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량이 매우 많아 북안면 전체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는 도유지. 마을 입구에서 못의 물을 바라보며 안 쪽으로 1㎞ 정도 들어가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왕릉 못지않은 웅장한 규모에 주변 또한 말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무덤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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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릉일대는 조선 8대명당에 비견될 만큼 좋은 풍수를 가지고 있다. |
이 곳은 광주(廣州)이씨 대종회에서 시조로 모시는 이당의 무덤이다. 이 무덤에 얽힌 사연은 지난 2001년부터 초등학교 4학년 1학기‘생활의 길잡이’(이호연과 최원도의 우정이야기)에 실려 있고 일제시대에는 교과서에 ‘진우(眞友)’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둔촌과 천곡의 우정에 대해 일본사람들이 존경하면서 교과과목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학생들의 소풍이나 자녀들의 체험학습장으로 이용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곡(泉谷)은 영천최씨인 원도의 호다. 그는 여말의 사람으로 요승 신돈이 득세해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 땅에 내려와 우거하고 있었다. 둔촌 이집과는 과거 동년생으로 절친한 친구였다.
어느 날 둔촌은 이웃에 살고 있는 신돈의 측근인 채판서란 자에게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 말이 신돈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큰 화를 자초하게 되었다.
장차 닥쳐올 큰 화를 예견한 둔촌은 연로하신 노부를 등에 업고 영천 땅의 천곡을 찾아 낮에는 숨고 밤이면 산길을 택해 걸었다. 천신만고 끝에 몇 달이 걸려 도착한 천곡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이라 많은 인근주민들이 모여 주연을 베풀고 있었다.
둔촌 부자는 바깥 툇마루에 앉아 피곤한 몸을 쉬며 천곡을 찾았으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천곡은 반기기는커녕 대노(大怒)해“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을 안아다 주지는 못할망정 화는 싣고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소리치며 오히려 내쫓았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둔촌은 다시 노부를 등에 업고 정처 없이 그곳을 떠났다. 둔촌이 떠나자 천곡은 역적이 앉았다 간 자리를 태워야 된다며 둔촌이 앉았다가 떠난 툇마루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한편, 둔촌은 천곡에게 쫓겨나 산길을 걸으면서 천곡이 진심으로 자신을 쫓아낸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여 멀리가지 않고 길옆 덤불 속에서 밤을 맞고 있었고 천곡은 둔촌이 노부를 등에 업었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날이 어두워 손님들이 돌아가자 등불을 켜들고 산길을 더듬어 찾아 나섰다.
그는 산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둔촌 부자를 발견하고 서로 얼싸안으며 산을 내려와 밤이 깊은 후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겼다. 이렇게 해서 4년간에 걸친 다락방 피신생활이 시작되었으니 그때가 1368년(공민왕 17)이다. 천곡은 가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비밀로 했다. 식욕이 왕성해졌다며 밥을 큰 그릇에 고봉으로 담게 하고 반찬도 많이 담게 해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긴 세월동안 날마다 고봉으로 담은 밥을 먹어치우는 주인의 식욕을 의아히 여긴 여종 제비가 문구멍을 몰래 들여다보고 놀라서 안방마님에게 말하게 되었고 그 말이 결국 천곡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함구령을 내린다고 과연 비밀이 보장될까? 그러나 그 방법밖에 없어서 식솔들에게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만약에 비밀이 새는 날에는 양가가 멸망한다는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여종 제비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말았다. 한문으로 된 기록에는 제비를 연아(燕娥)라고 적고 있다.
그 후 영천에 수색이 시작되어 천곡의 집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으나 둔촌 부자를 쫓아버린 상황을 목격한 동리사람들의 증언으로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인 1369년 둔촌의 부친이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무 준비도 없었음은 물론, 장례도 비밀리에 치러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실로 컸다.
천곡은 자기의 수의(壽衣)를 내어다가 예에 어긋남이 없이 빈염을 하고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 놓은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아래에 장사지냈다. 이 곳이 바로 도유리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공 묘소 즉, 광릉인 것이다.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해 유배되었다가 곧 주살되었고 장장 4년에 걸친 피신생활도 끝이 났다. 둔촌이 떠날 때 천곡은 시로써 전별했고 그 시는 지금도 전한다.
둔촌은 그 후 판전교시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로 세월을 보냈고 천곡도 좌사간으로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자고로 우의의 두터움을 말할 때면 관포(管鮑)와 양좌(羊左)를 들지만 둔촌과 천곡의 우의도 오래도록 기릴만 하다.
둔촌의 후손들이 산 아래에 천곡의 은혜를 추모하기 위해 보은당(報恩堂)을 지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으며 충비(忠婢) 제비를 잊지 않기 위해 제비의 무덤 앞에 술과 밥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6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단을 유지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무덤 일대에는 나현회관 앞에 둔촌선생유적비가, 이당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재사인 추원재,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이곳에 은거해 정착한 사간 최원도, 장례원판결사 최형도, 형조참의 최정도 3형제의 단을 수호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은 묘재인 나현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에 전하는 둔촌과 천곡의 우정과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자기가 모시는 주인의 안전을 지키고자 했던 몸종 제비의 이야기는 자양면 용산리에 있는 충노 억수의 무덤, 충과 효에 큰 모범을 보였던 포은ㆍ노계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형제의 우애를 가르쳐준 화북면 횡계리 옥간정의 양수선생, 부부사랑을 몸소 실천한 오원복 노인의 고인돌 무덤, 자양면 충효리에 서린 산남의진의 충과 효….
죽어서 오히려 더 큰 모범으로 남아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화시킨 이 분들의 삶에서 우리는 크나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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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천뉴스24>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 신소
[출처] `둔촌과 천*곡의 애틋한 우정 `- 도유리 광주이씨 시조공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