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하게 50년전인 1974년 2월20일 나는 논산훈련소 수용연대에 입대했고 일주일후인 3월1일 원주하사관학교로 명령이 나서 잔뜩 긴장한채 용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기차를 바꿔타고 원주 1하사관학교에 입교를 했다. 장장 28주의 고단한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9월중순 거여동 특전사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나처럼 허약체질이 전군에서 훈련세기로 유명한 하사관학교와 공수부대를 거친 당시의 군대은어로 대표적인 어둠의 자식들에 속했다.
당시 원주 1하교를 졸업하면 거의 100% 전방으로 배속되었는데 마침 그때 7공수여단과 9공수여단이 새로 창설되어 50명씩이 그곳으로 가게 되었고 나머지 50명은 전방으로 갔다. 나역시 9공수로 발령이 났고 거기가면 거의 말뚝(장기지원)을 박는다고 알고 있어서 한숨을 쉬며 집에서 일주일 휴가를 보내며 걱정근심에 싸여 있었다. 그당시 시중학원서 단과반 학원 영어강사를 하던 큰형한테 부탁을 했다. 큰형은 마침 육사교수부에서 제대한지 얼마안되어 학원서 수학을 가르치던 분한테 날 부탁을 했다. 그분이 백방으로 알아 봤는지 나는 부평부대로 귀대하자마자 혼자 사령부로 재발령나서 보충대 내무반장을 하다 무사히 제대를 했다.
14년전 나는 퇴직한후 같은 직장사람들 5~6명이 매주 화요일이면 거의 빠짐없이 광나루역에서 만나 아차산을 올랐다. 3시간정도 산길을 걷고 사가정역으로 내려와 사가정시장에서 국밥에다 막걸리 한잔하고 헤어졌는데 하루는 국밥집 방안에서 3점에 천원짜리 고스톱을 쳤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우리외에는 거실에 딱 한 사람만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그사람이 신고를 해서 갑자기 백차 2대가 서더니 우리를 연행해갔다. 중랑경찰서 산하 아주 작은 파출소에 끌려간 우리는 조서를 쓰는 순간, 각자 주변에 아는 경찰간부를 핸드폰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세상 조용했던 작은 파출소가 뒤집어졌다. 총경급이 아니라 경무관급도 전화가 와서 우리는 주의사항을 듣고 풀려났고 그때도 큰형은 힘을 써주었다.
이렇게 매년 어버이날이 되면 13년전 교수퇴직후 76세에 폐렴으로 어이없이 별세한 큰형이 생각나고 그립다. 큰형은 20대때부터 학원강사를 하며 부모님도 봉양하고 동생들 다섯도 학교 보내주었고 결혼도 시키고 본인도 두자녀를 잘키웠다. 큰형은 살아생전 우리들에게 한번도 너희들 때문에 날 희생했고 힘들었다는 말을 한적이 없다. 부모님 덕분에 세상에 태어나 자랐지만 난 큰형의 은혜로 지금까지 잘살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것이 은혜.은혜.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의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첫댓글
어버이날이 내일 인지라,
부모님 생각하듯이 언덕저편님의
큰 형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합니다.
형님의 두 어깨에 메어진 무게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동생도 있어요.
그런 분은 복을 받지 못해요.
나이들어서도 형에게서 받을려고만...
철이 안들어요.^^
모든 것이 은혜로 여기시는 언덕저편님은
건강한 삶을 살고 계시는 것 같아요.
건강하셔서 산행도 여가도 즐기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알고 신세를 갚아야 사람의 도리인데도 참 어렵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하려고 하나 잘 안됩니다.
언덕 저편님은 군대에서 본의 아니게 차출 하사 였던거 같습니다
게다가 공수 부대 훈련?
끔찍합니다
훈련 받느라 고생 많이 했겠네요?
큰 형님이 애를 쓰셔서 자대 생활은 편하게 보내셨겠네요?
전 직장 동료들 끼리의 고스톱?
그거를 고발하는 사람도 있군요
나는 아예 고스톱은 치지 않습니다만 동료들 끼리 재미로 치는 고스톱을 고발하다니?
어의가 없고 웃깁니다
그때에도 큰형님이 애를 쓰셨군요
동생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셨는데
일찍 돌아가셔서 안타깝습니다
큰 형님이 많이 생각 나겠네요?
충성
36년생 큰형님은 학원선생하면서 온집안식구들 먹여살리면서 틈틈이 공부하여 석박사를 마친후 인천대 행정학과 교수로 가서 23년근무하고 퇴직했답니다.
저는 동창의 은혜를 생각하며 당장 편지 쓰야 겠어요 그러고보니 편지 쓸곳이 몇군데 됩니다
친구들한테 도움받았으면 조금이라도 신세갚으면 좋겠지만 말처럼 쉽지않고 살다보면 잊게 마련입니다. 어제 집사람이 친구남편이 안산고대병원에 입원하여 다른친구랑 병원을 다녀 온것을 듣고 잘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얼마전 이곳에
은혜를 모르면 인간이 아니라는 글.. 쓴적 있습니다만..
오늘..언덕저편1님의 글에서..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에 머리를 숙입니다.
9공수에서의 군생활을 말씀하셔서
저도 9공수와의 인연 당시 군생활이 회상되는군요.
저는 여산 2하교를 나와 군생활중 국군의 날 행사에 차출되었는데..
당시 부평의 9공수여단에 육본 인사명령으로 1달간 머물면서 밤마다 여의도 광장으로 이동
행사연습에 매진했던 일이 추억됩니다.
당시에는 고달팠던 일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말씀처럼 은혜이고..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큰형 세상떠나고 작은형은 미국에 사셔서 올수가 없고 여기서는 제가 남자형제들 중 가장 어른이 되어 형제가족화합을 위해 매년1월1일 우리집에서 신년맞이 떡국을 먹고 같이 세배를 합니다. 보통 25명전후 참석합니다.
군생활을 여산 2하교에서 훈련을 받으셨군요. 당시 9공수여단장은 노태우장군이었고 전라북도 금마의 7공수여단장은 정호용장군이었답니다. 오래전 얘기입니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즐겁게 사는 것도 모두 주변의 여러 사람들 덕분이며 은혜입니다.
나를 그동안 알게 모르게 도움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사회 생활을 했던 터라 속칭 빽 있는 사람이 부러웠답니다.
당연 쓸 빽이 없어서 사회 생활도 맨땅에 헤딩하면서 살았지요.
비록 비빌 언덕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고비마다 제게 도움을 준 좋은 분들이 있었답니다.
그분들로 인해 제 삶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구요.
언덕저편님 덕분에 은혜라는 노래도 알았습니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 가사가 참 좋네요.
누르기만 하면 나오니 함께 들어요.ㅎ
https://youtu.be/t9opmaaJ3Sw?si=kk-d3CTQzMQEPJ3b
PLAY
세상사는 게 내힘으로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서로 돕고 의지해야만 하지요. 유현덕님도 고생많이 하셧군요..
올리신 글을 보고 끼니를 잇지 못할정도로
가난한 살림속에서도 끝까지 학교를 보내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참 옛날에는 왜그리 못살았는지.. 아마 요즘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겁니다.
산다는게 사실 모두 이웃에 신세 지는거지요.
그러하매 매사에 감사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그중에서도 고비마다 크게 신세지는 일들이 있고, 그게 터닝포인트가 되기도 하지요.
그런순간에 자애로운 형님이 계셨던 모양입니다.
저는 맞이라서 늘 힘에 부쳤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집집마다 장남은 집안에 기둥이라고 너무 무거운 짐을 강요했습니다.
언제나 내편이셨고 보호자이셨던 큰형님이
계셔서 얼마나 든든하셨어요.
넘넘 부러워요.
형제복이 많으신 언덕저편 님이세요.
파란만장한 76년을 살다간 큰형은 학원강사하면서 주경야독으로 행정학박사를 받은후 대학교에서 23년간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형이 죽고 딱 1년후 제자들은 희수(77세)를 맞아 유고집을 발간하며 추도행사를 크게 베풀었답니다.
대방동 공군회관에서 가족들을 초청하고 제자들 200여명이 참석했지요. 그 은혜를 갚기위해 저나름 애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