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된 땅 (외 2편)
함기석
첫 낱말이 태어날 때 그것은 죽음과 탯줄로 이어져 있다
그것은 핏덩어리 육체여서 나는 늙고 아픈 산파처럼 떨리는 손으로
엉킨 피를 닦아 대지의 파헤쳐진 가슴에 안긴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낱말은 훼손되고 썩은 젖을 빨며
꽃과 나무 사이에서 죽음은 한순간도 유혹을 멈추지 않는다
4월, 빛이 잠든 벚나무 꽃그늘 아래 검은 나비 날고
끝에 태어날 낱말은 우리 주검이 누울 차디찬 석관을 개봉한다
음시
오늘밤 장미는 세계의 반(反)기획이다 죽은 자들의 죽지 않는 발이 해저를 걷고 있다 그것이 내 몸이다 천둥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아픈 발을 뿌리내릴 때 소리는 빗물이 꾸는 가시 꿈, 사방에서 악의 술어들이 취하고 우리는 우리의 주검에 핀 살의 현상이고 음시다 수천의 혀를 날름거리며 피 흘리는 사전, 그것이 내 몽이다 에포케(epoche) 씨가 살로 세계를 쓸 때, 끝없이 제 살을 찢어 흰 숨결에 섞는 파도 그것 또한 내 몸이니, 연기 내며 비는 귀부터 타오르고 오늘밤 장미는 견고한 유머고 종이 요새다 벼락 속에서 지상의 모든 이름을 버린 어휘들이 태어나 웃을 때 섬광으로 피는 꽃들은 혼들의 무수한 편재다 백(白)과 골(骨) 사이, 밤은 늘 검은 수의를 입고 창가를 서성이므로 거대한 홀이 뚫린 이 세계의 중앙국 음부에서 (이 괄호 안의 세계가 open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제2의 주어 당신은 언어 속에서 살해되는 ING 생체다 (이 비극의 괄호 밖 세계도 open임을 확증할 수 없다)는 제3의 주어 나도 이미 언어 속에서 화형 중인 ING 사체이니 장미는 장미의 유턴이고 돌에 고인 번개다 장미는 시가를 물고 흑풍 속에서 백발을 흩날리는 양초인간 이 비극을 빗줄기는 흰 척추를 드러낸 채 밤새 대지에 음사하는데 이 참극을 새들은 살을 흩뿌려 잠든 잠을 깨우는데 망각되지 않는 어휘들, 오랜 연인처럼 내 살 속 해저를 걷고 있다 죽은 자들의 목이 해파리처럼 수면으로 떠오르고 절벽 위엔 팔만사천 개의 손들이 공중을 한 장 한 장 찢어 날리고 흰 사리 문 목어들이 북천에서 헤엄쳐오니 오늘밤 장미는 불의 유마경, 얼음의 유머경이다 산 자들의 죽은 발이 꽃밭을 걷고 있다 그곳 또한 내 몸의 적도이니 에포케 씨는 펜을 던져, 천둥이 살던 지하의 관시를 파묘하라 악의 술이 번지고 번져 닿는 저 세계의 실뿌리들
수학자 누(Nu) 7
항아리에서 귀가 수련처럼 자란다 실뿌리가 희다 나비가 다가오면 무서워하는 꽃을 피우다가 누가 다가오면 어린 창녀처럼 뒤돌아 앉아 시든다
폐를 도려낸 집, 갈라진 벽을 따라 빛이 예각으로 누수되고 있다 모든 소리와 색깔과 피를 흡수하는 삼각형 집, 나무는 없고 나무그림자 혼자 물속을 거니는
모든 모서리가 직각으로 꺾인 무채색 정원, 나비들은 나풀나풀 피살된 노부부 곁을 날고 귀 잃은 얼굴로 정오가 정원을 배회하며 망각되고 있다
덩쿨장미 담을 따라 늘어선 해바라기 전경들, 5월의 정원에서 하늘은 지렁이처럼 몸을 비틀며 마르는데 귀가하지 못한 귀가 하나 항아리에서 수련처럼 떨고
갈라진 벽 속으로 은폐된 비명이 둔각으로 흡수되고 있다 터질 듯 또 몽우리를 맺는 귀, 무서운 꽃을 피우다가 누가 다가오면 무서워하며 시든다
⸻시집 『음시』 2022년 2월 -------------------- 함기석 /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국어 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공원』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디자인하우스 센텐스』 『음시』 등. 동시집 『숫자벌레』 『아무래도 수상해』 『수능 예언 문제집』. 시론집 『고독한 대화』 . 비평집 『21세기 한국시의 지형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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