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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악: 서울사대 졸/피천득 교수의 제자 유머 에세이 <안경잡이 전봇대> 도내 중학교대항 배구대회가 열렸다. 나는 축구를 좋아하고 배구도 잘하여 학교 대표로 나섰다. 9인제 배구를 하던 때였다. 나는 맨 뒤 왼쪽을 맡았다. 요샛말로 후위 레프트였다. 억세게 날아오는 공을 잽싸게 받아 앞으로 밀어 주는 몫이었다. 그런데 상대편 선수가 떡치듯 내리 꽂는 공을 받을라치면 내 어께가 도망가는 듯하였다. 내가 받은 공은 번번이 앞쪽으로 가지 않고 옆이나 뒤로 야구공처럼 날아갔다. 뒤에서 공을 제대로 밀어주어야 앞 선수가 죽을 쑤거나 떡을 칠 텐데, 날아온 공을 내가 죽 쑤고 떡 치니 앞에서는 죽이고 떡이고 나발이고 하잘 것 없이 한가롭게 굿을 보고 있었다. 나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진을 치고 응원을 하고 있는데, 이런 망신하고도 개망신이 따로 없었다. 내 얼굴은 점차 달아오르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상대편 응원석에서 돼지 멱따는 고함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저 안경잡이가 구멍이야, 구멍! 거기다 마구 먹여! 전봇대야, 전봇대.” 사방을 둘러보니 안경 낀 선수는 나 말고는 없었다. 안경잡이는 정말 전봇대가 되었다. 발은 땅에 붙어 있고 손은 말을 듣지 않았다. 전신주나 되면 좋게, 초겨울 밭에 홀로 서 있는 수숫대가 되었다. 배구감독 선생님이 지나가는 학생이라도 붙들어다가 내 대신 꽂아 넣어야 했었다. 바야호로 우리 팀은 안경잡이 전봇대 구멍 때문에 첫 게임에서 낙동강 오리알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패잔병들은 다음날까지 여관에 묵을 까닭이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오밤중에 완행열차를 탔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친구들 몰래 눈을 가리고 한 없이 울었다. 내 머리에 서리가 내린 지 오래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헛소리다. 나를 전봇대라고 하고 구멍이라고 야유한 고함소리가 뇌리에서 되살아나면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선다. 그야말로 내 인생 일대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나를 야유하고 멸시한 그 녀석은 백발을 휘날리며 전신주 옆에 구멍가게나 차려 놓고 살 것이다. (2007)
딸 자랑 안사람이 첫 딸을 낳고 다음에도 언니와 닮은 애를 낳았다. 우리 집은 두 딸을 두게 되었다. 딸만 둘이라는 말을 나는 쓰지 않는다. 누가 물어 오면 “딸 둘만 기르지요”라고 대꾸한다. 평생 비행기 타고 제주도에 가고 미국 구경을 할 팔자가 되었다. 가끔 내 마음을 덧나게 하는 친구가 있다. 삼등 연락선을 타고 울릉도에 갈 사람이다. 첫 아들을 본 그 친구는 다음에는 딸을 낳겠다고 거드름을 피운다. 제가 무슨 재주로 구색을 맞추겠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우리 첫 딸의 이름을 ‘보라’라고 지었다. 김 보라! 눈부신 보라색 옥돌이 구른다. 어감이 곱고 뜻도 깊다. 이 여인을 보라! 순 한글로 호적에 올렸다. 나는 딸들을 사랑하는 마음의 백의 하나만큼도 남을 돕지 않았다. 어리석은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않았고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나로 말하건대, 한 평생 훈민정음을 밑천 삼아 먹고 사는 국어 접장으로서, 딸들 이름이나 한글로 지어서 세종대왕에게 바쳤다. 딸의 이름이 썩 잘 된 듯하였다. 애비의 허락도 없이 여기저기 보라아파트가 들어섰다. 거리에는 보라패션 전문점이 생겼다. 어울리지도 않는 보라슬레이트를 만드는 공장이 생겼다. 게으른 부모가 애당초 특허청에 딸 이름을 올려놓지 않은 일이 한이 되었다. 이보다. 더 한스럽고 섭섭한 일이 또 있었다. 간난 애를 안고 동네 고샅에 처음으로 나왔을 때였다. 보기도 아까운 우리 딸을 마음껏 보라고 말이다. 아모래도 모를 일이었다. 딸을 보고 누구 하나 예쁘다는 사람이 없었다. 옆집 할머니 한 분이 한다는 말씀이 복스럽게 생겼다고 하였다. 복스럽다는 말은, 칭찬할 구석이 없는 아이를 두고 하는 인사치레라는 사실을 오래 후에야 알았다. 스물다섯 해 전에 동네 할머니의 관상은 맞았다. 내 딸은 복스럽게 자랐다. 곱게 컸다. 치열한 입시경쟁에서도 심지를 뽑아서 명문 여고를 다니고 한강 가에 있는 대학도 나왔다. 우라집 공주는 직장에 나가거나 유학 가는 꿈은 꾸지 않았다. 요새 드문 효녀요 양반집 규수라 하겠다. 졸업하자마자 따님의 지상목표는 오직 시집가는 일이었다. 제가 골라 놓지도 않고 엄마더러 사윗감을 대령하라고 보채었다. 이 여성을 보라고 했더니 뭇 사나이들이 보다가 눈이 부셔 다 달아난 모양이었다. 장안의 여러 베테랑 매파에게 딸을 내놓았다. 보이기도 아까운 딸이 선보기로 나섰는데, 아침에 보고 점심에 만나고 저녁에 맞선을 보자니, 이런 야단이 없구나. 만나본 총각이 무릇 기하이며 후보 신랑의 직업이 무릇 기하이뇨. 어디서 전화가 오면 잠꾸러기 내 딸은 어느 녀석인지 분간할 줄 몰랐다. 복 받은 일이었다. 우리집 따님은 보는 신랑감 마다 다 좋다고 하였다. 좋게 보면 착한 녀석이요 흠이라면 주체성이 없었다. 장님 문고리 잡은 격으로 의사 총각이 나타났다. 의사는 의사인데 ‘한’자가 앞에 붙은 의사인데, 우리 딸을 만나려고 세상에 나온 사나이 같았다. 키는 조금 작지만 이목구비가 반듯하였다. 보약을 들고 우리집에 찾아오기도 하였다. 장인 될 어른이 뇌물에 약하다는 소문을 들었나 보았다. 애의 애미가 물었다. “처음에 우리 딸을 보고 어땠지요?” “정신이 없었어요.” 한약방 주인이 우리 딸을 제대로 본 듯하였다. 이 여인을 보라고 하였더니, 보는 임자 따로 있다. 보자마자 정신을 놓은 모양이었다. 신랑감이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예를 갖춰야 했다. 사주 관상쟁이 찾을 틈이 없고 길일을 택할 겨를이 없었다. 지난겨울, 한강물 돌아가는 노량진 언덕 위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 이름처럼 보라고 안 해도 소님들은 신랑 신부를 다투어 보고, 천하일색 천정배필이라고 감탄하였다. 머리맡에 솟아 있는 63빌딩을 쳐다보는 하객은 하나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