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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내 인생의 타투
난 일어나 앉아서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윗옷을 어깨 아래로 내렸다. 지훈이를 기억하며 새겼던 문신이 거기에 있었다.
“보이지?”
“…”
“보여?”
그가 작게 대답했다.
“그래.”
“영원이라는 뜻이야. 그 사람 생각하면서 새긴 거야. 이 타투가 남아 있어서 못 잊나 봐. 근데 좋은 점도 있었어. 이거 새긴 이후로 남자들이 다 나 좋대. 지훈이만 날 떠났지 그다음엔 다 내가 떠났어. 내가 다 찼어. 근데 이게 당신한테는 안 통한다? 왜 그러지?”
그가 조용해서 일어나 가는 줄 알았다. 대신 그는 천천히 내 문신위로 그의 입술을 가져갔다. 그의 입술이 내 문신위에 내려앉았다. 난 온몸을 긴장한 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입술을 떼었지만 우리 둘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길게만 느껴졌던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기훈이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난 잠에 빠져 있었다. 금요일마다 집에 가지 않고 주말 아침을 이 집에서 보내는 습관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너무 오래 잤더니 허리가 아파서 잠에서 깨어졌다. 게다가 머리까지 깨어질 듯 아팠다.
‘어제 집으로 갔어야 했는데….’하다가 기훈과의 일이 생각났다. 기훈이 내 어깨에 키스했었다. 내 타투 위에. 이제 기훈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지? 내가 왜 그런 거지? 왜 그에게 술주정 하며 내 타투를 보여주고 왜 첫사랑 얘기를 늘어놓은 거지? 그는 내게 왜, 왜 거기에 키스를 한 거지?
침대 옆에 꿀물과 보온병이 눈에 들어왔다. 메모도 있었다.
‘이 속물아, 식구들 충주 큰 댁에 갔다 월요일에 온다. 보온병에 있는 죽 먹어. 내가 끓인 거 아니니까 너무 감동하지는 말고.’
꿀물에다가 죽이라니… 기훈이 이런 짓도 할 줄 아는 인간이었나? 그나저나 이런 몰골로 석훈과 라라할아버지를 보지 않아도 된다니 다행이었다. 아니, 당장 기훈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난 천천히 몸을 추스르고 우면동 집으로 향했다.
일요일에 작정하고 정연언니와 쇼핑을 했다. 언니에게 큰맘 먹고 정장을 한 벌 선물했다.
“너 왜 그래? 난 됐어. 이거 그냥 엄마꺼로 바꾸자.”
“엄마는 다음 달에 사드릴게. 언니 데이트하려면 옷 사입어야 하잖아. 그리고 솔직히 벌기는 아마 내가 언니보다 많이 벌걸?”
“그러니? 잘됐네. 고생하는데 그 값은 받는다니. 근데 나 옷 안 사도 돼. 석훈씨 다 알어. 내가 말했어. 석훈씨가 전에 선 본 그런 여자들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럭셔리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 쪽으론 아예 기대를 마시라고 못을 박았어.”
“정말 그렇게 얘기했어? 뭐하러 그랬어? 구질구질 해보이게.”
“우리 집안이 부자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게 창피한 일도 아니고 그냥 처음부터 솔직하게 만나고 싶었어. 근데 석훈씨가 나보고 지금까지 본 여자들 중에 청바지에 면 티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그랬다?”
“말도 안돼.”
“뭐가?”
“사장님이 진짜 그런 소리도 하신단 말이야?”
“너 모르는구나? 석훈씨 수학 수업 재밌어. 은근히 유머 있으셔.”
“애들이 교장선생님이라고 괜히 리액션 해주는 거 아냐?”
“아니야! 은근 재밌는 사람이야.”
신기하다. 남자들은 자기의 숨겨진 얼굴은 자기의 짝이라고 생각되는 여자들에게 공개하는 건가? 아니다. 언니는 이미 동료이자 상관으로서 김석훈이라는 남자를 오랫동안 보아온, 둘만이 쌓아온 남들은 모르는 역사가 있는 걸거다.
하지만 난 기훈을 잘 알지 못하지 않은가? 근데 여기서 기훈 생각이 왜 나는 건데? 언니가 나를 툭 쳤다.
“무슨 생각해?”
“아니야.”
언니가 H호텔을 가자고 했다.
“거긴 왜?”
“너 맨날 영국에서 마시던 커피 맛이 그립다며? 거기가 제대로더라. 나도 그저께 처음 가봤는데 커피 정말 맛있더라.”
그저께면 사과나무 집에서 모임 끝나고 사장님과? 내가 큰소리로 말했다.
“언니! 나 찬성이야.”
“뭐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애가 셋이면 어떻고 넷이면 어때? 언니가 애들보고 결혼하는 거 아니잖아, 남자보고 하는 거지. 잘해 봐. 솔직히 가끔 너무 엄격해 보이시는 거 빼곤 우리 사장님 괜찮은 분이야. 술도 안 마셔, 담배 안 펴, 일 열심히 해. 좋아. 좋아.”
“갑자기 너 왜 그래? 내 옷을 다 사주지 않나.”
“에이구, 언니 내년이면 마흔인데 내가 언니 결혼하는 거 밀어줘야지 아니면 언니 응원군이 누가 있겠어? 엄마, 아빠, 정애언니 다 반대할 게 뻔한데.”
“아무튼 고맙다.”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카페 정원에는 은은한 난초의 향이 가득했다.
“여기 너무 좋다.”
“그치? 여기 점잖은 노부부들도 꽤 온다? 보기 좋아.”
“근데 언니 그거 알아? 외국에서 백발 노부부들이 손잡고 다니고 그러니까 한국사람들이 저렇게 나이 들어도 금슬 좋게 서양사람들 참 애정표현 잘한다고 그러잖아. 근데 그 백발 노부부들 중 절반 이상이 두 번째나 세 번째 결혼이다?”
“아, 정말 이혼율이 높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불륜을 저지르는 노인분들도 있을 수 있겠네?”
“저기 저 어르신 커플도 좀 수상하지 않아? 부부치고는 너무 내외하듯이 그러잖아?”
내가 멀리 야자수 나무 뒤에 앉은 두 노인을 가리켰다.
“그런가? 다라야!”
언니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왜? 왜? 뭐? 바퀴 벌레? 쥐?”
옆 테이블의 남녀가 ‘쥐’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어머…쥐? 나가요. 우리.”
그들이 나가는데 언니가 날 얼른 일으켰다.
“우리도 나가자. 나가.”
차에서 언니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니, 쥐 한 마리 가지고 뭘 그리…”
“다라야, 쥐 아니었어.”
“그럼 뭐 뱀이라도 봤어?”
“엄마였어.”
“엄마? 누구 엄마? 우리 엄마?”
“응.”
“엄마도 이런데 올 줄 알시나? 친구 만나셨나 보다. 근데 왜 가서 아는 척.”언니가 내 말을 끊었다.
“엄마랑 이사장님이었어.”
“이사장님? 무슨…우리…그 이사장님? 라라 할아버지?”
“그래.”
“그럼 벌써 언니 결혼문제 때문에 만나시는 거야?”
“아닐껄? 이사장님은 우리 집이 어딘지도 모르시는데.”
“아니면 엄마랑 이사장님이랑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 언니 결혼 정말 밀어붙이려고 그러시는 거네.”
“아니라니까!”
언니가 소리를 꽥 질렀다.
“이.사.장.님.이 엄마 손을 잡고 있었다구! 끈끈한 눈빛으로 엄마를 쳐다보면서!!”
언니와 난 엄마가 집에 들어오길 기다렸다. 당장 엄마에게 따져 보자는 나에게 언니는 말했다.
“가만있으면 산들바람으로 아무도 모르게 지나갈 것을 우리가 헤집어내서 아빠도 알게 되고 괜히 폭풍으로 만들까 봐 그게 걱정이야. 엄마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서면 어쩔래? 여자 늦바람이 태풍보다 무서운 법이야. 아빠 말년에 황혼이혼이라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가 침착하게 대처해야 해.”
“언니는 괜..찮아? 언니 결혼…”
“지금 내 걱정할 때가 아니야. 그리고 두 분이 어떤 사연이신지 아직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수 없어.”
우린 집에 들어서는 엄마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엄마의 옷차림이 오늘따라 세련돼 보였다.
“그렇게 차려입고 어딜 갔다 오세요?”
“응. 독산동 계모임갔었지. 어이구, 이 년!”
갑자기 엄마가 내 등을 짝하고 내려쳤다.
“왜?”
“너 뭐 엄마한테 숨기는 거 없어?”
지금 누가 물어볼 말인데 이럴 때 적반하장이라는 소리가 맞는 걸 거다.
“뭘?”
“그래 학원 일은 안 힘들고?”
“으응.”
엄마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됐어. 그나저나 너 거기 ..그 집 아니 그.. 학원에서 몸가짐 바로 하고 밤에 문 꼭 잠그고 자고.”
“학원에서 무슨 몸가짐을 바로 해?”
“아니다. 정연아!”
엄마가 이번에는 언니에게 말했다.
“너 학교에서 항상 말조심하고 행동거지 조심하고 그래야 돼. 집에서처럼 덜렁거리고 그러면 노처녀라 그렇다고 더 흉을 보는 거야.”
언니가 대답했다.
“알았어.”
“항상 이사장님이나 높은 분들한테 깍듯하게 대하고!”
언니와 난 눈을 마주쳤다. 뭔가 있다. 엄마가 저녁준비를 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지난 날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싶어라, 몰래 사랑했던 그 남자, 또 몰래 사랑했던 그 여자..”엄마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몰래한 사랑’이라는 불길한 가사의 노래까지 부르자 난 그만 엄마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유난히 말이 없는 아빠를 보니 더 신경이 쓰였다.
저녁을 먹고 나와서 큰언니를 호줄 했다. 세 자매가 동네 호프집에 모였다. 정애언니는 우리 얘기를 다 듣고 나서도 뜻밖에 쿨한 반응을 보였다.
“진짜 신기한 우연이다. 아님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근데 김석훈은 어떻게 생긴 남자니?”
내가 말했다.
“지금 그게 문제야? 아빠 어떡해?”
정애언니가 웃었다.
“얘가 왜 이렇게 심각해? 너 외국물 먹고 온 애 맞아? 엄마가 왜 아빠 말고 딴 남자랑 커피를 마시면 안 되는데? 요새 결혼한 여자들 이성친구 있는 사람들 많아. “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언니는?”
“야, 사돈하고 미리 아는 사이였으면 혼수문제도 부드럽게 잘 해결 되겠구만 뭐. 사돈끼리 친하면 좋은 거야. 오히려 으르렁대는 사이가 문제지. 그리고 노인분들이 지금 와서 다 늙어서 새 사랑 찾겠다고 가출을 하시겠니? 이혼을 하시겠니? 오히려 어중간히 늙은 중년 남녀보다 더 현명하게 만나실 거야. 엄마도 요새 아빠가 맨날 집에 있어서 스트레스 꽤나 받아 하셨는데 기분전환도 되고 좋지 뭘.”
“언니, 정말 왜 이렇게 통이 커지셨어? 아주 이해심이 바다와 같아지셨네.”
“부러워서 그런다. 남편 말고 나도 누가 그런 호텔 데려가서 커피 한 잔 사주면 소원이 없겠다. 두 분이 분명 첫사랑이었을 거야. 아, 내 첫사랑은 지금 어디 있을까?”
정애언니는 그렇게 말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권태기의 가정주부한테 이런 상담을 하니 참으로 엉뚱한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내가 말했다.
“라라할아버지가 아시는 게 분명해. 수제비 사건이라고 있는데 하여튼 할아버지가 우리 엄마 이름을 듣고 당황해 하셨던 게 기억나. 우리 아빠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으셨고.”
정연언니가 말했다.
“설마 이건 정말 말도 안돼.”
정애언니가 나섰다.
“얘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니? 아직 두 분이 어떤 스토리가 있었는지 그냥 그분이 엄마의 사돈의 팔촌 오빠일 수도 있잖아. 설사 두 분이 옛날 첫사랑이었다고 쳐. 이미 삼, 사십 년도 지난 일인데 그게 이제 와서 뭐? 정 그렇게 궁금하면 다라 니가 그 이사장이라는 분한테 ‘정정연선생님이 실은 제 언니예요 알고 계셨어요?’이렇게 말해. 그러면서 엄마랑 무슨 사이인지도 살짝 떠보고. ”
거실에서 엄마와 드라마를 보는데 주인공 두 남녀가 실은 배다른 남매 사이였던 것이 밝혀졌다. 정연언니와 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엄마가 혀를 끌끌 찼다.
“어이구, 저걸 어쩐다니..”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우리 집은 저런 일 생길 일 없지?”
“그게 뭔 소리야?”
엄마가 멍하니 날 보다가 내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에구, 말을 해도. 굼벵이는 구르는 재주라도 있지. 니 아빠는 겁이 많아서 절대 바람 못 피운다.”
“아니…뭐 엄마 쪽에서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엄마가 이번엔 발길질을 하시려고 해서 간신히 피했다.
“엄마, 농담이야. 농담.”
엄마가 부엌으로 가시고 정연언니가 내 귀에 속삭였다.
“야, 설마 나랑 김석훈씨가 배다른 남매 그러면 어쩌지?”
나도 마침 기훈와 내가 그런 사이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던 참이다.
“언니, 그런 일은 우리같이 평범한 집에서 안 일어나.”
월요일에 집을 나서는데 엄마가 게장을 보자기에 싸서 건넸다.
“이거 가져가. 니 그..학원 원장님이 맛있다고 하셨다며?”
“인제 싫대요. 그 할아버지 변덕이 얼마나 심한 대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하고 엄마 손을 뿌리쳤다. 순간 엄마는 당황했고 나는 미안했다.
월요일에 사과나무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해피 산책을 시키는 것이었다. 석훈의 가족들은 아직 충주에서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라라할아버지는 충주에 가지 않은 것이 확인된 셈이다. 하긴 이혼한 부인을 만나러 충주에 내려갈 이사장님이 아니시다.
‘설마..아닐거야. 라라 할아버지랑 엄마랑? 말도 안돼. 그 연세들에 설마 …가능하기나 해?
“거 참 엉덩이 꽤나 흔들면서 걷네.”
난 멈춰 섰다. 기훈이 건들거리며 걸어왔다.
“어, 충주에서 왔어요? 다른 식구들은 안 보이던데?”
“내가 충주에 왜 가니?”
“네?”
“충주에 누가 있는데? 너 같으면 남편이 바람 펴서 데리고 들어온 여자의 아들을 보고 싶겠냐?’
맞다. 충주엔 석훈의 생모가 살고 계신다. 메모를 보고 나도 모르게 기훈까지 함께 충주로 내려갔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게 농담을 건넨다. 이런 식으로 지난 금요일의 일을 가볍게 넘기겠다? 좋다. 나도 바라는 바다. 그의 키스자국이 문신보다 뜨겁게 아직도 남아있지만 그걸로 그와 내가 뭔가 복잡하게 엮이는 일은 없을 거다. 나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마.
“아니 어떻게 여자 엉덩이를 대놓고 볼 수가 있어요? 내가 그렇게 만만해요?”
“보이는 걸 어쩌냐?”
“아무리 그래도 형젠데 어떻게 그렇게 사장님이랑 다를 수가 있어요?”
내가 또 실수했다.
“아무리 그래도 형젠데?”
“미안해요.”
“괜찮아. 새삼스럽지도 않잖아?”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은 아니고… 사장님은 항상 젠틀한 이미지시니까…”
“형 얘기 듣고 싶지 않다고.”
“미안해요. 까먹었어요.”
“니 머릿속이 항상 형 생각으로 꽉 차있는 게 아니고?”
“아니란 거 알잖아요. 괜히 놀리고 있어.”
“내가? 내가 뭘 아는데?”
“사실 사장님요, 지난 번에 선생님들….”
아니다, 아직은 나의 친언니가 김석훈과 사귄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 라라 할아버지도 정연언니를 아이들에게 소개시키기도 전인데 내가 먼저 나서면 안 되는 것 같다. 게다가 엄마와 라라 할아버지가 어떤 사이인지도 모르겠고…우리가 자매이며 라라 할아버지와 우리 엄마의 인연이 언니와 석훈의 미래를 위해서 긍정적인 요소가 되어줄 지 그 반대가 되어줄 지 난 하나도 짐작이 되질 않았다.
“형이 뭐?”
“아니에요.”
“그거 아냐? 사람들은 말야,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볼 때와 실제 눈으로 볼 때조차도 달라 보이는 거거든? 혹시 아냐? 형 같은 사람이 서재 안에 야한 비디오들 감춰놓고 혼자 보고 그럴지?”
“말도 안돼.”
정말 이상하게도 기훈의 그 말 때문에 난 석훈이 서재에 들어갈 때마다 이상한 상상이 들었다. 한번은 진짜로 두꺼운 영문원서 안을 열어보기까지 했다.
기훈이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이 행동하길 원한다면 나도 그렇게 할 자신이 있었지만 왠지 그와 우연이라도 신체적 접촉이 생기는 일은 절대절대 피하고 싶었다.
라라가 유치원에 있는 동안 나도 나름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태권도장에 등록하려고 했더니 석훈이 학교에 도장이 있다고 거기서 배우라고 알려주었다. 정말 사랑고등학교에는 없는 게 없었다. 멀리서 온 아이들을 위한 기숙사, 수영장, 골프연습장 게다가 아주 저렴하고 고급스런 카페테리아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김기사님도 충주아줌마도 아이들이 다 사랑고에 재학중이었다. 물론 석훈이 도입한 장학금의 혜택으로 무료로 말이다. 학교 옆 체육관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한창 연습 중인 검은 밸트의 남자에게 먼저 꾸벅 인사를 했다. 검은 밸트의 남자는 … 기훈이었다.
“어, 기훈씨도 여기서 배워요?”
그가 날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뭐야, 저 한숨은? 내 뒤로 수업하러 사랑고등학교 태권도부 학생들이 들어오며 기훈에게 인사를 했다. 기훈은 아이들의 사범이었다.
“부럽네요. 취미도 많으시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비꼬는 말처럼 들렸다. 기훈의 표정이 굳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의 수업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나중에는 다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았다. 기훈의 진지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본 것이 가장 놀라운 경험이었다. 김수영이라는 영진이의 여자친구가 단연 돋보였다. 기훈의 수제자로서 초급반 아이들을 따로 지도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제야 왜 기훈이 수영을 자신의 제자라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수업이 끝나고 그가 수영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사범님 만나봤어?”
“네.”
“잘될 거야. 이번 기회 잡아.”
“네..감사합니다.”
“가 봐.”
수영이 나가고 내가 말했다.
“아까 취미라고 한 말…미안해요.”
“괜찮아.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그의 이 말이 더 충격이었다. 정말 상관없다고? 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집에 가서 근육 좀 풀어줘. 안 그러면 고생해.”
난 왠지 기운이 빠져서 유치원으로 라라를 데리러 갔다. 단지 안 하던 운동을 해서 기운이 이렇게 쑥 빠진 거라고 꼭 믿고 싶었다.
화요일 오후에 서진와 다시 청양 보육원을 찾았다. 서진이는 아이들 공부를 담당하기로 했고 난 욕실에서 이불빨래를 했다. 석훈이 서진이가 지난번에 보육원을 방문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로서는 다분히 파격적인, “대단하네. 서진아. 정말 잘했어…너가 자랑스럽다.”라는 엄청난 칭찬과 함께 보육원에 성금까지 보낸 덕분에 서진이는 이번에는 순순히 이곳에 들어섰다. 한참을 보육원 욕실에서 열심히 이불 빨래를 하고 있는데 한 남자아이가 헐레벌떡 내게 달려왔다.
“선생님, 싸워요.”
“어?”
“그 선생님이 데려온 그 누나랑 주니누나랑 싸워요.”
“정말? …넌 일단 모른 척하고 있어. 둘이 해결할거야. 원래 여자들끼리는 말다툼도 하고 그래. 서로 오해가 있었거든.”
아이가 우물쭈물했다.
“왜?”
“근데... 둘이 ..막 머리카락 잡고..막 치고 그러면서 싸워요.”
“뭐?”
난 헐레벌떡 아이를 따라 아이들의 공부방으로 뛰어갔다. 방 안에는 주니와 서진이가 서로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었고 몇몇 어린 보육원 아이들은 그 장면을 보고 울고 있었다. 난 당장 서진을 끌어냈다. 우선 저항하는 서진이를 질질 끌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일단 진정해!”
서진이가 날 무섭게 노려봤다.
“뭘 진정해?”
“진정하고 그 다음에 나가자.”
“다 내 잘못이라 이거지?”
“나중에 얘기하자고. 5분만 있다가 그리고 진정되면 나와. 집에 가서 얘기해. 난 주니한테 가 볼 테니까.”
“똑같이 싸우는데 보자마자 내가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잖아! 너 정말 공평하지 못해!”
“공평하지 못해? 너가 공평한 게 뭔지나 알아? 넌 도대체 동정심이란 것도 못 느끼는 아이니? 주니가 불쌍하지도 않아? 너 지난번에 주니한테 뭐랬어? 그거 때문에 주니 상처받은 거 미안하지도 않아?”
“미안했어!”
“뭐?”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서진이가 지금 미안이라고 말했나?
“미안했어. 나도 그게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오늘은 주니공부 열심히 가르쳐 줄려고 한 거야. 근데 그게 나보고 …나보고.”
“…”
“잘난 척하지 말라고 그랬어. 그것도 참았어. 근데 나보고 똥통학교 다니면서 멍청한 게 자길 가르치려 그런다고 그래서..그래서 내가.”
“그래서 머리끄덩이를 잡았어?”
“아니! 내가 말했지. ‘내가 너보다 가진 거 많다. 난 부자고 아빠도 있고 똥통학교 다니는 거 하나도 안 아쉽다. 난 외국학교 갈 거고 돈도 앞으로 많이 벌 거고. 하지만 넌 고아에다 공부도 못하니 너가 제일 한심하다. 그러니까 나보다 잘나지고 싶으면 공부해서 서울대 가라.’ 그랬더니 걔가 먼저 내 머리카락을 잡았다구. 막 욕하면서.”
방식은 잘못됐지만 서진이는 나름대로 주니에게 자신이 깨달은 세상의 이치를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주니에게 지난번에 내가 미안했다고 말하는 한마디보다 주니를 동정하는 눈빛보다 주니를 저렇게 자극하고 주니가 뭔가 목표를 세우고 이루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 주니를 돕는 길이라는 것을 어린 서진이도 어렴풋이 알았었나 보다. 그러나 그건 서진이 하기에는 너무 서툰 어른 흉내였다.
“의도는 좋았지만 방식이 문제였어. 집에 가자.”
서진이가 차에서 나를 기다리는 동안 주니에게 서진의 행동에 대해서 대신 사과를 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내 말을 듣다가 물었다.
“선생님이 영국에서 오신 거 맞죠?”
“응. 왜?”
“그럼 영어 잘하세요?”
“뭐..그런 편이지.”
“저 영어 좀 가르쳐 주세요. 걔보다 더 영어 잘하고 싶어요. 수학은 내가 훨씬 잘해요.”
“그래. 앞으로 내가 시간 날 때마다..아니다. 우리 인터넷으로 화상통화 하자. 너가 말하면 내가 고쳐서 바로 문장수정도 되고. 그리고 영작은 메일로 보내. 그럼 내가 수정해서 다시 보내줄게. 어때?”
“좋아요.”
“일단 먼저 내가 영국에서 보던 DVD가 많거든? 그거 영어 자막 나와. 그걸로 영화부터 봐. 한글자막 없어서 처음엔 답답할지 몰라도 영어자막으로 봐야 더 이해도 잘돼.”
“근데…그거 우리 디비디플레이어 고장 나서 없는데.”
보육원에서 돌아와서 방에서 디비디 플레이어를 사려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있었다. 서진이가 방에 들어왔다.
“라라, 거실에 혼자 두고 컴퓨터 한다고 이른다?”
“라라 거실에서 지금 간식 먹잖아.”
“간식 먹으면 당신 자유시간이야? 아주 신났어. 남의 집에서 돈도 벌고 놀고.”
“알았어. 알았어. 에이그, 니가 이 집 안방마님이다. 잔소리가 거의 도가 트셨어. 서진아, 근데 어떤 디비디플레이거가 좋은 거니? 영국에서 사온 디비디도 플레이되는 걸로 골라야 하는데..”
“지금 우리집에서 인터넷 쇼핑이나 하고 앉아서 돈 받아 먹는 거야?”
“주니 때문에 그래.”
“…?”
“주니 영어공부 하라고 내가 디비디 보내준다니까 플레이어가 없다잖아. 그래서 그거 사려고 그런다.”
“…나 있어.”
잠시후에 서진이가 디비디 플레이어를 가지고 왔다.
“나 안 쓰는 거야.”
“거의 새건데?”
“아니야! 후져 가지고 내가 안 쓰는 거라니까?”
“알았어. 왜 화를 내고 그래?”
“에이 씨. 귀찮게!”
그러더니 서진이가 이번에는 책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바닥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이것도 버리려던 건데 주니한테다 버려야겠어.”
그리곤 횡하니 방을 나갔다. 기집애. 서진이가 속까지 까만 악녀가 아니란 사실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보육원에 디비디 플레이어와 책들을 보내고 오는데 정애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가 요즘 기운이 통 없으셔. 혹시 엄마가 좀 이상하게 행동하시나? 아직 라라할아버지한테선 뭐 알아낸 거 없니?”
“아직은…정말 아빠가 기운이 없으셔?”
“일이 없으셔서 그렇겠지.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괜히 너한테 전화했나 보다.”
밤에 우면동 집에 들렀다. 전화로 아빠만 집 앞 포장마차로 불렀다.
“너 웬일이냐? 무슨 일 있어?”
아빠가 걱정스런 얼굴로 날 보자마자 물었다.
“아니야. 내일 수업도 없고 닭발에 소주 한 잔 하고 싶었는데 혼자 먹기가 창피해서 아빠 불렀어.”
아빠가 술잔을 따르시며 말했다.
“이런 때 불러낼 남자친구도 없으니….얼른 하나 만들어.”
“그러게 말야. 아빠는 내가 어떤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어?”
“한 서방 같으면 좋지. 남자 돈도 능력도 다 소용없어. 그저 온순하고 마음이 똑바른 사람이 최고지.”
아빠와 거의 처음으로 술이란 걸 마셔본다.
“자식, 좀 마시는구나?”
“헤헤.”
“일이 힘들어?”
“아니요. 진짜 심심해서 불렀다니까. 엄마는? 엄마는 요새 어떠셔?”
“니 엄마야..똑같지. 내가 니 엄마한테 미안하다. 빨리 새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괜찮아, 아빠. 여태 40년을 우리 먹여 살리고 키우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이제 우리가 아빠 엄마 남은 인생 책임질게.”
아빠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으셨다.
“아이구, 니가? 그래서 그래 연봉이 일억이 넘는 일자리 때려치우고 애들 돌보는 일 시작했냐? 내가 니가 돌보는 애들하고 같아? 이제부터 니가 날 책임져?..허허허.”
“돈이야…아빠, 그냥 배 안 고프고 안 춥고 누울 자리 있으면 되지 않아?”
“니가 그런 소릴 하니 해가 서쪽에 뜨겠다. 너 영국 가자마자 맨날 옷 산다고 돈 보내달라고 떼쓰든 거 다 잊었구나?”
“참 그땐 그랬어. 근데 이젠 아냐. 자꾸 뭘 사봤자 결국엔 다 저기 쓰레기 매립지에 묻히는 쓰레기 더미만 되더라구.”
아빠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이젠 헐렁한 면 티에 면 바지에 헝겊 가방에 헝겊 신발에 그러고 다니냐? 강남 거지도 너보단 잘 입고 다녀!”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 강남거지가 잘못된 거라니까?”
“일어나자. 니 엄마도 닭발 좋아하니까 좀 싸가야겠다.”
“아빤 정말 엄마 아직도 사랑하나 보다.”
“어이구, 간지럽게 사랑은 무슨? 나중에 우리끼리 먹었다고 잔소리 듣기 싫어서 그러지.”
“에이, 참. 사랑하면 한다고 하시지 뭐가 그리 쑥스러울까?”
“사십년 살아봐. 사랑으로 사나. 사랑보다 더 무서운 걸로 버티는 거야.”
“그게 뭔데?”
“얼른 일어나?”
“아빠 통장 확인해 봐.”
“...?”
“나 아빠한테 투자했어. 그동안 모아놓은 거 아빠통장에 넣었으니까 아빠가 사업을 하시든 뭘 하시든 해서 왕창 불려서 나 결혼할 때 결혼자금으로 주세요.”
아빠가 아무 말씀이 없어지셨다.
“뭘 그렇게 감동 받고 그러셔?”
마침내 아빠가 입을 여셨다.
“아빠도 자존심이 있어.”
“그런 게 아니구요. 이모 말이 맞아.”
“니 이모가 왜?”
“내가 막내라 날 아빠가 이뻐하시기도 했지만 우리 집에 남자가 없잖아. 그래서 아들한테 투자를 할 걸 나한테 대신 투자를 한 거래. 큰 언니는 일찍 결혼했고 정연 언니는 여기서 사 년제 대학 나왔는데 나만 유학 보내 놨더니 그 모든 부모들의 소원이라는 의사, 변호사가 돼주지는 못할망정 엄마 말처럼 남의 집 애나 봐주러 다닌다고. 엄마 아빠. 내가 실망 많이 시켰다. 그게 요새 왜 이렇게 미안한지 몰라. 내가 딱하니 금의환양 했어야 하는데…”
아빠가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 의사, 변호사만 있으면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냐? 내가 널 유학 보낸 거는 마침 이모가 도와준다고 하니까 그런 거고. 부모가 자식한테 바라는 건 하나 밖에 없어.”
“그게 뭔데?”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거. 자식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 그게 부모가 눈 감고 죽는 그 순간까지 바라는 소원인 거다. 돈은 내가 니 통장으로 다시 보내마. 아빠도 돈 있어. 괜한 걱정 말아.”
“아빠, 돈 은행에 두면 이자 얼마 붙지도 않아. 아빠가 그거 잘 불려줘. 응?”
아빠가 내가 버스 타는 곳까지 마중을 해주셨다.
“집에서 자고 내려가라니까..”
“내일 영어과외 있는 거 깜빡 했어.”
“고생한다.”
“고생은..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근데… 엄마 아빠 나이엔 바람 같은 거 잘 안나지?”
“바람?”
“남자들은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젊은 여자랑 결혼하고 그러잖아? 여자들은 할머니돼서 바람 같은 거 안 피우지?“
“하하하...왜 니 엄마가 그 나이에 바람 필까 봐 걱정돼?”
“아니, 요새 주위에 하도 그런일들이 많아서 그냥.”
“걱정 마라. 니 엄마는 젊어서나 지금이나 니들하고 돈밖에 몰라. 됐냐?”
엄마가 돈밖에 모른다는 말에 가슴이 좀 철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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