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땡의 세월
내일모레면 팔순이다. 옛날 같으면 이미 고려장이라도 갈 나이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요양병원 신세도 지지 않고 집에서 삼식이로 멀쩡히 지내고 있다. 아침, 점심, 저녁을 꼬박
집에서 먹는 처지를 스스로 놀리듯 그렇게 부르지만, 이만하면 시쳇말로 ‘만고땡’이다. 세월을 오래 살았다는
뜻도 되겠지만, 세상에 더 바랄 것 없이 좋다는 의미가 더 가까울 것이다.
‘만고땡’이라는 말 속에는 묘한 정서가 들어 있다. 만고란 문자 그대로 아주 오랜 세월을 뜻하지만, 흔히는 세상
에 비길 데 없이 좋다는 느낌으로 쓰인다. 여기에 붙는 ‘땡’이라는 말도 흥미롭다. 본래는 화투 노름에서 같은 짝
두 장으로 이루어진 패를 말한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뜻밖에 생긴 좋은 수, 혹은 우연히 굴러들어온 복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더 많이 쓰인다. 인생살이에서 이런 ‘땡’ 하나쯤 잡는다면 그 또한 만고의 복이라 할 만하다.
화투판에서는 끗발 싸움이 치열하다. 단 한 끗 차이로 승패가 하늘과 땅처럼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땡’이라는 것
은 그런 끗발의 세계와는 또 다른 차원의 패다. 판을 단번에 뒤집어 버리는 힘이 있다. 그래서 화투판에서 땡을 잡
으면 그야말로 만고땡이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에 화투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그 뿌리가 일본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지금도
사람들이 쓰는 ‘고도리’나 ‘이노시까’ 같은 말이 일본어라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이던 일본에서 서양 카드의 형식을 본떠 만든 놀이패가 화투였고, 그것을 만든 회사가 오늘날 게임 회사로 유명한
닌텐도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고스톱’ 열풍이 대단했다. 회사 일을 마치고도 집에 가지 않고 사무실에 남아 밤늦게까지 고스
톱을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시대 풍자를 담은 규칙이라며 ‘전두환 고스톱’, ‘노태우 고스톱’ 같은 변형판까지
등장했다. 그만큼 이 놀이가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었던 셈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마작을 즐기는 사람들은 많아도 화투를 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일부 하층민의 놀이 정도
로 여겨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정작 그 나라에서는 시들한 놀이가 우리나라에서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으니 묘한 일이다.
요즘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휴대전화로 화투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며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화투놀이는 어디까지나 노름의 한 가지일 뿐이다. 치매
예방이라는 말은 그럴듯하게 붙여 놓은 미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팔순을 앞둔 나이에 이르러 보니, 인생의 ‘땡’이란 것이 꼭 화투판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요양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집에서 밥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큰 땡일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삶 속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유물 같은 놀이 문화는 이제는 한 번쯤 돌아보고 정리할 때가 된
것도 사실이다.
만고의 세월을 살며 깨닫는 것은 단순하다. 인생의 진짜 ‘만고땡’은 화투판의 패가 아니라, 무탈하게 흘러온 세월과
평온한 하루라는 사실이다. 그 소박한 복을 새삼스럽게 되새기며 오늘도 밥상 앞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