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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로(官路) 삼천(三千) 리, 절반(折半)은 산을 뚫었어라. [제4편]
[사막풍(沙漠風)은 곧 말갈풍(靺鞨風)]
2,026년 09월 22일
○ 이미 게재(揭載)된 ‘1∼3편(篇)’ 모두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서 불가능(不可能)한 것들을 주제(主題)로 하였는데, ‘4∼5편(篇)’ 역시(亦是) 똑같은 주제(主題)로 「“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것」들을 설명(說明)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동북삼성(東北三省) 땅에, 옛 조선(朝鮮)이 있었다거나 부여(夫餘) 혹은 여타(餘他)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들이 시원(始原)했다거나 하는 고증(考證)되지 않은 이야기를 사실(史實)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바로 왜곡(歪曲)이며, 조작(造作)이다.
예(例)를 들면 : 오늘날의 동북삼성(東北三省)【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만주(滿洲) 땅】땅에 “동이(東夷), 구이(九夷), 구한(九韓), 고조선(古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 한국(韓國), 부여(夫餘), 삼국(三國) 등(等)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일부(一部) 학자(學者)들에게 말하건대 : 이 주장(主張)의 결론(結論)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라고… …? 즉(卽),
“이 주장(主張)의 결론(結論)”은 안타깝게도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왜곡(歪曲)하는 것이고, 「반도(半島) 땅 중남부(中南部)【한강(漢江) 이남(以南)】는, 온몸에 문신(文身)하고 ‘훈도시(褌)’차고 다니는 왜(倭) 땅이 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 이러한 ‘결론(結論) 또는 결과론(結果論)’을 모르는 학자(學者)는 학자(學者)로의 배움이 한참 모자라는 “사이비(似而非)”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관계(事實關係)는 ‘고전(古典) 원전(原典) 한국(韓國)’ 편(篇)을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모른다면, 말 그대로 자격미달(資格未達)이자, 한심(寒心)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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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耳溪集 5권 / 詩 / 朔方風謠 〔丁酉冬, 黜補慶興府使 : 정유년(1,777, 正祖, 1) 겨울, 출척(黜陟)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보임되었다]【黜陟 : ‘내쫓김을 당하다’라는 뜻이다】
• 마운령〔磨雲嶺〕: 《三載邊門戍客廻, 摩雲絶頂且啣盃 : 삼 년 세월 변방 지키던 나그네 돌아가며, 마운령(摩雲嶺) 정상에서 또 술잔을 기울이네. 句麗地薄滄溟盡, 靺鞨風從大漠來 : 구려의 땅은 푸른 바다에 다다라 다하였고, 말갈의 바람은 큰 사막에서 불어오네. 太白不如長白險, 一夫應敵萬夫開 : 태백의 험준함이 장백의 험준함만 못하니, 한 사람이 만 사람 공격 막아낼 수 있도다. 靑春短髮添高興, 斜日還登學士臺 : 푸른 봄날 듬성듬성한 머리에 높은 흥취 보태니, 석양 질 무렵에는 학사대 오르겠네》라고 하였다.
➊ 《句麗地薄滄溟盡 : 구려(句麗)의 땅은 푸른 바다에 다다라 다하였고》라는 것인데… …여기에 등장(登場)하는 마운령(磨雲嶺)은, “반도(半島) 땅의 마운령(磨雲嶺)이 아니다.” 따라서 “구려(句麗) 땅이 창명(滄溟) 곧 창해(滄海)에 다다랐다”라는 말에서 “창해(滄海)”는 오늘날의 반도(半島) 동해(東海)가 될 수 없다.
또 아래의 구절(句節)과 연관(聯關)되기 때문이다.
➋ 《靺鞨風從大漠來 : 말갈(靺鞨)의 바람은 큰 사막(大漠)에서 불어오네》라고 하였으니, “당시(當時)의 말갈(靺鞨)은, 큰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있었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말갈(靺鞨)의 바람(靺鞨風)은, 곧 사막풍(沙漠風)」이란 것이고, 사막(沙漠)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말갈풍(靺鞨風)은 곧 사막풍(沙漠風)을 말하는 것이다.”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존재(存在)할 수 없었던 종족(種族)이며,
그곳에는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없으니, 사막풍(沙漠風)이 불어올 리 없는 것은 : 조물주(造物主)가 천지창조(天地創造)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없었다.」라는 것이고, 아래 구절(句節)은 “반도조선(半島朝鮮)”을 만들고, 그것을 주장(主張)하며, 전파(傳播)한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에게 치욕(恥辱)스러움과 함께 염치(廉恥)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내용(內容)일 것 같다.
(9) 耳溪集 5권 / 詩 / 朔方風謠 :〔丁酉冬 黜補慶興府使 : 정유년(1,777, 正祖, 1) 겨울, 출척(黜陟)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보임되었다.]
함관령〔咸關嶺〕: 《去歲雪中出北關, 今年花發始南還 : 지난해 눈발 속에 북관을 나섰더니, 올해 꽃 피는 시절에야 남쪽으로 돌아왔네. 列州二十皆濱海, 官路三千半鑿山 : 늘어선 스무 고을 모두 바닷가 땅이요. 역마(驛馬) 다니는 삼천 리 길 절반은 산을 뚫었어라. 危棧踏來仍急水, 摩雲過了又凋顔 : 잔도를 아슬아슬 밟고 왔더니 이내 물살 급하고, 마운령 지나왔더니 또 안색 초췌하네. 卽今周道平如砥, 行旅休歌蜀道難 : 이제는 대로가 숫돌처럼 평평하니, 나그네들아 촉도난 부르지 마소.》
• 《列州二十皆濱海, 官路三千半鑿山 : 늘어선 스무 고을 모두 바닷가 땅이요. 역마(驛馬) 다니는 삼천 리 길 절반은 산을 뚫었어라.》라고 하였는데,
「이걸 믿어?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이러한 기막힌 기록(記錄)을 보고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역마(驛馬)가 다니는 길이란 관로(官路)를 말하는 것인데,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까지는 3,000리(里)로, 이 중(中)에서 절반(折半) 정도(程度)는 착산(鑿山) 곧 산(山)을 뚫어 역마(驛馬)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내었다」라는 것인데, 시세(時勢) 말로 터널을 뚫었거나 계곡(溪谷)을 메꾸고, 산(山)을 깎아 길을 내었다는 뜻이다.鑿山
《Naver, 漢字辭典 : 鑿山 : 鑿 뚫을 착 / 山 메 산 : 「산(山)을 뚫음」》
말 그대로 「3,000리(里)의 절반(折半) 정도(程度)를 이렇게 산을 뚫어(鑿山) 관로(官路)를 만들었다」라는 것인데… …‘반도학계(半島學界)의 말대로 한양(漢陽)에서 두만강(豆萬江) 하구(河口) 또는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까지는 기껏해야 1,600-1,700리(里) 정도(程度)이니, 이 전부(全部)를 산을 뚫어 역마(驛馬)가 다니는 관로(官路)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걸 믿어봐! 아니면 미친 헛소리?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대로라면 :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다녔던 ’착산(鑿山) 관로(官路)‘가 21세기(世紀) 지금(只今)도 존재(存在)해야 하고, 일부(一部)는 새로운 길을 뚫음에 없어져 버렸더라도 그 일부(一部)는 생생(生生)한 그 모습을 증거(證據)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흔적(痕迹)은 고사하고, ’착산(鑿山) 하여 길을 만들었다‘라는 해설(解說)은 없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말하고 있는 “반도조선(半島朝鮮)” 논리(論理)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설명(說明)뿐이다. 위에서 말해주고 있는 ’1,500리(里)‘ 정도(程度)를 산을 뚫어 길을 만들었다는 흔적(痕迹)은 어디에 있나?
산(山) 고개를 돌고 돌아 관로(官路)를 만들었다는 것은 백번(百番) 이해(理解)할 수 있는 가능(可能)한 이야기고, 실제(實際) 그렇게 하여 길을 만들었다. 21세기(世紀) 오늘날의 현실(現實)을 봐도 1,000∼1,500리(里)를 산(山)을 뚫어 고속도로(高速道路)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기술(技術)이 문제(問題)고, 수지(收支) 타산(打算)이 맞지 않기 때문에, 국고(國庫)만 축내는 원인(原因)이 되기 때문이다.
혹시(或是), ’나제통문(羅濟通門)‘ 같은 예(例)로,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를 설명(說明)하는 것은 아닐까?
☛ 「나제통문(羅濟通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설천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를 관통하는 석굴(石窟) 형태의 문(門). 석굴 통문. ➠ 높이 3m, 길이 10m의 자연 암석을 인위적으로 관통시킨 인공동굴로서,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덕유산국립공원 경역(境域) 안에 속하며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의 입구에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윗부분에 ‘羅濟通門(나제통문)’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그러나,
➠ 백제와 신라의 국호가 들어가는 '나제통문'이라는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김천군과 거창군을 잇는 신작로를 내면서 만들어진 터널이다. 나제통문을 중심으로 위쪽 마을은 '기니미 마을', 아래쪽 마을은 '이미리 마을'이라고 하였기에 주민들에게 '기니미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광복 및 정부 수립 이후인 1963년에 관광 목적의 무주 구천동 33경이 지정되면서 '나제통문'으로 이름을 붙였다. 본래는 옛 신라 땅과 백제 땅의 가운데에 있는 통문이라는 의미로 나제통문이라 작명한 것으로 추정되나, 세월이 흐르면서 마치 원래부터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잇던 역사적인 굴이었던 것처럼 왜곡 홍보되었다.》라고 하는데,
☛ 누기 1,925년에 뚫은 터널을 “나제통문(羅濟通門)”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바로 이 땅의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름을 지었겠는가? 한동안 “나제통문(羅濟通門)”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굳어지는 듯하다가 ‘일제(日帝)가 1,925년에 뚫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 사건(事件)은 필자(筆者)도 생생(生生)하게 기억(記憶)하고 있다.
이게 어디 한, 두 가지인가? 반도(半島) 땅의 모든 것들이 이렇게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에 의해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져진 것이다. 80년(年)이 지난 뒤, 지금(只今)은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眞實)인지를 구분(區分)조차 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없었다.」라는 것이 거짓없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로 보면 : 반도(半島) 한성부(漢城府)로부터 두만강 하구(河口)의 슬해(瑟海)까지 약 1,600-1,700리(里)에 불과(不過)한데, 경흥(慶興) 도호부(都護府)까지는 3,000리(里)라고 하였으니, 두만강(豆萬江) 하구(河口)로부터 무려 1300리(里)를 더 북상(北上)해야 하는데… …그곳이 어딘가? 러시아(Russia) 땅 하바롭스크【하바롭스크(러시아어: Хаба́ровск, 영어: Khabarovsk)는 러시아의 도시로, 하바롭스크 변경주의 중심지이다. 극동에서 최대의 도시이며 인구는 대략 60만 명이다. 아무르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에 이르게 된다.
거리(距離)로 보면 : 이곳 주변(周邊)에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가 있어야 한다. 올바른 말? 헛소리? ➠ 곧,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북변(北邊)에 있었던 지명(地名)을 좁디좁은 반도(半島) 땅과 그 주변(周邊)에 심으려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0) 耳溪集 5권 / 詩 / 朔方風謠 정유년(1,777, 正祖, 1) 〔丁酉冬 黜補慶興府使 : 겨울, 출척(黜陟) 당하여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보임되었을 때이다.〕
철령〔鐵嶺〕: 《北去南來歲月移, 層巒絶壑轉逶迤. : 남북(南北)을 오가는 사이 세월은 흐르고, 층층 봉우리와 절벽은 더욱 구불구불하네. 人間始見羊腸險. 劍外誰言鳥道危 : 인간 세상에서 험난한 구절양장(九折羊腸) 비로소 보게 되니, 검각(劍閣) 밖 조도의 위태로움 누가 말하였던가. 聲敎卽今連朔漠, 山河無復限華夷 : 성상의 교화(敎化)가 지금 북(北)쪽 사막(沙漠)까지 이어지니. 산하(山河)에 다시 중화와 오랑캐(華夷) 구분 없어라. 回看瑟海三千里, 飛度重關是不期 : 삼천 리 떨어진 슬해 돌이켜 보노라니, 다시는 겹겹 관령(關嶺) 나는 듯이 넘지 못하겠지》라고 하였다.
➊ 《聲敎卽今連朔漠, 山河無復限華夷 : 성상의 교화(敎化)가 지금 북(北)쪽 사막(沙漠)까지 이어지니. 산하(山河)에 다시 중화와 오랑캐(華夷) 구분 없어라.》라고 하였으니,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에 없었다.”」라는 결정적(決定的)인 증거(證據)다. 『조선(朝鮮) 천자(天子)가 북(北)쪽의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통치(統治)하니, 천자(天子)의 교화(敎化)가 오랑캐들에게도 미쳐, 남(南)쪽의 화(華)와 같이 되었으니, 오랑캐라고 분리(分離)할 필요(必要)가 없어졌다』라는 뜻이다.
위의 구절(句節)에서 주어(主語)는 「삭막(朔漠)」이란 단어(單語)다. 「삭막(朔漠)」이란 단어(單語)의 뜻이 무엇일까?
☛ ‘Naver, 한자사전’ [㈜오픈마인드인포테인먼트] / 「삭막(朔漠) 朔漠 : 북쪽(北-)에 있는 사막(沙漠ㆍ砂漠).」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반도학계(半島學界)는, Naver 한자사전(漢字辭典)에서 설명(說明)하는 것도 부정(否定)할 수 있는 배짱이 있을까?
삭막(朔漠)? ‘북쪽 막막한 곳?’ 그럼 그곳은 어디? 어쭙잖은 변명(辨明)은 수명(壽命)을 단축(短縮)시킬 뿐이다. 「삭막(朔漠)이란 북(北)쪽의 사막(沙漠)을 말하는 것이다.」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삭막(朔漠)”의 땅은 어디를 지칭(指稱)하고 있을까?
• 阿蘭泰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1,699年),滿洲鑲藍旗,富察氏,清朝政治人物、清朝工部尚書。康熙三十五年(1,696年),康熙帝征噶爾丹,宿衛紫禁城,綜理奏章。秋季,隨康熙帝出歸化城(今內蒙古呼和浩特市),奉命經理軍務。康熙三十六年(1697年),為《平定朔漠方略》總裁官,深得康熙帝讚許。中略.》
噶爾丹(蒙古語:ᠭᠠᠯᠳᠠᠨ,鮑培轉寫:galdan,西里爾字母:Галдан;滿語:ᡬᠠᠯᡩᠠᠨ,穆麟德轉寫:g'aldan;1,644年∼1,697年5月3日),又作噶勒丹、嘎爾旦,衛拉特準噶爾部琿台吉,巴圖爾琿台吉第六子. : 1696年五月,康熙帝親自率軍與其決戰於昭莫多,獲決定性勝利。噶爾丹的妻子阿努可敦亦戰死。他逃到塔米爾。因窮困無依,流徙於白格爾等地。1697年,康熙帝前往寧夏,組織對噶爾丹的包圍,費揚古擒獲噶爾丹之子塞卜騰巴爾珠爾。: 곧 준갈이(準噶爾)를 지배하고 있던 ‘琿台吉, 巴圖爾琿台吉 第六子’라는 뜻이다.
➥ 위의 글을 보면 : “삭막(朔漠)”이 대충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바로 “준갈이(準葛爾) 땅”을 말하고 있다. 「‘아란태(阿蘭泰)의 약력(略歷)을 보면 : AD 1,696년에 강희제(康熙帝)가 친정(親征)한 준갈이전(準葛爾戰)에 대한 ‘평정삭막기략(平定朔漠方略)’을 집필(執筆)하는데 총재관(總裁官)을 지냈다고 때문이다.」 물론(勿論)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말하고 있는 ‘삭막(朔漠)’의 땅이 “준갈이(準葛爾)” 땅을 말하고 있는지 그 여부(與否)는 알 수 없으나, 확신(確信)할 수 있는 것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西北)쪽 사막지대(沙漠地帶)를 말한다.」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은 중화(中華)였다는 것이고, 북(北)쪽 사막(沙漠)은 오랑캐였으나, 이제는 조선(朝鮮)의 영토(領土)가 되었으니 오랑캐도 조선(朝鮮) 천자(天子)의 교화(敎化)를 받을 수 있으니 오랑캐에서 벗어났다〉라는 뜻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도 이제는 제정신을 좀 차려야 되지 않을까? 언제까지 눈감고 귀 닫고, 강시(僵尸)처럼 조종(操縱)당하며 살 건가?
➋ 《回看瑟海三千里 : 삼천리(三千里) 떨어진 슬해(瑟海) 돌이켜 보노라니》라 하였으니,
거리(距離)상으로 보면 : 「러시아(Russia) 땅 하바롭스크【하바롭스크(러시아어: Хаба́ровск, 영어: Khabarovsk)는 러시아의 도시로, 하바롭스크 변경주의 중심지이다. 극동에서 최대의 도시이며 인구는 대략 60만 명이다. 아무르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에 이르게 된다.」
슬해(瑟海)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를 들이대면 : ‘당시(當時)의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및 슬해(瑟海)’는, 오늘날의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 해삼위(海參崴)’가 되어야 한다. 또 그곳을 ‘슬해(瑟海)’라고 했기 때문이다.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에게 묻노니 : 「도대체 어디가 슬해(瑟海)라는 건가?」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없다』라는 것이다.
(11) 이계집 제6권 / 시(詩) / 연운기행(燕雲紀行) : 〔渡遼行 : 요하(遼河)를 건너며〕
《汀洲楊柳綠旖旎, 行人曉渡遼河水 : 물가의 버드나무 초록빛 하늘거리는데, 나그네는 새벽에 요하(遼河) 물을 건너노라. 遼河舊是箕子地, 東去鴨水一千里 : 요하는 옛날에 기자의 땅이니, 동쪽으로 압록강과 일천 리 거리라네. 行人去時氷塞江, 今日歸來波瀰瀰 : 나그네 고국 떠나올 제 얼음이 강을 메웠더니, 늘 돌아갈 때는 물결이 출렁이네. 중략(中略)》
• 요수(遼水)는 심양(瀋陽)의 서(西)쪽을 흐르는 하천(河川)이라고 한다. 심양(瀋陽)에서 남(南)쪽으로 500리(里)를 내려오면 압록강(鴨綠江)에 닿는다. 위에서 설명(說明)한 대로 동(東)쪽으로 천리(千里)를 가면 어디에 닿을까? 바로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 천지(天池)에 닿는다.
《東 去 鴨 水 一 千 里 : 동쪽으로 압록강과 일천 리 거리라네》라는 말은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압수(鴨水)는 남(南)쪽 500리에 있다. 이는 곧 오늘날의 심양(瀋陽)과 압록강(鴨綠江)은, 짝퉁이라는 증거(證據)다.
➥ 사서(史書) 중에서도 근대(近代)에 가까웠던 왕조(王朝) 작품(作品)은,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인데, 이곳에서는 : 『조선(朝鮮)은 성경(盛京) 동(東)쪽 1,800리에 있는데, 동서(東西)는 2 천리(千里) 떨어져 있고, 남북(南北)은 4 천리(千里)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서 말하는 조선(朝鮮) 영토(領土)는, 그 면적(面積)이 반도(半島)의 ‘6’배(倍)에 이르는 중원(中原) 요충지(要衝地) 땅에 해당(該當)된다.】
「성경(盛京)에서 동(東)쪽으로 1,800리에 조선(朝鮮)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 성경(盛京)에서 동(東)쪽으로 1,800리를 가면 : ‘블라디보스토크’ 남(南)쪽 동해(東海)에 닿는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한계(限界)가 바로 이런 것이다.
☛ 반만년(半萬年)을 이어온 옛 조선(朝鮮)이 동해(東海) 가운데에 있다? 한심(寒心)한 작자들이다. 【朝鮮〈在盛京東一千八百里, 東西距二千里, 南北距四千里.〉】
이것을 수치화(數値化)하여 방위(方位)로 보면 : “성경(盛京)의 동(東)쪽 1,800리(里)부터 조선(朝鮮) 영토(領土)가 시작(始作)되어, 3,800리(里)까지였다”라는 것인데 :
㈠ 성경(盛京)으로부터 동(東)쪽으로 3,800리(里)를 가면 오늘날의 “블라디보스토크 앞 동해(東海)+열도(列島) 땅+태평양(太平洋) 바다에 이르는 곳까지”가 ‘조선(朝鮮)의 영토(領土)였다’라는 것이고,
㈡ 남북(南北)으로 보면 : “오늘날의 ‘반도(半島)+동해(東海)+열도(列島)+유구[琉球 : 오끼 나와]’까지 모두 육지(陸地)가 되어야 한다.” 맞는 말인가? 광견병(狂犬病)에 걸린 미친 견공(犬公)의 헛소리일까?
아래의 글을 보면 : “반도학계(半島學界)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을 더는 보고 있을 수 없다”라는 울분(鬱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2) 이계집(耳溪集) 이계집 제6권 / 시(詩) / 악주록(岳州錄)
《岳州先祖舊莅也 小子忝按本道 巡節凡三到 而舍弟又蒙恩守是郡 奉老親爲專城養 余請暇來覲 太守備儀郊迎 回憶辛卯春以新恩到碧城時 同一勝事 莫非國恩也先休也 詩以識之 甲辰 : 악주(岳州)는 선조(先祖)께서 옛날에 다스리셨던 곳이다. 소자가 외람되이 본도(本道)의 관찰사가 되어 순시하면서 무릇 세 번을 이곳에 왔는데, 아우가 또 은혜를 입어 이 군을 다스리게 되어 노친을 모시고 전성(專城)의 봉양을 하였다. 내가 휴가를 청하여 악주에 와서 노친(老親)을 만나 뵈니 태수인 아우가 의례(儀禮)를 갖추어 교외까지 나를 맞이하러 나왔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신묘년(1771, 영조47) 봄에 아우가 신은(新恩)의 몸으로 벽성(碧城)에 당도했을 때에도 함께 훌륭한 시간을 보냈으니, 나라의 은혜이며 선대의 아름다운 은덕 아님이 없다. 이를 시로 지어 기록한다. 갑진년(甲辰年, 1784, 正祖, 8).》이라고 하였는데,
【AD 1,784년(正祖, 8)에 이계(耳溪)가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있는 아우 홍명호(洪明浩)를 찾아가 노친(老親)을 문안하고 옛 추억을 되돌아보며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계(耳溪)는 1,770년(英祖, 46) 2월(月)에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으나, 10월(月)에 파직(罷職)되었다고 전(傳)해진다.】
위의 글을 음미(吟味)해 보면 : 이게 너무 황당(荒唐)해서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답답한 마음이다.
➥ 「악주(岳州)」[Naver 검색창 / [AI], 曰] : 《악주(岳州)는 중국 후난성 북부의 웨양시를 가리키는 옛 지명으로, 둥팅호 동북쪽 끝에서 양쯔강으로 이어지는 교통·군사 요충지였습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악주(岳州)」를 Naver에서 검색(檢索)하면 : ㈠「반도(半島) 조선(朝鮮) 땅의 악주(岳州)는 없고,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동정호(洞庭湖) 동북(東北) 장강(長江)과 이어지는 요충지(要衝地) 지명(地名)으로 설명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卽),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와 장강의 합류(合流) 지점에 있는 고을로 보통 악양(岳陽)이라 부른다. 이곳에 천하(天下)의 명승(名勝)인 악양루(岳陽樓)가 있는 곳이다.
㈡ 岳州[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岳州 / 中國古代的州。隋朝開皇九年(589年)改巴州置州。治所在巴陵縣(今岳陽市)。唐朝時,轄今湖南洞庭湖東、南、北沿岸各縣地,後略小。南宋紹興二十五年(1155年),因名同岳飛姓,改為純州[1],旋恢復舊稱。元朝改為岳州路,明朝改為岳州府。1913年廢.
㈢ 「악주(岳州)는 선조(先祖)께서 옛날에 다스리셨던 곳이다. 소자가 외람되이 본도(本道)의 관찰사가 되어 순시하면서 무릇 세 번을 이곳에 왔는데, 아우가 또 은혜를 입어 이 군을 다스리게 되어 노친을 모시고 전성(專城)의 봉양을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선조(先祖)【曾祖父, 安岳郡守】가 이곳을 다스리던 곳인데, 또 홍양호(洪良浩)가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이곳을 3번(番)이나 순시(巡視)했고, 마침 홍양호(洪良浩)의 아우인 홍명호(洪明浩)가 또 군수(郡守)가 되어 이 군(郡)을 다스리고 있다」라는 뜻이니, 홍양호(洪良浩)가 얼마나 감회(感懷)어리겠는가!
• 벽성(碧城) : 《벽성(碧城)은 북한 황해남도의 벽성군을 가리키며, 1616년 해옥사건으로 해주목이 벽성현으로 강등된 데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한국 김제의 옛 이름인 벽성은 벽골지와 관련해 ‘벼의 고장’이라는 뜻으로 풀이되지만, 금이 나는 곳이라는 해석도 있어 학설이 갈려요》라고 말한다. “곧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라는 뜻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는 이렇게 두리뭉실 이곳저곳에 다리를 걸쳐놓는다. 도대체 정확(正確)하게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가 더 궁금할 정도다.
악주(岳州)는 「岳州先祖舊莅也 : 악주(岳州)는 선조(先祖 : 증조부)께서 옛날에 다스리셨던 곳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선조(先祖)가 동정호(洞庭湖) 동북(東北) 땅의 중국인(中國人)이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 그 주(注)에서 이르기를 : 이계(耳溪)의 증조부인 홍만회(洪萬恢, 1643~1710)가 안악 군수를 역임한 적이 있다. 《本集 卷27 曾祖考判决事贈吏曹參判府君墓碣銘》 또 이계(耳溪)의 아우 홍명호(洪明浩)는 1,783년(正祖, 7) 10월 16일에 안악군수(安岳郡守)에 제수되었다. 《承政院日記 正朝 7年 10月 16日》라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 「안악군(安岳郡)을 악주(岳州)라고 했다」라는 것인데… …각종 지리지(地理志)에서도, 사서(史書)에서도,
「예(例)도 없고, 전고(典故)도 없고, 군호(郡號)도 없고, 도대체 어디에서 불쑥 뛰어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안악(安岳 : 黃海道)이 악주(岳州)였다는 건가? ‘그렇다’라는 기록(記錄)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길이 없다. 악주(岳州)는 악양루(岳陽樓)와 동정호(洞庭湖)를 연상(聯想)시키는 지명(地名)이라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黃海道 安岳郡 : 양악(楊岳)ㆍ양산(楊山).
•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 군명(郡名) : 楊嶽。別號楊山。
• 여도비지(輿圖備志) : 建置, 本楊嶽。 高麗太祖改安岳。 顯宗九年屬豐州。
• 大東地志 卷十八 / 黃海道 安岳 : 本高句麗阿斯達。 新羅景德王十六年, 改楊嶽郡, 領縣三: 栗口, 靑松, 屈峴。 隷漢州。 高麗太祖二十三年改安岳。 顯宗九年屬豐州。 睿宗元年置監務。 元宗十年沒于元, 爲黃州領縣.
• 어디에도 안악군(安岳郡)을 악주(岳州)라고 했다는 기록(記錄)이 없다. “양악(楊岳)과 안악(安岳)과 악주(岳州)가 뭔 상관이 있는 걸까?”
• 악주(岳州) : 안악군(安岳郡)을 악주(岳州)라고 한 예(例)가 없다. 알 수 없는 일이다.
➥ 그러나 대륙(大陸)에서는 송(宋)나라의 영종(英宗)도 「皇祐 二年(1,050年), 遷左衛大將軍、岳州團練使(악주단련사)」에 임명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嘉祐七年(1,062年)八月,立為皇子,賜名曙,賜襲衣、金帶、銀絹各一千。九月,遷齊州防禦使、進封鉅鹿郡公。제주방어사도 역임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宋英宗 / 宋英宗趙曙(1032年2月16日—1067年1月25日),原名趙宗實,是宋太宗曾孫,濮王趙允讓之子,過繼給宋仁宗為嗣,是宋朝皇帝,1063年5月1日-1067年1月25日在位。
趙曙是前任第四代皇帝仁宗的堂兄濮王趙允讓的第十三子,是太宗第四子商王趙元份的後裔,生母為仙遊縣君任氏。天聖十年(明道元年)壬申年正月三日甲戌(1032年2月15日)生於宣平坊宅第〔嘉祐八年(1063年),英宗把這天定為“壽聖節”〕,最初,濮王夢兩龍與太陽一起掉落下來,用衣服裝住了它們,到英宗出生時,赤光滿室,有黃龍在赤光中游走。景佑二年(1035年),被仁宗接入皇宮撫養。三年(1036年),授太子左監門率府副率,賜名宗實。四年(1037年)六月,特遷太子右內率府率。累遷至左千牛衛將軍。寶元元年(1038年)十月,遷左領軍衛將軍。二年(1039年)六月,遷右千牛衛大將軍,出居睦親宅,還第。慶曆元年(1041年)十二月,為右羽林軍大將軍。皇祐二年(1050年),遷左衛大將軍、岳州團練使。嘉祐四年(1059年)十一月,父喪。六年(1061年)十月,起復,為秦州防禦使、知宗正寺,固辭不拜。十一月,上表請終喪,許之。七年(1062年)三月,乞還泰州防禦使、知宗正寺告敕,不許。五月,繳還泰州防禦使、知宗正事敕告,詔不許。八月,辭泰州防禦使、知宗正寺,許之。
登基 / 仁宗所生的三名兒子皆幼年夭折,而仁宗的兄弟也早逝(早於仁宗登基時逝世),故在嘉祐七年(1062年)八月,立為皇子,賜名曙,賜襲衣、金帶、銀絹各一千。九月,遷齊州防禦使、進封鉅鹿郡公。八年(1063年)三月,仁宗崩于福寧殿。四月,即皇帝位。】
• 동문휘고 / 原編 卷之七十八 : ‘湖 廣 岳 州’라고 했고,
• 心臺別寤齋之任安岳 『三淵集』 卷15 詩 心臺別寤齋之任安岳 [김창흡(金昌翕) 1653년(효종 4)∼1722년(경종 2)] :《離合何多路。君今向岳州。: 이별의 길은 어찌 이리 많은가. 그대는 이제 악주(岳州)로 향하는구나. 山川垂老別。楓菊滿園愁。月隱街鐘度。霜重塞鴈遒。當筵意無限。安可一杯休.》하였고,
• 『後漢書』 卷86 夜郞 / 이현의 주에 따르면, 원수는 牂柯郡, 즉 옛 且蘭 동북에서부터 辰州·潭州·岳州를 거쳐 洞庭湖를 지나 長江에 들어간다고 하였다(沅水出牂柯故且蘭東北, 經辰州·潭州·岳州, 經洞庭湖入江也). 바로가기
• 동아일보 1,920년 06월 21일 : 「湖南의 南軍形勢, 岳州의 南方約二十哩의 地點에서 戰鬪中」이라고 하였으니, 악주(岳州)는 악양(岳陽)을 말하고 있다.
➥ ‘황해도(黃海道) 안악군(安岳郡)’을 ‘악주(岳州)’라고 했다는 기록(記錄)은 전무(全無)한 실정(實情)이다. 그 근거(根據)가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악주(岳州)는 황해도(黃海道) 안악군(安岳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반도조선(半島朝鮮)’이라 할 때 : 「이렇게 ‘지명(地名)’ 한 곳도 고증(考證)하지 못한다면, 그게 어디 학계(學界)라고 할 수 있냐?」라고 반문(反問)하는 바다. 여기서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 하나… …황해도(黃海道)를 해서도(海西道) 또는 해서지방(海西地方)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인하여 황해도(黃海道)를 해서(海西)라고 했을까?
• 해서(海西) / 서해도(西海道), 이칭(異稱) 황해도(黃海道), 이칭(異稱) 풍해도(豊海道)
반도(半島) 땅의 학계(學界)에서는, 「해서(海西) 지방(地方)」은 : 「황해도(黃海道) 일대(一帶)를 중심(中心)으로 한 서해안(西海岸) 지역(地域)을 가리키는 전통적(傳統的) 명칭(名稱)으로, 인천(仁川)과 강화도(江華島) 앞 “경기해(京畿海) 서(西)쪽에 있어 해서(海西)”라고 불렀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卽), 황해도(黃海道)를 해서지방(海西地方)이라고 하는데, 그 설명(說明)을 보면 「경기해(京畿海) 서(西)쪽에 있어 ‘해서(海西)’라고 이칭(異稱)으로 불린다」라고 하였는데, 반문(反問)하고 싶은 것은 : 경기해(京畿海)를 검색(檢索)해 보면 : “경기해(京畿海)”라는 단어(單語)는, 아예 검색(檢索)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卽), 어디에도 ‘경기해(京畿海)’라고 부르는 곳은 없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 황해도(黃海道)를 서해도(西海道)로 만들기 위해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것이다. ‘경기해(京畿海)’는 없고, 그저 ‘서해(西海)’라고 했을 뿐이다.
○ 좀 벗어난 주제(主題)이긴 하지만 아래의 AD 1,910년의 일제(日帝)가 반도(半島) 땅을 강제병합(强制倂合)했던 그 해의 조사(調査) 보고서(報告書)를 인용(引用) 해보고자 한다.
➥ 명치(明治) 43年【AD 1,910年】: 전국(全國) 호구조사(戶口調査)[單位, 戶]
관공리(官公吏) 15,748 戶
양반(兩班) 54,217
유생(儒生) 19,075
➠소계(小計) 관리(官吏)+양반(兩班)+유생(儒生) / 89,040 戶
상업(商業) 178,780
농업(農業) 2,433,450
어업(漁業) 33,646
공업(工業) 22,743
광업(鑛業) 1,429
일가(日稼 : 일용직) 69,399
기타(其他) 34,957
무직(無職) 31,126
➠소계(小計) 2,805,737 戶 [수백(數百)의 오차(誤差)는 감안(勘案)]
합계(合計) 2,894,777 戶
➥ 위의 결과치(結果値)로 보면 : 〈관공리(官公吏)+양반(兩班)+유생(儒生)=89,040 戶〉로 : 전제 호수(戶數)의 「3.07%」에 불과(不過)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더 세분(細分)하여 보면 :《「관공리(官公吏) 15,748 戶【0.55%】」가, 「2,879,029 戶【99.45%】」를 지배(支配)했다》라는 것이 된다.
이것은 ‘옛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로 볼 때 불가능(不可能)한 결과(結果)다. 조선왕조(朝鮮王朝) 5,000년(年)! 5,000년(年) 이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관공리(官公吏) 출신(出身), 7품(品) 이상(以上)의 군인(軍人), 기타 왕족(王族)을 포함(包含)한 그 숫자는 수십만(數十萬)을 헤아려야 ‘왕조(王朝) 체제(體制)’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위에서 언급(言及)된 양반(兩班)과 유생(幼生) 호수(戶數)를 보면 황당(荒唐)하다 못해 까무러칠 지경이다. 약(約) ‘3백만(百萬) 호수(戶數)’에, ‘구만(九萬)의 양반층(兩班層)【유생(儒生) 20,000호(戶)를 포함(包含)하였다.】 숫자라면 : 그 나머지 2백(百) 팔십만(八十萬) 여호(餘戶)는, 말 그대로 「평민(平民)과 그 이하(以下) 천민(賤民)이었다」라는 이야기다.
결과(結果)로 보면 : 당시(當時)의 반도(半島) 땅에는 그 어떤 왕조(王朝)도 없었다는 것이며, 다만 『본국(本國)【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 임명(任命)을 받은 극소수(極少數) 관리(官吏)들에 의해 통치(統治)되었다』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고,
☛ AD 1,905년(年)에 『열도(列島) 도쿄(東京)에서 미국(美國)과 일제(日帝)가 ‘반도(半島) 땅과 필리핀(Philippines) 땅’에 대한 지배권(支配權)을 가지고 서로 양해(諒解) 문서(文書)를 만들고 극비(極祕) 야합(野合)한 그 진실(眞實)에 대해 어느 정도(程度)의 의문(疑問)을 해소(解消)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 《이러한 1,910년 이전(以前)의 반도(半島)와 만주(滿洲) 땅에 대한 극비문서(極秘文書)로부터 그 이후(以後)의 많은 보고서(報告書)를 보면 : 만주(滿洲)【오늘날의 동북삼성(東北三省)】와 반도(半島) 땅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쇠퇴(衰退)로 인하여 본국(本國)조차도 제대로 통치(統治)되지 못했으니, 만주(滿洲)나 반도(半島)의 지배권(支配權)은 있으나 마나 한 실정(實情)이었다》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斟酌)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일제(日帝)가 호구조사(戶口調査)를 마친 뒤에 호적(戶籍)을 정비(整備), 새롭게 만들면서 성씨(姓氏)가 없던 많은 백성(百姓)에게 성씨(姓氏)를 주고, 본관(本貫)을 따르면서, 일제(日帝)에 협력(協力)하는 대가(代價)로 엄청난 토지(土地)와 현금(現金)을 주며 전향(轉向)토록 하고, 일제(日帝)에 부역(附逆)하도록 했다』라는 것은, 이미 주지(周知)의 사실(事實)인데, 「이때로부터 문중(門中)으로 엄청난 토지(土地)가 분할(分割)되어 주어졌다」라는 것도 사실(事實)이다.
지금(只今) 어느 가문(家門)이든 스스로 천민(賤民)이었다는 가계(家系)는 없을 것으로 사료(思料) 되며, 스스로 양반가(兩班家)의 후예(後裔)라고 하면서, 족보(族譜)를 들먹이며, 우리 선조(先祖)는 어느 왕(王) 때, 무슨 무슨 판서(判書)를 역임(歷任)하고, 사후(死後) 무슨 무슨 공(公)으로 추증(追贈)된 가문(家門)이라며, 강조(强調)할 것은 자명(自明)한 일일 것이다.
필자(筆者)는 이러한 것을 따지기에 앞서, 이러한 당시(當時)의 실정(實情)을 직시(直視)하여, 조선(朝鮮)의 역사(歷史)와 그 무대(舞臺)【영토(領土)=강토(疆土)】를 찾고자 함이다.
곧,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없었다』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라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존재(存在) 여부(與否)에 대한 증거(證據), 근거(根據). 흔적(痕迹)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증거(證據)라고, 흔적(痕迹)이라고, 유물유적(遺物遺迹)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과는 전혀 다르고, 핵심적(核心的)이고, 객관적(客觀的)으로 확인(確認)되지 않는,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것이 모두다. 특히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는 인간(人間)의 삶과 필수적(必須的)인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있어야 함에도 전혀 고려(考慮)되지 않는 주장(主張)과 설명(說明)뿐만 있을 뿐이다〉
☛ 『반도조선(半島朝鮮)이 존재(存在)치 않으므로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란 있을 수 없다.』 특히 「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고 있는 많은 기록(記錄)에 대한 ‘절대적(絶對的) 의문(疑問)’에 대하여 단, ‘!%’도 해소(解消)되지 않는다」라는 것은,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없었다’라는 것은, 확실(確實)하게 증명(證明)되는 일이다.
2026년 09월 22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21세기 오늘을 기준해서 : "이계 홍양호"의 문집 기록을 보면 :
황당하다 못해, 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의 이웃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분명한 것은, 이계 홍양호는 조선족이며, 또한 한족이며, 조선왕조의 관리였다는 것이다.
18세기를 꽉 채우고 영면하신 분이니 겨우 2백여 년 전의 인물이다.
'조선의 임금이 북쪽 사막 땅을 통치하였다'라는 말은, '반도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설명하면 설명할 수록, 답답한 이야기다.
이렇게 답답한 이야기만 하다 보니, 필자도 답답한 마음 뿐이다.
사이다처럼 시원한 기록은 없을까?
그러나 그 시원한 '사이다'같은 소리를 할 무리들은, 반도의 사학계인데... ...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맬 수 있을까?
이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 자기들만의 조그만 놀이터에서 짜고 치는 고스톱이 과연 재미가 있을까?"
* 관로 3 천리 중 절반을 착산(鑿山 : 산을 뚫음)하여 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놀라게 하고도 남는다.
참 흥미있는 이야기다.
* 반도 땅에 있었다는 1910년 당시의 '양반가'는 팔도 여러 곳에 있었음에도,
유독 충청도에만 많이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 충청도에 양반가가 많이 정착하게 된 원인은?
그래서 '충청도를 양반'이라는 이칭까지 붙었던 같은데 말이다.
* 이런 유추에는, 양반가가 많았다는 것은, 그곳에는 노비출신, 천민층, 하인출신들 또한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