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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8장 31-39절
(2) 이 단락의 진짜 의미를 찾기 위한 고된 여정!
4) 최종적인 해석 - 은혜로 깨달은 이 단락의 참 의미!
● 이 단락은 칼빈의 견인 교리와 무관하다!
그 다음, 바울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바울은 분명히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을까요? 그것을 다음 구절이 보여줍니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구절을 13절과 함께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 곧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방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바울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대로 오직 그런 사람들만 하나님의 아들 즉 참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주는 성령의 증거에 대해 썼습니다.
로마서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나니"
우리가 처음 회개하고 믿을 때 성령님이 우리 영에 이제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해주십니다. 그 후 무조건 계속 증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설명한 것에 근거해서 살 때 속에서 너는 참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해주십니다. 즉, 우리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일 때 우리 속에서 계속 증거해주십니다. 그럴 때 1절에서 말한 것처럼 정죄감이 사라지고 우리 영이 성령의 증거에 화답함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진짜 구원의 확신입니다.
존 웨슬리가 "성령의 증거"라는 설교에서 잘 말한 대로 성령의 증거는 성령의 열매와 함께 나타납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성령의 증거도 없고, 우리 영의 증거도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성령의 증거와 구원의 확신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큰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바로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데, 단 고난을 견뎌야 합니다.
로마서 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 다음, 바울은 우리가 영광을 상속받을 때, 즉 재림 때 우리가 아니라 자연계에 일어날 일에 대해 썼습니다.
로마서 8:19-22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여기서 착각하기 쉬운데, 허무한 데 굴복했던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고 탄식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도덕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에 대해 썼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관심은 여전히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것을 넘어 죄의 존재 자체에서 해방되는 것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다음 구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그 다음,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서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 즉 죄의 존재 자체에서 자유케 될 몸의 구속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독려합니다.
로마서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그리고 우리를 죄의 지배에서 자유케 해주신(8:1-2) 보혜사 성령님이 중보기도를 통해 계속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저는 이 구절에 나오는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성령을 따라 행하여 거룩과 사랑을 실천하고, 죄에서 완전히 자유케 되는 "몸의 구속" 즉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게 하기 위한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추론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정말로 그럴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다음 절을 통해 그 증거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왜 바울이 갑자기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해 말했을까요? 여기서 "그 뜻"은 예정입니다. 그리고 예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29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부활입니다. 29절의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가 몸의 구속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의 구속이 선택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입니다.
그런데 27절에서 바울은 성령님이 (선택받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곳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정의 목적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개하면, 예정의 1차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정의 2차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정의 3차 목적은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키는 몸의 구속 즉 영화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이 신자들이 이 땅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다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궁극적인 구원을 받게 되는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전후문맥을 통해 더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무엇을 위해 탄시하실까요? 그것은 예정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탄식입니다. 확실합니다!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에는 첫째, 피조물의 탄식, 둘째, 성령의 탄식, 셋째, 신자의 탄식 등 세 가지 탄식이 나옵니다. 그런데 세 가지 다 같은 이유로 탄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직 우리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자유하게 되지 못하고 탄식합니다. 피조물은 도덕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썩어짐에서 종노릇하는 데에서 해방되는 것에 대해 말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몸의 구속과 관계가 있는 탄식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 범죄할 때 근심하시는(엡 4:30) 성령님이 하시는 탄식도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시는 탄식입니다. 다른 것 때문에 하는 탄식이 아닙니다.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죄의 법이 몸속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범죄하고 타락하여 버림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시는 탄식입니다. 즉, 지옥에 갈까 봐 애가 타서 하시는 탄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탄식하십니까? 우리 속에 반드시 자신에 대한 이런 탄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향한 이런 탄식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롬 9:1-3, 고후 11:29).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들도 죄의 지배에서는 자유케 되었어도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속에 갈등이 있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되고, 베드로가 말한 대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하기 때문에 속으로 탄식합니다. 몸의 구속을 통해 죄의 존재 자체에서 완전히 해방되기를 바라며 탄식합니다.
이처럼 세 가지 탄식이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시는 탄식도 거룩과 사랑 그리고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하시는 탄식임이 분명합니다.
참고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방언기도가 아니다!"고 하지만, 의외로 성령운동 하는 자들뿐 아니라 학자들 중에도 방언기도로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과연 둘 중 어느 것이 옳을까요? 저는 이 구절이 방언기도를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으로 하는 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께서 계시적으로 기도제목을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해주시는 기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성령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기도할 때, 죄와 부족과 고쳐야 할 점들을 '밝히' 깨닫고 '깊이' 인식하게 해주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게 해주십니다.
또 하나는, 방언기도입니다.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웁니다(고전 14:4). 그런데 "덕을 세운다"는 것은 우리가 변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구절의 기도와 그 성격이 일치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것 안에 당연히 방언기도도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령으로 하는 두 가지 기도가 모두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안에 포함된다고 봅니다.
한편, 저는 26절의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에 나오는 "연약함"이 단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3절에서 언급한 "연약함"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이것은 죄를 이기지 못하는 연약함이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도와주실까요?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처럼 우리 속에서 우리와 함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심으로써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살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탄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말씀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눅 21:34-36).
그 다음, 바울은 성령의 탄식하는 간구의 결과 고난을 위시해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사랑과 거룩을 이루고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게 하신다고 무한 격려합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그의 뜻"은 예정이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몸의 구속"입니다. 그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바로 거룩과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고, 그 결과 몸의 구속을 받아 죄의 지배에서뿐 아니라 죄의 존재 자체에서 자유케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영광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 않습니다. 심지어, 좋은 것들이 독이 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즉 택함받고 구원받아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에게는 나쁜 일들도 다 합력하여 선이 됩니다. 요셉이 바로 그 예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습니다(빌 1:21).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바르게 신앙생활하는 자를 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35절과 38-39절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바울이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말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다음, 바울은 예정과 예정의 목적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기 원하십니다(딤전 2:4, 벧후 3:9).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지예정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미리 아신 자들을 ...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했으니 정말로 예지예정이지요! 동시에, 여기서 바울은 죄의 지배뿐 아니라 죄의 존재 자체에서 완전히 자유케 되는 몸의 구속이 우리를 택하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다음, 과거시제가 보여주듯이 예정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현재까지 하신 일들을 열거했습니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즉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현재까지 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때문에 그 후에 그것을 다뤘습니다. 즉 29절은 예정의 목적, 30절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현재까지 한 일, 31절 이하는 그들의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다뤘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미래의 궁극적인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 쓴 것이 바로 31-39절입니다.
한편, 여기서 31절에 나오는 "이 일에"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일에"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라는 문구는 8:18-30의 내용뿐 아니라 3:21-8:30에 나오는 구원에 관한 가르침도 가리킨다."
"31절의 질문은 5-8장에서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는데, 아마도 1장 16절-8장 30절 전체를 포함할 수도 있다. 앞의 선택이 선호되는 이유는 8장 31-39절에 스며들어 있는 소망의 주제가 동일한 주제를 제기하는 5장 1-11절과 '인클루지오'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타우타'("이 일들")는 5장 1절-8장 30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으로 구성된다."
"'이 일'은 ... 바울이 방금 28-30절에서 말한 것으로, 또는 8장 전체에서 말한 것으로도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5-8장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속한다고 한 모든 축복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라는 간단한 진술 속에서 요약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 단락이 앞에 있는 내용들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 여기서 잠시 28절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 구절에 나오는 "그의 뜻"은 예정입니다. 또, 29-30절에서도 택하신 자들에 대해 썼습니다. 그리고 31-39절도 택함받은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33절). 그러므로 31-39절은 앞부분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1-30절의 근거 위에서 말한 것이 확실합니다. 때문에 반드시 지금까지 설명한 것의 근거 위에서 31-39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서 많은 이들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지금까지 설명해드린 것 위에서 여러분과 함께 이 단락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참 자녀들이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속에서 증언해주십니다. 참 신자는 사랑과 거룩뿐 아니라 죄에서 온전히 자유케 되는 몸의 구속이라는 영광을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또, 성령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위해 간구하고 그 결과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룹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1-30절의 간단한 요약입니다.
이 토대 위에서 바울이 이 단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절대 이 단락에서 "구원받은 자는 절대 버림받지 않는다. 설사 말씀대로 못 살아도 천국에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죄의 지배와 존재 자체에서 해방되는 것에 대해 계속 강조한 바울의 논지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이 이곳에 위치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13절에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 즉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반드시 버림받고 멸망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그것과도 상반됩니다. 때문에 바울이 이 단락에서 그런 이상한 견인의 교리를 말했을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단락은 절대 구원받은 자가 모두 틀림없이 궁극적인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일 수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