의아했지만 어른이 물어보시니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었다.
‘원래 노인들이 궁금한 게 참 많지. 남의 살림살이도 다 참견하고 싶어하시고.’
그가 뚫어지게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갑자기 그가 수제비만 매일 끓여내라고 할까봐 불안했다. 할아버지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소.”
하여튼 엄마의 특제 수제비 덕분에 그 후로 할아버지는 날 더는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지도 않으셨고 라라와 내가 놀고 있으면 멀찍하니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곤 했다. 심지어 내가 라라를 위해 거실에 텐트를 치려고 하자 아줌마도 말리고 석훈마저 라라할아버지가 집안 어지럽히는 것을 싫어한다며 반대했지만 그가 나서서 “내 버려둬. 다 라라 위해서 하시는 건데.”하고 말씀하셨다. 나와 석훈, 아줌마 모두 그의 의외의 말에 놀랐다.
그리고 라라 할아버지에게는 아주 독특한 말투가 있다. 그 말투는 전화를 받을 때면 나온다. 전화를 받으시면 항상 “여보세용?”하신다.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심하게 콧소리를 내면서 말하는 그의 “여보세용?”하는 소리에 난 간신히 웃음을 참게 된다.
한번은 내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데 기훈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할아버지가 전화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기훈이 손으로 전화를 받는 동작을 하며 갑자기 할아버지의 흉내를 냈다.
“여봉세용?”
난 빵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도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난 소파에서 쓰러질 듯이 웃었다. 그가 서서히 웃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색한 순간이었다.
하여튼 요즘 라라 할아버지가 그런 콧소리를 내게도 해주신단 말이다.
“우리 라라선생님 식사 하셨어용?”
이렇게 말이다. 그러면 난 또 웃음을 참아야 했다.
거실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라라와 춤을 추었다. 배어 헌트(Bear Hunt)라는 영어 노래인데 라라가 영국에서 유치원 다닐 때 좋아하던 노래와 율동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라방에 있는 음악 CD를 그동안 아무도 들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그 CD를 틀자 라라는 금세 율동을 기억해 내었다. 노래의 가사는 ‘우리는 곰 사냥을 간다. 우리는 곰 사냥을 간다. 우리 아주 큰 걸 잡을 거야. 난 두렵지 않아.’ 근데 중요한 것은 동작이다. 오두막 문을 열고 닫고, 산 위에 나무도 오르고, 강도 건너는 동작을 하면서 아이들은 공간감각과 어휘력도 키우는 것이다.
라라가 음악과 율동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우리는 신나게 노래도 따라 부르고 율동도 함께 했다.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라라가 소리쳤다.
“삼춘! 컴 히어(Come here). 같이 해! 같이 해요!”
기훈이 우릴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라라는 기훈의 셔츠를 잡아당겨 내 앞으로 끌고 왔다.
“…음 따라 해요?”
기훈이 당황했다.
“삼촌 그런 거 못해.”
나도 기훈과 함께 다정하게 율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어른들은 잘 못해.”
라라가 소리쳤다.
“싫어!!...플리즈, 플리즈.”
기훈이 말했다.
“이런 건 니 아빠”
하다가 기훈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래, 어떻게 하는 거야?” 하고 라라에게 물었다. 기훈도 석훈이 라라와 이런 율동을 함께 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되긴 했나 보다. 나는 음악을 틀었다. 키가 훌쩍 큰 다 큰 남자가 율동을 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거로 생각했는데 기훈은 곰을 피해 나무 위로 도망치는 동작, 강을 건너려고 배의 노를 젓는 동작, 그리고 곰에 쫓겨 오두막에 들어가 문을 꽝 닫는 동작까지 열심히 제대로 했다.
김기훈…정말 알다가도 모를 남자다. 라라가 맑게 웃는 모습을 보는 내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화목한 한 가족이라고 했을 거다. 기훈이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기훈 역시 내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이건 뭐지? 눈싸움? 라라가 말을 걸어서 내가 졌다.
사과나무학교 선생님들을 초대한 날 오후였다. 출장요리사들도 오고 집안이 들썩거렸다.
“가끔 이렇게 학교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대해요?”
내가 기훈에게 물었다.
“아니. 처음이야. 나도 이제 아버지가 별 일을 다 하신다 생각하고 있던 참이야.”
“근데 사장님 맞선 보셨어요? 아까 이사장님이 요즘 잘 만나냐 그렇게 물어보시는 거 같던데…”
“나한테 형 얘기하지 말라고 했지?”
“...참 쓸데없는 경쟁심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뭐라고?”
“아니에요.”
“아니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셔. 남의 집안일에 나서는 오지랖 넓은 라라 선생님.”
“알았어요. 남의 집안일에 나서서 죄송해요.”
그가 나의 정중한 사과에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건 참으로 조심스러우면서도 개인적인 문제였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지 마. 이상해."
"....?"
"너 답지 않아.”
“뭐에요? 오지랖 넓다고 그럴땐 언제고.”
그가 귀찮은 듯 말했다.
“그냥 하던 대로 해.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학교 선생님들이 도착했다. 다른 식구들처럼 나도 정원에 서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뒷마당에서 할아버지가 석훈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창고에서 라라 장난감만 꺼내려 한 것인데 엿듣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정선생님하고 잘 된다고 들었다.”
나랑? 잘되긴 뭐가 잘 돼?
“오늘 식사 끝나고 니가 집까지 꼭 모셔다 드리고.”
왜 날 집에?
“우리 학교에서 삼 년을 봐온 사람이야. 그만한 처자가 없어. 정선생님은 노처녀긴 해도 초혼인데 니가 말년에 복이 있으려나 보다. 복덩이 누가 채가기 전에 얼른 서둘러.”
내 얘기가 아니구나…
“왜 대답이 없어?”
“아버지가 안 그러셔도 잘 만나고 있어요.”
“더 자주 만나라 그 말이다. 그리고 이제야 니가 그 말을 해줬지 내가 알았냐? 도통 말을 안 하니.”
내가 들은 얘기의 내용을 종합해보았다. 석훈이 그러니까 직장동료인 사과나무학교 여선생님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는 것이었다. 이사장님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그랬구나. 좀 섭섭한 마음이 들긴 했다. 그를 이성으로서 느낀 건 아니지만 그에게 아주 호감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보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석훈의 재혼이 당연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학교 선생님들 중 누군가인 모양인데…난 손님들을 살펴보며 누가 석훈과 이사장님이 말한 정선생님일까 추측을 해보았다. 눈에 띄는 미모의 여선생님이 보였다. 저 여자구나…서진이가 아빠의 재혼을 찬성할 리가 없다. 저 여선생님, 서진이 때문에 눈물 꽤 쏟겠지 싶었다.
뒤늦게 학교 선생님 한 분이 더 도착했다.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정원 테이블에 가서 앉는 것을 보고 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녀는 정연 언니와 많이 닮아 있었다. 세상엔 참 닮은 사람이 많다 싶었는데 그런데 그 여선생님이 날 쳐다보았다. 그녀가 일어서서 내 앞으로 걸어와서 아주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 제 동생이랑 너무 닮으셨어요?”
“…언...언니?”
“어머! 너 다라 아니니? 다라야! 너 여기서 뭐해?”
언니였다. 정말 정연 언니였다. 난 언니가 어느 학교에서 일하는지는 정말 몰랐었다. 가끔 학교 얘길 듣긴 했지만 이름은 들은 적이 없었다. 너무 반가웠다. 내가 지방에서 영어학원 강사를 한다는 거짓말은 탄로가 나겠구나 싶었지만...
“사실 나 이 집에서 여기 막내딸 라라 입주가정교사로 일하고 있어. 엄마, 아빠가 반대하실까 봐 지방에서 영어학원 강사 한다고 거짓말 한 거야.”
언니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지만 이내 수습을 했다.
“넌..그럼 여기서 쭉 살고 있었던 거야?”
“응. 그나저나 반갑다, 언니. 이런 데서 보니까. 우리 이따가 따로 수다 좀 떨자. 응? 나 할 얘기 정말 많아.”
석훈과 라라 할아버지가 어느새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석훈아, 정선생님 모시고 집 좀 구경시켜 드려라.”
석훈과 우리 정연언니가 마주보고 미소를 짓는다.
‘뭐지, 이 분위기는?’
둘이 다정하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불현듯 언니의 ‘애 셋 딸린 남자… 존경스러운… 같이 뮤지컬’ 등등의 말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오 마이 갓!!!’ 설마 정연언니가 만난다는 남자가..설마 석훈이 만난다는 여선생님이….
라라할아버지가 내게 물다.
“어머님은 잘 계시죠?”
“예? 예.”
“건강은 하시고?”
“예? 예.”
“나이 들수록 건강이 중요하니까…자식들이 챙겨주지 않으면 자기 몸에 돈 쓰는 걸 아까워하는 게 노인들이에요. 어머님한테 안부전화도 자주 하시고.”
“네…”
라라할아버지는 내가 정정연 국어선생님과 자매지간이라는 걸 모르신다. 물론 석훈도 모른다.
난 자리에 털썩 앉아서 마음을 정리했다. 난 난…난…난…이 결혼 반대다. 물론 아직 언니가 교장선생님과 결혼한다고 결정한 건 아니지만 일단 제일 먼저 난 반대다. 사랑하는 정연언니가 영진, 서진, 라라의 엄마 노릇에다 깐깐한 시아버지까지 모시느라 검은 머리가 하루 새에 파뿌리가 되는 꼴을 내가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다. 게다가 시동생..! 기훈와 내가 사돈지간? 우웩!!!
라라가 뛰어왔다.
“다라, 뭐해요? 해피랑 놀아요?”
강아지 해피가 내 발을 갖고 장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진이 버려진 강아지를 주워왔는데 석훈은 외외로 강아지 키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라라 할아버지는 “개 키우려면 밥값 들고 개집도 사야하고 뭐냐 동물병원도 데리고 다녀야 하고 돈 많이 든다!”며 반대했지만 난 동물을 키우는 것이 아이의 교육에 얼마나 좋은지 설명을 했었다.
“동물을 키우면서 나쁜 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선 동물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고요, 살아있는 생물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요, 밥 주고 목욕시키고 돌보면서 책임감도 키울 수 있고요, 강아지를 쓰다 듬고 안아주면서 정서적인 안정감도 가질 수 있구요..”
“됐소. 됐소. 애한테 좋다는데 할아비가 반대하면 나만 나쁜 사람 되는 거지. 흠흠.”
해피랑 노는 라라의 모습이 정말 해피해 보였다. 라라는 요즘 많이 밝아졌다. 라라와 강아지의 모습에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기훈이 저쪽에서 라라의 사진을 찍는 것이 보였다. 하여튼 라라를 너무 예뻐한다니까…하고 생각하면서 갑자기 라라가 부러워졌다.
내가 왜 이러지? 기훈이 라라만 예뻐해서 속상해?
식사를 마치고 손님들이 떠나기 전 언니를 사람들이 안 보이는 정원 한구석으로 데려갔다.
“언니 정말 여기 교장선생님하고 결혼할 거야?”
“다라야! 우리 단 둘이 사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돼. 겨우 …다섯 번 만났지 아마? 결혼이란 단어 나오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진 않니?”
“학교에서 서로 삼 년을 봐왔다고 들었는데?”
“그거야 직장 동료이자 교장선생님으로서 석훈씨를 봐온 기간이고. 결혼을 전제로 사적으로 만난 거는 얼마 안 되니까…”
“그래도 서로 어색한 사이는 아니잖아. 전에 친한 편이었어?”
“친하기보다는 …야, 근데 너 여기 사는 줄 알았으면 진작 물어볼걸. 석훈씨 집에선 어떠니? 나보다 너가 더 잘 알 거 아냐. 얘기해 줘봐. 사람은 괜찮지? 좋은 아빠지?”
“사장님이야..뭐 나쁜 사람 아니지.”
“나쁜 사람 아니면 됐네. 요즘에 착한 사람 만나기도 어려워.”
“착한 건 모르겠고 참 ..정상이시지.”
“그럼 됐어. 요즘 같은 세상에 정상인 남자 만나기가 쉬운 줄 아니?”
“언니, 완전히 빠졌구나.”
“아니야! 진심으로 남자를 지금까지 만나면서 사람이 참 정상적이다 참 바르다 그렇게 느낄 수 있었던 사람이 별로 없었어.“
“게다가 돈도 많고?”
언니가 정색을 했다.
“돈이야 물론 없는 거보다 낫지만 난 그분 조건보고 좋아하는 거 아냐.”
“다섯 살 차인데 그 분 그 분 하시네. 언니, 사장님 조건 좋은 거 아냐. 오히려 최악이지. 영진이는 그래 다 컸다 치고, 애는 착하니까… 근데 새엄마한테는 어떻게 행동할지 그건 아무도 장담 못하는 거라고. 서진이? 서진이는 언니 정말 피를 말릴 걸? 라라…라라는 착하고 귀엽지만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데..언니 절대 감당 못해.”
“누가 당장 결혼한대?”
“어쨌든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거잖아? 언니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너가 도와주면 되잖아. 너 당분가 내가 애들하고 친해질 때까지 도와주면 되잖아. 만약 나 결혼하게 돼도 라라가정교사 일하면서. 나 근데 학교는 계속 다녀야 할까?”
내가 소리를 꽥 질렀다.
“언니! 왜 그렇게 급해?”
언니가 갑자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내 나이 돼봐라. 안 급하게 생겼나. 나도 이제 아이도 낳을 …아니다.”
갑자기 언니가 밝은 톤으로 목소리를 바꿨다.
“농담이야, 농담. 석훈씨 같은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날 좋아하겠니? 우리 그냥 아직… 덤덤해. 사실 이사장님이 밀어붙이시니까 석훈씨가 지금까지 끌려 온 거나 마찬가지인 거 나도 알고 있었어. 그만 가야겠다. 선생님들이 나 먼저 갔나 하겠다.”
언니가 가기 전에 물었다.
“근데 우리 자매지간인 거 비밀로 해야 하는 거니?”
“난 당분간 그랬으면 좋겠어.”
“알았어.”
손님들과 언니가 가고 나서 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 자신이 참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가 셋이든 재혼이던, 부자던, 가난하던, 사랑은 조건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믿었던 순수한 다라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사랑하는 언니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축하를 해주는 게 먼저 일텐데…그동안 남자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던 언니. 기운이 빠져 지내던 언니에게 처음으로 누가 봐도 훌륭한 남자가 나타난 건데 난 왜 언니를 응원해주지 못하는 걸일까? 만약 언니랑 사장님이 결혼하면 난 그의 처제가 되는 거다. 난 석훈을 형부라 불러야 하고 그렇게 되면 기훈와 난 사돈총각과 사돈처녀…으악! 하지만 그게 어때서? 그와 사돈지간이 되기 싫은 거야? 설마 나 그와 다른 관계를 원하는 거야?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정연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어, 언니 웬일이야?”
“….”
“언니 말을 해. 왜 그래?”
“저기…”
언니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너 혹시..아니다.”
“말해!!”
“너 보이 매그넛 이라고 내가 놀렸는데… 너는 가만있는데 남자들이 다 너 좋다고”
“본론이 뭔데?”
“그러니까 혹시 석훈씨도 그 사람도 너한테 혹시 좋다고 관심을 보인 건 아닌지…”
“언니!”
“얘가 왜 소릴 지르고 그래? 솔직히 그동안 석훈씨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애들도 봐주고 정이 들었어도 엄청 들었을 거고.”
“언니 완전히 사장님한테 빠졌구나?”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냐. 그게 걱정돼서 나한테 전화를 해놓고선. 언니, 걱정 마. 이 집 남자들은 다 날 안 좋아해. 할아버지는 좀 나아지셨지만 이 집 남자들 다 나보다 충주아줌마를 더 좋아해요. 됐어?”
언니와 통화를 끝내고 경미에게 전화했다. 동네 사과나무 주막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행히 주막 안의 테이블은 높은 칸막이로 가려져 있어 청승맞게 여자 혼자 술 마시는 심란한 그림은 숨길 수 있었다. 경미가 왔다.
“평일에 이렇게 나와도 돼?”
“원래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은 자유시간이야.”
“참 그 직업도 그렇다.”
우리 말없이 술을 마셨다. 불현듯 경미가 말을 꺼냈다.
“화내지 마, 다라야. 나.. 호남씨 다시 만나.”
“뭐? 야!”
“너한테 허락 받을 일은 아니지만 그냥 알려주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는 경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친구가 어떤 남자친구를 만나던 안 만나던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경미가 현명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했다. 내가 말했다.
“허락? 그래, 나한테 허락받을 일은 아니지. 근데 너 말투가 좀 그렇다.”
“내 말투가 뭐?”
“봐! 지금도.”
경미가 결심한 듯 말했다.
“호남씨 너무 무시하지 마, 다라야.”
“내가 호남씰 무시해? 너 왜 이러니? 너 지난번에 전화로 나한테 뭐라고 했어? 호남씨 좋아한 적 없었냐고? 내가 그런 남자를?”
“봐! 너 그 사람 지금도 무시했어. 넌 호남씨 계속 아래로 보고 있었고 나도 다 느끼고 있었어.”
“…”
“알아, 너 보기엔 호남씨가 여자나 밝히고 나한테 명품가방 사준답시고 카드빚이나 지고 쥐꼬리만 한 월급이나 받는 한심한 남자라는 거..”
“경미야…”
“하지만 너가 모르는 게 있어. 호남씨 좋은 대학 못 나오고 좋은 직장 안 다녀도 일 못하시는 부모님 대신해서 자기가 다 동생들 공부시키고 이번에 여동생 시집도 보내. 카드빚을 안고 있어도 친구가 돈 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서든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야.”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래? 그럼 호남씨랑 결혼하면 고생문이 훤한 거네.”
경미가 벌떡 일어났다.
“너 왜 이렇게 속물이 됐니? 영국에서 너무 고급스러운 집에서 비싼 물만 먹더니 애가 완전히 변했구나?”
“넌 내 말을 오해하고 있어.”
“뭐? 오해? 너 지금 호남씨 능력 없다고 무시하는 거잖아?”
“흥분하지 말고 앉아 봐.”
경미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내가 속물이 된 건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난 사랑이 그렇게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그래서 돈 보고 결혼하라고?”
“아니, 돈도 영원할 것 같지는 않아.”
“그럼 너 얘긴 뭐야?”
“난 호남씨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겠어. 카드빚이 있어도 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겠다는 그의 판단력. 수입에 맞지 않은 명품선물을 너에게 해줘야 한다는 그의 그 사고방식을 믿지 못하겠어. “
“너 지금 대통령 선거하니? 무슨 사랑하는 사람의 판단력, 가치관 그런 걸 다 따져? 남자를 사랑할 때 그 남자의 사과방식, 판단력 뭐 ..정치적 성향 뭐 그런 거 보고 사랑에 빠지냐고? 넌 ‘무작정 그 사람이 좋아’ 그런 말은 한 번도 안 들어봤어? 내가 널 속물이라고 말한 이유가 그거야. 넌 다 계산해서 사람을 사랑하려고 해. 넌 호남씨랑 못 헤어지는 내가 불쌍하겠지만 난 사랑을 믿지 못하는 너가 더 불쌍해 보여.”
경미가 나가버렸다. 화해하려고 만난 자린데 또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경미는 내가 기훈에게 했던 말을 나에게 했다. 정연언니도 사랑에 조건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했다.
나도 한때 그렇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 나이 열아홉이었고 나에겐 첫사랑이 왔었다. 김지훈. 그 이름, 그 얼굴. 마치 손가락에 낀 반지를 잊고 있다가 문득 내가 반지를 끼고 있구나 하고 느껴지는 그런 순간들처럼 그가 그렇게 떠올랐다. 그건 하루에 두 세 번 일 때도 있고 한 달 동안 아무런 자각 없이 지나갈 때도 있었다. 오히려 지훈을 닮은 기훈을 매일 보면서도 이 집에 있는 동안 김지훈을 떠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술이 그렇다. 지나간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속상할 때 술을 마시면 더 취한다. 땅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간신히 발을 조심조심 눌러서 디디며 걸었다. 누가 보면 땅바닥에 지뢰라도 있는 줄 알았을 거다.
간신히 집으로 들어가서 이 층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확인작업을 했다. 누군가 제발 등을 두드려 주었으면 할 정도로 위장이 뒤틀렸다. 그때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쉭..쉭’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기훈이 마스크를 쓴 채로 화장실에 방향제를 뿌리고 있었다. 그는 나한테 가글을 내밀었다. 방으로 들어가는데 기훈이 따라 들어왔다.
“나가요.”
그가 나가는 대신 마스크를 벗었다.
“뭘 먹은 거야? 냄새가 내 방까지 침입했어. 죽는 줄 알았다.”
“막걸리..”
내 대답에 그가 헛구역질을 하며 다시 마스크를 썼다. 그리곤 화장실에서 대야를 가지고 들어 왔다.
“이 옆에다 놔둘게. 그리고 가능하면 토하고 바로 치우고 이 방향제도 많이 좀 뿌려 줘. 내가 냄새에 너무 예민해서 그래. “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대야를 갖다 댔다.
“인간은 너무 이기적이야.”
그가 대야를 더욱 바짝 대며 말했다.
“안 나와?”
“저리 치워요.”
난 대야를 밀어냈다.
“왜 이렇게 인간은 이기적인 걸까? 당신도 지금! 내가 얼마나 속이 안 좋을까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냄새가 그저 싫은 거잖아?”
“지금 술주정 하냐?”
“다들 지만 생각해.”
“너는 남들 생각만 해?”
“나도 나만 생각해. 어떻게 하면 나만 잘 먹고 잘 살까 그것만 생각해.”
“가정교사 주제에 말이야 애들 있는데 술이나 마시고 들어오고 말이야.”
“그래, 나 가정교사다. 그럼 난 사람도 아니니? 난 술 먹고 싶을 때 술도 못 마시니? 나 근무시간 끝났는데 난 사생활도 없냐?”
“그냥 자라.”
“미안하다. 나 속물이다.”
그렇게 말하고 난 침대에 뻗었다.
“옷이나 벗고 자. 내가 벗겨주길 기대한다면 나야 땡큐지만.”
말과는 달리 그가 나가려 했다. 난 그의 손을 잡았다. 취하지 않았다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보고 싶어.”
“….”
“좀 찾아 줘.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누굴?”
“내 첫사랑. 이름이 김지훈이야. 당신이랑 이름이 아주 아주 비슷하지? 눈도 비슷하고. 성격은…”
“듣고 싶지 않아.”
“내가 뭐 보여줄까?”
첫댓글 뭘 보여 줄까요? 작가님 오늘은 11편.... 이에요ㅠㅠ
아..큰일이네요. 너무 바빠져서. 실은 20대방에 올릴 소설도 수정중이라..
그래도 기다려주는 분들을 위해 더 부지런을 떨겠습니다.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