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동백꽃 / 김용택
여자에게서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산울림 / 김용택
아부지, 왜 이리 무덤까지가 멀다요. 오늘도 나는 아버지 무덤에 닿지 못하고 해 진 풀잎들과 나무들 사이를 헤매며 길 찾지 못합니다. 아부지, 죽음에서 삶까지 길이 왜 이리 멀다요. 야 이놈아 없는 세상의 길을 찾지 말고 논을 찾아라 논을.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그대 생의 솔숲에서 / 김용택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그대 거침없는 사랑 / 김용택
아무도 막지 못할 새벽처럼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대 앞에서 나는 꼼짝못하는 한떨기 들꽃으로 피어납니다 몰라요 몰라 나는 몰라요 캄캄하게 꽃 핍니다
그랬다지요 / 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6월 / 김용택
하루종일 당신 생각으로 6월의 나뭇잎에 바람이 불고 하루 해가 갑니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마음을 주저앉힐 수가 없습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오래오래 어딘가를 보고 있곤 합니다 느닷없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당신 생각이었음을 압니다 하루종일 당신 생각으로 6월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해가 갑니다
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가을밤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하나 둘 꺼져가면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들판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 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가을이 오면 / 김용택
나는 꽃이예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강가에서 / 김용택
강가에서 세월이 많이 흘러 세상에 이르고 싶은 강물은 더욱 깊어지고 산그림자 또한 물 깊이 그윽하니 사소한 것들이 아름다워지리라. 어느날엔가 그 어느날엔가는 떠난 것들과 죽은 것들이 이 강가에 돌아와 물을 따르며 편안히 쉬리라
겨울 바람 / 김용택
당신과 헤어져 걷는 길에 겨울 찬바람 붑니다. 내 등뒤에 당신이 꼭 계실 것만 같아 뒤 돌아다보면 야속한 바람만 불어댔지요 뜨거운 눈물 삼키며 휘청이는 내 발등 위로 억새꽃잎 같은 눈발이 서성거렸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행여 당신 모습 잡힐랑가 뒤돌아다보면 섬진강 갈대들이 몸 비비며 사노라고 그러노라고 무수히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 갈대밭에 내 까칠한 머리 풀어놓고 걷자걷자 당신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 겨울 찬바람만 휘몰아 쳤습니다
고향 / 김용택
한번 왔다 가는 이 세상 살며는 얼마나 살겠다고 울고 갔던 타관길 들꽃 피는 고향길에 꽃상여로 왔구나 앞산 뒷산 오동동 오동꽃이 피어 흰나비 노랑나비 훨훨 날아 이 건너 저 건너 물 건너 이 산 저 산 청산을 나는데 한번 왔다 가는 저 세상 잘 가소, 잘 있으소 눈짓도 없이 물 건너 저 건너 녹수야 청강 건너서 오월 청산을 가는구나 저 세상에 드는구나
그 강에 가고 싶다 / 김용택
그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는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은 때로 나를 따라와 머물다가 멀리 간다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그리운 그 사람 / 김용택
오늘도 해 다 저물도록 그리운 그 사람 보이지 않네 언제부턴가 우리 가슴 속 깊이 뜨건 눈물로 숨은 그 사람 오늘도 보이지 않네 모 낸 논 가득 개구리들 울어 저기 저 산만 어둡게 일어나 돌아앉아 어깨 들먹이며 울고 보릿대 등불은 들을 뚫고 치솟아 들을 밝히지만 그 불길 속에서도 그 사람 보이지 않네 언젠가, 아 그 언젠가는 이 칙칙한 어둠을 찢으며 눈물 속에 꽃처럼 피어날 저 남산 꽃 같은 사람 어는 어둠에 덮혀 있는지 하루, 이 하루를 다 찾아다니다 짐승들도 집 찾아드는 저 들길에서도 그리운 그 사람 보이지 않네
그리운 꽃편지 1 / 김용택
봄이어요. 바라보는 곳마다 꽃은 피어나며 갈 데 없이 나를 가둡니다. 숨막혀요. 내 몸 깊은 데까지 꽃빛이 파고들어 내 몸은 지금 떨려요. 나 혼자 견디기 힘들어요. 이러다가는 나도 몰래 나 혼자 쓸쓸히 꽃 피겠어요. 싫어요. 이런 날 나 혼자 꽃 피긴 죽어도 싫어요. 꽃 지기 전에 올 수 없다면 고개 들어 잠시 먼 산 보셔요. 꽃 피어나지요. 꽃 보며 스치는 그 많은 생각 중에서 제 생각에 머무셔요. 머무는 그곳, 그 순간에 내가 꽃 피겠어요. 꽃들이 나를 가둬, 갈 수 없어 꽃그늘 아래 앉아 그리운 편지 씁니다. 소식 주셔요.
그리운 우리 / 김용택
저문 데로 둘이 저물어 갔다가 저문 데서 저물어 둘이 돌아와 저문 강물에 발목을 담그면 아픔 없이 함께 지워지며 꽃잎 두 송이로 떠가는 그리운 우리 둘.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 김용택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 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것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 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이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나를 깨우는 이슬로 왔습니다
길 / 김용택
실낱같이 가는 샛길로 샛길로 가서 마지막 샛길 끝에 말이라도 걸면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슬픈 초가 한 채 아무도 가지 않고 이따금 내가 가다가 해 져서 길 잃고 길 없이 돌아온다
꽃 / 김용택
그대 잠 못 들고 뒤척일 때 꽃 지는 소리 들린다 다시 돌아눕는 그쪽이 두렵다 무서워 다시 찾는 쪽도 꽃 지는 소리 무섭다 어둡다 어둠 속에서도 눈감으면 어디선가 아픈 숨소리들린다 그러면 또다시 내가 돌아누우며 네 손을 더듬어 찾는줄 알라 우리들의 잠마저 이리 아프고 어디로 돌아눕든 각 진 돌멩이 맨살에 박힌다 친구여 어디로 돌아누울 곳 없어 이렇게 발끈 쭈그려 앉은 이 무서움 속에서 어디선가 우리를 부르는 새벽닭 울음소리를 듣자 어둠 속에 뜬 눈이 꽃처럼 아프다 첫봄이 먼데서 겨울을 이기며 온다
바람 / 김용택
며칠을 바람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저물 때 저물어서 고개 숙여 어둑어둑 걷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스물은 슬픈 것 같습니다 걸을수록 슬픔은 무거워 몸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슬픔이 무거워 어둠에 머리 기대고 핀 하얀 들꽃들을 만났습니다 정든 땅 언덕 위 초가 토방에 앉아 해 걷힌 눈을 마당에 깔았습니다
보리 / 김용택
비바람 분다 보리야 비바람이 불면 바람 온 쪽 보며 바람 간 쪽으로 쓰러지자 위엔 언제나 하늘이고 등엔 언제나 땅이다 온몸으로 끝까지 쓰러져 무릎에서 뿌리내려 몸 들고 고개 들고 일어서자 서너 번 쓰러지면 서너 번 일어나는 보리야 온몸이 일어나는 보리야 잘 드는 조선낫으로 베어도 피 한 방울 없는 보리야 가자 오뉴월 뙤약볕 아래 보릿대 춤으로 가자
사랑을 위하여 / 김용택
그대와 내가 처음 사랑에 눈뜰 때 이 세상이 반짝 깨져 새로워지고 눈부시던 날 우리는 우리들의 동강난 조국에 눈떠 그대와 내가 그렇게 서로 바라볼 때 우리들에게 여직 통했던 말들은 소용없어 전라도나 함경도 어느 한쪽의 말로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사랑 지을 수 없는 아픔으로 우리 사랑은 겨울 풀잎들보다 멀리 흔들리며 발목에 얼음이 잡혀 거부할수록 얼음은 살을 파고들었습니다 아아, 슬픔도 괴로움도 사랑도 그리움도 말 안 되어 나오는 애처로움으로 서로 껴안으며 흘리는 이 더운 핏방울 그대와 내가 그렇게 처음 사랑에 눈떠 서로 손 달 때 차가움과 뜨거움에 놀란 가슴으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사는 거역의 몸짓들이 우리를 더 가까이 불러들이는 끌림으로 얼음이 얼음을 불러 생살을 파고들어 피 흘릴지라도 뿌리로 실뿌리로 칭칭 얽혀 피 통하여 얼어오는 우리들의 몸을 녹일 수만 있다면 저 물의 가장 차가운 곳을 녹일 수만 있다면 우리 남은 피 한 방울 끝까지 다 흘리며 우리들은 여러 번 멀리 헤어지고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헤어지지 않는 한 몸으로 한 땅덩어리로 그대와 내가 처음 사랑에 눈뜰 때 이 세상이 반짝 깨져 이 세상이 새로 살아나던 그 눈부신 사랑을 위하여.
다시 옛마을을 지나며 / 김용택
다 늙은 감나무에 따지 못한 감들이 허연 눈을 쓰고 얼고 썩고 곯아 떨어진다 감나무 하나 제대로 가꾸지 못해 감가지마다 감들을 썩이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달 / 김용택
앞산에다 대고 큰 소리로,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소리로 당신이 보고 싶다고 외칩니다 그랬더니 둥근 달이 떠올라 왔어요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 / 김용택
환장허겄네 환장허겄어 아, 농사는 우리가 쎄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덜이 편히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며루 땜시 농사 망치는 줄 모르고 나락도 베기 전에 풍년이라고 입맛 다시며 장구 치고 북 치며 풍년잔치는 저그덜이 먼저 지랄이니 우리는 글먼 뭐여 신작로 내어놓응게 문뎅이가 먼저 지나간다고 기가 차고 어안이 벙벙혀서 원 아, 저 지랄들 헝게 될 일도 안된다고 올 농사도 진즉 떡 쪄먹고 시루 엎었어 아,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이사 바로 혀서 풍년만 들면 뭣헐 거여 안되면 안되어 걱정 잘되면 잘되어 걱정 풍년 괴민이 더 큰 괴민이여 뭣 벼불고 뭣 벼불면 뭣만 남는당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뙤놈이 따먹는 격이여 아, 그렇잖혀도 환장헐 일은 수두룩허고 헐 일은 태산 겉고 말여 생각허면 생각헐수록 이갈리고 치떠리능게 전라도 논두렁이라고 말이 났응게 말이지만 말여 거, 머시기냐 동학 때나 시방이나 우리가 달라진 게 뭐여 두 눈 시퍼렇게 뜬 눈 앞에서 생사람 잡아 논두렁에 눕혀놓고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똥 뀌고 성내며 사람 환장혀 죽겄는지 모르고 곪은 데는 딴 데다 두고 딴소리 허면서 내거 헐 소리 사돈들이 혓잖여 아, 시방 저그덜이 누구 땜시 호강 호강 허간디 호강에 날라리들이 났당게 못된 송아지 엉뎅이에 뿔 돋고 시원찮은 귀신이 생사람 자는다는 말이 맞는개비여 사람이 살면은 몇백 년을 사는 것도 아니겄고 사람덜이 그러능게 아녀 뭐니 뭐니 혀도 말여 사람은 심성이 고와야 허고 밥 아깐지 알아야 혀 시방 이 밥이 그냥 밥이간디 우리덜 피땀이여 피땀 밥이 나라라고 나라 자고로 말여 제 땅 돌보지 않는 놈들허고 제 식구 미워하는 놈들 성헌 것 못 봤응게 아, 툭 터놓고 말혀서 쌀금이 왜 이렇게 똥금인지 우린 모르간디 우리라고 뭐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창사도 없는 줄 알어 지그덜이사 뱃속이 따땃헝게 뱃속 편헌 소리들 허고 있는디 그 속 모르간디 그러고 말이시 거, 없는 집안 제사 돌아오듯 허는 그놈의 잔치는 왜 그리도 많혀 땡큐땡큐 하이하이 혀봐야 저근 저그고 우린 우리여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 덕에 뭣 나발들 엥간이 불며 실속없이 남의 다리 긁지 말고 가려운 우리 다리나 착실히 긁어야 혀 그저 코쟁이야, 왜놈이야 허면 사족들을 못 쓴당게 사람들이 말여 쓸개가 있어야 혀 쓸개 아, 생각들 혀보드라고 여직 땅 갈라진 채로 이 지랄들이니 남 보기도 부끄럽고 챙피혀서 말여 긍게 언제까장 이 지랄발광헐 거여 긍게 긍게 북한이 외국이여 꺼떡하면 4천만 동포, 동포 허는디 아, 그러고 말이시 우리가 어디 한두 번 농사 망쳐봤어 쩍 허면 입맛 다시는 소리고 딱 하면 매맞는 소리 철부덕 허면 똥 떨어지는 소리여 거, 제미럴 헛배 부를 소리들 작작 허라고 아, 제미럴 우리는 뭐 흙 파먹고 농사 짓간디 고름이 피 안되고 살 안되게 짤 것은 짜내야 혀 하나를 보면 열을 알겠더라고 새 세상에 새 칠로 말허겄는디 말여 그 속 들여다보이는 선거고 나발이고 아, 말이 났응게 진짜 말허겄는디 선거만 허면 질이여 거, 뭐여 그러면 민주냐고 민주가 뭣인지 잘 모르지만 말여 제미럴, 가다오다 죽고 총맞아 매맞아 죽고 엎어져 뒤집혀 죽고 곧 죽어도 말여 우린 넓디넓은 평야여 두고두고 보자닝게 군대식으로 혀도 너무들 허는디 우리는 말여 옛적부텀 만백성 뱃속 채워주고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치고 논두렁은 비뚤어쳤어도 농사는 빤듯이 짓는 전라도 농군들이랑게 고부 들판에 농군들이여 참 오래 살랑게 벼라별 험헌 꼴들 다 겪고 지금은 이렇게 사람 모양도 아닝 것맹이로 늙고 병들었어도 다 우리들 덕에 이만큼이라도 모다덜 사는지 알아야혀 아뭇소리 안허고 있응게 다 죽은 줄 알지만 말여 아직도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부릅뜨고 땅을 파는 농군이여 농군
먼 산 / 김용택
그대에게 나는 지금 먼 산입니다 산도 꽃 피고 잎 피는 산이 아니라 산국 피고 단풍 물든 산이 아니라 그냥 먼 산입니다 꽃 피는지 단풍 지는지 당신은 잘 모르는 그냥 나는 그대를 향한 그리운 먼 산입니다
밤이슬 / 김용택
나는 몰라라우 인자 나는 몰라라우 하얀, 하이얀 어깨에 달빛이 미끄러지고 서늘한 밤바람 하 줄기 젖은 이마를 지난다 저 멀리 풀잎에 이슬들이 반짝이는데 언제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오는지 자욱한 풀벌레, 풀벌레 울음 소리 아, 저기 저 산 달빛에 젖어 밤새가 우네 달을 안고 앉아 산을 보는 사람아 살에 붙은 풀잎을 떼어내는 여인의 등에 얼굴을 묻네
밥이 무섭다 / 김용택
밥이 무섭다 식전 논에 가 논두렁을 걸으며 논을 둘러보면 무섭다 머리가 띵하게 코를 찌르는 농약 냄새 메뚜기 한 마리 없는 논두렁 방동사니 개밥풀 하나 없는 깨끗한 논바닥 올챙이 한 마리 없이 말짱한 논물을 보면 어지럽고 무섭다 논두렁을 걸으며 들을 둘러보면 바작 받쳐놓고 소죽감 베는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한 들판을 보면 무섭다 거미줄 한 가닥 걸리지 않은 논을 둘러보고 돌아와 배고픈 밥상 앞에 앉으면 밥이, 밥이 겁나고 무섭다
보리씨 / 김용택
달이 높다 추수 끝난 우리나라 들판 길을 홀로 걷는다 보리씨 한 알 얹힐 흙과 보리씨 한 알 덮을 흙을 그리워하며 나는 살았다
뿔나무 / 김용택
저 산에 저 뿔나무 미쳤네 미쳤어 저 혼자 낮술에 취했는가 취해 아슬아슬 저 산 저 절벽 벼랑에 벌겋게 벌겋게 저 혼자 미쳤어 어떤 여자랑 차 타고 초가을 산, 그 어떤 산 지나가는데 저 절벽의 벼랑 끝 저 뿔나무 미쳤네 미쳤네
사람들에게 묻다 / 김용택
지난 시대에 나는 나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이 사람 맞아? 지금 나는 또 묻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때 그 사람들 맞아?
사랑 2 / 김용택
사랑은 혁명입니다. 거기 사람들이 흰밥 먹으며 사는 아름답고 큰 나라가 있습니다
산벚꽃 / 김용택
저 산 너머에 그대 있다면 저 산을 넘어 가보기라도 해볼 턴디 저 산 산그늘 속에 느닷없는 산벚꽃은 웬 꽃이다요 저 물 끝에 그대 있다면 저 물을 따라가보겄는디 저 물은 꽃보다가 소리 놓치고 저 물소리 저 산허리를 쳐 꽃잎만 하얗게 날리어 흐르는 저기 저 물에 싣네
산을 기다린다 / 김용택
산외 지나면 산내다 산외에서 산내 가는 길 몇 개의 인적 드문 마을에 살구꽃이 지고 먼 산에 산벚꽃 지더니 지금은 감잎이 핀다 뭐 하니?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곳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 밤 나도 마당에 내려서서 호주머니에 두 손 찌르고 서성인다 텃밭에 마늘같이 고르지 못한 이 하루의 생각들을 무슨 말로 정리하랴 어두워도 보이는 얼굴이 있을까 어둔 산 쪽을 바라본다 기다리는 것들은 오지 않음을 알면서 나는 산을 기다린다 산외 지나 산내다 산내에서 너 있는 곳 산외다 산 밖에서 그리운 산 본다 서쪽이다
섬진강 10 / 김용택
전라도나 경상도 여기저기 이곳 저곳 산굽이 돌고 논밭두렁 돌아 헤어지고 만나며 아하, 그 그리운 얼굴들이 그리움에 목말라 애타는 손짓으로 불러 저렇게 다 만나고 모여들어 굽이쳐 흘러 이렇게 시퍼런 그리움으로 어라 둥둥 만나 얼싸절싸 어우러지며 가슴 벅찬 출렁임으로 차오르나니 어화 어화 숨차 어화 숨막히는 저 물결 어화 어기여차 저 시퍼런 하동 포구
섬진강 12 / 김용택
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새벽잠에 깨어 논바닥 길바닥에 깔린 서리 낀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아버님의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을마다 몇 등씩 불빛이 살아 있고 새벽 닭이 우는구나. 우리가 여기 나서 여기 사는 것 무엇무엇 때문도 아니구나. 시절이 바뀔 때마다 큰소리 떵떵 치던 면장도 지서장도 중대장도 교장도 조합장도 평통위원도 별것이 아니구나.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동경도 서울도 또 어디도 시도 철학도 길가에 개똥이구나. 아버님의 마을에 닿고 아버님은 새벽에 일어나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어머님은 헌 옷가지들을 깁더라. 두런두런 오손도손 깁더라. 아버님의 흙빛 얼굴로, 어머님의 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빛나는 새벽을 다듬드라. 그대들의 눈빛, 손길로 아침이 오고 우리들은 살아갈 뿐,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 누구누구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구나.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온갖 가지가지 구호와 토착화되지 않는 이 땅의 민주주의도,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한낱 검불이구나. 빗자루를 만들고 남은 검불이구나. 나는 헐은 토방에 서서 아버님 어머님 속으로 부를 뿐 말문이 열리지 않는구나. 목이 메이는구나.
섬진강 13 / 김용택
푸른 하늘 그 아래 청산 강이 있어 바라보고 그 강언덕 산자락에 사람들이 모여 물 나고 빛 좋은 곳 터를 잡아 영차영차 집을 짓고 힘써 논과 밭을 만들고 철 따라 꽃 피고 지고 씨 뿌려 거두는 것같이 자식들을 늘려 동네를 이루어 살았으니 그게 몸과 마음 둘 땅이었더라. 강으로 가는 길을 두고 산에 길이 열렸으니 사시장철 흐르는 물이 맑았더라. 어디로든 길을 따라 사람들이 오고 가니 이 동네 저 동네 막힌 길이 없어 소와 쌀을 베와 쌀을 바꿔 썼더라. 앞산 뒷산 길을 따라 사내들이 나무 가고 집안에서 아낙들이 길쌈하여 베를 짜고 집짐승들 제 살붙이처럼 기르고 강으로 처녀들이 물 길러 오고 총각들이 나무하여 강 건너오다 처녀 총각 눈이 맞아 소쩍새 이 산 저 산 울면 달 뜬 강변에서 강물을 황홀하게 바라보다 꽃등을 밝혀 한 집안에 사렴 앉아 지심 매고 서서 땅을 파면 콩 심은 데 콩 거두고 팥 심은 데 팥 거두고 땅의 임자로 오붓하게 살았으니 누가 보기에도 좋았더라. 비 묻어오는 골짜기는 우골이요 복사꽃 피는 앞산은 꽃밭등 큰 골짜기는 큰골이요 작은 골짜기는 작은골 절이 있으면 절골이라. 밭이 평평하면 평밭이요 논이 버선 모양이면 버선배미 배 뜨면 뱃마당 달 뜨면 달바위 벼락 맞은 바위는 벼락바위 쏘가리가 많으면 쏘가리 방죽 앞산이 길어서 동네 이름이 긴뫼라 사람들이 부르기 편하게 진매로 되었는데 일본놈들이 긴 장자에 뫼 산이라 장산으로 고쳐 버렸더라,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누가 지었는지 모르게 그 생긴 모양대로 이러저러한 이름이 생겨 사람들이 살 비벼 살며 곳곳에 사연과 이야기가, 내력이 보태져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니 우리집 식구들이 어디로 일 나간 것도 쉽게 찾겠더라. 동구에는 정자나무를 심어 지키게 하고 나무 밑 상석은 어른이 앉을 자리요 그 아래 순서가 저절로 정해져서 그게 위아래로 스스럼이 없어 질서가 걱정 없더라. 거기 그늘에 모여 쉬고 놀며 이야기하고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는 쓸 데 없이 남고 쓸 것 있는 이야기는 쓸모 있게 남아 쌓이고 간추려져 저기 저 물같이 유유하고 끝이 없으니 몸에 배어들고 살이 쪄 그게 또한 푸른 역사더라. 마을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아래로 모여들어 중지 모아 해결하며 매사에 불평 불만이 없게 고르고 경우가 빤듯하니 그 경우 역시 평등과 정의여서 그게 요샛말로 민주주의요 그 전당이더라. 뉘집 큰일 날 때마다 남의 일이 곧 내 일이어서 누가 뭐라 안 해도 각자 모여들어 곡식과 품을 보태어 일 추리고 두레와 품앗이가 성하니 어허라 상사디야 그게 일과 노래요 일 새로 시작하는 달이 명절이요 농사 다 끝나면 명절이요 달 밝으면 또한 명절이요 다달이 명절이 있으니 쉬는 날이 있고 명절 때는 정자나무 그늘에 모여 어라차차 들독 들고 어기여차 힘 겨루고 훨훨 그네 뛰며 둥게둥실 춤을 추고 덩게둥게 농악 하며 다 이녁들의 몸짓과 노래로 흥겨웁게 고된 몸을 잠시 풀었으니 그게 일과 놀이를 위한 축제였더라. 마을이 위급하면 징과 장구를 울려 괭이 삽 낫들이 솟구치고 함성도 들려 앞산 앞내가 부르르 함께 치를 떨어 사람도 구하고 논과 밭을 지켰더라. 이러고 저러고 살며 해 뜨면 땀흘려 논밭 갈고 해 지면 돌아와 저녁을 맞아 긴긴 밤을 모여 이 얘기 저 얘기 살림살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로 지새우니 그게 또한 사랑방이어서 얘기하며 새끼 꼬고 망태 만들며 오손도손 살았더라. 밤과 낮이 바뀌더라. 누구는 이리자라 쟁기질 잘하고 소 잘 다루고 누구는 선일 잘하고 모 잘 심고 써레질 잘하고 누구는 논두렁 잘 붙이니 논일 밭일이 걱정 없고 누구는 집 잘 짓고 방 잘 놓고 쟁기 지게 뚝딱 잘 만들고 누구는 괭이 삽 호미 낫 띵깡띵깡 잘 다루니 농사 질 때 쓸 연장이 걱정 없더라. 누구는 밥 잘 짓고 떡 잘 하고 술 잘 담고 삼 잘 삼고 밭 잘 매고 철그덕 철컥 베 잘 짜고 꼼꼼하게 옷 잘 지으니 집안 일들이 잘 돌아가고 어떤 해 어떤 집엔 호박, 박이 잘 열리고 어떤 집은 가지, 오이가 잘 열려 콩 한 조각도 서로 노놔 먹으니 반찬이 그리 부족치 않더라. 누구는 글귀가 밝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귀동냥 손동냥 하여 글 잘하는 사람이 생겨나 세상 이치에 맞게 적발하고 축문과 제문도 쓰고 침도 잘 노니 그 사람 집이 글방이 되더라. 누구는 또 뭣 잘 하고 뭣 잘 하고 누구는 소리 잘 하고 누구는 쇠 잘 다루고 누구누구는 징 장구 소구 잘 치니 모두 농악에 한가락씩 장기가 있어 이래저래 안과 밖으로 일과 놀이에 구색이 맞아 자연스럽게 다 소용되는 사람들이니 다 사람 구실을 하고 서로서로 사람사람을 다 귀하게 여기니 동네방네 일에 아귀가 맞아 다 사람 대접을 받았더라. 같이 슬프고 기뻐하며 태어나 살고 죽고 하는 일이 자연스러워 세상 인심에 큰 변동이 없고 잘 살고 못 사는 것 또한 다 자기 몸 쓸 탓으로 살아 사돈이 논을 사도 배가 안 아프고 빈부와 귀천이 없고 태어남에 근본이 같아 알고 모름에도 부끄럼이 없으니 살과 보리나 온갖 곡식과 채소가 잘 자라 여기저기서 불쌍치 않더라. 쌀과 보리가 불쌍치 않으니 밥 먹고 하는 일들이 좋아서 하늘 아래 땅 위에서 밥이 아깝지 않더라
섬진강 17 / 김용택
추석에 내려왔다 추수 끝내고 서울 가는 아우야 동구 단풍 물든 정자나무 아래 -차비나 혀라 -있어요 어머니 철 지난 옷 속에서 꼬깃꼬깃 몇 푼 쥐여주는 소나무 껍질 같은 어머니 손길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고개 숙여 텅빈 들길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우야 서울길 삼등열차 동구 정자나무잎 바람에 날리는 쓸쓸한 고향 마을 어머니 모습 스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어머니 어머니 부를 아우야 찬 서리 내린 겨울 아침 손에 쩍쩍 달라붙는 철근을 일으키며 공사판 모닥불 가에 몸 돌리며 앉아 불을 쬐니 팔리지 않고 서 있던 앞산 붉은 감들이 눈에 선하다고 불길 속에 선하다고 고향 마을 떠나올 때 어여 가 어여 가 어머니 손길이랑 눈에 선하다고 강 건너 콩동이랑 들판 나락 가마니랑 누가 다 져날랐는지요 아버님 불효자식 올림이라고 불효자식 올림이라고 너는 편지를 쓸 것이다
섬진강 18 / 김용택
섬진강 나루에 바람이 부누나 꽃이 피누나 나를 스쳐간 바람은 저 건너 풀꽃들을 천번만번 흔들고 이 건너 물결은 땅을 조금씩 허물어 풀뿌리를 하얗게 씻는구나 고향 산천 떠나보내던 손짓들 배 가던 저 푸른 물 깊이 아물거리고 정든 땅 바라보며 눈물 뿌려 마주 흔들던 설운 손짓들 두고 꽃길을 가던 사람들 지금 거기 바람이 부누나 꽃이 피누나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던 뱃길 뱃전에 부서지며 갈라지던 물살을 보며 강 건너 시집 간 누님도 객지로 가고 공장 간 누이들은 소식도 없다가 남편 없는 아기엄마 되어 밤배로 몰래 찾아드는 타향 같은 고향 나루 그래도 천지간에 고향이라고 이따금 꽃상여로 오는 사람들 빈 배가 떠 있구나 기쁜 일 슬픈 일 제일 먼저 숨가쁜 물결로 출렁이던 섬진강 나루에 지금도 물결은 출렁이며 설운 가슴 쓸어 그리움은 깊어지는데 누가 돌아와서 이 배를 저을까 오늘도 저기 저 물은 흘러, 흘러서 가는데 기다림에 지친 물결이 자누나 풀꽃이 지누나
섬진강 19 / 김용택
아우야 여기 아무도 찾아온 흔적이 없구나. 풀들이 키도 넘게 우거져 몇 바퀴 무덤 밖을 헤매이다 풀들을 헤친다. 무덤에 이르는 길은 길이 없어도 무덤에 이르러 길이 끝나고 길이 막힌다. 아우야 저녁이면 풀벌레들이 얼마나 자지러지게 울고 반딧불들이 얼마나 여기저기 헤메이데. 밤이 늦도록 소쩍새는 또 얼마나 목쉬어 울고 강 건너 무논 개구리들은 얼마나 길길이 울어대데. 새벽엔 거미줄들이 얼마나 풀잎과 풀잎 사이에서 휘어져 안개 속에 흐득이고 마을 어머님 등불은 언제까지 깜박깜박 살아 있데. 때때로 너를 까맣게 잊고 자연스레 나는 살았다. 어디서부터 이 무성한 풀을 베랴. 죽음 같은 우연으로 풀 한 주먹을 베어 들고 놓을 자리가 없어 망설일 때 문득 이 세상을 떠나는 물소리 풀 위에 풀을 눕히고 허리를 편다. 아득하여라 세상은 아우야 저승은 얼마나 멀고 너는 갈길을 다 갔느냐. 풀을 베어내니 무덤이 이리 달처럼 단정하구나. 아우야 몇 밤을 밤이 밤으로 막막하고 몇 밤을 달이 달처럼 떠서 지데. 오늘밤 달이 가장 높이 떠서 가장 멀리 지리라. 가장 늦게 지리라. 곧 서리 맞을 새 풀이 돋고 가을이 오리라. 또 몇번 하얗게 눈이 내려 무덤을 키웠다가 낮추리라. 너는 그때 스물다섯 나는 지금 서른다섯 삶과 죽음이 이렇게 다정한 것 같아도 이제 우리는 한 살 차이가 아니구나. 아우야 너에게 전할 것이 없어 나란히 앉을 수 없어 땀 밴 낫자루를 놓고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지는 초가을 햇살, 물빛이 이마에 닿아 따갑구나. 저 물을 너는 길 없이 건너왔지. 여울목엔 아직도 누이들의 서러운 울음소리들이 물길을 못 찾은 듯 길길이 자욱하구나. 날이 저물었구나. 벌써 풀벌레들이 애둘애둘 길을 찾고 반딧불들이 깜박이며 헤매인다. 이제 내가 나갈 길은 들어온 길뿐이다. 그새 일어선 풀들을 헤치고 들어온 길로 어둑어둑 나가마. 아우야 너는 넘어진 풀들을 일으켜 길을 막아라. 내 그렇게 길 없이 또 오리라.
섬진강 5 / 김용택
이 세상 우리 사는 일이 저물 일 하나 없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변으로 가 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팍팍한 마음 한 끝을 저무는 강물에 적셔 풀어 보낼 일이다. 버릴 것 다 버리고 버릴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눈빛 하나로 어둑거리는 강물에 가물가물 살아나 밤 깊어질수록 그리움만 남아 빛나는 별들같이 눈떠 있고, 짜내도 짜내도 기름기 하나 없는 짧은 심지 하나 강 깊은 데 박고, 날릴 불티 하나 없이 새벽같이 버티는 마을 등불 몇 등같이 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 새벽 강물에 눈곱을 닦으며, 우리 이렇게 그리운 눈동자로 살아 이 땅에 빚진 착한 목숨 하나로 우리 서 있을 일이다
섬진강 6 / 김용택
물들은 스스로 흘러 모여 제 깊이를 만들어 힘을 키우고 얼음으로 강물을 감추어 농부들을 편히 건네주며, 참을 길 없는 뜨거운 속마음만 흘려 강 스스로 강이게 하였다가 녹을 철엔 차례로 녹아 넘치며, 물길을 열어 섬진강 좁은 물목들을 지나며 힘껏 부서지고 마음껏 외쳐 부시시 잠깨는 지리산 이마를 때려 퍼뜩 진달래를 피워놓고 막을 길 없는 물살로 시퍼렇게 굽이쳐 흐르는구나. 부서진 것들은 금빛 모래로 구례 강변에 쌓아 빛나게 하고 거친 숨결 달래가며 물 깊이 다시 굳세게 만나 하동 포구 억센 억새들을 흔들어 억세게 키우는구나. 아름다운 하늘 아래 그 푸른 물결로 출렁이며 땅 무시하는, 밥 아까운 헛소리 헛짓들을 불러 개펄 진흙으로 쌓아 뼈로 딛고 서서, 우리나라 알 만한 그리움들은 다 불러 제 살로 보내 억센 몸을 쑥쑥 키워내며 두고 보라고 두고 보면 알 것 아니냐고, 알 만한 주먹들은 진즉 알 것 다 알고 있다고, 학도 봉도 아닌 것들이 비싼 밥 싸게 먹고 앉아 배부른 소리들 작작하며 까불지들 말라고, 불끈불끈 핏줄들을 키워 불거지며 여기저기 손 휘두르며 이거 보라고, 이 주먹들을 보라고 불쑥불쑥 주먹들이 솟는구나.
섬진강 7 / 김용택
울래 울래 나도 울래 날 저물고 저녁 오면 이 산 저 산 소쩍새야 여기저기 발동기야 가문 논에 물 품으며 천수답에 물 품으며 물 품은 논 개구리야 이 논 저 논 새벽까지 나도 울고 너도 울고 울음 모아 함께 울래 쌀금 똥금 부엉부엉 날 가문다 부엉부엉 양식 없다 부엉부엉 사람 없다 부엉부엉 농부새야 부엉부엉 풀잎 뒤에 풀벌레야 나뭇잎에 개구리야 발동기는 물을 품고 지게 밑에 쓰러져서 이슬 속에 선잠 자고 섬진강물 깊은 데로 몸 담그고 나도 울래 너도 울고 나도 울고 울음 모아 함께 울래 닭이 울고 새벽 오고 섬진강물 품어대며 소쩍소쩍 소쩍새야 목이 타다 소쩍새야 앞산 옆산 옆산 뒷산 뺑뺑 돌아 소쩍새야 개골개골 개구리야 이 논 저 논 메마른 논 물꼬 둑에 개구리야 통통통통 발동기야 안 돌아가면 애통기야 잘 돌아가면 발동기야 저기 저 물 품어올려 모도 심고 설움 심어 어헤라야 어헤라야 어화 둥둥 섬진강아 어라 둥둥 가문 강아 오고 흘러 섬진강아 천리만리 섬진강아
섬진강 8 / 김용택
달이 불끈 떠오른다. 첩첩산중 달 떠오면 그대는 장산리 마을회관 술집을 나선다. 시린 물소리로 강물을 건너 갈대들이 곱은 손 들어 가리키는 어둔 산굽이 강길을 다라 끄덕끄덕 걷는다. 내 친구, 서울에서 돈 못 벌고 중동을 다녀와도 어쩐지 우리는 못 산다며 첩첩산중으로 못난 여자 데리고 검은 염소 몇 마리 끌고 돌아왔지. 그대는 누구인가 내 친구, 소주 몇 잔 거나하게 걸치고 강길을 홀로 걷는 그대는 내 친구. 겨울 시린 달빛 강물에 떨어져 어는데 어둔 산 밑 달그늘 속 담뱃불 빤닥이며 그대 여자 홀로 기다리는 깊은 산속으로 라면 몇 봉지 지게에 달고 서리 끼는 풀들을 밟고 헤치며 달빛 돌아오는 산굽이를 흥얼흥얼 돌아간다. 인생 쓴맛 단맛 다 본 내 친구, 스레이트 지붕 빳데리 불빛 깜박이는 산속으로 가는 그대는 누구인가 내 친구.
시인 / 김용택
배고플 때 지던 짐 배부르니 못 지겠네.
지구의 일 / 김용택
저기 저 가만가만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 풀잎 한줄기가 그냥 흔들리는지 아냐 나도 풀잎처럼 아픔없이 휘고 싶다 온갖 것들 다 게워내고 햇살이 비치는 맑은 피로 나도 저렇게 부드럽고 연하게 가만가만 흔들리고 싶다 가만히 땅에 누워서 텅빈 하늘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싶다 저기 저 흔들거리는 상수리 나뭇잎 하나 땅 위에 바로 선 풀잎 한줄기가 그냥 흔들리는지 아냐 지구의 일이다
짧은 이야기 / 김용택
사과 속에 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과는 그 벌레의 밥이요 집이요 옷이요 나라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벌레의 집과 밥과 옷을 빼앗고 나라에서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누가 사과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정했습니까 사과는 서러웠습니다 서러운 사과를 사람들만 좋아라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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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의 향기 / poem & photo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
첫댓글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의 시집 한권을 통채로 읽는 행운에 감사합니다........